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흑주술사 도네콜린트
지이이잉―
“……!”
대기가 사납게 진동했다. 흐려진 시야 앞으로 단검에 막힌 검 끝이 보였다. 조금만 늦었다면 하체가 꿰뚫릴 뻔했다.
서늘해진 가슴을 쓸어내리며 시선을 돌렸다.
쌍 단검을 교차해 감시자의 검을 막은 존재가 있었다.
복면을 쓴 호리호리한 체구.
펜리 체이서가 직접……?
아니, 그녀는 아닌 것 같았다. 비슷한 체형의 또 다른 복면인들이 감시자의 뒤를 치고 나타났으니까.
펜리의 실력이라면 굳이 일행을 데리고 오지 않았을 것이다.
모두 셋.
나를 보호하기 위해 펜리가 보낸 검은 장미들이었다.
“…뭐냐!?”
갑작스레 나타난 기습에 감시자는 당황한 것 같았다. 하지만 그도 실력 있는 기사.
그는 주변을 둘러보곤 표정을 굳히더니 온몸에서 섬뜩한 빛을 토해냈다.
4성의 힘을 개방하려는 모습. 이에 나를 막아선 검은 장미의 몸에도 붉은빛이 번뜩였다.
카카카카캉―!
고막을 후려치는 충돌음이 터져 나왔다. 그들 중심으로 빗방울과 돌조각이 사납게 튀자, 난 주춤주춤 물러났다.
두 빛무리가 번뜩이며 충돌하는 광경. 싸우는 모습이 너무 빨라서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다.
…4성이 이 정도라고?
그럼 5성 이상은 어떤 세상 속에서 사는 놈들인 거야?
“퉤!”
난 입 속에 들어온 이물질을 뱉어내곤 도망칠 궁리를 했다.
주변을 살피는 사이, 곁에 있던 검은 장미까지 전투에 합류하자, 감시자는 수세에 몰리며 먼 거리까지 물러났다.
내겐 신경 쓸 여유조차 없는 모습.
하지만 여유가 없는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10분이다.]
분명히 들었다.
그때부터 타임 어택은 시작이 된 셈이다. 10분, 아니 이제 9분이면 약이 바짝 오른 감시자를 내버려 둔 채 저들은 먼지처럼 사라질 것이다. 그 후 뒷감당은 오롯이 내 몫이었다.
4성급의 전투를 직접 구경할 기회였지만, 그게 내 목숨값이라면 사양이었다.
‘어디지? 어디야!?’
쓰러진 용병들과 벤에게 잠시 머물던 시선이 타오르는 불꽃으로 향했다.
마법 불꽃은 폭우 사이에서도 쉽사리 꺼지지 않았다.
불꽃이 토해내는 짙은 연기.
난 어디론가 흘러가는 연기를 쫓아 움직였다.
잠시 후, 연기가 사라지는 광경을 바라본 내 두 눈이 반짝였다. 난 그 방향으로 전력을 다해 질주하기 시작했다.
‘찾았다!’
돌산을 방불케 하는 거대한 바위.
그 바위에 뚫린 수백 수천 개의 구멍 중 일부 구멍들이 검은 연기를 쭉 빨아들이고 있었다.
바람을 빨아들이는 현상.
난 그 이유를 알고 있다.
눈앞의 현상을 만들어낼 기적은 한 가지뿐이었으니까.
‘고대 문양!’
칼바람을 토해내는 고대의 힘.
조금 전 일행을 휩쓸었던 칼바람이 멈춘 이유는 다음 소리를 토해내기 위한 바람 흡수 과정이 필요했던 거였다.
그 진행 과정의 시작과 끝을 볼 수 있는 수단이 바로 저 연기였다. 저 검은 연기 끝에 넬리토리의 고대 문양이 있다.
난 주저 없이 연기를 삼키는 구멍 중 가장 커 보이는 구멍으로 미끄러지듯 내려갔다.
“아뜨뜨뜨……!”
온몸이 따끔따끔했다.
암석 표면이 제주도 돌하르방처럼 잔구멍이 많고 거칠어서 미끄러질수록 잔상처가 늘었다.
하지만 지금 이딴 상처에 주저할 때가 아니다.
7분.
구멍 깊이는 깊지 않았다.
바닥에 착지한 후 젖은 헝겊으로 코를 틀어막았다. 매캐한 검은 연기가 화생방처럼 제법 매웠다.
난 물기로 가득 찬 공간을 둘러봤다.
동서남북.
사방으로 크고 작은 구멍들이 뚫린 개미굴 형태.
일부 구멍에서 빛이 흘러 들어와 어둡지는 않았다. 지형을 살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쁘지 않아.”
미로 형태에, 폭우로 인해 흔적마저 실시간으로 지워지고 있었다. 게다가 칼바람의 저주까지.
