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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에게서 살아남는 법-27화 (27/130)

27화 고대 문양의 능력

푸욱―

신력이 깃든 단검은 키메라의 얇은 껍질을 가볍게 꿰뚫었다.

정신 계열 쪽 키메라는 물리 방어력이 약했는데, 난 이 약점을 철저히 파고들었다.

“히익!”

키메라가 죽자, 잠들어 있던 도적들이 발작하며 일어났다. 악몽을 꾸고 일어난 것처럼 보였는데, 난 무시한 채 생체 마석을 채취하고 자리를 떴다.

‘열 마리.’

미끼를 문 키메라만 기습했기에 손쉽게 사냥할 수 있었다.

붉은 보석을 가방 안에 넣고 다음 사냥감을 물색하고 있는데, 달라진 분위기에 잠시 멈칫했다.

쉴 새 없이 터져 나오던 비명이 멎었고, 사방을 메우던 괴성도 사라졌다.

아니, 멀어지고 있다.

‘키메라들이 물러나고 있다.’

수거 작업을 마무리하고 복귀 명령이 떨어진 것이 분명했다.

주변에 보이는 키메라들이 한 방향으로 움직이는 게 보인다.

붙잡힌 도적들을 끌고 마법진 바깥으로 나간다는 뜻인데.

‘어떻게 나가는 거지?’

의문이 들자, 곧장 거대 키메라들의 흔적을 쫓아 움직였다.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해볼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이다.

흔적이 커서 추적하는 데는 어려움이 없었다.

키메라들의 흔적이 대부분 숲 바깥으로 이어져 있자, 더는 눈치 보지 않고 숲을 전력으로 가로질렀다.

잠시 후, 숲을 지나 흐르는 물가를 건넜을 때, 나는 잠시 멈춰선 채 인상을 구겼다.

‘흔적이 끊겼어.’

칼로 베인 것처럼 흔적이 잘린 듯 사라졌다.

‘마법이라는 건가?’

남은 흔적을 자세히 훑어봤지만, 이어진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마치 허공 속에 사라진 것처럼 보였다.

마법의 ‘마’ 자도 모르는 내가 마법진을 이해할 수 있을 리 없다.

우선 이 근처에 숨어 지켜볼 요량으로 발걸음을 옮기려는데,

“……!”

옆쪽으로 한 발을 내딛는 순간, 풍경이 비틀리면서 다른 공간으로 떨어졌다.

마법진의 경계를 밟으면 생기는 현상. 주변 다른 곳으로 이동된 모양이었다.

그런데,

“이런 시발……!”

시야가 바뀐 순간, 수많은 팔이 내게 쏟아졌다.

수십, 수백에 달하는 인간들의 팔이다.

뭐야, 이것들은?

다급히 단검을 휘둘렀지만, 베는 것보다 짓쳐 오는 게 더 많았다.

팔들은 내 팔다리를 붙잡고 확 당기더니, 목과 허리를 매섭게 끌어안았다. 난 버둥거리며 발악했다.

“크아아악!”

전력을 다했지만, 뿌리치는 건 불가능. 동시에 흐물거리는 젤리 벽이 나를 반겼다.

위를 봐도 온통 젤리 벽이다.

인간 팔들을 달고 다니는 거대 슬라임.

망했다.

이 생각이 들었을 때, 슬라임이 나를 집어삼켰다.

퐁―!

삼켜진 순간 수영장에 풍덩 빠진 부유감이 몰려왔다. 허공에 둥둥 떠다니는 느낌인데, 문제는 숨을 쉬는 것도 수영장이랑 똑같았다.

숨이 쉬어지지 않는다.

“크, 크룩!”

걸쭉한 액체가 목구멍을 타고 넘어왔다. 비위가 상할 정도로 그 맛이 역했다.

문제는 맛이 아니라 액체를 삼킬수록 몸이 마비된다는 것이었다.

악을 쓰며 허우적거렸지만, 잡히는 건 함께 떠다니는 도적들뿐이었다.

순간,

“……!”

뒤룩뒤룩 움직이는 도적들의 눈동자와 마주쳤다. 의식은 있지만, 몸이 굳어 있는 상태.

그때 깨달았다.

‘최악이다!’

이대로 도미닉과 만나면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된다.

마비된 채 실험용 쥐처럼 뒈지겠지.

지독한 위기감이 몰려왔다.

감각이 사라지는 순간까지 난 살기 위해 미친 듯이 허우적거렸다.

그때였다.

내 손등에 새겨진 문양을 본 것이.

고대 문양.

난 두 눈을 질끈 감고 문양의 빛을 소환했다.

내가 가진 유일한 힘이자, 지금 내가 이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유일한 발악.

