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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에게서 살아남는 법-34화 (34/130)

34화 마셔. 고통은 없을 거야.

토바른의 영지들은 라웁 숲을 중심으로 퍼져 있고, 라웁 숲 사이에서 키메라 군단이 난리를 피울수록 카멜에게 유리했다.

회귀자인 그는 도미닉 후아튼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움직이는 시기가 나 때문에 다소 늦춰지긴 했는데.’

내가 더미로 만든 존재, ‘그’.

갈대숲에서 만난 용병을 통해 카멜이 현재 ‘그’를 만나기 위해 교섭 장소로 향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와 교섭을 위해 카멜은 움직일 수밖에 없었을 거다. 학살자는 ‘그’란 존재를 매우 경계하는 것처럼 보였으니까.

난 카멜에게 건넸던 지도를 떠올렸다.

카멜이 그곳에 도착해도 ‘그’는 없다. 대신 내가 보낸 ‘편지’를 받겠지.

‘편지는 잘 전달했겠지?’

검은 장미에 1만 골드짜리 의뢰를 신청하면서, 남은 잔돈으로 편지 의뢰를 부탁했는데, 펜리는 푼돈 의뢰 따윈 듣고 싶지 않다며 쫓아냈다.

다행히 푸른 장미의 마담인 넬라가 그 제안을 수락했는데, 그 조건으로 잔돈과 5층에서 환불한 금액까지 몽땅 빼앗겼다.

‘엘프가 돈독 오르니까. 더 무서워.’

천 골드 이상을 건넨 배달 의뢰다 보니 학살자의 눈을 피해 잘 전달했을 것이다.

편지는 카멜이 위화감을 느낄 만한 내용으로 꽉꽉 채워 넣었다. 읽어보는 순간 꽤나 놀랄 거다.

‘다만, 편지를 읽고 놈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감이 안 온단 말이지.’

카멜 블레이저는 등장하는 악당 중에 지능이 가장 뛰어난 놈이었다.

늘 파격적인 행보를 보이는 놈이라, 섣불리 예측했다간 뒤통수 맞기 십상이었다.

그저 나와 관련된 상황만 빼고 스토리의 큰 틀만 생각해야 했다. 카멜의 목적은 토바른의 전역을 손에 넣는 것이었으니까.

‘놈은 나만큼이나 도미닉 후아튼에 대해 잘 아는 인물이야.’

분명 키메라 군단을 이용해 에토르 가문을 도모하려고 할 텐데, 아쉽게도 지금 처지에선 이를 방해할 방법이 없었다.

그에 대해 고민하고 있는데, 건너 숲에서 엘튼이 일행과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난 그 모습에 벌떡 일어났다.

엘튼이 칼에게 건네는 장신구가 보였다.

흙먼지가 잔뜩 묻은 팔찌.

칼이 말한 팔찌를 찾은 모양이었다.

“이게 그 팔찌입니까?”

“그래, 소식이 없어서 걱정이 들 찰나였는데 다행이야.”

확실히 다행이었다.

팔찌를 찾지 못했으면 칼이 아는 마법사에게 제작을 다시 맡겨야 했는데, 그 시기를 기약하기 힘들었다.

예상한 것과 달리, 별다른 특징이 없는 팔찌였다. 도시 상점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투박한 디자인. 다른 점이라면 팔찌 안쪽 면에 마법 룬어가 깨알만 한 글자로 새겨져 있었다.

“겉보기에는 평범해 보여도, 마법 아티팩트다.”

“이 팔찌가 벌레를 죽일 수 있다고요?”

“그래. 벌레 제거용으로 제작된 거야. 다만, 시간이 걸려. 벌레를 단칼에 죽이는 게 아니라 말려 죽이는 거니까.”

“어떻게요?”

“일단 선택해. 오른손이야? 왼손이야?”

오른손은 고대 문양이 각인되어 있어서 난 왼손을 선택했다.

“벌레를 네 왼쪽 손목으로 옮길 거야.”

“그게 가능합니까?”

“충분히.”

“굳이 옮기는 이유가 뭡니까?”

“팔찌를 채워야 하니까.”

팔찌에 벌레를 죽이는 마법이 걸려 있다고 했다.

기간을 물어보니 한 달 정도는 차고 있어야 한다나.

“근데, 정말 안전한 겁니까?”

벌레도 죽기 전에는 꿈틀댄다고 하지 않던가.

칼의 휑한 소맷자락을 바라보며 묻자, 칼은 피식 웃으며 헐렁한 소매를 흔들었다.

“이건 내 선택에 따른 결과야. 팔찌랑 상관없어.”

나도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크룩스의 추적대를 따돌리기 위해 스스로 팔찌를 풀고 붐(Boom)을 터트린 일을.

엘튼과 그 휘하 암살자들이 칼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것과 관련이 있었다. 저들을 탈출시키기 위한 희생이었으니까.

‘학살자와 칼이 다른 점이지.’

