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당에게서 살아남는 법-37화 (37/130)

37화 백(百) 개의 심장

발걸음을 떼는데 힘이 쭉 빠진 듯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너무 쉬어서 근육이 말라버린 건가?

꼬르르륵―

뱃가죽이 달라붙을 정도로 배가 고팠다.

기분 탓이 아니었다.

상당 시간 오래 누워 있던 게 분명했다.

‘아, 치킨 뜯고 싶다.’

꿈 때문인지, 배달 어플로 자주 시켜 먹던 치킨 콤보 세트가 떠올랐다.

기름에 바사삭 튀긴 현대의 맛.

오늘 같은 날 육즙이 흐르는 고기 맛 좀 봐야 하는데.

이런저런 잡생각을 하며 나무숲 사이를 거닐고 있는데, 머리 위로 검은 그림자가 뚝 떨어졌다.

“정신이 언제 돌아올까 싶었는데, 오늘이었나?”

익숙한 기척과 목소리.

칼이었다.

난 칼이 떨어진 나무 위를 올려다봤다.

높다. 아파트 5층 정도 높이?

그런데, 떨어질 때 충격은커녕 소리도 잘 안 들렸다.

그만큼 몸이 가벼워졌다는 뜻.

“컨디션은 전부 회복하신 겁니까?”

“충분히 쉬었으니까.”

“제가 꽤 오래 누워있었나 보네요.”

“벌레의 움직임이 예상보다 더뎠어. 일주일이 흘렀다.”

일주일?

어째 뼈마디 전신이 쑤신다고 했더니, 무려 일주일이나 정신을 잃고 있었다. 그리고 인간이 일주일을 굶어도 이리 멀쩡할 수 있다는 걸 처음 알게 됐다.

“의식도 없는 환자만 놔두고 전부 어딜 간 겁니까?”

“반경을 늘려서 경계를 세운 것뿐이야. 아지트는 안전해.”

“무슨 일이 생긴 겁니까?”

“약간 귀찮아지긴 했지.”

“네?”

칼은 따라오라는 손짓을 한 뒤 앞장서서 걸었다.

방향을 보니 아지트로 다시 가려는 것 같았다.

난 그 뒤를 따르며 물었다.

“시술은 잘됐습니까?”

“성공했어. 팔찌 보이지?”

“네.”

“벌레는 팔목에 안착했어. 팔찌가 벌레의 생명력을 갉아먹기 시작할 거야. 말라 죽을 때까지 눈치채지 못할 양으로.”

“무슨 마법이길래.”

“라이프 드레인(Life Drain), 대상의 생명력을 갈취하는 흑마법이야. 무시무시한 흑마법이지만, 팔찌에 걸린 수준은 벌레조차 간지럼을 탈 정도지.”

“용케 이런 걸 만들어줬네요.”

“흑마법사지만 나름 선을 지키는 녀석과 알고 지내고 있거든.”

한 달 동안 벌레 한 마리를 죽일 수 있는 미니멈 라이프 드레인이라니, 신박하긴 했다.

벌레에게 자극을 주지 않고 제거하는 방식인데, 칼이 말한 대로 딱 붐(Boom) 제거용 아티팩트 같았다.

이걸 생각하고 제작하다니.

그 흑마법사가 누굴까.

“배고프지?”

그 의문은 곧 칼의 물음에 눈 녹듯이 사라졌다.

“당연한 걸 왜 묻습니까? 고기 없습니까?”

“그 비슷한 건 있지.”

아지트로 복귀한 칼은 작은 주머니를 건넸다.

그 안에는 마른 육포가 잔뜩 담겨 있었다.

육즙은 없지만, 이게 어디냐.

난 자리를 잡고 허겁지겁 육포를 입에 욱여넣었다. 역시 배고프면 뭐든 맛있는 것 같았다.

칼은 말없이 내 모습을 한동안 지켜봤다. 그 시선에 먹던 육포를 꿀떡 삼키곤 입을 열었다.

“뭡니까? 물어보고 싶은 게.”

“눈치는 귀신이라니까. 엘튼의 눈치가 네놈의 반만 닮았으면 바랄 게 없을 텐데.”

“눈치보단 믿음이 더 중요한 거 아닙니까?”

“쓰다 버릴 패라면 믿음만으로 충분하지. 하지만 평생 곁에 둘 녀석이라면 믿음 가지곤 부족해. 높은 위치에 있다면 더더욱.”

“눈치가 왜 중요합니까?”

“그 어떤 조건보다 생존과 직결되는 덕목이니까. 우린 암살자야. 표적 중에 암살자보다 약한 자는 없어. 늘 강한 상대를 두고 눈치 싸움을 벌여야 하지.”

“기다리느냐, 사냥하느냐, 도주하느냐. 타이밍을 잘 재라는 말이군요.”

