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편지
“난 그 누구보다 두려움에 떠는 인간 군상을 많이 봐왔지. 그런데, 잡혀 온 이들의 벌벌 떠는 모습이 왜 같잖아 보일까?”
“…….”
“연기 그만해. 역겨우니까.”
엎드린 촌장의 얼굴이 불쑥 올라왔다. 인형처럼 표정 없는 얼굴. 촌장의 시선이 카멜을 향한 순간, 리옹의 검이 벼락처럼 움직였다.
촤악―
핏방울이 허공에 흩어지며 양팔이 떨어져 나갔다.
잘린 상처 부위가 새하얗게 얼어붙으며 괴사하기 시작했다. 리옹의 특성, 칼바람의 냉기(冷氣)에 노출된 흔적.
생포를 위해 특성을 사용했는데, 촌장은 비명도 없이 그대로 카멜에게 몸을 튕겼다.
“죽어!!!”
촌장의 가슴이 불룩불룩 송곳처럼 튀어나오더니 전신에 실핏줄이 퍼지며 몸이 뒤틀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카멜은 코웃음을 치며 망토로 몸을 가렸고, 리옹이 앞을 막아서며 팔을 뻗었다. 리옹의 손가락에서 푸른빛이 번뜩였다.
푸른 반지.
콰아아아아아앙―!!!!!!
폭음과 함께 살점과 뼛조각이 사방으로 터져나갔다. 폭발에 휩쓸린 마을 사람들 일부가 처참한 몰골로 비명횡사했다.
위이이잉―!!
폭발을 막아선 리옹은 무표정한 얼굴로 방패를 내려놨다.
팔뚝에 생성된 푸른빛으로 이뤄진 카이트 실드(Kite Shield).
일주일 전 주군이 하사한 ‘네메시스의 얼음 방패’였다. 살점이 덕지덕지 묻은 방패를 본 리옹은 미간을 살짝 좁히며 방패를 다시 들었다. 사방에서 짙은 살기가 쏟아졌다.
폭발이 신호탄이 된 듯, 피로 흥건한 바닥을 밟고 마을 사람들이 돌진해왔다.
날렵한 몸놀림으로 모두가 카멜을 먹잇감처럼 노리기 시작했다.
삽시간에 포위된 리옹은 자세를 잡으며 으르렁거렸다.
“렌구아, 뭐 하나!”
리옹의 타박에 1층 중심으로 거대한 핏빛 마법진이 생성됐다.
공간 전체가 붉은빛으로 채워졌다. 그 기운이 예사롭지 않자, 마을 사람들, 아니 암살자들은 더욱 다급히 카멜을 향해 미친 듯이 달렸다.
순간,
꿀렁―!
마법진 안에서 촉수처럼 뻗어 나온 수십 수백의 붉은 넝쿨. 넝쿨은 인간의 핏줄을 닮아 혐오스러웠다. 살아있는 듯 꿀렁거리며 넝쿨들은 삽시간에 암살자들을 낚아채며 공간 전체를 붉게 물들였다.
마치 거미가 먹잇감을 매달아 놓은 것처럼 암살자들은 붉은 넝쿨에 매달려 벽 이곳저곳에 꼬치처럼 달라붙었다.
백여 구의 꼬치가 붉은 벽을 수놓았다.
으…….
벽 사방에서 신음이 흘러나오고, 꼬치가 된 이들은 꼼짝도 하지 못한 채 눈동자만 뒤룩뒤룩 굴렸다. 잠시 후, 기사들 뒤쪽에서 어두운 로브를 걸친 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렌구아와 주술사들이었다.
렌구아는 카멜에게 다가와 예를 표했다.
카멜은 형체조차 사라진 촌장의 시신을 훑어보곤 짧게 혀를 찼다.
“붐(Boom)? 설마 크룩스 놈들이었나?”
회귀 전 자신의 얼굴에 큰 상처를 안겨준 자살 폭탄.
붐(Boom)은 카멜도 잘 알고 있는 것이었다.
‘그’와 관련된 마을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어찌하시겠습니까?”
리옹이 의자를 가져오자, 카멜은 의자에 앉아 잠시 고민했다. 그러곤 렌구아를 향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렌구아는 고개를 숙인 뒤 꼬치가 된 암살자들에게 다가갔다. 그 뒤로 주술사들이 따랐다. 그들의 손에는 기억을 뽑아낼 주술 도구가 들려 있었다.
“끄아아아아악―!!!!”
“아아악! 아악―!!!”
처절한 비명이 공간을 가득 채웠다. 주술사들은 꼬치에 묶인 암살자들을 하나씩 붙들고 기억을 뽑아냈다. 눈, 코, 귀에서 피가 흐르고, 피를 토하듯 비명을 질러댔지만, 주술사들은 암살자가 죽든 말든 느린 몸짓으로 뇌리에 담긴 기억을 구슬 장치에 담았다.
“촌장이 죽은 게 아쉬워. 쓸만한 기억이 있었을 텐데.”
