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당에게서 살아남는 법-31화 (31/130)

31화 특성 개화자

최악의 마나 감응력.

마스터의 시선에선 실패작이 맞았다. 신비를 각성했어도 등급 잠재력이 꽝이면 무특성 3성보다 못한 존재였으니까.

“역시, 그 황금빛이…….”

슬라임을 죽이고 자신을 구한 신비한 빛무리.

칼은 그 황금빛이 내가 가진 신비 능력이라 생각하는 것 같았다.

난 칼의 착각을 부정하지 않았다.

들킨 능력을 신비 능력으로 둔갑시키는 것이 맞았다. 인챈트 능력을 굳이 오픈할 이유가 없었으니까.

신체에 각인된 고대 문양이기에 가능한 속임수였다.

“신비 능력을 각성하고, 마스터의 선택을 받았습니다.”

“그게 1년 전이다?”

칼처럼 나도 내 스토리를 풀어냈다. 물론, 진짜 나의 스토리가 아닌 이 몸의 스토리였다.

마스터의 선택을 받고 수련했던 기억.

버려진 이유까지.

마나 과실 세 개를 복용하고도 아직 1성에 머물고 있다는 내용에선 칼도 혀를 내둘렀다.

최악의 가성비.

“그 돈이면 3성 암살자도 키울 돈인데, 나라도 버리겠어.”

“당사자 앞에서 할 말입니까?”

“그럼 여전히 1성이란 소리인데.”

칼은 내 몸을 쭉 훑어봤다. 그러곤 고개를 갸웃거렸다.

“1성인데, 1성 같지 않단 말이지.”

칼의 눈이 틀린 건 아니었다.

마나는 1성에 불과하지만, 난 특별한 능력들을 지니고 있었다.

정신 방벽과 인챈트, 그리고 고대 문양까지.

모두 내 목숨을 한 번 이상 살려준 능력들이고, 고작 1성이 지니기엔 터무니없이 큰 힘이었다.

그렇다고 내 등급보다 높은 이들을 이길 수 있느냐?

도네콜린트는 상황이 특수했던 것이고, 대부분은 힘들 것이라 봤다.

주어진 능력들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등급의 한계일지도 모른다.

인챈트도, 고대 문양도, 전부 반쪽짜리처럼 느껴졌다.

칼은 단검을 만지작거리며 나를 응시했다. 멀찍이 서서 지시를 기다리는 암살자들이 보인다.

살기가 느껴졌는데, 칼이 신호를 보내면 당장 죽이러 올 것 같아서 살 떨리긴 했다.

하지만 확신했다.

칼은 나를 죽이지 못한다.

일단 내가 한 말에는 거짓이 없다.

그 완벽한 증거가 바로,

“붐(Boom)이 아니었다면 넌 지금 죽었어.”

“알고 있습니다. 버려진 패의 증거니까요.”

붐(Boom)의 희생자라는 것.

칼을 설득하는 데 이만큼 확실한 카드가 또 있을까?

처음으로 벌레 새끼한테 고마움을 느꼈다.

이젠 쐐기를 박아야 할 차례.

다음 포지션이 중요했다.

“전 마스터의 죽음을 그 누구보다 갈망합니다. 크룩스의 몰락까지도.”

“…….”

“이곳을 벗어난다면 꼭 ‘복수’할 겁니다.”

분위기가 착 가라앉았다.

마스터의 죽음과 크룩스의 몰락은 현재 칼이 마음속으로 가장 갈망하는 목표였다.

복수.

목표의 일치성을 언급하는 건 신뢰를 주기 좋다.

같은 적을 둔 동료라 어필하는 것이다.

내 눈을 말없이 응시하는 칼이 보인다. 시선이 살짝 부담스러웠지만, 난 단단한 눈빛으로 칼을 마주 봤다.

“애써 만든 친구를 잃을 순 없지.”

그 말이 떨어진 순간 암살자들의 살기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다행히 말이 먹혔다.

“부탁이 있다고 했지? 붐(Boom)인가?”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칼은 고기를 한 점 썰어 입에 넣었다. 한동안 우물우물거리던 그가 음식을 삼키곤 입을 열었다.

“붐을 제거하는 데 도움을 주지. 대신 당장 들어야 할 게 있다.”

“뭡니까?”

“진짜 이름이 뭐지?”

칼의 질문에 난 주변을 둘러봤다. 그 모습에 칼이 손을 흔들자, 암살자들은 거리를 벌렸다.

‘그럴 의도로 둘러본 건 아니었는데.’

내 이름이 뭐라고.

그렇게 내 이름이 듣고 싶은 건가?

“아서, 아서 클레이튼입니다.”

“칼 바스타인이다.”

이 통성명을 통해 칼과 더 가까워진 느낌이었다.

같은 적을 둔 동료로 인정받은 건가.

칼은 다시 고기를 먹기 좋게 잘라서 놔줬다.