목적을 가지고 펼친 것이 아니었다. 그저 생존 본능에 가까운 행동.

우우우우우웅―!!!

손등이 황금빛으로 물든 순간, 내 몸을 중심으로 끈적이는 액체가 소용돌이쳤다.

황금빛 파동.

빛의 물결은 곧 슬라임 몸속을 휘젓기 시작했다. 곧 거대 슬라임의 몸이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꿀렁―!

슬라임의 몸체가 빛과 함께 크게 꿀렁거렸다.

느릿느릿 움직이던 거대 슬라임.

빛에 노출된 순간 움찔움찔하더니 이내 거대한 몸체를 고통스레 비꼬기 시작했다.

팔 전체가 바들바들 떨며 경련을 일으켰는데, 지독한 고통을 온몸으로 표현하는 것 같았다.

크에에에엑!!!!

괴성과 함께 슬라임의 몸체가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젤리 벽이 허물어지며 삼켰던 모든 것들을 게워냈다.

걸쭉한 액체와 쏟아져 나오는 인간들.

“우엑!!!!”

그중에는 나도 있었다.

바닥에 처박힌 나는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몸을 배배 꼬았다. 의식은 있지만, 마비가 풀리지 않아 움직이기가 쉽지 않았다.

서서히 돌아오는 감각.

이대로 시간이 지나면 마비가 풀릴 것이다.

제발, 이대로만 가자.

키아아아악!

“…….”

어림도 없다는 듯, 검은 그림자가 강한 돌풍과 함께 내 위를 덮쳤다.

허공 위의 검은 그림자.

날개 달린 거대 뱀이었는데, 놈은 바닥에 너부러진 나와 눈이 마주치자, 내 몸의 냄새를 킁킁 맡기 시작했다.

슬라임 체액 덕에 삼킬지 말지를 고민하는 모습인데, 간담이 서늘했다.

끔찍하다 시발.

삼켜지기 전에 붐(Boom)을 터트리고 같이 죽어?

하지만 내 생존 본능은 무척이나 강력해서, 그딴 짓은 절대 불가능했다.

어떻게든 발악하려고 두 주먹을 부르르 움켜쥐고 있는데, 옆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시선을 돌리니, 불과 세 걸음 거리, 인상 더러운 중년 도적 하나가 마네킹처럼 굳은 채 날 보며 입을 놀리고 있었다.

상처투성이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뭐라 중얼거리고 있는데, 뭐라는 거야?

비…… 빛?

동시에 눈동자로 내 손등을 다급히 가리킨다.

아, 멍청하게 이걸 잊고 있었다.

워낙 경황이 없어서 생각도 못 하고 있었다.

설마, 이 빛이 지금 상황을 만든 건가?

번쩍―!

손등에서 황금빛이 터져 나왔다. 이것도 마나를 소비했기에 전보다 그 빛이 옅었지만,

끼아아아악―!

키메라 뱀을 날려 보내기는 충분했다. 빛에 노출된 순간, 몸을 배배 꼬던 뱀이 황급히 몸을 날려 하늘로 솟구쳤다.

그러곤 숲 너머로 사라져 버렸다.

난 손등에서 흘러나오는 황금빛 마법진을 응시하며 두 눈을 끔뻑였다.

……아무래도 이거.

고대 문양의 능력을 찾은 것 같았다.

부스슥― 부스슥―

‘…설마, 또냐?’

넝쿨 흔들리는 소리에 시선을 돌리니, 또 다른 키메라들이 입에 침을 흘리며 다가왔다.

시발, 여기가 무슨 동네 맛집인 줄 아나.

도적과 나는 시선을 마주쳤고, 도적은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난 조용히 손등을 들어 올렸다.

* * *

태풍이 몰아치는 듯한 밤이 지나갔다.

주변은 이제 조용했다. 키메라들의 흔적이 없는 것으로 봐선 수거 작업이 마무리된 모양.

“으윽!”

마비가 풀렸다.

너부러진 사람 중에 내가 가장 먼저 풀렸는데, 아무래도 문양의 빛과 관련되어있는 것 같았다.

왜냐면, 나와 가장 가까이 있던 도적이 그다음으로 몸을 배배 꼬며 움직이기 시작했으니까.

“우웩―!”

나와 도적은 사이좋게 낮에 먹었던 음식물을 토해냈다.

신물을 뱉어내며 구역질 나던 것들을 모조리 게워내자, 정신이 어느 정도 돌아왔다.

“……시부랄, 까나리 액젓을 통으로 퍼마신 것 같네.”

마법진 경계를 밟는 바람에 저세상 갈 뻔했다. 그것도 슬라임 배 속에 잡혀서 말이다.

