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추락한다!
“어, 어라!?”
황금빛 문양에 접촉한 순간, 문양이 손가락 끝으로 쭉 빨려 들어왔다. 문양의 빛이 몸 주변에 흘러넘쳤다. 황금빛 기류가 몸 전체에서 넘실거리다가 이내 천천히 사그라들었다.
“…끝?”
난 두 눈을 끔뻑였다.
겁을 집어먹은 것도 잠시였다. 아무런 변화가 느껴지지 않자, 몸을 요리조리 살폈다. 그러다, 달라진 점을 발견했다. 오른쪽 소매를 살짝 걷으니, 손등에 마법진을 닮은 신비로운 문신이 생겼다.
각인의 상징.
고대 문양의 주인이 된 건가?
“진짜로…?”
도네콜린트의 소설 내용과 비교하면 허무하리만큼 쉬워서 얼떨떨했다.
[하루하루 지옥 같았던 환각을 극복한 후에야 문양의 주인으로 인정받았고, 환각의 힘을 각성할 수 있었습니다.]
‘세이렌의 비명’이 어디서 기원했는지, 도네콜린트가 주군인 학살자에게 설명하는 대사가 떠올랐다.
지독한 환각을 극복했다고?
두 발을 딛고 서 있는 바닥을 확인했다.
결계 안.
난 이곳에서 따스한 포근함과 영원히 머물고 싶은 안락함을 느꼈다.
칼바람의 저주로 오염됐던 정신이 정화된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현재 내 정신 상태는 그 어느 때보다 또렷했고 맑았다.
난 손등에 그려진 고대 문양을 쓰다듬었다.
문양의 주인이 된 것 같은데, 그 과정이 소설 속 내용과 전혀 달랐다.
‘세이렌의 비명은 개뿔.’
환각 각성은커녕 환각 비슷한 능력도 펼칠 수 없었다.
한 가지 가정이 떠올랐다.
‘주인에 따라 문양의 능력이 달라지는 건가?’
가능성이 있다.
고대 문양은 주인을 매개체로 힘을 소환했으니까.
모든 사람의 목소리가 다르듯, 고대 문양도 그 주인에 따라 능력이 다를지 모른다.
도네콜린트의 문양이 환각, 세이렌의 비명을 불러일으켰다면,
‘내 능력은 뭐지?’
문양으로 각인된 지식은 능력에 대한 설명 대신 사용 방법만 담겨 있었다.
일단 나가서 뭐든 알아볼 생각이었는데, 갑자기 바닥이 출렁거렸다.
쿠웅―!
“……!”
무슨 일이지?
고개를 돌린 순간, 밧줄이 허공에 떠서 꾸물거리기 시작했다.
도네콜린트의 주술 밧줄.
검은 밧줄은 살아있는 뱀처럼 사납게 움직였는데, 기괴한 소리를 토해냈다.
으으으으으으으으―!
“무, 무섭잖아. 인마!”
오싹한 울음소리.
마치 주인의 죽음을 슬퍼하는 것처럼 보였다.
제단 전체를 둘러친 밧줄은 두껍고 길었다. 밧줄에서 검은 기류가 흘러나왔다.
불길한 기운.
기운이 바닥을 자극한 순간, 주변 지반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빌어먹을! 설마!?”
주인인 도네콜린트가 죽자, 밧줄에 담겨 있던 영력이 통제를 잃고 폭주를 시작한 것 같았다.
밧줄에는 도네콜린트가 보름 동안 쏟아부은 어마어마한 영력이 담겨 있었다.
‘설마 무너지겠어?’
그런데 무너지면 생매장이다.
드디어 카멜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자유를 만끽할 타이밍인데, 변수가 발생했다.
탈출 후 ‘프리덤(Freedom)!’을 외치려고 했던 내 계획에 큰 차질이 생긴 것이다.
난 처음 들어왔던 구멍으로 미친 듯이 달렸다.
콰자작―! 콰자자자자작!
“으아악!!!”
발을 딛자마자 운동장 크기의 바닥이 쩌적 갈라지며 무너져 내렸다.
판타지 게임에서 신나게 써대던 어스퀘이크 지진 마법이 딱 이랬다. 내가 쓸 땐 신났는데, 당해보니 아주 좆같았다.
“비, 빌어먹을!!!”
갈라진 바닥 틈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린 나는 아래를 내려다봤다.
틈새는 암흑 세상이었다. 끝도 없는 나락행을 꿈꾸게 하는 섬뜩한 비주얼.
떨어지면 무조건 뒈진다.
다급히 기어 올라와 낭패 어린 표정으로 제단 쪽으로 다시 돌아와야 했다.
처음 왔던 구멍 쪽 바닥이 모조리 무너져서 접근할 수가 없었다.
그럼 반대편뿐인데.
뒤쪽을 돌아보며 난 헛웃음을 흘렸다. 수많은 구멍이 눈앞에 펼쳐졌는데, 어느 구멍이 바깥으로 통하는지 알 길이 없었다.
