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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에게서 살아남는 법-22화 (22/130)

22화 진통제가 그립다

기습적으로 터진 칼바람의 저주.

“커, 커억!”

더 큰 충격의 저주에 케플린은 가슴을 움켜잡고 주저앉았다. 청각이 삐― 하고 울리며 시야가 샛노래지는 감각. 정신이란 필름이 뒤엉킨 것 같았다.

반대로 도네콜린트는 저주의 여파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은 듯 보였다. 대신, 마녀의 목걸이가 사시나무 떨리듯 흔들렸다. 충격을 대신 받아주고 있는 모습.

“속박!”

“큭! 이 늙은이가!”

도네콜린트의 지팡이가 움직였다. 케플린 주변으로 수십 줄기의 돌가시가 삐죽삐죽 튀어나와 온몸을 날카롭게 옥죄였다.

충분히 피할 수 있는 공격인데, 케플린은 정신 충격으로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푹! 푹! 푹! 푹!

“큭!”

돌가시가 피부를 파고들었다. 케플린은 피투성이가 되어 위태롭게 휘청거렸다. 온몸에 터져 나온 검붉은 피. 케플린은 피를 한 움큼 뱉어내곤 얼굴을 와락 일그러트렸다.

케플린의 몸에서 빛이 터져 나왔다. 오라가 몸을 감싼 순간, 돌가시들이 먼지처럼 흩어졌다. 속박을 벗어난 그는 앞으로 돌진했다.

흐릿해지는 잔상.

도네콜린트는 다급히 지팡이를 들었다.

콰작―!

지팡이가 땅에 박히자 검은 장막이 생겼다.

쩌엉―

장막 위로 번뜩이는 불꽃의 향연. 벼락처럼 움직이는 붉은 칼날이 장막을 찢을 듯 베기 시작했다.

장막이 위태롭게 흔들리며 충격을 흡수했다.

묵묵히 충격을 막아내던 도네콜린트.

잠시 후, 방울 소리가 들리자, 그의 입가가 비틀렸다.

삐이이이이이이―!

두 번째 칼바람의 여파!

“크아악!”

이번에도 케플린은 대응하지 못하고 검을 놓쳤다.

그가 휘청이며 물러나자, 도네콜린트가 기다렸다는 듯 지팡이를 휘둘렀다.

콰앙―!

바닥에서 바위 손들이 튀어나와 케플린의 몸을 움켜잡았다.

“마녀의 개새끼! 죽어라!”

기회를 잡은 도네콜린트가 노성을 터트리며 기운을 폭발시켰다.

부르르 떨리는 지팡이.

케플린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바위 손들 표면에 돌가시들이 튀어나와 케플린의 온몸을 꿰뚫기 시작했다. 동시에 걸레를 짜듯 손들이 압박을 시작했다.

“끄아악! 아악!”

결국 케플린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는 필사적으로 몸을 뒤틀며 모든 오라를 쥐어짜듯 터트렸다.

평소라면 금세 찢을 수 있는 주술이지만, 복면인들과 전투에서 힘을 소진하고, 저주까지 받은 상황이라, 모든 게 힘에 부쳤다.

케플린은 지독한 위기감에 죽을힘을 다해 버티기 시작했다.

마지막 발악.

바위 손들에 서서히 금이 가기 시작했다.

“쿨럭!”

거센 반발력에 도네콜린트도 피 섞인 기침을 토해냈다. 그는 검은 장막의 힘을 해제하고 심부름꾼을 죽이는 데 모든 힘을 쏟아부었다.

죽이려는 자와 버티려는 자.

잠시 대치하던 그 승부는,

삐이이이이이―!

“……크륵!”

세 번째 저주 여파로 결정이 났다. 케플린의 눈, 코, 입, 귀에서 핏물이 터져 나왔다.

저항하는 기운이 빠르게 옅어진다. 그 모습에 도네콜린트는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이겼다!’

마녀의 목걸이가 있는 한, 칼바람의 저주는 자신의 편이었다. 처음부터 질 수 없는 싸움.

‘쓸만한 전리품을 얻었어.’

4성 육체는 쉽게 얻을 수 있는 재료가 아니었다. 저 육체를 가지고 해볼 수 있는 주술 실험이 얼마나 많겠는가.

서서히 쪼그라드는 케플린을 응시하며 도네콜린트가 흥분하고 있는 사이,

‘11, 12, 13…….’

난 도네콜린트의 뒤를 잡기 위해 은밀히 움직이고 있었다.

‘암살자의 걸음’이란 게 있다.

잠들어 있는 상대에게 은밀히 접근하기 위해 크룩스에서 가르친 것인데, 거북이처럼 느렸지만 은밀함에선 제법 뛰어났다.

도네콜린트와의 거리는 불과 열 걸음 정도.