이젠 먹으면 체할 것 같은데.

그래도 애써 맛있는 척 집어 먹었다.

‘두 번째인가?’

배덕의 기사, 록터 펠리스의 뒤를 이어 내 진짜 이름을 들은 두 번째 인물.

어째 주요 인물들과 하나둘 엮이는 느낌이다.

난 남은 고기를 입에 모조리 욱여넣었다.

식사 시간이 끝났다.

대화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밤이 되었다.

이른 시간이지만 난 다시 잠자리에 들었다.

생체 마석을 시간 내서 살펴보려고 했는데, 칼과 대화하느라 진이 다 빠졌다.

암살자들의 살기가 워낙 살벌했어야지.

지금은 아무것도 하기 싫었다.

밤하늘에 뜬 별빛을 보며 생각했다.

“이것 참…….”

어제도 그렇고 오늘도 그렇고 하루하루가 삶과 죽음의 갈림길이다.

아주 좆같았다.

* * *

다음 날, 물고기를 잡아다가 식사를 준비했다. 자급자족이라더니, TV에서만 보던 정글 서바이벌을 내가 하게 될 줄은 몰랐다.

민첩한 몸놀림 덕에 사냥은 성공했는데,

“불은 어떻게 피우지?”

어제 일로 부탁하기가 어색해서 마른 풀때기를 붙들고 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데, 칼이 다가왔다.

“뭐 하나?”

“불 피우는데요?”

“난 또 춤추는 줄 알았지.”

“…….”

칼은 피식 웃고는 엘튼을 불렀다.

갑자기 그 녀석은 왜?

잠시 후, 엘튼이 모습을 드러내더니 단검을 들고 성큼성큼 다가왔다.

살벌하게 왜 이래.

엘튼은 내가 붙들고 있던 풀때기를 단검으로 가볍게 찔렀다.

순간 단검에 변화가 일어났다.

화르륵―

“…….”

허무하게 타오르는 불씨.

여태껏 한 행동들이 다 뻘짓으로 취급되는 결과물을 보며 멍하니 서 있는데, 칼이 엘튼의 어깨를 다독거리며 말을 해왔다.

“우리 불 담당이지. 신기하지?”

“…3성, ‘특성 개화자’입니까?”

“함께하는 이상 숨길 수 없으니 엘튼의 속성 계열만 밝히는 거야. 그렇게만 알고 있어.”

마나 유저로 각성하면 1성으로 취급되며, 2성, 3성, 숫자가 높아질수록 등급 차이를 보이게 된다.

등급 분포는 당연히 피라미드 구조.

위쪽으로 향할수록 폭은 급격히 좁아졌다.

소설에선 이 피라미드 구조를 꽃의 성장 과정으로 묘사했는데, 1성은 새싹, 2성은 꽃봉오리, 3성은 ‘개화’로 표현됐다.

개화(開花)!

마나 유저의 일생(一生)이 특성과 무특성으로 갈리는 단계.

이 중 선택받은 소수만 ‘특성 개화자’로 각성한다. 물론, 난 엘튼의 개화 특성을 이미 알고 있었다.

‘불꽃검 엘튼.’

암살 대상은 재 가루만 남긴다는 엘튼의 위명이었다.

그리고,

“칼 님도 3성입니까?”

“내가 그렇게 세 보이나?”

“약한 자는 머리가 될 수 없다. 암살자 세상의 격언이죠.”

“부인할 수 없겠는데? 뭐, 3성 비슷하다고 해두지.”

3성과 비슷하다라.

답이 애매했다.

과거에는 그 이상이었는데 한쪽 팔을 잃으면서 3성으로 떨어졌다고 해석하면 되나?

“칼 님도 특성 개화자입니까?”

“난 운이 그렇게 좋은 편이 아니라서.”

“그렇습니까?”

난 고개를 끄덕이곤 불씨를 태워 큰불을 만든 후 물고기를 굽기 시작했다.

거짓말이다.

난 그의 개화 특성을 알고 있었으니까.

‘위기 감별사.’

그는 위험의 경중을 파악할 수 있는 감각 계열의 특성을 지니고 있었다.

수년간 이어진 크룩스의 고된 추적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게 해준 능력.

특성 개화자인 두 사람을 보니, 문득 나는 어떻게 될지 궁금해졌다.

3성이 됐을 때, 로또가 터질 확률이 얼마나 될까.

‘힘들겠지?’

워낙 불운 덩어리로 취급되는 터라,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아니, 마나 감응력이 최악인 나에겐 3성도 아직 요원했다.

가성비가 워낙 쓰레기라서 말이지.

‘아, 그것도 확인해봐야 하는데.’

가방에 넣어둔 생체 마석을 떠올렸다.

내 쓰레기 같은 몸뚱이에 희망의 불씨를 피워줄 물건인지 확인해봐야 했다.

혼자 있을 시간과 장소가 필요한데.

그때 칼이 용무가 있었는지 말을 꺼냈다.

