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당에게서 살아남는 법-17화 (17/130)

17화 시발, 쫄았잖아.

‘시발. 금화를 허공에 뿌리고 달려도 이것보단 늦게 쓰겠다.’

내 목숨값이 이렇게 비쌀 줄은 나도 처음 알았다.

하지만 내 선택지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일단 살아있어야 황금도 돈으로 보이는 법이니까.

“계약서 쓰시죠.”

“좋아.”

그나마 다행인 건 저 여자가 돈만 꿀꺽하곤 모른 척하지는 않을 거란 사실이었다.

* * *

펜리가 내민 마법 계약서는 서로 간에 강제 구속력이 존재한다. 난 그 계약서를 꼼꼼히 살피곤 서명을 한 뒤 별관으로 안내되었다.

푸른 장미에서 하룻밤 묵을 숙소였는데, 방 내부가 궁전 내부를 떠올릴 정도로 화려했다.

확실히 돈이 좋긴 좋다.

‘이젠 완전 개털이지만.’

화려하게 꾸며진 방 중에 푹신해 보이는 침대가 있는 방을 골라서 몸을 던졌다.

두 눈이 스르륵 감긴다.

검은 장미 펜리 체이서.

그녀와의 대화는 짧았지만, 온몸의 기가 빨린 것처럼 피곤했다.

‘일단 작은 인연을 만들어놨네.’

가진 돈을 몽땅 탕진했지만, 그렇기에 그녀를 만나볼 기회가 생겼다.

펜리는 악당도 영웅도 아닌 철저한 중립 캐릭터였다.

그녀에게 선과 악은 돈을 누가 많이 주냐에 따라 바뀐다. 그렇기에 그녀는 악당의 편에서도, 영웅의 편에서도 의뢰에 따라 태도를 달리했다.

박쥐 같은 인물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나름 원칙대로 움직였다.

즉, 돈만 많으면 철저한 아군으로 둘 수 있는 인물이었다. 나중을 위해 지금 그녀와 인연을 만들어놓은 건 좋은 선택이라 할 수 있었다.

‘내 눈에는 악당 그 자체였지만.’

난 펜리를 떠올리며 눈을 감았다.

잠깐 졸았던 모양이었다. 나름 꿀잠에 들었는데 작은 기척에 두 눈이 번쩍 떠졌다.

암살자의 오감인가?

나름 좋다면 좋은 능력이었다.

침대에서 일어나 정신을 차리고 큰 소파가 비치된 큰 방으로 나가니, 용병들이 전부 모여서 수다를 떨고 있었다.

하나같이 표정에는 아쉬움이 가득해 보였다.

푸른 장미가 베네타의 명물이 된 이유에는 이 5층이 큰 몫을 차지했다.

5층은 엘프와 단둘이 시간을 보내며 교감을 쌓을 수 있는 자리였다. 300골드를 투자하고 입만 잘 털면 엘프 마누라를 얻을 수도 있다는 말이었다.

당연히 초창기에 5층이 생겼을 때 남정네들은 두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었다.

예쁜 꽃을 꺾기가 그리 쉬울까.

웬만한 능력으론 엘프의 마음을 사로잡기란 불가능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부나방처럼 끝없이 5층에 도전하는 이유는 실제로 엘프의 마음을 얻어 결혼까지 골인한 손님들이 알음알음 있었기 때문이다.

그중 가장 유명한 인물이 이 도시의 지배자인 드워프 도르네프로, 푸른 장미 5층을 명물로 자리 잡게 해준 실질적인 인물이었다.

그 외에 용병 출신들도 있다 보니, 5층은 용병들 사이에서도 로망으로 불리는 곳이었다.

분위기를 보니, 용병들은 보기 좋게 실패한 것 같았다.

가비스가 아쉬운 듯 소파 턱걸이를 툭 치며 말했다.

“시간만 더 있었으면 분명 나한테 넘어왔을 거야. 눈빛에서 호감을 읽었다고. 한 번만 더 가면 될 것 같은데…….”

“형님도요? 저도 가능성을 봤습니다. 이번 임무 끝나고 한 번 더 가보려고요.”

“네가 돈이 어딨어?”

“장비 좀 팔면 맞출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모아둔 돈도 조금 있고.”

“음, 나도 선금을 몽땅 땡기면 가능할 것 같은데….”

‘아주 놀고들 있네.’

엘프를 작업하러 왔다가 반대로 작업당한 꼴이 아주 가관이다.

푸른 장미에선 엘프에게 꽃뱀 교육도 시키는 모양이다. 수많은 사내가 5층에 모든 돈을 탕진하고 베네타 근처를 배회하고 있지 않을까?

갑자기 왜 유흥으로 유명한 강원랜드가 떠오르지?

이 미친 소설의 막장 콘셉트가 어디까지 뻗어갈지 이젠 나도 잘 모르겠다.

“헉!”

“어, 언제 일어났습니까?”

