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흘러 흘러 라웁 숲
흠칫!
움찔하며 의식이 돌아왔다.
누군가가 나를 흔들거나 깨운 것은 아니었다. 누군가의 접근으로 깨어났다.
정확히 누구‘들’이었다.
내 기감 안에 잡힌 존재들.
암살자의 기감은 기절한 나를 깨울 만큼 예민하고 날카로웠다. 아니, 이 몸뚱이의 기감이 특별한 건가?
그들은 정확히 나를 태운 통나무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우거진 숲속이라 아직은 나를 발견하지 못한 것 같았다.
“크…….”
몸을 움직인 순간 지독한 고통이 몰려왔다.
아, 어깨가 부러졌지?
게다가 추위로 몸이 오들오들 떨렸다.
폭우와 강물에 오랜 시간 노출됐더니 컨디션이 최악이었다.
신음을 삼키며 검 자루에 묶었던 헝겊을 풀었는데 손이 마비된 듯 움직이지 않았다. 온통 멍투성이에, 오랫동안 피가 통하지 않아 감각이 없었다.
‘어떡하지?’
몬스터였다면 무리해서라도 움직였을 것이다. 하지만 암살자의 경험으로 미루어 볼 때 이 발소리는 인간의 것이었다.
도움을 받을 수 있을까?
위험한 놈들?
생각해보니 굳이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이곳은 다른 곳도 아닌 악당들의 세상. 인간들이 더 무서운 곳이었으니까.
최소한의 대비는 필요했다.
‘포션이….’
주술사의 가방은 험난한 환경 속에서도 멀쩡했다. 게다가 방수 기능까지.
가방에 여러 가지 주술이 걸린 건가? 의외의 득템이었다.
다행히 포션 한 병이 있었다.
아낄 상황이 아니라서 포션을 쭉 들이켰다. 따뜻한 기운이 몸 안에 퍼지며 나른한 기분이 들었다. 몸의 떨림도 멈췄다.
다만, 상태가 심각해서 회복하려면 시간이 다소 걸릴 것 같았다.
물속에 가방을 숨긴 후 기절한 척 통나무 위에 엎어졌다.
양손에 단검을 쥔 후 물가 밑으로 안 보이게 숨겼다. 언제든 출수할 준비를 마치고 난 그들을 기다렸다.
잠시 후,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근처에서 외침이 들려왔다.
“두목! 여기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 몇 놈인데.”
“한 명입니다!”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대략 열 명 정도? 생각보다 숫자가 많았다.
그나저나 두목? 어째 호칭이 싸한데.
“통나무랑 같이 흘러들어 온 모양입니다. 어떡할까요?”
“뭘 어떡해? 살펴야지. 들어가.”
첨벙첨벙 물소리가 들렸다.
허벅지까지 차오른 물을 헤집고 다가오는 인기척은 두 명.
살기가 느껴지지 않자, 일단 기절한 척했다. 내가 또 기절한 척에는 일가견이 있거든.
“어때?”
“대가리에 구멍이 났는데요? 피를 제법 많이 흘렸습니다.”
“죽었어?”
“숨은 붙어 있습니다. 죽일까요?”
“바깥소식을 물어보고 죽여도 늦지 않으니 일단 데려와.”
이 빌어먹을 세상은 툭하면 죽이고 시작하는 모양이다.
협곡에서 어디까지 흘러들어 온 거야?
정신이 반쯤 나간 상태에서 버틴 거라, 어디로 얼마나 흘러갔는지 가늠이 안 됐다.
아, 나도 물어보면 되는구나.
덥석―
우악스러운 손길이 내 목덜미를 움켜잡았다. 물에 얼굴을 처박았는데, 내가 물을 먹든 말든 상관없다는 모습이다.
난 고민 없이 움직였다.
단검으로 둘의 허벅지를 벼락같이 찔렀다.
“끄아악!”
비명을 지르는 두 놈을 발로 차서 넘어뜨렸다. 허우적거리며 물을 처먹고 있었는데, 물맛 좀 보고 있어라.
난 소란스러운 바깥을 응시했다.
내 쪽을 향해 무기를 꺼내든 사내들.
머릿수는 많았지만, 두목이라 불리는 놈 빼곤 별 볼 일 없었다. 마나를 익힌 놈은 저 두목 말곤 없다는 뜻이고, 두목의 수준도 1성에 불과했다.
참고로 난 같은 등급한테 안 진다. 내가 가진 능력이 꽤 많거든.
“딱 봐도 어떤 놈들인지 알겠네.”
저런 분위기를 풍기는 놈들을 난 질리도록 만나본 적이 있었다.
라웁 숲을 우회하며 마주쳤던 도적놈 새끼들.
아직도 그 웃음소리들이 환청으로 들렸는데, 생각만 해도 이가 갈리는 놈들이었지.
“무, 뭐야!?”
“저, 저, 저……!”