“맞아. 그 찰나가 생사를 가르지.”

내 답에 칼은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서 클레이튼.’

칼은 눈앞의 사내를 응시했다.

물주머니를 벌컥벌컥 마시면서도 배가 고픈지 움켜쥔 육포 덩어리만 노려보는 녀석.

짧은 시간이지만, 녀석과 다양한 주제로 대화하며 시간을 보냈다.

처음에는 달라붙어서 꼬치꼬치 따지고, 이것저것 물어보길 반복해서 짜증이 났는데 시간이 갈수록 그 대화에 재미를 느꼈다.

‘대화가 통한다.’

40년 경험의 노련한 자신과 사고 능력이 비슷한 눈높이에 있다는 뜻이다.

고등 교육을 받은 것 같지 않았는데 판단에 대한 계산이 빨랐고, 사회 경험이 풍부했다.

거기에 눈치와 빠른 이해력까지.

오랜만에 욕심이 나는 인재를 만났다.

한번 제대로 키워보고 싶을 정도.

“2성에 올랐던데.”

“아, 시술 당일에 각성했습니다. 깜빡하고 얘기를 못 했는데, 어떻게 아신 겁니까?”

“그 덕에 시술이 오래 걸렸으니까.”

“네? 그게 문제가 됐습니까?”

“1성에 맞춰서 양 조절을 했거든. 마나가 돌면 베텔의 독이 해독되는 거 알고 있지? 독이 중화되는 바람에 벌레의 움직임에 이상이 생겼어.”

“아.”

이 문제를 생각지 못했다.

설마, 2성 각성이 시술에 방해가 될 줄이야.

급히 더 많은 독을 투여해 문제를 해결했지만, 그 부작용으로 일주일 동안 의식을 잃었던 것 같았다.

위험할 뻔했는데, 운이 좋았다.

아니, 칼이 관심을 쏟았기 때문이겠지.

난 다시 한번 칼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목숨을 빚졌네요. 감사합니다.”

“뭐, 나도 네 덕에 살아남았으니까. 슬라임 배 속 경험은 정말이지 끔찍했거든.”

“끔찍하긴 했죠.”

육포 주머니가 비워지는 동안, 우린 가볍게 대화를 주고받았다. 잠시 후, 칼은 망설이더니 내게 질문을 던졌다.

“여기서 벗어나면 갈 곳이 있나?”

영입 제안.

난 그 물음에 바로 답하지 못했다. 그런 나를 보며 칼이 말을 이었다.

“갈 곳이 없다면 우리 조직으로 들어와. 공공의 적을 두고 있으니 협력 관계 그 이상도 가능할 것 같은데.”

“죄송합니다.”

하지만 곧 거절의 의사를 밝혔다.

칼과 깊은 인연을 맺는 건 반길 만한 일이지만, 조직에 들어가는 것과는 별개 일이었다.

어딘가에 소속되면 움직임에 제한이 생기니 피하는 게 맞았다.

암살자의 몸으로 빙의했지만, 난 암살자로 끝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이 소설의 끝자락까지 살아남으려면 그 누구보다 강해져야 했으니까.

내 뜻에 칼이 아쉬운 눈빛을 보냈지만, 그것도 잠시 그는 곧장 다른 주제로 넘어갔다.

“네가 각성한 신비 능력, 언제쯤 알려줄 거지?”

“지금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번에 칼이 내 진짜 이름을 물었을 때 신비 능력에 관해서도 언급했었다. 하지만 당시엔 고대 문양의 정확한 능력을 알지 못해서 며칠 시간을 달라고 했다.

고대 문양의 능력.

생체 마석을 흡수하고, 저번에 흑주술사인 여인을 상대하면서 고대 문양에 대해 많은 것을 파악했다.

칼은 여전히 고대 문양을 신비의 능력으로 착각하고 있었지만, 그 착각을 바로잡을 생각은 없었다.

내 신비 능력인 인챈트는 히든카드로 남겨둘 생각이었다.

살아남기 위해 힘 일부를 숨기라고 가르친 것이 칼이니 나중에 밝혀지더라도 이해해 줄 것이다.

“정화(淨化)?”

“네, 불안정하거나, 불순한 기운을 억누르거나, 제거하는 능력입니다.”

“그런 특성은 성직자나 사제 계열의 능력인데 혹시 신을 모시나?”

“전 무신론자인데요?”

“…무신론자? 실존하는 신을 부정하다니. 웃기는 놈이네. 악마가 씌었다고 사제들이 거품을 물고 달려들겠어.”

무신론자인 게 여기선 문제가 되려나?

사제나 성직자가 신의 힘을 빌려 기적을 일으키는 세상이니, 그럴 수도 있겠단 판단이 들었다.