내 존재는 잊은 것처럼 도네콜린트는 케플린에게만 신경을 쏟았다.

내가 저주를 버틸 수 없을 거라 판단했겠지.

사실 그게 맞긴 하다.

4성인 케플린도 버티지 못한 충격을 고작 1성 따위가 버틸 수 있을까.

‘근데 버텨진단 말이지.’

전에도 느꼈지만, 정신 방벽과 관련된 특별한 능력이 아니었다면 열 번은 더 죽었을 것이다.

지금도 이렇게 위기를 기회로 만들지 않았나.

난 단검을 슬며시 들어 올렸다.

감시자는 칼바람의 저주에 무지했기에 도네콜린트의 승리를 점쳤다.

‘그리고 감시자가 죽었을 경우.’

나와 도네콜린트의 승부에선 나의 승리를 점쳤다. 그는 내 능력에 관해 전혀 모르고 있었으니까.

물론, 기습 공격이 성공했을 때의 일이었다.

난 천천히 속으로 숫자를 세었다. 네 번째 칼바람의 노래가 터지는 타이밍을 재기 위해서다.

이미 위에서 카운팅을 여럿 해봤고, 방금 세 번째 여파에서 다시 확인했다.

으득―! 으드득!

주술 압력에 바스러지는 감시자가 보였다. 허무한 죽음. 그도 여기서 자신이 죽을 줄 몰랐는지 두 눈을 부릅뜬 채 죽어있었다.

툭.

잠시 후, 감시자의 목이 힘없이 꺾였다.

심부름꾼을 제거했다는 희열감에 도네콜린트는 클클클 이를 드러내며 웃고 있었다.

‘지금!’

내가 쥔 단검에서 새하얀 빛이 흘러나왔다.

인챈터의 능력.

“이 개새끼야!”

새하얀 빛으로 번뜩이는 단검.

다섯 걸음을 앞두고 질주한 내 기습적인 공격이 도네콜린트의 뒷덜미를 갈랐다. 아니, 가르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늙은이 주제에 반응이 엄청나게 빨랐다. 그렇다고 실패한 건 아니었다.

“커, 커억! 이, 이 버러지 같…!”

“제발 죽어 새끼야!”

뼈를 파고든 묵직한 감각.

목뼈를 분명 베고 지나갔다.

도네콜린트의 목에서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그 핏방울이 내 얼굴을 흠뻑 적셨지만, 이를 무시한 채 난 미친 듯이 단검을 휘둘렀다. 주술사에게 여유를 주면 죽는다.

붙자마자 박치기를 시도했다.

빡―!

“크억!”

워낙 변칙적인 공격이라, 도네콜린트도 피하지 못했다.

코뼈가 부러지며 휘청거렸다. 악을 지르며 나는 놈의 가슴에 단검을 찔렀다.

푹―

우측 어깨를 파고든 단검. 그리고 벼락처럼 마주한 놈의 지팡이.

지팡이가 섬뜩한 빛을 번뜩였다.

“……시ㅂ!”

번쩍―

퍽―!!!!

터져 나오는 빛에 몸은 멀찍이 날아가 벽에 처박혔다.

“끄으으으…!”

신물이 입에서 질질 흘러나왔다. 헤비급 챔피언에게 복부를 전력으로 처맞은 느낌이다. 속이 뒤집힌 것 같은 고통. 시야가 샛노랗다. 진짜 죽을 것 같았다.

“이 벌레 같은 새끼가…!”

도네콜린트의 얼굴이 악귀처럼 일그러졌다. 같잖은 것에게 죽을 뻔했다. 너무나도 화가 났다.

그는 매섭게 지팡이를 들어 올렸다. 그것도 잠시, 그는 흠칫하곤 목을 더듬거렸다.

무척 당황한 눈빛.

난 비틀비틀 일어나며 손에 잡힌 물건을 들어 올렸다.

히죽 미소를 지었지만, 고통으로 일그러진 얼굴이 어떻게 보였는지 모르겠다.

난 목걸이를 흔들었다.

이 새끼야. 내가 다 봤어.

어디 뒤져봐라.

“시팔 새끼야. 딱 18이다.”

숫자 18을 중얼거린 순간,

삐이이이이이이이―!

다섯 번째 여파가 터져 나왔다.

동시에 난 석궁을 벼락처럼 꺼내든 뒤 놈을 겨눴다.

“끄아아악!”

놈이 머리를 부여잡고 주저앉았다. 비틀거리며 방어 주술을 외치려는 찰나, 난 볼트에 기운을 담아 방아쇠를 당겼다.

퍼억―!

기운이 담긴 볼트가 도네콜린트의 목을 꿰뚫고 지나갔다. 두 눈을 부릅뜬 채 놈은 목을 부여잡고 쓰러졌다.

상대는 흑주술사.

방심하면 안 된다.

퉁―! 퉁―! 퉁―!

