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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에게서 살아남는 법-19화 (19/130)

19화 돈값 해! 이 새끼들아

비를 피해 몸을 웅크리고 있던 케플린은 착용한 목걸이가 떨리자 반응을 보였다.

한 방향을 향해 울리는 진동.

벤이 신호를 보내왔다.

그는 어둠을 뚫고 바위 사이를 비집고 달렸다. 주변 풍경이 흐릿하게 지나갈 만큼 빠른 속도. 잠시 후 목걸이의 진동 폭이 점점 짧아지더니 어느 순간 뚝 하고 끊겼다.

“…….”

케플린은 신호가 끊긴 장소에 서서 주변을 살피다 큰 바위 틈새 사이에서 옅은 빛을 발견했다. 그는 빛 반대편 바위로 기어 올라간 뒤 목표를 확인하곤 비를 피해 근처 바위 밑에 다시 몸을 웅크렸다.

표정에는 불만이 가득했다.

“이게 무슨 꼴인지….”

물기를 털어내며 그는 인상을 찌푸렸다.

4성에 오르고, 주군의 직속 친위대로 발탁됐다.

부와 명성을 움켜쥘 자리고, 모든 이의 부러움을 사는 신분이 됐는데, 이런 젖은 생쥐 꼴로 돌아다니게 될 줄은 몰랐다.

기분 전환 겸 산책할 마음으로 나설 만큼 이번 임무는 쉬웠다.

최근 포섭된 암살자를 은밀히 지켜보며 그 일거수일투족을 보고하는 것, 그러다 변수가 발생하면 처리하는 임무를 맡았다.

변수는 둘 중 하나였다.

암살자가 중간에 도망가거나, 아니면 갑자기 죽어버리거나.

그는 이 두 가지 상황을 대비하기 위해 카멜이 보낸 진짜 감시자였다.

“너무 과하단 말이지.”

주군의 명이기에 불손한 생각은 자제했지만, 고작 햇병아리 암살자 한 명 감시하는 데 붙은 전력이 과하다고 생각했다. 정식 기사 벤을 붙인 것도 모자라, 친위대인 자신까지 추가로 은밀히 감시를 두다니.

처음에는 암살자에게 특별한 능력이 있는 줄 알았지만, 창고에서 본 암살자는 겁 많고 어리숙해 보였다.

물론, 그 어리숙한 암살자의 돈지랄에 넘어가 감시 임무조차 잊어버린 벤이 더 멍청해 보였지만 말이다.

벤이 눈을 뗀 탓에 대상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나.

“불쾌한 하루야.”

목표가 영지로 복귀하는 날까지 은밀히 감시를 명했기에 그는 불을 피우지도 못했다. 축축해진 육포를 씹으며 그는 욕설을 내뱉었다. 현 상황을 떠올릴수록 짜증만 늘어났다.

“이럴 거면 차라리 벤 대신 나를 대상 곁에 붙여두면 될 것을, 어째서 그 멍청한 벤을 붙인 거지?”

주군의 안배가 이해 가지 않았지만, 이내 고개를 털었다.

소문으로 예지 능력을 얻었다는 주군이었다. 그분을 의심하는 건 자신의 가치를 깎아내리는 것과 같다.

눈앞의 임무에 충실하며 지켜볼 생각이었다.

‘내가 나설 일은 없을 것 같으니까.’

욕심 많고 멍청한 놈이지만, 벤은 3성 기사. 암살자보다 압도적으로 강했다.

벤의 손에서 임무가 끝날 확률이 높았다. 자신은 감시만 하다가 변수가 발생하면 나설 생각이었다.

그는 잠시 눈을 붙였다.

축축한 감촉에 잠이 올 것 같지 않지만, 이대로 가만히 있는 것도 고역이었다.

불쾌하기만 했던 밤이 지나갔다. 날이 밝자 암살자 놈이 틈새에서 천천히 기어 나왔다. 상쾌한 듯 하품하며 기지개를 늘어지게 켜는데, 케플린은 그 모습에 심사가 뒤틀렸다.

‘버러지 같은 놈이….’

종자들의 시중을 받으며 편히 생활하던 그였다. 저놈 때문에 이 고생을 하고 있다는 게 분했다.

‘영지에 도착하면 평생 하품도 못 하게 해주마.’

영지로 복귀하면 저 이빨을 모조리 뽑아버릴 생각이었다. 주군의 허락이 필요하겠지만, 분명 허락하실 것이다. 주군이 직접 포섭한 인물이지만, 그는 저 암살자가 주군의 사람이 아니란 것을 잘 안다.

[최악의 경우 머리라도 잘라서 내게 가져와라. 대신 사흘을 절대 넘겨선 안 된다.]

가신으로 생각했다면 이런 명령 따위가 내려올 리 없을 테니까.

주술사들의 중요한 생체 연구 재료 정도?

저 암살자의 쓰임은 그 정도일 것이라 케플린은 판단했다.

