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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에게서 살아남는 법-36화 (36/130)

36화 광의의 예언자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카멜은 기억을 더듬어 올라갔다. 곧 첨탑 꼭대기에서 봤던 전달자를 떠올릴 수 있었다.

이름조차 모르는 하찮은 암살자 놈.

그 만남부터 미래가 어그러지기 시작했다.

카멜은 미래가 뒤틀린 원인으로 ‘그’를 떠올렸다. 자신의 다음 행보를 예측할 수도 있는 존재.

수를 읽힐 수 있으니 어려운 상대였다.

‘어떻게 상대해야 할까.’

고민하던 카멜은 곧 한 가지 방책을 떠올렸다.

“의외성밖에 없나?”

‘그’의 예측을 벗어나려면 변수가 필요했다. 그조차 예측하지 못할 변수 말이다.

그는 에토르를 떠올렸다.

토바른 전역을 손아귀에 넣고 세력 확장을 꿈꾸려면 반드시 손에 넣어야 하는 땅.

과거에는 에토르를 점령하는 데만 3년이란 시간이 걸렸다.

부친과 형제.

이들을 정리하고 블라이어를 정비하는데 긴 시간을 잡아먹었기 때문이다.

‘앞으로 8개월.’

하지만 앞으로 계획한 밑그림대로 흘러간다면 에토르는 8개월 뒤에 자신의 수중에 떨어진다. 회귀 전과 비교하면 엄청난 속도인 셈이다.

그럼에도 카멜의 표정은 만족스럽지 않았다.

“무리를 좀 해야겠어.”

카멜은 큰 피해를 보더라도 점령 시기를 앞당겨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의 예측에서 벗어나려면 ‘의외성’이 필요했고, 시간으로 상황을 뒤틀면 수많은 변수를 불러올 수 있었다.

얼마나 앞당겨야 할까?

‘4개월 안에 에토르의 성벽에 깃발을 꽂는다.’

절반의 시간을 줄인다.

수많은 피가 흐르겠지만, 미묘하게 계획이 계속 삐거덕거리는 느낌이라, 강행할 필요성을 느꼈다.

카멜은 마차를 툭툭 두드렸다. 리옹이 말을 몰고 다가오자, 카멜은 창문을 열고 물었다.

“‘광의의 예언자’는 어디쯤 있지?”

“정보원의 소식대로라면 엘레토르 성곽을 넘어가기 전에 만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마차를 버리고 움직인다.”

“네? 하지만…….”

“서둘러라. 리옹.”

갑작스러운 지시에 리옹은 살짝 당황했지만, 곧 표정을 고치고 수하에게 주군의 말을 가져오게 했다.

“이럇!”

카멜은 거칠게 말을 몰았다.

계획을 앞당기려면 기존의 일부터 빠르게 처리해야 했다.

그중 광의의 예언자와의 만남은 앞으로 계획을 정하는 데 꼭 필요한 일이었다. 지금이 아니면 쉽게 만날 수 있는 인물이 아니라서 서둘러야 했다.

시끄러운 말발굽 소리를 뒤로한 채 카멜 일행은 쉬지 않고 엘레토르 성곽이 위치한 북쪽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반나절을 쉬지 않고 이동했다.

어둠으로 물들었던 숲이 서서히 밝아지기 시작했다. 동이 트며, 색 바랜 성곽을 비추었는데, 그 길이가 끝도 없이 펼쳐졌다.

엘레토르 성곽.

토바른 지역의 북쪽 경계를 가르는 상징이었다. 그 성곽에 도착하기 전, 카멜 일행은 대규모의 행렬과 마주했다.

“멈춰라!”

리옹이 앞서가던 행렬을 가로막았다. 선두에서 움직이던 마차는 무척이나 화려했는데, 한눈에 봐도 높은 신분의 사람이 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잠시 후, 뒤늦게 리옹 곁으로 카멜이 기사들을 이끌고 나타나자, 마차를 호위하던 기사들이 일제히 무기를 뽑아 들었다.

“제때 맞춰서 왔군.”

카멜은 마차에 달린 깃발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엘레토르 성곽 너머부턴 오르도르의 숲이 펼쳐진다. 초대받지 못한 자는 들어갈 수 없는 마녀들의 숲.

다행히 성곽을 넘어가기 전에 예언자의 마차를 잡을 수 있었다.

카멜은 리옹이 건넨 손수건을 받아 땀을 닦았다. 체력적으로 무리했다. 하지만 꼭 만나야 할 인물이 앞에 있었다.

“누구신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마차를 대표하는 덩치 큰 기사가 카멜 앞에 다가왔다. 중무장한 기사였는데, 한눈에 봐도 강해 보였다.

‘리옹이 감당할 수준인가?’