바깥과 달리, 안쪽 공간은 응축된 공간이라 칼바람의 위력이 수배는 강력할 것 같았다.
일반인은 휩쓸린 순간 머리가 터져 죽을지 몰랐다.
추적에 일가견이 있는 자라도 이런 환경에선 날 찾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놈이 안으로 들어올까?’
곧 있으면 밤이다.
빛까지 사라진다면 감시자는 여러 방해 요인을 극복하면서 나를 추적해야 할 것이다.
결코, 쉽지 않은 길.
하지만 카멜의 명을 목숨처럼 여기는 놈이라면 끝까지 날 추적해 움직일 것이다.
‘6분.’
내 계획은 간단하다.
깊숙이 숨어서 버티는 것이다. 감시자가 아무리 강하다고 한들, 이 안에선 칼바람이 쉴 새 없이 퍼부어진다.
놈이라도 온종일 버티는 건 불가능했다. 지도 힘들면 물러나겠지.
“후….”
난 수많은 구멍을 둘러보며 숨을 내쉬었다.
안쪽부턴 미지와 같아서 뭐가 펼쳐질지 알 수 없다. 다만, 확실한 건 지금 목숨을 건 숨바꼭질이 시작됐다는 것이다.
술래에게 잡히면 죽는다.
제한 시간 안에 최대한 멀어진 후 꼭꼭 숨어 있어야 한다.
우선 매캐한 연기를 길잡이 삼아 한 곳을 정해 전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아직 여유 시간이 남았다.
그 시간 안에 고대 문양의 위치를 파악해볼 생각이었다.
주변 풍경이 휙휙 지나갔다.
고작 1성이지만, 육체 능력은 일반인과 차원이 달랐다.
5분.
충분히 여유 있는 시간이었다.
눈앞에 두 개의 갈림길이 나타났다. 그다음에는 세 개의 큰 구멍이 위아래로, 다음에는 다섯 개의 큰 구멍이 사방으로 나타났다.
연기의 흔적만 쫓으면 됐기에 선택은 어렵지 않았다. 연기의 흔적이 끊어질 때까지 쉴 틈 없이 달렸다.
3분.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지만, 난 멈출 수 없었다.
최대한 움직여야 한다.
그러다, 더는 갈림길이 나오지 않고, 쭉 뻗은 공간만 나타났다. 구멍이 줄어들더니, 빛이 사라졌고, 잠시 후엔 폭이 좁아지기 시작했다. 그 변화에 난 살짝 당황했다.
“곤란한데….”
웅크려 걷길 잠시, 이젠 기어서 가야 할 수준까지 왔다.
이대로 쭉 가면 될 것 같은데, 문제는 폭이 더 좁아지고 있다는 거였다. 게다가 이젠 시야가 암흑 그 자체였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꽉 낀 공간, 어두운 시야.
현실의 나였다면 공포에 먹혔겠지만, 이곳의 나는 신기할 정도로 침착했다.
‘여기서 더 좁아지면 돌아가야 해.’
고립은 안 된다.
서둘러 돌아가야 하는데, 슬슬 10분이 끝나가는 시간이었다.
돌아가다 놈과 마주치면 그대로 게임 끝이었다.
이것 또한 좋지 않다.
‘제발….’
간절한 마음을 담아 한참을 기어갔다.
결국, 10분이 지났다.
제한 시간 끝.
검은 장미들은 물러날 테고, 감시자가 움직일 시간이다. 놈이 어떤 선택을 할지 모르지만, 난 이제 돌아갈 수 없다.
이 길의 끝이 무엇인지에 따라 내 운명이 갈릴 것 같았다.
잠시 후,
“어?”
좁은 틈 너머에 빛이 번뜩였다. 새하얀 빛이다.
설마 바깥으로 통하는 길인가?
아니면 고대 문양이 위치한 곳?
희망이 보이자, 두 팔에 힘이 들어갔다. 난 이를 악물고 앞으로 나아갔다.
“크핫!”
눈 부신 빛을 헤치고 좁은 구멍을 가까스로 탈출했다.
밑으로 우당탕 굴러떨어진 나는 재빨리 자세를 잡고 주변을 살폈다.
암벽으로 둘러싸인 거대한 공터였다.
학교 운동장만큼 넓었는데, 반대편 쪽으로 구멍이 여럿 뚫려 있었다. 구멍 사이로 바람이 흘러 들어왔다.
바람은 한 방향으로 흘렀다.
공터 한가운데 세워진 높은 제단.
제단 위에 둥둥 떠 있는 문양이 보인다. 그 문양은 포식자처럼 흘러 들어오는 바람을 모조리 빨아들이고 있었다.
‘설마, 저게…?’
황금빛으로 이뤄진 신비한 문양.