내가 두 명을 단숨에 제압하며 일어나자, 두목은 표정을 구기곤 나를 가리켰다. 그가 사납게 ‘죽여!’를 외치려는 순간 내 손이 벼락처럼 움직였다.
“……헉!”
두목의 목으로 단검 하나가 스쳐 지나갔다.
피부가 쭉 베이며 주르륵 흘러나오는 핏물.
하지만 두목은 베인 상처를 만질 생각도, 화를 낼 생각도 하지 못했다. 방금 스쳐 갔던 칼날에서 유형화된 빛을 봤기 때문이다.
‘오, 오라!?’
도적질에서 살아남으려면 무조건 피해야 하는 상대가 있다.
바로 무기에 오라를 싣는 괴물들. 그런데 눈앞의 상대는 오라를 실어 집어 던졌다. 저 원거리 기술은 천재지변이라 불리는 괴물만 가능한 기술이었다.
5성.
피하는 게 아니라 눈조차 마주치면 안 되는 재앙 같은 존재들.
두목은 마른침을 삼키곤 가리켰던 손가락을 슬그머니 내렸다.
그 모습에 수하들이 울분에 찬 표정을 지었다.
“두목! 고작 한 명입니다!”
“형제들이 당했습니다! 복수해야 합니다!”
“복수를!”
“우어!”
‘닥쳐, 이 미친 새끼들아!’
두목은 핼쑥한 표정으로 뒤를 돌아봤는데, 부두목이 수하들의 기세를 받고 당당하게 앞으로 나왔다.
“안 그래도 괴상한 장소에 갇혀서 짜증 났는데 이참에 살풀이 좀 합시다! 놈을 잡아다 사지를 뜯어서… 커억!”
두목은 막 외치던 부두목의 성대를 손날로 후려쳤다. 컥컥대며 쓰러지는 녀석을 짓밟으며 눈치를 보고 있는데, 뒤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 경고가 우스웠나?”
“…그게!”
“다 죽이기 귀찮은데.”
단검을 슬며시 들어 올리자, 두목이 움츠리며 물러났다. 그 모습에 난 미소를 지으며 칼날에 기운을 넣었다.
신력, 인챈터의 능력.
고작 1성 기운이라 지금은 속성 없이 관통력만 증가시키는 수준이지만, 외관으로 드러나는 모습은 무지한 자들을 속이기 충분했다.
우웅―!
“……!”
단검이 시퍼렇게 빛나자, 남은 이들도 상황의 심각성을 인지했다. 눈앞의 존재가 감당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두목을 시작으로 그들은 주춤주춤 물러나기 시작했다.
“도망가려고?”
“……!”
“도망가는 게 빠를까? 아니면 몰살당하는 게 빠를까?”
“아, 아닙니다!”
“내가 한번 맞혀볼까? 난 이미 답을 알고 있거든.”
답이 뭐냐고?
당연히 도망가는 게 훨씬 빠르지.
숲 사이로 뿔뿔이 흩어지면 내가 어떻게 잡아.
그런데도 내가 이리 여유를 부리는 건, 줄곧 살아남으면서 간땡이가 부은 것도 있지만, 우선 저들이 내 능력조차 못 알아보는 약자였기 때문이다.
수준을 파악하고 뻥카를 쳤는데, 제대로 먹힌 것 같았다.
“사, 살려주십쇼!”
눈치 빠른 두목이 넙죽 엎드리며 빌자, 남은 도적들도 넙죽 따라 엎드렸다.
그래, 이렇게 쉽게 가는 날도 있어야지.
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회복 포션을 마시고 쉬었더니 상태가 살짝 호전됐다. 그래도 전투는 되도록 피하는 게 좋았다.
그 사이, 허벅지를 찔렸던 두 놈이 버둥대며 물가로 올라왔다.
덜덜 떨며 고통을 호소하는 모습.
안타깝게 보이기도 했는데, 일단 저들은 도적이었다.
난 도적이라면 이가 갈리는 사람이라.
잠시 후, 난 두목을 향해 단검을 까딱이며 말했다.
“살려면 성의를 보여야지.”
“…네?”
“몸에 걸친 것들 모조리 벗어. 팬티까지.”
두목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시발, 저 실력에 나 같은 도적을 턴다고?’
지독한 새끼한테 걸린 것 같았다.
하지만 상대가 상대인지라,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어물쩍거리는 수하들을 향해 다급히 소리를 지른 뒤 옷을 휙휙 벗어 던지기 시작했다.
옷을 벗어 던지는 쇼를 구경하며 난 물가 바깥으로 나왔다.
“아우 추워.”
바위에 걸터앉아 물기를 털었다. 어깨가 욱신거리고, 손끝이 떨렸지만, 최대한 여유롭게 행동했다.
약한 모습을 보인 순간, 돌변하는 놈들이니 방심은 금물이었다.
“…옷가지들은 어디에다 놓을까요?”