“조금 전이요.”

내가 잔 모습을 본 모양이었다.

그나저나 이 녀석들 이젠 나를 완전히 내려놨네. 하긴 진짜 감시자도 아닌 데다, 의뢰비의 수십 배인 300골드를 처발랐는데, 나에 대한 호감이 안 올라가면 거짓말이었다.

“벤은 어디 있습니까?”

“모르겠습니다. 조금 전에 5층 복도에서 봤는데, 그때 헤어지고 본 적이 없습니다.”

“같이 안 왔습니까?”

“먼저 가라고 하더군요. 누군가에게 쪽지를 받은 것 같았습니다.”

“쪽지? 이곳에 온 지 얼마나 됐습니까?”

“꽤 됐습니다.”

들어보니, 벤이 자리를 제법 오래 비웠다.

무슨 일이지? 그리고 쪽지라.

양반은 아닌지, 벤 이야기가 나오자 그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런데 표정이 무척이나 무거워 보였다. 아니, 긴장했다고 해야 하나?

5층에서 엘프가 아니라 오우거를 보고 온 얼굴인데?

벤은 날 보자, 멈칫하곤 곧장 내게 다가왔다.

“어, 어디에 있었지?”

“방에 있었죠.”

“아니. 5층에서….”

“당신 옆방이요.”

“…….”

“웃음소리가 벽을 뚫고 들리던데 엘프랑 진척 좀 나갔습니까?”

“크흠.”

엘프랑 시시덕거리느라, 내가 어디 있었는지 알 리가 없겠지.

“그만 쉬죠. 제가 만났던 엘프는 기가 더럽게 세서 피곤하네요.”

“내일 출발할 건가?”

“네. 동이 트는 대로 베네타를 벗어나 넬리토리로 향할 겁니다.”

내 답에 용병들은 아쉬운 표정인데, 벤은 바로 다른 질문을 던져왔다.

“넬리토리에서 얼마나 머물 거지?”

“글쎄요. 사흘 안에 끝나지 않을까요?”

“보석 주머니는 받았나?”

“아뇨. 푸른 장미 주인에게 당분간 보관을 부탁했습니다.”

“보관?”

“네. 위험한 곳에 굳이 큰돈을 들고 갈 이유가 없으니까요. 돌아올 때 받기로 했습니다.”

주머니를 보여달라고 하면 곤란하다.

이미 넬라에게 잔돈까지 건네면서 모조리 다 써버렸거든.

개털이란 뜻이었다.

“무슨 문제 있습니까?”

“아, 아니다. 쉬어라.”

이 새끼 영 반응이 이상한데?

평소와 달리 내 눈치를 살피며 내 행동을 주시하는 모습이다.

이제야 정신을 차린 모습이랄까.

잠시 후, 벤은 또 볼일이 있다며 용병들에게 나를 맡긴 후 방을 벗어났다.

난 가비스에게 쉰다는 말을 남기고 방으로 돌아왔다.

커튼을 치우고 창밖을 슬쩍 내려다봤지만, 보이는 건 어둑한 골목뿐이다.

‘놈도 푸른 장미에 머무는 건가?’

하는 짓이 너무 뻔해서 벤이 누구에게 갔는지 알 것 같았다.

진짜 감시자.

그놈이 벤을 불렀다면 달라진 벤의 반응이 이해가 간다. 벤도 진짜 감시자의 존재를 몰랐던 눈치였으니까.

그놈이 왜 갑자기 벤을 찾아간 거지?

‘창고에서 마주친 것 때문에?’

가능성이 있다.

창고로 날 쫓다가 존재가 들킨 건 사실이었으니까. 그 일로 내가 진짜 감시자의 존재를 눈치챘는지 벤을 통해 떠보려는 것 같았다.

‘그나저나 보석 주머니의 행방을 왜 묻지?’

설마, 2만 골드를 회수하라는 명령도 받았나?

카멜 이 새끼, 보기와 다르게 쪼잔하네.

그렇다고 당장 여기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다.

그럼, 자야지.

확실히 소설 속에 들어오더니 간땡이가 커졌나 보다.

난 그대로 침대에 벌러덩 누워 잠을 청했다. 처음 갖는 편한 잠자리다.

이 세계에 떨어진 이후 쌓인 모든 피로가 몰려왔는지 용병들의 수다가 자장가처럼 들려왔다.

난 꾸벅꾸벅 잠이 들었다.

이른 새벽.

모두 잠든 고요한 별관.

누군가 내 방의 문을 살며시 열었다. 문 사이로 드러난 얼굴.

벤이었다.

“…….”

그는 내 침실을 한참 동안 살핀 후 다시 문을 살며시 닫았다.

잠시 후, 난 뒤척이는 척 몸을 뒤집고는 잡았던 스크롤을 살며시 놓았다.

펜리와 거래를 통해 얻었던 2성 뇌전 마법이 담긴 스크롤.

