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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에게서 살아남는 법-18화 (18/130)

18화 칼바람의 저주

“알려주신 영지들 주변으로 주술사들을 풀어 알아보는 중입니다.”

도네콜린트.

‘세이렌의 비명’이란 광역 주술로 모든 대상을 혼란에 빠트리는 흑주술사.

영력도 무척 뛰어나서 주술사들의 둥지에서 큰 역할을 맡을 핵심 전력으로 낙점한 인물이었다.

“도네콜린트는 앞으로 벌어질 전쟁에 꼭 필요한 인물이다. 분명 블라이어, 에토르, 베네타 이 세 영지 주변에 은둔해 있을 거야. 서두르도록.”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모든 이들에게 라웁 숲으로는 당분간 접근 금지령을 내려.”

“라웁 숲 말입니까?”

“그래. 그곳은 지금 건들면 안 되는 곳이거든.”

“주술사들에게도 지시를 내리겠습니다.”

뜬금없는 지시 같지만, 주군의 지시에는 늘 큰 뜻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 혜안에 감복해 충성을 맹세한 렌구아는 군말 없이 고개를 숙이며 물러났다.

‘아.’

그러다 며칠 전 자신에게 일어난 신명을 떠올리곤 주군을 바라봤다. 창가로 등을 돌린 주군이 보인다. 그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렌구아는 잠시 고민하다가 결국 입을 다물고 물러났다.

신명을 받았다는 건, 주술사들 사이에서 부러움을 살만한 일이지만, 주군에겐 신명보단 그 신명의 내용이 더 중요했다.

하지만 해석 불가능.

스스로 실력이 형편없다고 알리는 꼴이니, 렌구아는 이 사실을 숨기는 걸 택했다. 다행히 자신 말고 그 신명을 받은 주술사는 없는 것 같았으니까.

모두가 나간 자리.

카멜은 책상 위에 빈 잔을 내려놓고 지도를 살폈다.

암살자가 떠나기 전 건네준 지도에는 일주일 후 ‘그’와 접선할 장소가 표시되어 있었다.

‘엘레토르 성곽 주변의 작은 마을이라….’

카멜은 그 장소를 떠올리며 생각에 잠겼다.

“‘그’를 죽일 수 있을까?”

애초에 카멜의 머릿속에는 동행이란 단어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시기의 차이일 뿐이었다.

* * *

“와, 미치겠네.”

마차를 몰던 마부, 가비스가 뒤집어쓴 후드의 물기를 털어내며 투덜거렸다. 아침부터 날씨가 흐려지더니, 오후쯤 하늘에 구멍이 뚫린 것처럼 폭우가 쏟아졌다.

넬리토리 협곡을 지척에 둔 거리에서 하필 폭우라니, 곧 저 멀리 보이는 가파른 돌산을 타야 하는 처지에선 무척이나 불행한 일이었다.

하지만,

‘하늘이 날 돌보고 있음이야!’

난 쏟아지는 빗줄기를 올려다보며 기쁨을 애써 감췄다.

폭우는 주변 시야를 좁혀주고, 도망친 흔적을 지워준다. 도망치는 입장에선 이보다 좋은 환경이 없었다.

난 이 거센 폭우가 제발 며칠간 쭉 이어지길 간절히 기도했다.

베네타 영지를 벗어나 북쪽으로 반나절을 이동했을 때, 풍경에 서서히 변화가 일어났다. 숲과 초목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크고 작은 암석들이 자리 잡았다.

잠시 후, 생명의 흔적이라고는 마른 잡초밖에 없는 횅한 바위 대지 위에 서자, 가비스는 짧게 숨을 내쉬며 고삐를 내려놨다.

길을 가로막은 바위 더미들, 야트막한 경사로 시작된 넬리토리 협곡 초입부터는 마차를 이용할 수 없었다.

“마차에 한 명을 남길 생각인데, 어찌할까요?”

“돌아갈 때 마차가 필요할 테니, 남긴다.”

벤의 허락에 가비스는 함께 온 용병 중 한 명을 마차 안에 남겼다.

잠시 후 짐을 챙긴 일행들은 마차를 내려와 협곡 쪽으로 이동을 시작했다.

벤과 가비스를 포함한 용병 셋 그리고 나까지, 총 다섯으로 이뤄진 파티였다.

“물건 빼먹지 말고 잘 챙겨. 나중에 고생하기 싫으면.”

“네!”

