16화 10분에 1만 골드
두 눈을 깜빡이며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졌음을 느낄 수 있었다.
바깥에 진짜 감시자를 떠올리자, 나도 더는 미룰 수 없었다. 본래 검은 장미를 이용할 생각으로 이곳을 방문한 것이지만, 훨씬 더 적극적으로 이용해야 할 것 같았다.
“이곳의 주인을 뵙고 싶군요.”
눈앞의 주인을 두고 또 다른 주인을 언급하자, 그녀는 짧게 한숨을 내쉬곤 답했다.
“선약이 되어 있으신가요?”
“아니요. 하지만 의뢰비가 제법 크죠. 이미 맡긴 액수처럼.”
내가 눈짓으로 보석 주머니를 가리키자, 넬라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곤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다만, 전처럼 살가운 모습이 아니었다. 푸른 장미 손님이 아닌 검은 장미 의뢰인으로 날 대하는 모습.
“일정 액수를 넘기셨으니 모시겠습니다. 다만, 선약이 아닌 이상, 의뢰 내용에 따라 목숨을 보장받지 못하시거나, 감시를 받으실 수 있습니다.”
“상관없습니다.”
“따라오시죠.”
2층 계단 위로 향하는 넬라 뒤를 나는 천천히 따랐다.
도착하고 한참 뒤에야 나는 베네타의 명물인 푸른 장미 내부를 자세히 구경할 수 있었다.
한산했던 로비와 달리, 2층부턴 손님들이 바글바글 눈에 띄었다. 2층과 3층은 바 형태의 오픈된 장소로 식사와 술이 제공됐다.
깔끔한 차림의 남녀 엘프들이 고객들을 응대하며 술을 파는 모습.
바텐더와 비슷하다고 해야 하나?
남자 엘프가 있을 줄은 예상치 못했다. 하긴, 상대가 미남 엘프라면 여성 단골도 있을 수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4층부터는 복도만 존재하는 프라이빗한 공간이었다.
복도를 지나치는 손님들만 봐도, 귀족 혹은 부유한 상인이란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상아색 대리석이 깔린 복도와 황금 실내장식으로 이뤄진 여러 개의 문. 그 사이로 엘프들은 손님들에게 술을 따르고 노래를 부르고 웃음을 팔았다.
‘진짜 적응 안 되네.’
역시 봐도 봐도 신기했다.
엘프가 술을 파는 세계관이라니. 엘프는 순결과 지혜, 순수를 지향하는 종족 아니었어?
악당들이 판치는 세상인 만큼 이곳 엘프도 살아가는 방식이 제법 매웠다.
난 5층 로비 앞에 섰다.
5층은 손님과 엘프, 일대일 접대가 이뤄지는 비밀 공간이다.
방값만 300골드를 자랑하는 미친 공간. 그 방들을 둘러보던 나는 문득 궁금해졌다. 남녀가 한 공간에 같이 있다. 그럼, 무슨 일이 벌어질까.
“진짜 궁금해서 물어보는 건데….”
“그건 엘프들의 선택에 달렸습니다.”
“아직 물어보지도 않았습니다만.”
“5층 손님들이 가장 궁금해하는 부분이니까요. 배우자를 선택하는 건 엘프들의 선택 사항입니다.”
“…배우자요?”
넬라는 당연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엘프가 몸을 허락하는 존재는 오직 배우자뿐입니다. 그게 아니라면 허락하지도 않겠죠.”
“만약 잠자리 후에 모르쇠로 일관하면….”
“살려두지 않습니다.”
“방금 전에 돈이면 다 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상대 엘프가 위로금에 합의한다면 생식기를 자르는 선에서 합의를 봅니다.”
“…….”
이 정도면 거의 악당 수준 아니야? 코를 잘못 꿰이면 바로 고자로 가는 나락 테크인데.
웃음꽃을 피우던 엘프들이 갑자기 무섭게 보인다.
넬라가 어디선가 엘프 하나를 앞에 데려왔다. 전처럼 아찔하게 이쁜 건 맞는데, 난 기겁하며 물러났다.
“무, 뭡니까?!”
“혹시 지명이 있으신가요? 없다면 이 아이는 어떠세요?”
“갑자기 무슨…?”
“5층 값을 이미 받아서 여쭤보는 겁니다. 5층을 먼저 이용하실 건지 아니면 나중에 이용하실 건지.”
넬라가 이 주변 방들을 가리켰다. 일행들이 각자 들어간 방인 것 같았다.
아, 나도 5층 비용을 이미 냈었지.
남녀의 웃음소리가 방들 사이로 흘러나오는 것을 보니, 술을 즐기며 즐겁게 대화들을 나누는 것 같았다.
근데, 난 고자 테크는 사절이라.
게다가 시간상 하나만 선택해야 했다. 자리를 오래 비우게 되면 의심을 살 테니까.
“환불해주세요.”
“…….”
넬라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나를 복도 가장자리로 안내했다.
어째 진상으로 찍힌 것 같은데, 돈만 아니었으면 쫓겨났을 것 같았다.
