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터진다!
콰앙―!
“우웩!”
파리채에 잡힌 파리마냥 벽에 짓눌린 나는 피를 한 사발 토했다. 짓누르는 압력이 무시무시했다. 바위니까 당연한 건가?
등뼈가 전부 바스러지는 느낌이었다.
옴짝달싹하지 못한 채 천천히 다가오는 깡마른 노인네와 마주했다.
학살자의 악당 중 하나라서 그런가. 인상이 딱 봐도 나 괴팍하다고 적혀 있었다.
“…….”
노인, 도네콜린트는 혹시 몰라 주변을 잠시 살폈다.
결계를 해체하는 도중 무언가 타는 듯한 냄새를 맡았다.
근처에 누군가 접근했다는 것이고, 이곳은 칼바람의 저주로 평범한 사람들이 드나들 수 없는 공간이었다.
위협적인 불청객의 등장.
그가 잠시 몸을 숨긴 채 불청객을 살핀 이유였다. 그런데 보이는 건 같잖아 보이는 젊은 녀석 하나였다.
‘작업이 막바지인데, 불청객이라니.’
고대 문양에 관해 잘 아는 도네콜린트에겐 무척 불쾌한 일이었다. 보름 동안의 개고생이 물거품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도네콜린트는 빛나는 문양을 올려다보며 진한 미소를 그렸다. 탐욕으로 가득 찬 눈동자.
‘저 문양은 나와 상성이 무척 잘 맞아. 내 것이란 말이다.’
정신 공격 계열로 보이는 저 고대 문양은 각인의 주인이 정해지면 더 큰 위력을 발휘할 것 같았다. 그 효과는 상상만 해도 흥분이 될 정도.
‘그 전에 불청객을 치워야지.’
도네콜린트는 불청객을 훑어봤다.
몸속에서 느껴지는 마나는 1성 정도다.
‘고작 이 능력으로 제단까지 접근했다고?’
도네콜린트의 미간이 좁아졌다.
그는 고대 문양의 위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접근 불가능.
1성의 마나로 버틸 수 있는 저주가 아니었다. 잠시 불청객을 노려보던 그가 지팡이를 휘둘렀다.
“으악!”
불청객이 허공에 거꾸로 뒤집혔다. 대롱대롱 매달려 허우적대는 불청객 주변을 느릿느릿 돌며 도네콜린트는 감각을 끌어올렸다. 불청객의 몸을 살펴봤지만, 감각에 잡히는 마법 물품은 없었다.
그렇다면 축복 계열일 확률이 높은데, 아무리 봐도 축복을 걸 능력자로는 안 보였다.
‘동료가 있다?’
그는 자연스럽게 또 다른 불청객을 떠올렸다. 주변을 둘러보니, 여전히 구멍에선 연기가 흘러 들어오고 있었다.
“바깥에 누가 더 있지?”
“일단 놔주시고…….”
“이대로 피떡이 되고 싶나?”
“자, 잠깐만요! 아악!”
바위 손이 나를 움켜잡고는 찌그러트리기 시작했다. 옥죄는 압박감에 소리를 질렀지만, 노인은 귓등으로도 안 들었다.
이놈의 악당들은 인내심이 없어!
두둑! 맞물리는 섬뜩한 뼈 소리에 식은땀이 절로 나왔다. 이대로 가다간 온몸의 뼈가 바스러질 것 같았다.
‘위기다!’
설마, 도네콜린트를 만나 붙잡히게 될 줄이야.
주변을 둘러보니, 매캐한 연기가 여전히 흘러 들어왔다.
‘시발, 누가 만든 건지 스크롤 효과 한번 죽이네.’
폭우 속에서 10분이 지난 지금까지도 불꽃은 사라지지 않았다.
제단으로 통하는 구멍이 제법 많았는데, 그 일부 구멍에서 연기가 계속 흘러 들어오고 있었다.
순간 감시자의 존재가 떠올랐다.
‘이걸 좋아해야 하는 건지, 울어야 하는 건지 모르겠네.’
감시자가 나를 쫓아 구멍 안으로 들어왔다면 무엇을 쫓아 움직일까.
폭우로 내 흔적은 깨끗이 사라졌고, 구멍은 수도 없이 많다.
그 상황에 한 곳으로만 흘러가는 검은 연기를 발견한다면?
일단 그 흔적을 쫓아 움직이지 않을까?
‘내 움직임으로 10분이면….’
감시자의 능력을 봤을 때, 그 절반인 5분도 채 걸리지 않을 거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지?
곧 들이닥칠 4성 기사.
지금 도망쳐도 아슬아슬한데, 난 지금 도네콜린트의 손아귀에 잡혀 있었다.
‘감시자에게 구함을 받아야 하는 상황인 거야? 정말 그런 거야?’
저 늙은 악당 새끼와 달리, 감시자는 블라이어 영지까진 날 보호하려고 할 것이다. 이대로 피떡처럼 죽을 바엔 일단 잡히는 게 나을지도.