“내 앞에 놓고, 너희들은 저쪽에서 무릎 꿇고 있어.”
두목을 시작으로 도적들이 물건들을 좌판처럼 깔아놓고 한쪽에 나란히 무릎을 꿇고 앉았다.
‘…실수했나?’
사내새끼들의 알몸을 보고 있자니, 눈이 썩을 것 같았다.
놈들을 물가로 쫓아버린 뒤 머리만 내놓게 했다.
머리만 내민 놈들을 잠시 바라본 뒤 소지품을 하나하나 뒤적거렸다. 그러다 딱 필요한 물건 하나를 발견했다.
‘득템!’
포션으로 보이는 병을 낚아챘다.
색이 탁한 것이 품질은 낮아 보였지만, 어깨가 부러진 상황에선 이것도 감지덕지했다.
그 외 물건은 낡고 닳아서 쓸모없어 보였다. 그러다, 눈에 띄는 물건들을 발견했다.
보랏빛을 띤 물병.
그 수가 제법 많았다.
난 그 옆에 세트로 놓인 나무 대롱을 집어 들곤 잠시 살폈다. 손가락 길이의 쇠침이 안에 들어있었는데, 침 끝부분이 보랏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병에 든 보랏빛 액체는 아무래도 독인 것 같았다. 이를 알아볼 방법은 아주 간단했다.
난 병뚜껑을 딴 뒤 도적들이 묻혀있는 물가에 집어 던졌다.
처음에 뭔지 모르고 멀뚱히 날아오는 병을 바라보고 있던 도적들은 곧 병을 확인하곤 시퍼렇게 질렸다.
“베텔의 독!”
“비, 비켜! 이 새끼들아!”
“나가! 얼른 나가라고!”
메뚜기 떼가 따로 없었다.
병이 떨어진 곳이 보랏빛으로 물들기 무섭게 도적들이 펄쩍펄쩍 뛰며 물가에서 우르르 튀어나왔다. 마치 접촉하면 죽을 것처럼 말이다.
예상대로 독이 맞았다.
근데 특이한 점이 있었다.
수하들은 모조리 튀어나왔는데, 두목 홀로 물가에서 머리를 내민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나 잘했죠?’ 이딴 표정을 짓고 있는데 죽여버릴까?
난 물가 근처에서 헥헥대는 도적 하나를 붙잡았다. 부두목이라고 했던 거 같은데? 그는 나를 보자마자 새하얗게 질린 채 넙죽 엎드렸다.
“사, 살려주십시오!”
뻥카가 먹힌 건 좋은데, 너무 강력하게 먹힌 것 같았다. 하긴 5성급 존재는 도적이 아니라 모두에게 공포의 대상이었으니, 앞선 반응이 이해가 갔다.
다만, 난 5성이 아니라는 거.
“이건 무슨 독이지?”
“베, 베텔의 독입니다. 숲 중심부에 서식하는 독초에서 추출한 독인데, 중독되는 순간 심장 박동이 서서히 느려집니다. 중독 정도에 따라 심하면 심장이 마비되어 죽을 수도 있습니다.”
“침에 독을 발라 대롱으로 쏘는 건가.”
“그, 그렇습니다!”
뭐냐, 이 고블린 새끼들은.
독침은 고블린의 전유물 아니었어?
이 무기, 숲에서 쓰면 상당히 위협적일 것 같은데.
“해독제는?”
“없습니다.”
“없어?”
내가 미간을 좁히자, 도적은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다시 말했다.
“마, 마나를 사용하는 존재에겐 통하지 않습니다! 회복 물약만 마셔도 해독이 되는 터라 해독제가 굳이 필요 없습니다.”
그래서 저 두목 놈은 저 자리에 계속 머문 거였군. 마나를 익혔으니, 베텔의 독에 당할 리 없을 테니까.
저 새끼, 은근히 이기적이네.
나오려면 같이 나와야지.
아, 그러고 보니 이 장소가 어딘지 묻지 않았다. 가장 중요한 정보인데 도적들의 출몰로 잠깐 정신이 없었다.
숲이라고 했다.
넬리토리 협곡에서 어디까지 흘러들어 온 것이기에 도적들이 머무는 곳까지 온 것일까.
내 물음에,
“라웁 숲입니다!”
“……뭐?”
“라, 라웁 숲…….”
“시발, 뭐라고?”
“제발 살려주십시오!!!”
순간 내 머릿속이 멍해졌다.
라웁 숲?
내가 아는 그 미치광이 마법사, 도미닉 후아튼이 머문다는 그 공포의 숲?
그동안의 고생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크룩스의 감시에서 벗어나기 위해 카멜의 아가리에 머리를 들이밀고, 또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해 개고생을 하며 협곡 꼭대기에서 줄 없는 번지 점프까지 했는데, 그 도착지가 라웁 숲이라고?
“이런 시발….”
오늘도 욕은 참을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갑자기 지독한 불안감이 몰려왔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