그녀는 5층 복도 끝자락에 보이는 문 앞에 멈춰 섰다. 문에 손을 대자, 옅은 빛이 흘러나왔다. 잠시 후 문을 열자 방이 아닌 위로 올라가는 계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 계단으로 올라가시면 됩니다.”
“혼자 갑니까?”
“이 위부턴 제가 끼어들 곳이 아니라서요. 그럼, 좋은 거래 되시길.”
일이 끝났다는 듯, 그녀는 휑하고 가버렸다.
빠르게 멀어지는 그녀에게서 시선을 뗀 나는 계단을 따라 오르기 시작했다.
‘분위기 한번 살벌하네.’
1층부터 5층으로 이어진 화려한 계단과 달리 이곳 계단은 음습하고 칙칙했다.
발걸음 소리만 덩그러니 들려온다.
푸른 장미는 화려한 살롱 느낌의 술집처럼 겉으로 꾸며놨지만, 이곳의 실체는 훗날 스페셜(Special) 랭킹으로 이름을 떨칠 ‘검은 장미’의 접선지이자, 정보 수집 장소였다.
독사 소굴이란 뜻이었다.
계단 끝, 낡은 철문을 열고 들어간 나는 의자에 앉아 있는 한 여인을 발견했다.
금발의 검은 피부.
뾰족한 두 귀.
매끈한 다리(?).
‘다크 엘프’였다.
“흐응, 초대받지 못한 손님이 오셨네.”
책상에 두 다리를 꼬아 올린 채 긴 곰방대를 뻐끔뻐끔 피워대는 다크 엘프가 있었다.
표정이 딱 봐도 불량의 표본이다.
피부색을 뺀 이목구비와 외형은 엘프 넬라와 비슷했지만, 풍기는 분위기가 달랐다.
넬라가 귀부인이라면, 다크 엘프는 여전사 같은 느낌이었다. 풍기는 기운이 딱 봐도 쎈언니 타입이다.
“헉!”
그 순간, 다크 엘프가 땅으로 푹 꺼지듯 사라졌다. 두 눈을 껌벅인 순간, 뒤쪽에서 내 엉덩이를 주물럭거리는 손길이 느껴졌다.
언제?!
난 화들짝 놀라며 그녀에게서 떨어졌다.
엉덩이를 만진 것 같은데, 착각이지?
“수준이 형편없네.”
“무, 뭐가 말입니까?!”
“실력이랑 엉덩이가.”
아쉽다는 듯 내 엉덩이를 바라보는 것이 영 불안하다.
이 엘프 뭐야?
성격이 왜 이래?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난 눈앞의 다크 엘프를 알고 있었다.
소설 속에서 무척 유명한 인물인데 모를 수가 없지.
검은 장미의 수장, 펜리 체이서.
그녀는 훗날 마탑 연합이 정한 스페셜 랭킹에 이름을 올리는 6성급 실력자가 된다.
엘프가 지닌 마력 친화력과 선천적 신력을 동시에 지닌 존재.
난 그녀의 숨겨진 신력을 잘 알고 있었다.
바로 그림자.
방금 전 내 그림자를 이용해서 뒤를 잡은 건가?
기척을 느낄 새도 없었다. 만약 그녀가 날 노리는 암살자였다면?
상상만 해도 살이 떨렸다.
그녀는 책상 위에 걸터앉은 채 뿌연 연기를 후― 내뿜었다.
“넬라가 보냈다는 건 의뢰가 제법 굵직하다는 건데, 말해봐.”
“당신이 이곳 주인입니까?”
“그럴걸?”
“넬라 씨와 무슨 관계입니까?”
“그건 왜?”
“닮아서요.”
“정보료 5천 골드.”
“…가격 책정이 어떻게 되는 겁니까?”
“귀찮은 건 비싸고, 쉬우면 싸고, 위험하면 안 하고.”
“…….”
가격은 그냥 저 여자 꼴리는 대로 정하는 모양이었다.
손님 신분인데, 무례하다면 무례한 답이지만, 그녀의 성격을 잘 알고 있는 난 곧장 본론으로 넘어갔다. 지금 시기라도 5성급은 될 거다. 최소 5성급 실력자 앞에서 뻗대다가 얻어터지기 싫었다.
일단 처음부터 생각해둔 두 가지부터.
“칼바람의 저주를 아십니까?”
“넬리토리 협곡의 그곳?”
“맞습니다.”
“잘 알지. 정신착란을 불러일으키는 저주받은 구역이잖아. 인간들은 잘 모르는 구역인데, 왜 묻는 거지?”
“그 구역이 표시된 지도를 얻고 싶습니다.”
“가려고? 네 실력으론 눈물 콧물 오줌보까지 줄줄 쏟고 뒈질 각이라 추천해주고 싶지 않은데.”
“돈 벌기 싫으십니까?”
“뭐, 나야 돈만 받으면 되니까. 그리고?”
“마법 스크롤을 구할 수 있습니까?”
“당장 구할 수 있는 건 2성급 정도?”