학살자에게 수하란 욕망을 채워줄 도구에 불과하지만, 칼은 자신의 사람이라 확신이 들면 책임을 진다.

내가 칼과 친해지려는 이유였다.

칼의 생존 버스에 좀 타보고 싶었다.

“왜, 불안해?”

“뭐, 그 정도는 아닌데.”

“정 불안하면 옮긴 후 벌레를 터트려버려. 위력은 보증하지. 웬만한 녀석들은 다 죽을걸?”

“제 팔은요?”

“시원하게 날아가겠지. 더럽게 아프긴 한데, 날 봐. 어쨌든 살아있잖아.”

취소다.

생존 버스는 무슨.

내 안위는 내가 직접 챙겨야 할 것 같았다.

“용케 살아남았네요.”

“운이 좋긴 했지. 함께한 이들이 많았으니까.”

“전부 크룩스 출신입니까?”

내가 엘튼과 그 주변의 암살자들을 둘러보자, 칼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부분 붐(Boom)의 희생자 리스트에 올라온 녀석들이야. 도망칠 때 전부 데리고 나왔지. 그 덕에 개고생 좀 했지만.”

칼은 엘튼에게 베텔의 독을 가져오게 했다.

엘튼이 가져다준 병은 기존 베텔의 독과 달랐다. 보랏빛이 아닌 분홍빛을 띤 병이었다.

시술에 맞게 제작한 독이라고 했다. 칼은 병을 흔들며 내게 물었다.

“시술, 바로 할 거지?”

“네. 찜찜한 건 얼른 털어버리는 성격이라.”

“자리 깔고 누워.”

이 벌레 새끼가 생존의 위협을 느낀 건가?

심장이 간질거렸다.

자리야 따로 구할 필요가 없었다. 난 칼이 쉬던 장소에 자리를 잡고 편히 누웠다.

칼이 병뚜껑을 땄는데, 병에서 시큼한 향기가 흘러나왔다.

저 예쁜 분홍빛 비주얼에 걸레 빤 썩은 냄새라니 어째 불안한데.

칼이 냄새를 맡고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이자, 더 불안해졌다.

“벌레가 심장에 자리하는 이유는 심장 박동 때문이야. 진폭이 일정하게 느껴지는 장소에 둥지를 틀도록 훈련되어 있거든. 그런데 만약 심장 박동이 죽은 듯이 느려지면 어떻게 될까?”

“다른 곳을 찾아 움직인다는 겁니까?”

“정확히 둥지 이전이지.”

“원하는 부위로 어떻게 이동시키는 겁니까?”

“압박과 자극.”

칼은 길고 두꺼운 천을 꺼내더니, 내 왼쪽 손목을 칭칭 감기 시작했다.

강하게 옥죄는 압박감과 함께 짙은 맥동이 느껴졌다. 칼은 약초를 꺼내더니 잘게 빻아 천 위에 꾹꾹 눌러 붙였다.

뜨거운 감각과 함께 맥박의 세기가 더욱 강해진 느낌이 들었다. 눈을 감으니 손목 맥박이 북소리처럼 크게 들려왔다.

칼은 내 입술 위로 병을 가져왔다.

“마셔. 고통은 없을 거야.”

“…대사 한번 살벌하네요.”

“맛도 살벌하지.”

험악한 인상이 이를 드러내며 웃는다.

어째 분위기가 장기를 떼서 파는 인간 백정 놈의 대사 같은데.

괜찮겠지?

난 그대로 병을 받아 마셨다.

시큼한 향기가 코끝을 찔렀다. 맛도 참으로 역겹다.

꾸역꾸역 삼키는데 순간 의문이 들었다. 시술 시간은 얼마나 걸리는 거지?

근데 묻지 못했다.

의식이 날아갔으니까.

* * *

“주군, 리옹입니다.”

“들어와.”

끼익― 귀에 걸리는 낡은 소리가 울렸다. 리옹은 너덜너덜한 문짝을 보며 미간을 좁혔다.

주군이 이런 누추한 장소에 오래도록 머문다는 사실이 무척 불쾌한 표정이었다.

나른한 눈빛으로 창밖을 응시하던 검은 머리의 사내.

작은 테이블에 올려진 찻잔은 차갑게 식어 있었다.

잔이 전혀 줄지 않았다.

그 모습에 리옹은 주군이 고민에 빠져있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됐지?”

“구했습니다.”

그제야 사내, 카멜이 리옹을 올려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눈짓으로 테이블을 가리키자, 리옹은 공손히 한쪽 무릎을 꿇고는 자신이 가져온 상자를 올려놨다.

카멜이 상자를 열자, 검은빛의 매끈한 망토가 모습을 드러냈다.

용아(龍牙)의 망토.

마법 방어력과 함께 착용자의 존재감을 올려주는 고대 아티팩트였다.

“마르샤 대상인은?”

“정리했습니다.”

“피를 많이 흘렸겠어.”