문양이 사라지면서 흘러 들어오던 검은 연기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하나를 골라야 하는 상황.
“로또보다 확률이 높긴 하네.”
이딴 생각이나 하고 있다니, 충격으로 머리가 돌아버린 것 같았다.
일단 바닥이 무너지기 전에 구멍 쪽으로 내달렸다.
콰콰쾅―!
“……!”
제단이 땅속으로 삼켜졌고, 감시자와 도네콜린트의 시신도 바닥의 시커먼 공간으로 빨려 들어갔다.
바닥이 빠르게 무너져 내렸다.
긴장감에 몸이 굳자, 난 두 뺨을 거칠게 때렸다.
다행이라면 몸과 달리 머리는 차갑게 돌아간다는 것.
바깥으로 통하는 구멍을 어떻게 찾지?
일단 새로 얻은 능력은 지금 상황에서 별 쓸모가 없어 보였다.
아직 어떤 능력인지조차 파악하지 못했거든.
수많은 구멍을 암담하게 바라보던 그때, 좋은 방법이 벼락같이 떠올랐다.
난 다급히 구멍들 주변을 뛰어다니며 손가락을 문질렀다.
“제, 제발!”
간절한 외침에 답을 한 것일까.
검지에 때처럼 묻은 재 가루를 발견한 순간, 난 고민도 없이 그 구멍 안으로 몸을 던진 후 내달리기 시작했다.
검은 연기가 더는 들어오진 않지만, 흘러 들어온 흔적을 역으로 추적해서 길을 찾은 것이다.
쿠웅―!
잠시 후, 공간이 크게 흔들리더니, 시야가 어둠으로 푹 꺼졌다. 중심부가 무너지면서 흘러 들어오던 빛마저 차단된 것 같았다.
암흑이 펼쳐졌지만, 난 멈추지 않았다. 언제 무너져 내릴지 모르는 공간에서 시간을 허비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짓은 없다.
그대로 오른손 팔을 앞으로 뻗었다.
파아앗―!
황금빛 물결.
손등의 문양에서 황금빛이 흘러나와 주변을 빛으로 물들였다.
우웅. 우웅. 우웅.
일정한 심장 박동처럼 문양은 빛을 깜빡이며 빛을 토해냈다. 이 빛에 어떤 능력이 담겨 있는지 모르겠지만, 시야 확보용으로 쓸만했다.
후각에 집중하며 매캐한 냄새를 쫓아 움직였다.
어둠 속 공포, 공간이 언제 무너져 내릴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몰려왔지만, 난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움직였다.
이것도 정신 방벽 때문인가?
묘한 괴리감이 느껴졌는데, 상황이 상황인지라 무시했다.
그것조차 생존 확률을 높이는 일이라 판단했으니까.
“어디야! 어디냐고!?”
바닥을 타고 올라오는 진동이 심상치 않았다. 중심부가 무너지면서 주변 지반도 무너지려는 것 같았다.
난 이를 악물고 달렸다.
“비, 빛!”
잠시 후, 개미굴처럼 뚫린 구멍 중에 빛의 흔적을 발견했다. 옅은 빛이 흘러 들어오는 곳.
밑바닥과 연결된 구멍이었다.
문양의 빛을 해제하자, 구멍 밑에 더욱 뚜렷한 빛이 반짝였다.
바깥으로 통하는 입구.
구원의 빛이 분명했다.
난 그대로 구멍 아래로 몸을 날렸다. 미끄럼틀을 타듯 난 쭉쭉 미끄러졌다.
쩌저저저저저적―
근처 외벽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설마, 돌산 전체가 무너지려는 건가?
더 빨리!
바깥 구멍에 다다르자, 차가운 물기가 얼굴 전체를 때렸다.
바깥의 폭우, 빗방울이다!
순간 영화 쇼생크 탈출이 생각났다. 감옥을 탈출한 주인공이 비를 맞으며 하늘을 향해 자유를 표현하던 그 모습.
기쁜 나머지 절로 그 단어가 튀어나왔다.
그래, 프리덤!
환희에 찬 표정으로 바깥 구멍을 향해 미끄러지듯 빠져나왔다.
동시에 와르르 무너지는 구멍.
돌산 전체가 무너지는 압도적인 광경이 펼쳐졌다.
가까스로 탈출에 성공하며 살아남았다.
하지만, 난 프리덤을 외치지 못했다.
그저,
“아아아아아악―!!!”
새된 비명만 질러댔다.
아래쪽이 공허하다.
바닥에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고, 난 그대로 중력의 이끌림에 따라 밑으로 처박혔다.
추락한다!
내 표정은 전보다 더욱 핼쑥해졌다. 밑을 보니 협곡 사이로 넘치는 거센 강물이 보였다. 폭우로 물이 엄청나게 불었는지, 물살에 회오리가 보일 만큼 섬뜩했다. 휩쓸린 순간 하늘도 못 보고 저세상 갈 것 같았다.
이 상황에 내가 할 수 있는 건 두 가지뿐이었다.