“죄송합니다.”
“리옹, 그대 잘못이 아니다. 붐(Boom)은 나도 예상 못 했거든. 세뇌당한 놈을 산 채로 잡는 건 쉬운 일이 아니지. 차나 한잔 부탁하지. 목이 마르군.”
“충.”
리옹이 자리를 비우자, 카멜은 의자에 편히 앉아 품을 뒤적거렸다. 편지를 꺼낸 그는 다시 편지를 읽었다.
‘그’가 보낸 편지.
벌써 여러 번 읽은 편지였지만, 카멜은 시간이 날 때마다 편지를 읽고 또 읽었다.
‘그’의 심리를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거슬려, 거슬린단 말이지.”
편지의 한 문구에서 멈춘 카멜은 미간을 구겼다. 감정 표현이 절제된 그가 고작 문장 한 줄에 짜증의 감정을 드러내고 있었다.
[검은 망토는 당신과 어울리지 않습니다.]
“…….”
사흘 전에 읽은 편지 내용이다. 검은 망토라…. 카멜은 자신의 망토를 바라봤다.
용아(龍牙)의 망토.
조금 전 리옹이 대상인 마르샤를 죽이고 가져온 고대 아티팩트였다. 놈은 자신이 용아(龍牙)의 망토를 얻을 것을 알고 있는 듯 말하고 있었다.
리옹이 찻잔을 건넸다.
주변은 고통과 비명으로 지옥이 펼쳐졌지만, 카멜은 덤덤히 티타임을 즐겼다.
“또 읽으십니까?”
“예언을 듣는 듯한 편지라서 말이야. 아주 기분이 더러워.”
“그는 이곳에 없는 것일까요?”
“내 일거수일투족을 알고 있는 듯한 내용이 적혀 있어. 실제로 그런 느낌이 강하고. 분명 내 주변을 감시하는 듯한데, 찾아보면 없단 말이지.”
결과만 보자면 ‘그’와의 교섭은 연기되었다.
동맹 표시는 잘 전달받았지만, 전달자로 보낸 이가 실종됐다는 이유였다.
문제는 납치를 지시한 카멜 본인도 현재 그 전달자의 위치를 모른다는 것이었다.
“감시자 소식은 아직이지?”
“아무래도 당한 것 같습니다.”
“케플린은 4성 기사야. 그가 당했다면 그 전달자 주변에 조력자가 있었다는 뜻인데. ‘그’가 전달자 실종을 핑계로 교섭을 미루고 있어. 날 가지고 노는 것일까?”
“벤을 붙이는 게 아니었는데, 죄송합니다.”
“큰 기대는 안 했어. 방심을 유도하려고 붙인 미끼니까. 다만, 전달자를 도운 조력자의 정체를 파악하지 못한 것이 아쉽군.”
둘은 며칠 전 홀로 돌아온 벤을 떠올렸다. 전달자를 놓쳤고 함께 움직였던 이들이 전부 죽었다는 소식을 전했는데, 렌구아를 시켜 벤의 기억을 뽑아봤지만, 기절해 있었는지, 협곡에 있었을 당시의 필요한 기억들이 하나도 존재하지 않았다.
알아낸 사실은 전달자 놈이 동맹 표시로 불을 지른 뒤 벤의 뒤통수를 치고 도망쳤다는 것 정도.
분명 케플린이 뒤를 쫓아갔을 텐데 지금껏 소식이 없었다는 건 리옹 말대로 당한 것 같았다.
“이 편지를 전달한 놈도 비렁뱅이라 그 흔적을 찾을 길이 없고, 알아낸 것이라곤 이곳이 크룩스와 관련된 마을이란 것뿐이야. ‘그’는 무슨 의도로 이곳을 교섭 장소로 정한 거지?”
카멜의 물음에 리옹은 답하지 않았다. 주군이 원하는 건 답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스스로 물음을 던지고 답을 찾아가는 방식.
주군이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를 풀 때 주로 쓰던 방식이었다.
“짜증 나는군.”
“…….”
그럼에도 주군의 입에서 답이 아닌 짜증이란 단어만 흘러나온다는 건 리옹에게도 생소한 경험이었다.
잠시 후, 작업을 끝낸 렌구아가 정보를 정리해 카멜에게 보고했다.
“역시, 크룩스의 비밀 거점이었나?”
“주요 거점 같습니다. 크룩스에 관한 굵직한 정보가 제법 많습니다.”
“‘그’와 관련된 정보는?”
“‘그’와 관련된 기억은 전혀 없었습니다. 대신, 그 전달자 놈이 이 마을에 머물다 간 흔적이 있습니다.”
“전달자가?”
카멜이 처음으로 큰 관심을 보이자, 렌구아는 고개를 크게 끄덕이곤 말을 이었다.
“암살 준비를 위해 잠시 머물렀던 것 같습니다. 처형당한 암살자 전원이 머문 기억이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은밀히 전달자에게 접근한 존재가 하나 더 있는 것 같습니다.”
“정확하게.”