눈앞의 기사들은 오르도르 숲 너머에 자리한 클라크 대공의 기사들. 대공의 직계 기사들이 약할 리 없겠지만, 손꼽히는 정도는 아니었다.

대공의 영지는 기사보단 마법사들의 영향력이 월등히 강한 곳이었으니까.

실력이 궁금했지만, 그럴 기회는 없을 것 같았다.

자신은 ‘손님’ 입장에서 예언자를 찾아온 것이니까.

“답을 구하고자 왔다.”

“답에는 대가가 따릅니다.”

기사의 말에 카멜이 손을 까닥이자, 뒤쪽에서 리옹이 작은 상자를 가져왔다. 상자를 열자, 그 안에는 황금이 가득 들어있었다.

황금을 확인한 순간, 팽팽했던 대치가 삽시간에 누그러졌다.

예언자의 손님.

대가만 확실하다면 신분은 중요치 않았다. 그것이 대공이 정한 기준이었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기사는 고개를 살짝 숙인 뒤 마차로 돌아갔다.

잠시 후, 마차 문이 열리더니 천으로 눈을 가린 노인이 시종들의 부축을 받고 천천히 걸어 나왔다.

광의의 예언자.

그의 예언 능력은 토바른을 넘어 왕국 전역까지 퍼질 정도로 유명했는데, 그 능력을 빌리려면 천문학적인 황금이 필요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예언자를 한 번이라도 보기 위해 황금을 아끼지 않았다.

2년에 한 번, 예언자는 클라크 대공의 부탁으로 손님들을 찾아가 황금을 받고 예언을 봐줬는데, 지금이 딱 그 시기였다.

“인연이 아닌 이가 찾아왔구려.”

“…….”

카멜은 눈앞의 노인을 처음 본다.

회귀하지 않았더라면 만나보지 못했을 인연. 예언자는 그것을 느끼고 있는 건가?

카멜은 준비해둔 의자에 앉아 예언자를 마주 봤다.

“예언자는 이름이 없나?”

“답을 구하는 것이오?”

예언자의 답에는 황금이 든다. 카멜은 피식 웃고는 말을 이었다.

“관두지. 내가 답을 구하는 건 사람의 생사다. 혹시 알 수 있나?”

“나와 만난 적이 없다면 불가능하오.”

카멜은 짧게 혀를 찼다. 전달자 놈과 감시자 케플린의 생사를 확인해볼 수단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럼, 내 죽음은? 내 죽음에 관해 예언해 줄 수 있나?”

미래가 뒤틀린 탓에 확인이 필요했다.

예언자는 카멜 앞에서 구슬을 만지작거렸다. 잠시 후 떨림과 함께 주황색으로 빛나는 구슬,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죽음의 손길은 보이지 않소. 당분간은.”

“당분간은? 그게 무슨 뜻이지?”

“그대의 행동에 따라 향후 언제든 미래가 달라질 수 있다는 뜻이오. 내가 말해줄 수 있는 건, 근 시일의 죽음뿐이지.”

“죽음이 보인다면 피할 수 있나?”

“피할 수도, 피하지 못할 수도 있소. 다만, 피한다면 그대의 가치만큼 대가를 치를 것이오.”

“대가? 무슨 대가?”

“그대에게 소중한 것.”

카멜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리옹은 그 표정에서 주군의 심기가 불편하다는 것을 눈치챘다.

“감히, 누가 나에게 소중한 것을 가져간단 말이냐.”

예언자는 그저 말없이 하늘을 가리켰다. 그게 신이 될 수도, 하늘이 될 수도, 운명이 될 수도 있다는 애매한 답과 함께.

“답변이 불성실해.”

“사실만 말하는 것이오.”

만족스러운 답변은 아니었지만, 그 정도면 충분했다. 계획에 당장은 큰 위협이 없다는 뜻이었으니까.

“묻고 싶은 게 또 있는데.”

“답을 구하려면 대가를 내놓으시오.”

“참으로 비싼 입이야. 당신.”

카멜이 리옹을 바라보자, 리옹은 또 다른 상자를 예언자 앞에 내려놓았다.

“근래에 받은 ‘신명’이 있나?”

“음, 하나가 있소만…….”

무슨 이유인지 예언자는 그것에 관해 말하기 싫은 표정이었다.

“그 주인의 생사를 확인할 수 있나?”

“할 수 있소. 신명은 특별하니까. 답을 원하시오?”

카멜이 고개를 끄덕이자, 예언자는 구슬을 살피더니, 잠시 후 구슬에서 손을 놓고 고개를 끄덕였다.

“살아있소.”

카멜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다행히 살아있나?’

그는 도네콜린트가 살아있다고 판단했다.

생사를 확인했으니, 찾기만 하면 될 것 같았다. 카멜은 확인차 물었다.