허공에서 발버둥 치는 것.
그리고,
“시이바아알!!!!!!!!!”
욕설을 내뱉으며 빠지는 것.
풍덩―!
난 그대로 폭우가 퍼붓는 물살 한가운데로 빨려 들어갔다.
* * *
초등학교 시절 수영을 배운 적이 있다. 부모님이 다른 건 몰라도 수영은 꼭 배워야 한다고 강제로 보냈기 때문이다.
물놀이를 할 때 익사를 예방하기 위해서라나?
어쨌든 물질에 재능이 있었는지, 내가 다녔던 초등학교 돌고래 반에서 난 일등을 단 한 번도 놓친 적이 없었다.
그래서 별명이 압구정 돌고래!
그런 내가,
“어푸! 아악! 살려줘!”
비명과 함께 물살을 따라 허우적허우적 떠내려갔다.
수영?
그딴 건 잔잔히 흐르는 물가에서나 먹히는 거고, 여긴 눈조차 뜨기 힘든 미친 물살이 흐르는 지역이었다.
진짜 돌고래가 와도 물살의 압력에 졸도할 수 있는 사지란 뜻이다.
꼬르르르륵―
그 흔한 개헤엄도 하지 못한 채, 난 다시 물살 아래로 쭉 빨려 들어갔다. 마치 소용돌이에 휩쓸린 지푸라기 같았다. 세상이 빙글빙글 돌았다.
퍽―!
“끄룩!”
물살에 휩쓸려 단단한 바위에 머리를 처박자, 붉은 핏물이 주변에 퍼져나갔다.
이마가 찢어진 것 같았다.
이대로 시간이 흐르면 다져진 고기가 될 것 같았다.
그나마 다행인 건, 정신이 또렷하다는 것.
난 숨을 꾹 참았다.
여기서 물을 삼키는 순간, 멘탈이 나갈 것이다.
그럼 죽는다.
‘잡을 것! 잡을 것!!’
빙글빙글 도는 시야에서 난 양손을 뻗은 채 걸리는 모든 것을 붙잡으려고 했다.
일단 중심부터 잡아야 했다.
꽈악―
무언가 잡혔다. 갈대를 닮은 잡풀이었는데, 바위틈에 박혀 단단히 고정되어 있었다.
그대로 팔을 당겼다. 다행히 잡풀이 버텨줬다.
“푸아!”
참았던 숨을 토해내며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숨 쉬는 게 이렇게 감사했던 적이 없다.
숨 막혀 뒈질 뻔했다.
가죽 가방과 단검 두 개.
다행히 소지품은 떠내려가지 않았다. 주변을 살핀 순간 욕설이 흘러나왔다.
가파른 절벽을 사이에 낀 협곡 형태였다.
올라갈 수 있을까?
폭우로 바위 표면이 너무 미끄럽다. 게다가 붙잡고 올라갈 틈도 보이지 않았다.
잠시 고민하고 있을 때,
“……!”
물살을 타고 내 쪽으로 짓쳐오는 물체가 하나 있었다.
거대한 통나무.
통나무는 돌진하는 멧돼지마냥 순식간에 쇄도해왔다.
못 피한다.
“이런 시…!”
퍼억―!
“커억!”
순간 의식이 날아갔다가 돌아왔다. 왼손을 방패 삼아 통나무와 충돌했는데, 어깨가 부러진 것 같았다. 정신을 차려보니, 통나무와 함께 물살에 다시 휩쓸렸다.
고민은 짧았다.
난 통나무 위로 단검을 박아 넣었다. 기운이 실린 단검은 손잡이만 남기고 깊숙이 들어갔다.
벌레처럼 통나무 위로 기어 올라간 뒤 매미처럼 착 달라붙었다.
“끄아아악!”
부러진 어깨에서 지독한 고통이 느껴졌다. 그럼에도 난 걸레짝이 된 윗옷을 찢어낸 뒤 단검 손잡이와 손목을 한 몸처럼 칭칭 감았다. 그리고 남은 단검은 바지춤 사이로 찔러 넣었다.
그때부터 버티기에 들어갔다.
쏴아아아아아아―!!!!
“이익!”
폭우와 비바람으로 중심 잡기가 쉽지 않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밤이 찾아오며 시야조차 어두워지는 상황.
난 두 눈을 질끈 감은 채 구명줄처럼 통나무만 붙잡고 늘어졌다.
얼마나 흘렀을까.
폭우가 점차 약해지더니 뚝 멈췄다.
물살의 세기도 약해졌다.
온몸의 힘을 모조리 썼는지, 기력이 하나도 없었다. 두 눈을 가까스로 뜬 후 주변을 살피니, 바위가 사라지고 초록 숲이 펼쳐졌다.
퉁―
그중 얕은 물가에 도달하며 통나무가 부드럽게 유영하며 천천히 흐르기 시작했다.
“……이 개 같은 소설.”
살았다는 안도감도 잠시, 붙잡고 있던 의식이 날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