침대에서 천장을 올려다보며 난 짧게 숨을 내쉬었다.

“시발, 쫄았잖아.”

암살자의 오감.

생각보다 더 쓸모 있었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갔다.

우리는 마차를 타고 넬리토리 협곡으로 향했다.

* * *

블라이어 내성 중앙에 솟아오른 첨탑.

카멜의 부름에 리옹은 빠르게 첨탑 계단을 밟았다. 첨탑 사이사이에 뚫려있는 창가로 빗방울들이 튀자, 리옹은 미간을 구기며 물기를 털어냈다. 오늘은 유독 비가 많이 오는 날이었다.

“주군.”

“들어와.”

카멜은 붉은 잔을 든 채 꼭대기 창가에 서서 밖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블라이어 영지가 온통 비로 흠뻑 젖는 광경을 구경하는 것 같았다.

“금광으로 투입할 인력은 모두 징집했나?”

“12세 이상 남자라면 가릴 것 없이 모두 마차에 태워 보내는 중입니다. 다만, 폭우로 인해 시일이 며칠 늦어질 것 같습니다.”

“날씨까지 기억할 순 없으니까.”

“네?”

“아니다.”

카멜은 잔을 비우며 자신의 영지를 내려다봤다. 개미 떼처럼 성문 뒤쪽으로 끝없이 행렬을 이어가는 마차들이 보인다.

광산 채굴로 끌려가는 징집 마차들이었다.

마차들 사이로 울분과 슬픔을 토하며 달라붙은 수백 수천의 여인들.

끌려가는 이들의 부모, 연인, 남매들로 보였다. 애타게 부르짖는 여인들을 향해 병사들은 가차 없이 창대를 휘둘렀다. 진흙탕을 구르는 그 참담한 몰골을 카멜은 무심히 내려다봤다.

“록터 펠리스는?”

“금광 개발 작업에 투입됐습니다. 기사 단장의 추종 세력까지 한데 묶어서 가장 험하고 깊은 곳에 몰아넣었으니, 몇 달 못 버틸 겁니다.”

“기사와 주술사 한 명씩은 항시 록터 곁에 감시를 붙여. 이건 그대가 직접 챙기도록.”

“알겠습니다.”

“내부 정리도 곧 끝나겠군.”

한 달 후부턴 새로 지은 창고에 황금이 차곡차곡 쌓이기 시작할 것이다.

그 후 다음 계획인 고대 아티팩트 수집에 나서야 했다.

지금은 먼지 속에 파묻혀 있지만, 훗날 등장하면서 위명을 떨칠 물건들. 골동품 중에서도 떠오른 것이 몇 가지 있었다.

고대 아티팩트의 소유는 영지의 무력 증가를 뜻했기에 닥치는 대로 긁어모을 계획이었다.

‘아티팩트로 무장한 기사단이 완성되면 전쟁 준비와 함께 계승자의 신기를 찾아 나선다.’

앞으로 6개월.

정벌 계획의 뿌리를 내리는 작업인 만큼 카멜에게 무척 민감한 시기였다. 그래서 근래에 존재를 드러낸 ‘그’가 상당히 신경 쓰였다. 계획의 시작부터 먹물을 뿌릴 수 있는 존재였으니까.

‘그’를 떠올리며 흐린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는데, 주술사 렌구아가 카멜을 찾아왔다.

“감시자가 수정구를 통해 소식을 전해왔습니다.”

“케플린이?”

케플린은 갓 4성에 오른 카멜의 친위대 중 한 명으로 머리를 제법 굴릴 줄 알고, 차분한 성격이라 전달자의 감시로 은밀히 붙인 인물이었다.

“말하라.”

“놈이 베네타의 푸른 장미에서 하루 묵고 넬리토리 협곡으로 향한 모양입니다.”

“푸른 장미? 수상한 점은?”

“특이점은 찾지 못했습니다.”

암살자에 대한 일거수일투족을 전해 들은 카멜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머문 장소가 푸른 장미라 살짝 의심했는데, 별다른 낌새를 발견하지 못했고, 신입 암살자 따위가 검은 장미의 존재를 알 리 없다고 생각했다.

보고처럼 유흥에 돈을 흥청망청 쓰고 떠난 모양이었다.

‘그냥 꼭두각시인가?’

머저리 벤을 붙였으니, 분명 기회가 있었을 텐데 도망치지 않았다. 정말 아무것도 모르거나, 일단 꿍꿍이가 없다는 뜻으로 봐야 했다.

“지켜봤다가 일이 마무리되면 끌고 오라고 해.”

“알겠습니다.”

꼭두각시 따위는 신경 쓸 필요 없다.

카멜은 전달자의 존재를 머릿속에서 지웠다.

“주술사 도네콜린트를 찾았나?”

‘세이렌의 비명’이란 능력을 지닌 한 주술사의 영입.

무척 중요한 일을 앞두고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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