고대 문양이 확실했다.
주인의 몸에 각인되어 문양을 통해 능력을 발휘하는 고대의 힘. 각인 아티팩트라고도 불리며, 고대 물건 중 무척 희귀한 힘 중 하나였다.
‘저 문양의 주인은 흑주술사 도네콜린트였지.’
주술사들의 둥지 원로 중 한 명.
전장에서 ‘세이렌의 비명’으로 병사들의 공포 대상이 됐던 흑주술사 도네콜린트.
세이렌의 비명은 저 문양의 힘을 바탕으로 펼치는 강력한 정신 주술이었다.
얻는 방법은 간단하다.
제단의 결계를 뚫고 각인 문양에 접촉하는 것.
다만, 목숨을 걸어야 했다.
결계 속은 진정한 문양의 힘이 발휘되는 공간이었으니까.
머리가 터지는 수준이 아니라 온몸이 갈가리 찢길 수 있다.
저 결계를 뚫고 문양에 접근하는 데, 도네콜린트도 보름의 시간이 걸렸다고 했다.
내가 과연 저 결계 속에서도 버틸 수 있을까.
‘확인해보면 되겠지.’
무리다 싶으면 피하면 그만이다. 눈앞의 문양도 중요했지만, 술래가 어디쯤인지 파악이 안 되는 지금 사방이 뚫린 이런 공터에 오래 머무는 건 좋지 않았다.
위치가 노출되면 끝이었다. 서둘러 숨어야 했다.
난 눈앞의 제단을 응시했다.
결계의 시작을 알리듯, 제단 주변에는 뜻 모를 문자가 빼곡하게 새겨져 있었다.
그 결계 주변을 둥글게 둘러친 검은 밧줄이 보였는데, 줄에는 작은 종들이 빼곡히 달려있었다. 거친 바람에 흔들리는데도 종들은 전혀 울리지 않았다. 무척 기묘한 광경으로, 이 제단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이건 마치….
‘주술사의 물품 같은데.’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 내 표정이 빠르게 굳어졌다.
‘이때쯤 도네콜린트가 학살자의 진영에 영입됐던 것 같은데. 정확히 언제였지?’
카멜이 블라이어 성주에 오른 후 외부에서 영입한 첫 인사가 도네콜린트라 확실히 기억이 났다.
그때, 도네콜린트는….
난 불길한 눈으로 결계를 에워싼 검은 밧줄을 응시했다.
‘고대 문양의 주인이었어.’
그럼 이 시기 근처로 문양의 주인이 됐다는 추론이 나온다.
이 밧줄과 종들이 제단 결계를 뚫기 위한 도네콜린트의 결계 해주법이라면?
“아니지? 말도 안 되잖아.”
난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하지만 내뱉은 말과 행동과 달리, 난 말이 끝나기 무섭게 미친 듯이 구멍 쪽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콰앙―!
“이런 씨팔!!!!!!!!”
바닥이 튀어 오르더니, 거대한 바위 손이 내 뒤를 덮쳐왔다.
난 그 어느 때보다 격렬하게 욕설을 내뱉었다.
장난도 정도가 있지.
내가 넬리토리 협곡에 방문한 시기와 도네콜린트의 결계 해주 기간이 겹칠 줄이야.
뉴비 암살자에 빙의시킨 것도 그렇고, 지금 상황도 그렇고, 이 개 같은 소설은 날 괴롭히기 위해 부른 게 분명했다.
뒤를 돌아보니, 어디서 나타났는지, 헝겊때기를 걸친 왜소한 노인 하나가 나를 향해 지팡이를 흔들고 있었다.
시발, 도네콜린트다.
쾅! 콰앙! 쾅!
바퀴벌레를 때려잡는 것처럼 거대한 바위 손은 바닥을 매섭게 짓누르며 나를 공격해왔다. 바닥을 구르며 요리조리 공격을 피하자, 성난 외침이 들려왔다.
“이 벌레 같은 놈이!”
“…….”
벌레라니, 내 심장에 벌레가 있는 건 사실이지만, 그건 내 것이 아니라고.
반대편 벽 쪽에 다다르자, 난 근처에 있는 구멍으로 몸을 날렸다. 도네콜린트란 변수가 발생했으니, 우선 이곳을 벗어난 후 상황을 살펴야 했다. 이 상황에 감시자까지 나타난다면 예측할 수 없는 개판이 펼쳐지겠지만, 결과는 같다.
‘끌려가거나, 뒈지거나.’
그렇게 구멍 안쪽으로 들어왔는데,
“와. 진짜. 어이가 없네?”
막혔다.
구멍이 막혔다.
헛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돌린 순간,
“어억!… 아악!!!”
바위 손이 내 한쪽 다리를 움켜잡고 허공으로 휙 낚아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