“단둘이 마을 창고에서 만났다는 정보가 있는데, 전달자와 접선한 인물이 누군지는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제 예상으로는 크룩스의 간부 중 하나가 아닐까 생각되는데….”
“단둘이 창고에서 만났다라.”
카멜은 조용히 편지를 바라봤다.
‘추신’이라고 적힌 마지막 문장.
[이곳 음식점 빵과 수프 맛이 괜찮습니다. 떠나기 전에 한번 드셔보시길.]
“…….”
처음에는 이게 무슨 개소리인가 했다.
그런데 내용을 보니, 이 마을에 방문했다는 것을 대놓고 알려준 셈이다.
전달자와 접선한 존재가 ‘그’일 확률도 배제할 수 없었다.
‘무슨 장난질이지?’
놈의 의도를 읽기가 어려웠다. 그렇다고 편지의 내용이 거짓이냐? 그건 아니었다.
[일방적으로 교섭을 연기했으니, 좋은 정보 하나를 알려드리죠. ‘메케릭의 비약’이라고 그대의 영지, 블라이어 하렘가에 연금 비약을 연구하는 마법사가 있습니다. 그 비약을 얻고 싶다면…….]
메케릭의 비약은 자신이 이미 마법사를 죽이고 리옹에게 복용시켰다. 그 효과로 리옹은 현재 5성에 오른 상태.
이미 써버린 쓸모없는 정보였지만, 이 정보는 진짜였다.
‘나에 대한 정보만 아는 게 아니야.’
어떤 방식으로 정보를 알아내는 거지?
‘그’에 관해 떠올릴수록 답은커녕 의문만 계속 늘어갔다.
한 존재에게 이토록 궁금증이 생긴 적이 있었을까.
‘그’를 어떻게든 죽이고 싶단 갈망이 스멀스멀 차올랐다.
카멜은 두 눈을 감고 길게 숨을 내쉬었다. 흥분하는 감정을 가라앉혀야 한다. ‘그’를 떠올릴 때면 이상하게 감정이 불같이 타올랐다.
카멜은 그런 자신의 감정을 이해할 수 없었다.
다시금 짜증이 올라왔다.
“리옹.”
“네.”
“떠날 것이다. 준비해.”
“그럼, 이곳은…….”
카멜은 의자에서 일어나 주변을 살폈다. 사방에서 얕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자비를 바라는 눈빛.
“전부 태워버려.”
하지만 그는 구원자가 아닌, 학살자였다.
* * *
화르르륵―!
마을이 거세게 불타올랐다.
어둑한 밤하늘, 불씨를 담은 재 가루들이 허공을 가득 채우며 떠올랐다. 뿌연 연기 아래, 카멜은 검게 타버린 마을을 둘러보곤 마차에 올랐다. 말을 탄 리옹이 마차 호위에 나섰고, 그 뒤로 서른 기의 말이 줄을 섰다.
마차가 출발하기 전, 카멜은 창문을 연 뒤 누군가를 찾았다.
“렌구아.”
“예, 주군.”
“그대는 주술사 전원을 데리고 라웁 숲으로 가라. 그곳에서 키메라를 사냥하고 마석을 수집해.”
“도미닉이 나타나면 어찌할까요?”
“지금쯤 놈은 베네타 영지 근처에 있을 테니 만날 일은 없을 거다. 혹여 만나게 되더라도 교전은 무조건 피해라. 놈과 부딪치지 마.”
“알겠습니다.”
“마석이 목표량에 이르면 에토르를 중심으로 마석을 풀면서 한 가지 소문을 흘려. 생체 마석이 마나 유저의 경지를 올려주는 보물이라고.”
“알겠습니다.”
렌구아는 이미 주군을 통해 생체 마석에 대한 부작용을 전해 들었기 때문에 군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크룩스 본진이 에토르에 있다고 했지?”
“그렇습니다. 접선 방법도 알아냈습니다.”
“마석에 관한 작업이 끝나는 대로 에토르에 남아 크룩스와 관련된 정보를 수집해. 언제든 처리할 수 있게.”
“크룩스를 지우실 생각입니까?”
“상황을 보고 판단하겠다.”
크룩스는 저번에 이용해 먹은 암살 조직이지만, 변변치 않아 무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와 관련되어 있다면 다르다. ‘그’와 관련된 조직인지 우선 파악한 후 결정할 생각이었다.
렌구아를 따라 주술사들이 라웁 숲으로 떠나고, 마차는 출발했다. 덜컹거리는 마차에 홀로 앉아 카멜은 ‘도네콜린트’를 떠올렸다.
‘소식이 전혀 없어. 너무 조용해.’
지금쯤 세이렌의 비명에 관한 ‘신명’이 소문으로 돌며 귀에 들어와야 하는데, 도네콜린트는 땅으로 푹 꺼진 것처럼 존재 자체가 사라져 버렸다.
영입을 위해 움직였던 모든 행동이 헛수고가 된 것이다.
미래가 또 뒤틀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