“뇌전 마법 스크롤 여섯 장이 필요합니다. 스크롤 겉표지는 이거와 같은 것으로 부탁드립니다.”
난 품에서 푸른 색감을 띤 발화 스크롤을 꺼냈다. 발화 스크롤은 속임수였다. 벤 몰래 이곳에서 스크롤을 바꿔치기할 생각이었거든. 펜리는 하품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리고’로 연신 물어보는 것이, 두 가지 의뢰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닌 모양이었다. 난 세 번째 의뢰를 전달하기 전에 한 가지 질문을 던졌다.
“암살 의뢰도 받습니까?”
“금액만 맞는다면?”
잠시 고민했다.
창고에서 나를 막아섰던 진짜 감시자를 떠올렸다.
가까이서 본 우람한 덩치.
날 내려다보는 그 무표정한 눈빛을 잊을 수 없었다. 벤은 상대도 안 될 만큼 엄청난 압박감을 느꼈던 상대였다.
‘내가 카멜이라면….’
어떤 변수가 발생해도 나를 놓치지 않고 성까지 강제로 끌고 올 수 있는 실력자를 붙였을 거다.
그렇다면….
“대상은 4성 기사입니다.”
“4성?”
“네. 4성이요.”
“기사라는 건 소속이 있다는 거겠지?”
“그렇습니다.”
“소속이 어딘데.”
“블라이어.”
펜리는 미간을 살짝 좁히곤 긴 곰방대를 뻐끔뻐끔 뿜었다. 처음으로 답이 길어진 순간이었다. 잠시 후, 그녀가 답했다.
“불가(不可).”
“이유가 뭡니까?”
“4성급 암살은 가려서 받거든. 특히 소속이 있는 기사라면 더 조심해야지. 벌집을 건들려면 그만큼 감수해야 할 게 있으니까.”
애초에 큰 기대를 하고 의뢰한 건 아니지만, 직접 거절 의사를 들으니 아쉬웠다.
쉽게 갈 수 있는 길이 막혔다.
그럼, 차선책이다.
“대상을 붙잡아두는 건 어떻습니까?”
“붙잡아? 4성 기사를 붙잡고 있으라고?”
“네. 도망칠 시간이 필요합니다.”
“도망? 누가?”
“저요.”
내 말에 펜리가 푸핫 하고 곰방대를 뱉더니 크게 웃기 시작했다. 배를 붙잡고 낄낄대는 모습에 꿀밤을 때려주고 싶은 충돌이 일었다. 누구는 목숨이 걸린 일인데, 그녀는 방금 전 의뢰가 어지간히 웃겼나 보다.
망할 년.
그래, 실컷 웃어라.
“넬라가 가지고 있는 돈이 네가 가진 전부야?”
“혹시 외상 됩니까?”
“미친 새끼. 이런 의뢰에 외상이 어딨어?”
“그럼 2만 골드가 전부입니다.”
“쳇. 개털이었네. 애초에 암살 의뢰도 불가능했잖아.”
4성 암살은 만 단위 골드로는 턱도 없는 모양이었다.
빌어먹을, 이러다간 꼼짝없이 잡혀가서 주술사들에게 머리 뽑히는 거 아니야?
“타산이 안 맞아. 붙잡았다가 그 불똥이 내게 튀면 곤란하거든.”
한 조직의 수장이라는 건가?
보이는 것과 달리 굉장히 신중한 여자였다.
난 욕설을 삼키곤 머리를 굴렸다. 차선책도 안 된다면 최악만큼은 피해야 했다. 3성도 힘든데, 4성은 재앙적 존재나 다름없었다. 정면 돌파 자체가 불가능한 상대란 뜻이다.
“잔금이 얼마 정도 남았습니까?”
“1만 골드 정도?”
앞선 거래 후 남은 금액은 1만 골드 정도인 것 같았다.
난 손가락 하나를 펴며 말했다.
“1분에 오백 골드.”
“뭐?”
“발목 잡고 늘어지는 데 1분에 오백 골드 드리겠습니다.”
“흠.”
“장소도 이곳이 아닌 넬리토리 협곡으로 바꾸겠습니다. 협곡에서 고작 몇 분 붙잡는다고 불똥이 튀겠습니까? 20분이면 1만 골드는 당신 돈입니다.”
“20분은 길어. 10분에 1만 골드.”
“…뭐요!?”
“싫으면 돈을 더 가져오든가.”
보관비 20골드를 불렀던 넬라는 눈앞의 도둑년에 비하면 새 발의 피였다. 피부만 검은 게 아니라 속까지 새까만 년이었다.
난 고민에 빠졌다.
표정을 보니, 아쉬움이 티끌도 없다는 표정이다.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반응.
급한 쪽은 내 쪽이니 거래에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이건 이미 진 거래다.
그녀도 그걸 알고 이딴 제안을 한 것이겠지.
‘1만 골드에 10분이라….’
4성 기사를 상대로 10분 동안 도망칠 시간을 벌어다 주는 금액.
절로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돈지랄도 이런 돈지랄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