‘어? 잠깐만….’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서로 적대하며 싸우게 한다면?
기회가 생기지 않을까?
하지만 어떻게?
고민도 잠시, 지독한 압박감에 얼굴이 일그러졌다. 눈앞의 상황부터 해결해야 할 것 같았다. 저 늙은이는 정말로 날 죽일 작정이었으니까.
그때였다.
거꾸로 된 내 시야에 도네콜린트의 목걸이가 눈에 띈 건.
머리카락을 재료로 만든 것인데, 뽑힌 이빨들이 주렁주렁 매달린 그로테스크한 목걸이였다.
‘저건…….’
목걸이를 본 순간, 좋은 생각이 번뜩였다. 난 다급히 손을 흔들며 외쳤다.
“하, 한 명이 더 있습니다!”
“한 명?”
“…그가 진짜입니다!”
“진짜? 무슨 소리지?”
“시, 심부름꾼!”
심부름꾼.
그 단어가 튀어나오자, 온몸을 비틀 듯 압박하던 힘이 뚝 멈췄다. 도네콜린트의 가라앉은 시선에 난 얼른 품을 뒤지며 대답을 이어갔다.
“저, 전 ‘심부름꾼’에게 고용된 C급 용병 알입니다!”
내가 용병패를 던졌지만, 그는 내 패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가 관심을 보인 건 내가 흘린 단어다.
심부름꾼.
그 단어는 도네콜린트에게 매우 민감한 단어였으니까. 역시나 도네콜린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오르도르의 숲에서 보낸 놈들이냐?”
“풀어주시면 전부 다 말씀드리겠습니다! 사, 살려주십시오!”
“…….”
“흐, 흔적을 쫓아서 곧 심부름꾼이 찾아올 겁니다!”
내가 검은 연기를 가리키자, 주술사는 미간을 구겼다.
심부름꾼은 오르도르 숲의 의뢰를 받은 존재를 뜻한다. 자신을 향한 원한으로 똘똘 뭉친 일부 마녀들이 목숨을 노리고 심부름꾼을 보냈다면 부담스러운 실력자를 고용했을 것이다.
잠시 고민하던 그는 나직이 내게 몇 가지를 물었다. 일종의 확인 작업이 분명했다.
“날 알고 있나?”
“주, 주술사 도네콜린트.”
“심부름꾼이 날 쫓는 이유는?”
“자세히는 모릅니다. 그저 보, 복수라는 것밖에는….”
내 시선이 목걸이를 향했다.
도네콜린트의 목걸이.
저 목걸이는 마녀를 사냥하고 그녀들의 머리카락을 엮어 만든 것이었다. 이빨도 마찬가지.
일종의 전리품이자, 주술 도구였다.
마녀의 신체는 주술에 큰 효력을 발휘했으니까.
“복수라… 날 어떻게 찾았지?”
“베네타 주변에 나타났다는 정보를 얻고 수색 중이었습니다.”
“정보? 그 정보 누구에게 들었지?”
“정보 길드 술집에서….”
“흠….”
“저, 정말입니다! 믿어주십시오!”
‘잠깐?’
도네콜린트의 뇌리에 한 가지 기억이 지나갔다.
며칠 전 필요한 물품을 사려고 베네타에 갔을 때, 자신을 은밀히 수소문하고 다니는 세력이 있었다. 고대 문양을 얻어야 하는 상황이라 일단 무시했는데, 설마 그들이 심부름꾼의 하수인이었나?
그들은 카멜이 보낸 주술사들이었지만, 도네콜린트가 이를 알 리가 없었다.
자신의 이름도, 목적도, 정보 출처도 딱딱 들어맞자, 도네콜린트는 지팡이를 내려놨다. 거대한 손이 부스스 먼지처럼 흩어졌다. 굴러떨어진 나는 거친 숨을 내뱉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의심 많은 늙은이처럼 보였는데, 생각보다 무난하게 넘어간 것 같았다.
“마녀가 직접 온 것이냐?”
“4, 4성 용병입니다.”
“4성?”
도네콜린트는 짧게 혀를 찼다.
차라리 마녀라면 상대하기가 편했을 텐데, 4성 용병이면 닳고 닳은 베테랑이라 혼자선 꽤 버거웠다.
다행이라면 전투 장소가 이곳이라는 점이었다. 그의 표정에 여유가 생겼다.
‘위협적이지만, 할만해.’
칼바람의 저주가 존재하는 이곳이라면 4성이라도 해볼 만했다.
자신은 이미 이곳 환경에 완벽히 적응한 상태였으니까.
그때,
딸랑― 딸랑― 딸랑― 딸랑―!!!
“…….”
바람에 흔들리면서도 조용했던 종들이 미친 듯이 울기 시작했다.
난 신음을 흘리며 두 귀를 틀어막았다. 종소리가 귀를 때리듯 날카로웠기 때문이다.
무슨 주술이지?