용병들의 가방에는 며칠 동안 필요한 음식과 물건들이 담겨 있었다. 고개를 돌린 벤이 나에게 물었다.

“어디로 가야 하지?”

“눈에 보이는 곳 중 가장 높은 곳으로 가시죠. 그곳부터 길을 잡아야 하니까.”

“폭우가 쏟아진다. 길을 찾을 수 있겠나?”

“해봐야죠.”

펜리에게 얻은 협곡 지도를 자세히 살피려면 주변 지리부터 파악해야 했다.

앞장서자, 일행은 천천히 내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폭우로 인해 이동 속도는 무척이나 더뎠다. 시야도 흐릿해 지리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았다.

이건 생각지 못했는데.

“이봐, 잘 가고 있는 거야?”

“네. 저 위 나무를 보고 올라가면 될 거 같습니다.”

“시발, 이 빌어먹을 폭우는 언제까지 오는 거야!”

벤의 투덜거림을 뒤로한 채 난 묵묵히 길을 열었다.

해가 저물 때쯤 우리는 주변 지형 중 가장 높은 장소에 오를 수 있었다.

난 큰 바위에 올라가 사방을 훑어봤다. 비바람에 몸이 휘청거려서 웅크린 채 둘러봐야 했다.

‘협곡이라더니, 오지게 크네.’

큰 바위를 쭉 이어 붙인 듯 긴 뱀처럼 늘어진 협곡이 보인다. 그 크기가 워낙 크고 방대해서 작은 산맥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난 주변 지형과 지도를 대조해보며 현재 위치를 파악한 뒤 칼바람이 부는 장소를 탐색했다.

내 두 눈이 순간 반짝였다.

‘여기다!’

펜리가 알려준 붉은 표식.

지도를 보니, 그리 먼 거리는 아니었다. 현 위치에서 우측 바위를 타고 걷다 보면 반나절 안으로 도착할 것 같았다.

“지도가 있었나?”

뒤쪽에서 벤의 목소리가 들리자, 난 어깨를 으쓱이며 지도를 허리춤에 넣었다.

“지도 처음 봅니까?”

“못 보던 지도인데. 어디서 났지?”

“주군께 받은 겁니다.”

슬쩍 물음을 넘기며 지나치려는데, 벤이 미간을 구기며 내 옷깃을 잡아당겼다.

“뭡니까?”

“슬슬 말해줄 때가 됐을 텐데.”

“뭘 말입니까?”

“왜 이곳에 왔는지, 그리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 말이다.”

“…….”

빗줄기가 거세게 퍼붓는다. 용병들은 나와 벤 사이의 침묵에서 눈치를 보며 가만히 서 있었다.

하긴 왜 이곳에 왔는지 궁금했겠지.

내가 넬리토리 협곡을 목적지로 정한 이유는 하나다.

‘도망치기 딱 좋으니까.’

지하 감옥에서 세 명의 주술사들에게 고문 아닌 고문을 당하며 알게 된 특별한 능력이 있다.

정신 방벽이 그 한계를 모를 정도로 높다는 거다.

워낙 호되게 당한 터라, 지금 능력에 대해 자세히 알게 됐다.

‘칼바람의 저주’를 떠올린 건 그 이후였다.

이 정도 정신 방벽이라면 칼바람의 저주 속에서도 평정을 유지할 수 있지 않을까?

저들은 그 저주를 버틸 수 없을 테니까. 혼란에 빠진 그들을 놔두고 도망치는 것이 원래 내 계획이었다.

실제로 지금 일행 수준이라면 손쉽게 성공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진짜 감시자가 따로 붙었지.’

무려 4성 기사가 붙은 것이다. 3성인 벤을 보면 4성이 얼마나 괴물인지 알 수 있다. 그가 멀리서 나를 지켜보고 있으니 도망치는 게 불가능했다.

일단 표식 안쪽으로 놈을 끌어들일 생각인데, 문제는 등급이 올라갈수록 정신 저항력도 비례해서 올라간다는 것이었다.

3성과 4성은 천지 차이다.

‘놈에게 칼바람의 저주가 통할까?’

간을 보면서 움직여야 했다.

내가 가진 황금 카드는 단 한 번, 10분밖에 사용할 수 없었으니까.

“일단 쉴 곳부터 잡죠.”

“안 알려줄 건가?”

“장소를 잡으면 그때 말해주죠.”

용병들은 공간을 찾아 어둠 속에서 빠르게 움직였다.