고개를 탈탈 털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속은 아직도 더부룩했는데, 그것 말곤 몸에 큰 이상은 없는 것 같았다.

주변을 둘러보니, 바닥에 흐물흐물 녹아버린 거대 슬라임이 눈에 들어왔다.

날 붙잡았던 팔들은 기능을 멈춘 채 무덤처럼 박혀 있었는데, 그 광경이 참으로 그로테스크했다.

슬라임의 사체를 살폈는데, 죽은 이유는 정확히 알기 힘들었다. 분명 고대 문양의 능력과 관련이 있을 텐데.

문양이 키메라와 상극인 기운을 담고 있는 건가?

‘천천히 알아보면 되겠지.’

또 다른 키메라와 마주한다면 더 자세히 알아보기로 했다.

“아, 챙길 건 챙겨야지.”

단검을 빼 들고 슬라임의 시체를 뒤적거렸다. 잠시 후 젤리 조각에서 생체 마석을 뽑아냈다.

붉은 보석 형태로 존재하는 줄 알았는데, 거대 슬라임의 것은 보랏빛을 띠고 있었다.

흘러나오는 기운을 보니, 붉은 마석보다 상등품 느낌이 났다.

마석을 가방에 챙기고 옆에서 토하고 있는 도적을 살폈다.

체액에 중독되어 마비된 도적들은 스무 명 정도 됐는데, 마비가 풀린 이는 이 도적뿐이었다.

근데 이자의 외형이 눈에 띄었다.

‘한쪽 팔이 없네?’

상체가 드러나 있었는데, 눈살이 찌푸려질 정도로 흉터가 많았다.

잘린 왼팔은 가슴 근처까지 아물어 있어서, 당시에 이 상처를 입고 어찌 살아남았는지 신기할 정도였다.

상처만 봐도 인생이 얼마나 치열했는지 알 것 같았다.

도둑치곤 빡세게 살았네.

‘그나저나 어떡한다.’

주변에 너부러진 도적들을 둘러보며 고민에 빠졌다.

문양의 능력으로 위기는 탈출했는데, 저들은 내 능력을 모두 보았다. 저 도적만 해도 내 능력을 상기시켜주지 않았던가.

문양에서 터진 빛무리가 키메라를 쫓는 걸 봤으니, 내 능력이 키메라와 상극이란 사실을 모두 알고 있을 것이다.

‘…죽여야 하나?’

안전을 위해선 전부 죽이는 게 맞다.

방금 보여준 능력이 좀 특별해야지.

정보가 알려진다면 분명 내게 위험하거나 귀찮은 일이 생길 거다.

근데,

‘시발, 그게 어디 쉽게 되냐고.’

무력화된 인간의 심장을 찌르는 일.

그것도 무려 스무 명이나 된다.

현대인의 상식으로 사이코패스나 다름없다.

알아도 쉽사리 할 수 있는 행동이 아니란 뜻이다.

저들의 마비가 풀리기 전에 결정해야 하는데,

“이, 이봐.”

그때 외팔이 도적이 입가를 닦으며 비틀거리듯 일어났다.

40대 정도로 보였는데, 눈빛을 보니 평범한 놈 같지 않았다.

이 새끼부터 조져야 하는데.

근데 마주 본 순간 느낌이 싸했다.

이 사내, 나보다 강하다.

위기감에 본능적으로 단검을 꺼내 들었는데, 그 모습에 외팔이도 다급히 단검을 꺼냈다.

그런데,

“…너 뭐냐?”

도적의 시선이 내가 꺼낸 단검에 닿아 있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

검 자루 끝에 벗겨진 흔적이 있었는데, 흐릿했지만 한눈에 알아봤다.

‘포효하는 늑대 문양.’

지워진 흔적은 내가 쥐고 있던 단검과 닮아있었다.

내 단검은 크룩스의 단장이 쓰던 무기였다. 크룩스 출신만 사용하는 단검이란 뜻이다.

설마, 이딴 곳에서 크룩스 출신의 암살자와 마주할지 몰랐다.

왜 이곳에 있는 거지?

“너 누구 휘하에 있는 놈이냐?”

질문이 들린 순간, 난 움직였다.

마비가 덜 풀린 지금이 기회.

일단 제압한다.

그런데 사내가 더 빨랐다.

삐이이이이―!

사내는 품에서 호각을 꺼내더니, 길게 불었다. 그 소리에 난 욕설을 내뱉었다.

혼자가 아니다.

방금 소리는 크룩스 내에서 사용하던 긴급 호출 신호.

사내는 방금 동료들을 불렀다. 근처에 크룩스의 암살자들이 더 있다는 의미.

게다가 호각을 가지고 있다는 건,

‘단장급!’

내 마음이 더 급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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