목표 일행이 폭우를 뚫고 이동을 시작했다. 우중충한 날씨 탓에 낮인데도 주변 시야는 무척이나 흐렸다.

목표가 협곡 정상을 따라 꼬불꼬불한 능선을 타고 움직이자, 케플린은 그 뒤를 조용히 따랐다.

콰아아아아아―!

빗소리보다 더 거친 물소리가 들려왔다.

케플린은 잠시 목표에서 시선을 떼고 절벽과도 같은 협곡 아래쪽을 내려다봤다.

작은 물줄기가 폭우로 하룻밤 새 거센 강물처럼 불어나 있었다.

빠진다면 목숨을 장담하기 힘들 정도로 그 물살이 무척이나 거셌다.

목표 일행은 그 물살 방향을 따라 천천히 전진했다.

반나절 정도 이동한 것 같았다. 슬슬 지루함을 느끼고 있는데, 시선을 사로잡은 엄청난 크기의 바위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니, 작은 바위산 같았다.

암살자는 그 바위를 가리키더니, 방향을 잡고 걷기 시작했다.

케플린은 암살자와 바위를 번갈아 보며 미간을 좁혔다.

아무래도 저곳이 도착지인 것 같았다.

한눈에 담기 힘든 바위산, 그 주변을 훑어본 케플린은,

‘이상해.’

이 한마디로 바위를 평했다.

시야가 어두운 탓에 멀리서는 주먹 형태만 눈에 들어왔었는데, 가까이서 자세히 보니 협곡과 어울리지 않는 바위였다.

색도 먹물처럼 어두웠고, 표면은 개미굴처럼 셀 수 없는 구멍들이 뚫려 있었다. 구멍은 성인이 들어가도 충분할 만큼 크고 깊었는데, 폭우 때문인지, 그 구멍들 사이로 물줄기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물줄기 대부분이 협곡 밑 거센 강물로 쏟아진다는 것을 확인한 케플린은 미간을 살짝 좁혔다.

만약 강물로 목표가 추락한다면?

‘사정거리 안에 두고 쫓아야겠어.’

그럴 리는 없다고 판단했지만, 최악을 가정한 그는 빠르게 움직였다.

암살자는 현재 일행과 함께 바위산 정상을 향해 오르고 있었다.

경사가 급격한 편이 아니라서 구멍들만 조심하면 될 것 같았다.

케플린이 거리를 줄이기 위해 은밀히 마나를 사용하려는 순간이었다.

드드득―!

“……!”

암석 대지가 크게 들썩거리더니 구멍들 사이로 거센 물줄기가 푸욱! 하고 쏟아졌다.

동시에,

휘이이이이이이이―!!!!!!

“큭!”

바람과 함께 쇠 긁는 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휘청거리던 케플린은 다급히 오라를 끌어올린 뒤 중심을 잡았다. 입술을 깨물었는지 피가 살짝 새어 나왔다.

“…방금 그 소리, 뭐지?”

정신을 파고드는 송곳 같은 날카로움. 4성인 자신이 이 정도 충격을 받았다면?

“끄아아악―!”

“아아악!”

멀리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용병 중 하나가 머리를 부여잡고 휘청이더니 구멍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누구도 용병을 구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암살자는 머리를 박은 채 덜덜 떨고 있었다.

변수다.

케플린은 다급히 움직이려고 일어났다.

드드드드득―!

“이, 이런 미친!”

귓가를 욱신 찌르는 감각. 마치 칼날로 후벼 파는 듯한 고통이었다.

그는 오라를 끌어올리며 눈앞의 구멍을 피했지만, 곧 주변을 둘러보며 욕설을 내뱉었다.

사방이 구멍 천지다.

휘이이이―! 휘이이이!!!!!

“크큭!”

두 번째 여파가 터져 나왔다.

“이, 이게 무슨… 큭!”

벤은 귀를 틀어막으며 나를 죽일 듯이 노려봤다.

이게 무슨 일이냐는 물음.

뭐긴 뭐야.

칼바람의 저주지.

세 번째 칼바람이 터지자, 벤이 휘청거리며 피를 토했다. 난 바닥에 머리를 박고 속으로 숫자를 세었다.

‘하나, 둘, 셋…….’

칼바람의 저주는 일정 주기를 갖고 소리를 토해낸다. 타이밍을 체크하며 주변을 살폈다.

용병들은 이미 두 번째 여파에서 거품을 물고 쓰러졌다. 간질에 걸린 사람처럼 부들부들 떨며 눈동자를 뒤집어 깐 모습이 무척 위태로워 보였다.

다만, 벤의 경우엔 달랐다. 기습적인 첫 여파에는 큰 타격을 받는 듯했는데, 다음 여파부턴 휘청거릴 뿐 쓰러지진 않았다.

다만, 내게 다가오지 못했는데, 충격이 상당한 것 같았다.

벤이 이 정도라면….

‘그놈에겐 큰 타격은 못 주겠는데?’