의외로 쉽게 하룻밤 묵을 장소를 찾을 수 있었다. 거대한 암벽 틈새에 작은 공터가 있었는데, 다섯 명이 하루를 보내기에는 충분해 보였다.

빗방울이 군데군데 떨어졌지만, 불을 피우기엔 충분했다. 용병들이 젖은 잡초들을 모아오자, 난 가방에서 발화 스크롤을 꺼내 찢었다.

펑―!

잡초들이 검게 타오르며 불꽃이 타올랐다. 공간에 온기가 돌기 시작했다. 젖은 풀이었는데 잘 타는 것을 보니, 확실히 마법이 좋긴 좋은 모양이었다.

난 사람들을 한곳에 모은 뒤 지도를 펼쳤다. 그리고 표식이 그려진 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우리가 할 일은 간단합니다. 이 표식으로 가서 신호를 보내면 됩니다.”

“신호?”

“앞에 불 보이시죠? 가서 불을 피우면 됩니다.”

“그다음은?”

“그게 끝입니다.”

“그게 끝이라고…?”

“네.”

벤도 용병들도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하긴 황당하겠지.

약간의 설명이 필요하려나?

“필요한 신호니까요.”

“누구에게?”

“주군께서 만나고픈 상대가 이 신호를 보고 움직일 겁니다. 그 이상은 모르시는 게 좋을 겁니다. 더 알면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을 수 있거든요.”

벤은 그 이후 더는 물어보지 않았다. 실제로 벤이 더 물어봐도 말해줄 내용도 없었다. 애초에 이딴 신호를 볼 사람은 없었으니까.

이건 페이크다.

카멜에게 ‘그’의 존재를 각인시킬.

“날이 밝는 대로 움직일 테니, 일찍 쉬시죠.”

난 모포에 들어가 몸을 뉘었다. 피곤했는지 용병들도 불침번을 정하고 자리에 누웠다.

한참 동안 불꽃은 조용히 피어올랐다.

시간은 흘러 자정을 넘어갔다.

불꽃이 여전히 일렁였다.

인기척에 잠에서 깼는데, 누군가 바깥에 나갔다가 들어온 소리였다. 난 모포를 털고 일어나면서 물었다.

“어디 다녀오는 겁니까?”

내 물음에 벤은 멈칫하더니 나를 그대로 지나쳤다.

“볼일을 보고 온 것까지 말해야 하나?”

“아, 그냥 물어본 겁니다. 그런데 용병들이 모두 자고 있군요?”

“이 시간에는 내가 불침번을 서기로 했으니까.”

“당신이요?”

고용주가 용병 대신 불침번을 선다고?

내가 무슨 빙다리 핫바지로 보이나. 하지만 난 모르쇠로 일관한 채 기지개를 켜며 바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어디 가는 거지?”

“볼일 보러요.”

쏴아아아아―

작은 틈새 구멍 바깥으로 폭우가 매섭게 쏟아지고 있었다. 안쪽으로 휘몰아치는 비바람 때문인지 추위가 으슬으슬 올라왔다. 난 바지춤을 내리고 오줌을 시원하게 갈겼다.

흐린 밤하늘에 달빛 한 점 없어서 바깥은 어둠 그 자체였다.

이것도 나름 운치 있었다.

‘지켜보는 눈만 없다면 말이지.’

볼일을 보는데 누가 지켜보고 있으면 나오던 것도 잘 안 나온다. 저놈은 뭐 찔리는 거라도 있나? 왜 따라 나온 거지?

뒤쪽에서 느껴지는 벤의 시선에 난 주변을 둘러보다가 바닥 끝자락에 미세하게 번진 붉은 재 가루를 발견했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작은 흔적이지만, 난 한눈에 그 재 가루의 흔적과 정체를 파악할 수 있었다.

모르는 게 이상했다.

‘나도 지금 똑같은 걸 쓰고 있거든.’

바지춤을 올리면서 작은 보석을 으깨 바람에 날렸다. 붉은 재 가루가 폭우와 함께 사라졌다.

누군가에게 위치를 알리는 마법 표식.

굳이 서로 누구한테 위치를 알렸는지는 답할 필요가 없었다.

4성 기사.

그리고 내가 의뢰한 검은 장미들.

“쓰벌, 튀었네.”

밑바닥에 묻은 흔적을 발로 지운 나는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모포를 덮고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추위 때문이 아니었다.

긴장감.

붉은 재 가루를 보며 현실이 피부로 와닿았다. 넬리토리 협곡에서 은밀한 꼬리 물기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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