두 번, 세 번 그리고 네 번.

여러 발의 볼트가 도네콜린트의 머리를 파고들었다.

난 거친 숨을 토하며 벌러덩 자빠졌다.

이 정도면 됐겠지?

“헉… 헉….”

삐이이이이이이―!

쉬고 있는데, 여섯 번째 저주 여파가 몸을 휩쓸고 지나갔다.

뇌를 쥐어짜는 고통.

난 지끈거리는 두통에 인상을 찡그리며 투덜거렸다.

“진통제가 그립다.”

고통스러웠지만, 살아남았다는 안도감에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대(大)자로 누운 채 손에 들린 목걸이를 잠시 바라봤다.

칼바람의 저주를 막았던 주술 도구.

확실히 이번 전투는 운이 따라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끊어졌던 목걸이를 이어서 목에 걸어봤다. 잠시 후, 마지막으로 휘몰아치는 칼바람의 저주.

“큭!… 안 되네.”

영력으로 주술을 걸어야 효력을 발휘하는 물건 같았다. 주술을 모르는 내게는 쓸데없는 물건이었지만, 난 목걸이를 챙겼다.

이 목걸이는 오르도르의 마녀들과 적대 중인 도네콜린트를 죽인 전리품 같은 것이었다. 언제고 쓸데가 있을 것이다.

천천히 일어나려고 하는데, 중심을 잡기가 쉽지 않았다.

한쪽 발목이 부러진 것 같았다.

난 절뚝거리며 감시자의 시신에게 다가간 뒤 품을 뒤적거렸다. 붉은 병을 발견하자, 짧게 숨을 내쉬곤 내용물의 절반은 마시고, 나머지는 발목에 발랐다.

시원한 느낌과 함께 고통이 천천히 사그라드는 게 느꼈다.

회복 물약을 볼 때마다 이 물건을 현대에 가져가면 떼부자가 될 텐데 하는 망상에 빠지곤 한다.

그만큼 효과가 좋다는 뜻이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주술사가 가져온 작은 가방이 보였다.

난 감시자와 주술사의 품을 뒤져 쓸만한 물건들을 가방 안에 욱여넣은 뒤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제단을 바라보니, 문양은 다시금 황금빛을 반짝이며 주변 바람을 빨아들이고 있었다.

“십 년은 늙은 거 같아.”

서로 상잔시켜 상황을 정리하는 계획.

아슬아슬한 도박이 성공했다.

심호흡으로 잠시 마음을 가라앉힌 후 제단 앞으로 걸어갔다.

고대 문양의 본래 주인인 도네콜린트가 죽었다.

주인 없는 물건은 먼저 줍는 자가 임자다.

제단 결계를 둘러친 검은 밧줄을 잠시 바라보던 나는 성큼 밧줄을 넘어 결계 안쪽으로 들어갔다.

‘해보자.’

도네콜린트조차 보름의 준비 기간을 거친 후 결계에 진입했다고 했다. 하지만 내겐 보름이든 반년이든 시간이 있어도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이럴 땐 그저 몸을 부딪치는 방법밖에 없었다.

결계 안으로 완전히 들어온 나는 잔뜩 긴장한 얼굴로 반응을 기다렸다.

너무 무모했나?

두려움이 살짝 올라올 찰나,

번쩍―!

“……!”

제단에 새겨진 수많은 문자가 빛을 토해내더니, 내 몸을 휩쓸고 지나갔다.

따스한 느낌의 감촉이 내 몸을 부드럽게 훑고 지나간다.

최고조로 유지됐던 긴장감이 눈 녹듯이 사라졌고, 안정감이 찾아왔다.

어머니의 품에 안겨드는 심적 평온함. 이대로 곤히 자고 싶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공간 전체가 황금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큭!”

짙은 눈 부심에 난 두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돌렸다.

잠시 후, 사그라드는 빛의 물결.

흐릿해진 시야를 끔벅이며 눈을 떴을 때, 내 눈앞에 화려한 광경이 펼쳐졌다.

황금빛을 토해내는 신비로운 문양.

그 문양이 내 앞 허공에서 천천히 돌고 있었다.

‘이게 무슨 일이지?’

소설 속 도네콜린트는 결계 안에서 엄청난 환각에 빠져 며칠을 허우적댔다고 했다.

그 환각을 극복하고 고대 문양의 주인으로 인정받으면서 각성한 힘이 바로 그 유명한 ‘세이렌의 비명’이었다.

정신 환각을 펼쳐 아군끼리 창검을 휘두르게 하는 힘. 혼돈의 비명이라 불리는 각인 문양의 능력 말이다.

그런데,

‘눈앞의 문양도 환각인 건가?’

설마, 문양을 건들면 시련이 시작되는 건가?

겁이 났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난 허공에 둥둥 떠 있는 문양을 손가락 끝으로 툭 건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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