그 모습에 도네콜린트는 히죽 웃었다. 필요한 정보는 모두 얻었으니, 눈앞의 벌레는 이제 필요 없다.
“약속대로 살려주도록 하지.”
“저, 정말 감사합니다!”
“이곳에서 살아서 나갈 수 있다면 말이지?”
“네? 그게 무슨…!”
저 종들은 신호탄이었다.
칼바람의 저주가 곧 터진다. 바깥에선 어찌어찌 저주를 버텼겠지만, 이곳은 제단 코앞이었다. 저주의 파괴력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하다는 뜻이다.
퍽―
“커억!”
지팡이에 빛이 터진 순간, 난 복부에 강한 충격을 받고 제단 바로 앞 벽 쪽으로 처박혔다.
그와 동시에,
콰앙―!!!!
구멍 한 곳이 부서지며 와르르 무너졌다. 그 앞에 검은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치열한 전투로 몰골이 엉망이 된 사내였는데, 그 덩치가 무척이나 거대했다.
그 실루엣을 본 순간 난 직감했다.
날 발견한 놈의 눈동자가 살기로 가득했다.
저 살벌한 눈빛.
감시자였다.
으득―!
케플린은 암살자를 발견한 순간, 이를 으드득 깨물었다.
놈에게 제대로 농락당했다.
[최악의 경우 목을 잘라 와라.]
어떤 최악이 벌어지길래, 목을 잘라 오라고 한 것인지 처음에는 지시가 이해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이해가 된다.
‘꼬리가 붙었을 줄이야.’
놈을 보호하는 세력이 있었다. 그것도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강력했다.
4성 한 명과 3성 둘.
셋의 합격기가 워낙 날카로워서 전력을 쏟아부어야 했다.
그런데도 위태롭게 밀렸다.
위협을 무릅쓰고 구멍 안으로 피해 일대일 상황을 만들지 않았더라면 위험할 뻔했다.
다행히 1명이 상처를 입자, 그들은 빠르게 물러났다.
벤에게 회복 물약을 쥐여주고 추적을 위해 암살자가 사라진 장소 근처에 도착했을 땐 10분 정도가 지난 뒤였다.
그때 구멍들 사이로 빨려 들어가는 검은 연기를 발견했고, 그 흔적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암살자의 찢긴 옷가지를 발견할 수 있었다.
안쪽에 어떤 위험이 도사리는지 알 수 없지만, 그는 추적을 포기할 수 없었다.
친위대로 부여받은 첫 임무.
주군 앞에 실패를 보고하는 굴욕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런데, 천운이 따랐는지 암살자가 눈앞에 잡혔다.
‘목을 잘라 간다.’
변수가 발생했으니, 주군의 지시에 따른다.
문제는 눈앞에 나타난 또 다른 변수였다.
케플린은 딱딱한 표정으로 출수할 수 있게 검을 늘어트렸다.
로브를 걸친 왜소한 노인.
지팡이를 겨눈 채 뭐라 중얼거리고 있다.
마법사?
주술사?
우선 표적과의 관계가 어떻게 될까. 조금 전 자신을 방해한 이들과 한편일까.
생각이 복잡하게 돌아가고 있을 때, 우렁찬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암살자의 외침이다.
“노, 놈입니다!!!!!!!!!”
내가 바라본 시선은 도네콜린트도, 감시자도 아니었다.
두 사람의 중간 사이.
딱 그 정도면 충분했다.
외침 소리에 도네콜린트와 케플린은 동시에 생각했다.
‘놈? 역시 표적의 지원 세력인가?’
‘저놈이 심부름꾼이군.’
마주한 둘의 기세가 날카로워졌다.
대화 따윈 없었다.
아니, 정확히 대화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
세차게 불던 바람이 갑자기 뚝 멈췄다. 대신 대기가 진동하며 제단 위의 황금빛 문양이 터질 듯이 부풀기 시작했다.
풍선이 터지기 직전처럼 위태로워 보인다.
도네콜린트의 비릿한 미소.
그 표정에서 한 가지를 읽었다.
‘터진다!’
나는 이를 악물곤 몸을 웅크렸다. 두 귀를 틀어막고 신께 빌었다.
제발 버텨줘!
삐이이이이―!!!!!!!!!!!!!!
“끄아아악!”
칼바람의 저주가 터지자, 내 목구멍에서 절규 섞인 비명이 터져 나왔다.
위에서 경험했던 칼바람의 저주는 자장가 수준에 불과했다. 이번 건 귀때기 바로 앞에서 대형 스피커로 때려 맞은 느낌이었다. 뇌가 소리에 붙잡혀 찌그러지는 고통.
그 고통 속에서도 나는 정신을 잃지 않았다.
‘버, 버틸 만해.’
죽을 정도는 아니다.
그럼, 괜찮다.
입술을 콰득 깨물자 핏물과 함께 정신이 번쩍 들었다. 겨우겨우 실눈을 뜬 채 난 두 사람을 살폈다.
칼바람의 저주가 터진 순간, 두 사람의 반응이 엇갈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