“시간이 필요해.”

“……네?”

“시술하려면 준비 시간이 필요하다고.”

“바로 가능하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팔찌가 없어졌어.”

“팔찌? 그게 뭡니까?”

“벌레를 제거하려면 그 팔찌가 꼭 필요해. 내 것을 없애려고 예전에 제작한 물건인데, 슬라임에게 먹히면서 어딘가 흘린 것 같아. 찾으려면 시간이 제법 걸릴 거야.”

“팔찌가 없으면 어떻게 됩니까?”

“팔찌를 제작할 마법사를 찾아가야지.”

팔찌가 없으면 이곳에서 시술을 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팔찌가 숲에 있길 기도해야 하나.

“팔찌만 찾으면 됩니까?”

“베텔의 독을 시술에 맞게 손봐야겠지. 기다려봐. 팔찌를 찾으면 금방이니까.”

“저, 근데….”

“뭐, 할 말 있나?”

“아직 대가를 말하지 않았습니다만?”

“대가?”

“시술의 대가 말입니다. 그것 때문에 어젯밤에 운을 뗀 거 아닙니까?”

“아, 그럴 의도로 말을 꺼낸 건 맞지. 네 폭탄 발언 때문에 깜빡했지만.”

“원하는 게 뭡니까?”

부담스러운 부탁이면 곤란한데.

“필요 없어.”

“네?”

“대가는 이미 받았으니까.”

노릇하게 익은 물고기를 보고 있던 나는 두 눈을 끔뻑이며 칼을 올려다봤다.

이건 또 무슨 소리래.

“네가 말한 복수. 왠지 너랑 있으면 내가 원하는 것을 쉽게 이룰 것 같거든.”

“감입니까?”

“내가 감이 뛰어나긴 하지.”

칼은 씨익 웃으며 험상궂은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무서워, 이 아저씨야.

그리고 이건 내 복수가 아니라 당신 복수잖아.

결국, 복수를 위해 대가 없이 치료해주겠다는 뜻이었다.

어차피 크룩스와 적대 사이니 상관없으려나.

어째 학살자가 아니라 나를 통해 복수하려는 모습인데, 부담스럽다.

난 다 구워진 물고기를 빤히 바라봤다.

식욕이 뚝 떨어졌다.

* * *

엘튼은 일행과 함께 팔찌를 찾으러 자리를 비웠고, 칼은 일부 암살자들 곁에 머물러 있었다.

함께 움직일 땐 몰랐는데, 부상자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모두 셋으로 복면을 쓰고 있어서 얼굴 확인은 힘들었고, 칼이 그 셋을 치료하며 돌보고 있었다.

하긴 칼도 스스로 미끼를 자청하면서 크고 작은 상처를 입었지.

난 그에게 다가갔다.

이대로 빈둥거리고 있기엔 시간이 너무 아까웠다.

“괴물들이 언제 또 나타날까요?”

“그건 인간들이 채워지는 시간에 따라 달라. 급격히 공간이 차버리면 저번처럼 갑작스레 나타나기도 하지.”

“그럼 지금은 안전하다는 소리네요.”

“한동안은 조용할 거야.”

“그럼 이 주변에 동굴이나 시선을 피할 장소가 있습니까?”

“그런 곳은 왜?”

“개인적으로 알아볼 게 있습니다.”

“우리 사이에 비밀이 있다니 섭섭한데.”

“나중에 알려드리겠습니다.”

“뭐, 그렇다면야….”

칼은 어깨를 으쓱이곤 한쪽 숲을 가리켰다.

“동굴은 없어. 하지만 갈대숲이 빽빽한 장소는 있지. 사람들이 찾기 힘든 곳이야.”

“감사합니다.”

“멀리는 나가지 마. 뒈지면 곤란하니까.”

“괴물 말고 위험할 게 또 있습니까?”

“인간.”

칼은 내게 폭죽 같은 걸 건넸다. 긴급 신호탄이었다.

“괴물보다 인간들이 더 무서워. 강하면 강력한 대로, 약하면 약한 대로 위협적이지. 감정이란 약점을 이용하거든. 특히 너같이 기준 없는 녀석은 먹잇감으로 딱이지.”

“……기준? 무슨 기준 말입니까?”

“피를 보는 기준. 이 세상에서 살아남으려면 그 기준을 잘 정해야 할 거야. 너무 무르면 죽기 십상이고, 너무 타이트하면 적이 많아지니까.”

기준이라.

깊이 생각해본 적 없는 주제였는데, 칼의 조언을 듣고 깨닫는 바가 있었다.

“칼의 기준은 뭡니까?”

“복수. 난 복수를 위해선 적과도 손을 잡을 수도, 죽이는 대상도 가리지 않아.”

“…….”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았다.

굳이 고민할 필요가 없는 문제였다.

‘살아남는 것.’

내 기준은 초반에 이미 정해져 있었으니까.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