“터무니없는 가격을 불러서 어쩔 수 없었습니다.”

“욕심 많은 돼지가 탐낼 만한 물건은 아니지. 뒤처리는?”

“접촉했던 증인들은 모두 제거했고, 흔적이 남을 만한 저택과 창고는 모두 불태웠습니다. 용병 일부가 도망쳤는데, 증인으로 세우기엔 비루한 놈들이라 무시해도 될 것 같습니다.”

“깔끔하네. 역시 리옹이야.”

카멜은 용아의 망토를 몸에 둘렀다. 그 순간 방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리옹은 주군에서 흘러나오는 위압감에 살짝 고개를 숙였다.

카멜은 용아의 망토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걸로 끝이었다. 더는 걸친 망토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세상에 이보다 좋은 물건은 넘쳤고, 자신은 여전히 배가 고팠으니까.

“이 마을 아무래도 미심쩍어.”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렌구아는 도착했나?”

“바깥에서 대기 중입니다.”

“주술사들의 둥지에서 몇이나 데려왔지?”

“다섯입니다.”

“슬슬 시작해볼까.”

고개를 끄덕인 카멜은 천천히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는 창가를 향해 다가서더니, 길게 기지개를 켰다.

창가로 비치는 풍경은 작은 시골 마을을 연상케 했다.

전달자가 건네준 지도대로 ‘그’를 보기 위해 마을에 도착한 카멜은 사흘 정도 이곳에 조용히 머물렀다.

하지만 ‘그’는 결국 나타나지 않았고, 대신 편지 한 장을 전달받았다.

편지 내용은 그의 심기를 무척 거슬리게 했다.

다음 만남을 기약하자니.

감히 자신을 바람맞힌 인간은 회귀를 통틀어 처음이었다.

카멜은 바로 떠나지 않고 며칠을 더 묵었다.

며칠 동안 창밖을 통해 마을 사람들을 구경했다. 그러면서 묘한 이질감을 느끼게 됐다.

그 이질감이 뭔지 오늘 확인해보고 싶었다. 주술사들이 도착했으니 움직인다.

“마을 전체를 봉쇄하고, 단 한 명도 빼놓지 말고 붙잡아라.”

“충.”

“렌구아에게 작업을 지시해.”

“무슨 작업을 원하십니까?”

카멜은 식은 찻잔을 홀짝이며 말을 이었다.

“마을 사람들의 기억을 뽑아야겠다.”

* * *

“아악!”

“도, 도망쳐!”

조용했던 마을에 때아닌 비명이 터져 나왔다. 불쑥 나타난 검을 든 사내들이 마을을 이 잡듯이 뒤지기 시작했는데, 이들은 카멜이 데려온 정예 친위대로 전원 마나 유저로 이뤄져 있었다.

그 기세를 마주한 마을 사람들은 대항할 엄두도 못 낸 채, 여관으로 모조리 끌려왔다.

그들은 여관 1층 구석에 몰린 채 벌벌 떨었다.

이리저리 눈치를 살피는 모습.

쿵!

“……!”

그 정적 사이로 무거운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위층 계단에서 검은 망토를 흩날리며 한 사내가 조용히 내려왔는데, 짙은 위압감 때문인지, 마을 사람들은 그를 감히 올려다보지 못하고 고개를 수그린 채 움츠러들었다.

그가 1층으로 내려오자, 둘러싼 이들이 고개 숙여 그를 맞이했다. 카멜은 리옹을 바라봤다.

“전부인가?”

“128명. 그 외는 없는 것 같습니다.”

“촌장은?”

리옹이 손짓하자, 기사들은 한 사내를 질질 끌고 왔다. 마흔 후반으로 보이는 사내였는데, 촌장치곤 젊어 보이는 나이였다.

카멜 앞에 엎드린 채 촌장은 벌벌 떨면서 고개를 떨궜다. 그래도 할 말은 있는지, 용기 내어 더듬거리듯 입을 열었다.

“누, 누구십니까?”

“이곳에 볼일이 있는 사람.”

“이곳은 에토르 가문에 보호세를 내는 정식 마을입니다. 누구신지 모르겠지만, 톰자엘 자작님이 두렵지 않으십니까?”

“아아, 그 늙은 너구리에게 보호세를 내고 있었나? 그 늙은이가 이곳까지 발을 담그고 있을 줄 몰랐는데.”

“그 무슨 불경한….”

“이 마을 뒤에 누가 있지?”

“무, 무슨 말씀이신지… 여긴 에토르의 주인이신 톰자엘….”

“걸음걸이가 달라.”

“…….”

“마을 사람들의 발걸음이 평범한데 이상하게 거슬려. 내가 자주 보던 그 느낌이더라고.”

카멜은 촌장을 빤히 내려다봤다. 촌장은 바짝 엎드린 채 벌벌 떨고 있었다.

하지만,

“암살자.”

순간 덜덜 떨던 촌장의 움직임이 뚝 멈췄다. 그 모습에 카멜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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