“신명의 내용을 듣고 싶다.”

“신명은 신이 주신 계시, 무분별한 발설로 세상에 영향을 준다면 큰 대가를 받게 된다는 것을 아시오?”

“그 두 눈이 실명된 것처럼 말인가?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지.”

“…….”

“선택권은 그대에게 없는 것을 알고 있다.”

카멜의 지시에 리옹은 세 개의 상자를 기사에게 가져갔다. 황금이야 금광 개발만 끝나면 천문학적으로 얻을 수 있다. 굳이 아낄 필요가 없었다.

상자를 확인한 기사는 예언자 옆에 섰다.

“손님께서 답을 원하십니다.”

“…하지만.”

“그대는 대공께 죄인임을 잊지 마십시오.”

무미건조한 기사의 말에 예언자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천을 가린 눈으로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는데, 그 모습에 카멜은 묻고 싶었다.

스스로의 죽음도 볼 수 있냐고.

“내가 말해줄 수 있는 건 신명의 내용 중 한 줄뿐이요. 나머지는 보이지 않아.”

“신명이 보이지 않는다고?”

“이유는 묻지 마시오. 나도 처음 겪는 일이니까.”

“…….”

카멜의 얼굴에 처음으로 당혹의 감정이 스쳐 갔다. 도네콜린트의 신명은 모두가 알 만큼 널리 퍼진 신명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광의의 예언자조차 보지 못하는 신명이라니.

갑자기 ‘그’가 떠오른 건 왜일까?

“말하라!”

그가 원하는 답은 도네콜린트의 신명, ‘세이렌의 비명’이었다.

재촉 섞인 언성으로 답을 구하자, 예언자는 빛나는 구슬을 만지작거렸다.

시력은 잃었지만, 그의 뇌리에는 구슬에 내려진 신명의 글자가 또렷이 박혔다. 그중 대부분이 해석이 안 되는 글자였다. 신명의 글귀 중 가장 밑단의 내용만 해석한 것이 고작이었다.

예언자는 궁금했다.

운명의 아케인이나 마녀 릴리도 이 신명을 전부 해석할 수 있을까.

그건 모른다.

하지만 그들이라면 절대 이 신명을 발설하지 않을 것이라 확신할 수 있었다.

이것을 계기로 죽음이 찾아올 수도 있겠지만, 죄인에겐 선택지가 없었다.

예언자의 입이 떨리듯 열렸다.

[XX XXXX – XX XX XXX]

[X XX XX.]

[세이렌의 찬가.]

“세이렌의 찬가.”

카멜의 표정이 악귀처럼 일그러졌다.

비명이 아닌 찬가?!

신명의 주인이 바뀌었다.

* * *

월급쟁이로 팍팍하게 살아가던 내게 하루 중 가장 소중하고 행복한 시간을 고르라면 잠을 청하는 때였다.

바스락거리는 보드란 이불 촉감 아래, 소설 악당들이 강해지면 벌어지는 일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그 꿀 같은 시간.

그 시간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날아갈 듯 좋아서, 퇴근길은 언제나 발걸음이 가벼웠다.

다만, 새벽이 되어 스마트폰을 끄고 눈을 감을 때면 그 환상은 와장창 깨진다. 잠이 들고 깰 때는 어찌나 시간이 쏜살같이 흘러가던지.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햇살만 봐도 기분이 더러웠다.

아, 출근 시간이다.

‘아오, 시발 꿈!’

의식이 돌아오고, 햇살 사이로 비추는 풍경이 커튼이 아니라 숲 한복판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회사를 안 나가도 된다는 이 안도감.

이딴 사실 하나로 행복감을 느껴야 하는 신세가 참으로 기가 막혔지만, 이 순간만큼은 즐기고 싶었다.

소설 속에 떨어진 이후 처음으로 긴 꿈을 꾸었다. 평범한 회사원의 삶이 그려졌고, 전까지 난 그렇게 살아왔다.

되새겨 보니, 현실의 삶은 확실히 재미는 없지만, 소소한 행복과 안정감이 있었다.

세렝게티 정글에 뚝 떨어져 보니, 그때가 좋았구나 하는 생각마저 든다.

“그래도 출근 시간이 싫은 것을 보면 어떻게 월급쟁이로 살았는지 몰라. 끙!”

몸을 일으키려는데 물먹은 솜처럼 무거웠다.

시간이 얼마나 흐른 거지?

주변을 둘러보니, 사람이 없었다.

칼을 찾기 위해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데 왼쪽 손목에 턱― 거슬리는 감촉이 느껴졌다. 손을 올려보니, 손목에 두꺼운 팔찌가 채워져 있었다.

검은색 바탕의 투박한 팔찌.

팔찌를 보니 시술이 성공리에 끝난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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