벤이 기절했더라면 플랜 A로 가려고 했는데, 플랜 B다.

잠시 후, 타이밍에 맞춰 터지던 칼바람의 저주가 뚝 멈췄다.

뭐지?

설마 딜레이가 있는 건가?

이에 대해 고민하는 사이, 몸을 회복한 벤이 검 자루를 잡고 다가오자, 난 핼쑥한 표정으로 비틀거리며 물러났다.

이건 당연히 연기다.

난 칼바람의 저주에 두통 말곤 영향을 받지 않았으니까.

“무슨 짓을 한 거냐!”

“저, 저도 모르는 일입니다!”

“넌 왜 멀쩡하지?”

“이, 이유가 있습니다! 나중에 설명하겠습니다! 소리가 멈춘 지금 어서 불을 피워야 합니다!”

“뭐?”

“다 왔습니다! 저기입니다!”

난 벤의 반응 따윈 무시하고 다급히 움직였다. 놈이라도 지금 날 말리진 못할 거다. 애초에 내 말을 따라 이곳에 온 녀석이니까.

거대한 바위 꼭대기에 올랐다. 가방을 뒤적거리며 발화 스크롤을 꺼내 마구 찢기 시작했다.

발화 스크롤을 모조리 찢자, 폭우 속에서 마법 불꽃이 타올랐다.

잠시 후, 큰 화마(火魔)가 피어올랐다. 검은 연기가 모락모락 폭우를 밀어내고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이것으로 할 일은 끝난 건가?”

어느새 벤이 뒤쪽에 서 있었다.

언제?

하도 멍청한 짓을 해대서 잠시 잊고 있었다. 눈앞의 녀석이 3성의 실력자란 사실을.

난 품에서 스크롤 두 장을 더 꺼냈다.

벤은 스크롤을 보고도 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조금 전 찢어버린 발화 스크롤과 겉면이 똑같았기 때문이다.

난 두 장의 스크롤을 꽉 움켜잡고 말했다.

스크롤은 벤을 향해 있었다.

“신호만 보내면 제 임무는 끝납니다.”

“어서 찢어라.”

“…….”

“어서 안 찢고 뭐 하나!?”

임무가 끝나는 순간, 날 패대기칠 것처럼 벤은 사나운 기세로 다가왔다. 내 멱살을 끌고 서둘러 나가려는 속셈인 것 같았다.

난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원한다면야….”

난 2성 뇌전 마법, 라이트닝 스피어가 담긴 스크롤을 거칠게 찢었다.

원래 붉게 타올라야 했던 스크롤이 파지직―! 소리를 내며 눈 부신 빛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무, 뭐!?”

벤의 눈동자가 푸르게 물들더니, 이내 경악으로 부릅떠졌다.

파지지지직―!

“끄아아아악!”

스크롤에서 뇌전 두 줄기가 벤에게 꽂혔다. 온몸에 물기까지 차 있어서 그 충격은 서너 배가 되었다.

검게 타버린 벤이 무기를 떨구고 주저앉은 순간, 난 이를 악물곤 품에서 스크롤 두 장을 더 꺼내 다급히 찢었다.

진짜 감시자 놈, 반응이 너무 빨랐다.

순간 풍경이 번뜩이며 푸르게 물들었다.

파지직―! 파지지직―!

강렬한 두 줄기의 뇌전이 벤의 뒤쪽에서 쇄도해오는 검은 인형에게 내리꽂혔다.

번쩍―!!!!

지독한 눈 부심에 난 신음을 흘리며 고개를 돌렸다. 순간, 소름 돋는 감각에 난 본능적으로 옆으로 몸을 굴렸다.

생존 본능에 가까운 행동.

스각―

“……이, 이런 시발!”

그 행동이 나를 살렸다.

섬뜩한 검광이 내 머리카락을 자르고 지나갔다.

난 다급히 감시자를 찾았다.

검게 그을린 몸뚱이가 거리를 둔 채 내 앞을 가로막았다.

놈과 눈이 마주쳤다.

그놈이다.

창고에서 날 막아섰던 놈.

2성 마법이 안 통한다.

내 예상보다 더 지독한 괴물 새끼였다.

얼굴을 악귀처럼 일그러트린 놈은 검을 겨눈 채 자세를 잡았다.

4성 기사.

마주한 순간 대응하면 뒈진다.

난 남은 스크롤을 갈가리 찢으며 울부짖듯 외쳤다.

“도, 돈값 해! 이 새끼들아!!”

뇌전 덩어리와 놈의 검이 부딪쳤다.

번쩍―!!

새하얀 백광(白光)에 눈이 멀 것 같았다. 하지만 느껴지는 살기는 여전했다.

빌어먹을, 당한다!

위기의 순간,

카앙―!

사라진 시야 속에서 둔탁한 소리가 들려왔다. 놈의 검이 막혔다. 그리고 들려오는 생소한 목소리.

“10분이다.”

검은 장미들이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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