마녀사냥은 사양인데.

신이라도 하나 골라서 모셔야 하나?

소설 속 신들에 대해 잠시 생각하는데, 칼이 대뜸 물었다.

“그럼, 치료는?”

“치료요?”

“능력으로 자신 말고 타인도 치료할 수 있냐고 묻는 거야.”

아군에게 능력을 사용한다라.

일단 내 능력은 사제의 능력과 그 성질이 달랐다. 치료에 집중된 사제의 능력과 달리, 내 능력은 그보다 더 광범위했기 때문이다.

물리적인 것을 넘어, 정신 쪽에도 효과를 보인다고 해야 하나?

“잘 모르겠지만, 가능할 것 같습니다.”

“그래?”

저번에 여인이 내게 건 저주도 제거했으니, 타인에게 걸린 저주도 치료가 가능할 것 같았다.

“능력 사용 횟수는?”

“유지 시간은 얼마나 되지?”

“능력의 범위는?”

칼은 내 능력에 관해 여러 가지 질문을 던졌고, 난 숨김없이 알려줬다.

칼이 엘튼의 불 특성을 말해줬듯이 내 능력도 함께 생활하는 한, 숨길 수 있는 성질이 아니었다. 숨기면 의심만 살 뿐이니, 착실하게 답하는 게 맞았다.

마지막에는 나뭇가지로 바닥에 큰 원을 그렸다.

빛무리의 범위.

원의 면적을 살피며 칼은 고민스런 표정을 지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아지트 바깥이 소란스럽다고 했다. 이 타이밍에 내 능력을 물어본 게 바깥 일과 관련이 있나?

잠시 후, 칼은 짧게 혀를 차며 말했다.

“네 능력을 빌려도, 다 같이 탈출하는 건 힘들겠어.”

“탈출이요?”

“일단 바깥 상황을 알려줄게. 사람들이 무서운 속도로 흘러들어 오고 있다. 도적 떼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도적 때보다 상황이 더 심각하다고?

그럼 도미닉이 아예 대놓고 영지 주변 마을을 털고 있다는 말이잖아.

의식이 없는 일주일 사이에 벌써 그 시기가 된 건가?

“괴물들의 정확한 정체는 키메라야.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생체 병기지.”

“도미닉의 정보가 거기까지 퍼졌습니까?”

“더 있지. 클라크 대공의 직속 마탑 출신으로 몬스터의 생체 조직을 연구하던 뛰어난 생체 공학자였던 모양이야. 지금은 인간까지 재료로 쓰는 미치광이 마법사가 됐지만.”

내 예상이 맞았다.

도미닉의 신상과 그가 부리는 키메라들의 자세한 정보가 토바른 전 지역에 퍼지고 있었다.

그 원인은 두 가지일 것이다.

‘학살자가 움직였다.’

하나는 학살자가 생체 마석에 관한 소문을 퍼트린 것이고, 다른 하나는 베네타와 관련되어 있었다.

“혹시 잡혀 온 이들 중에 이종이 있었습니까?”

“이종?”

칼은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사흘 전부터 이종들이 보이기 시작했어. 지금은 그 수가 제법 돼.”

“혹시 이종 중에 엘프를 보셨습니까?”

“엘프는 없었어.”

여성 엘프가 나오길 바랐는데, 칼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곳에 엘프 자체가 없다라.

그럼, 이곳이 아닌 또 다른 실험체 감옥에 그 엘프가 갇혀 있다는 건데.

“그건 왜 묻는 거지?”

“알아볼 게 있어서요. 이곳에 앞으로 이종들의 비율이 빠르게 올라갈 것 같거든요.”

“이종들이?…… 설마?”

칼은 내 말에서 숨은 뜻을 파악한 눈치였다.

“베네타인가? 도미닉이 그곳을 습격하고 있어?”

토바른 지역에서 이종들이 뭉쳐 사는 곳은 베네타뿐이다. 도미닉이 키메라 군단을 이끌고 베네타 주변 마을을 휘젓고 있다는 뜻이었다.

도미닉이 이종을 노리는 이유는 인간을 재료로 한 연구에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이종 사냥.

그 결과, 한 사건이 터졌다.

‘엘프 샤르바딘 실종사건.’

샤르바딘은 베네타의 군주 도르네프의 여인이다.

푸른 장미 5층에서 도르네프의 질기고 긴 구애를 받고 혼인한 미모의 엘프 말이다.

이 실종 사건으로 샤르바딘과 접점이 있는 베네타와 검은 장미가 움직이게 된다.

그 결과의 끝은 두 세력의 공멸(共滅).

‘이미 한 차례 부딪쳤을지도.’

훗날, 학살자는 토바른 전체를 손아귀에 넣게 되는데, 그 기회를 만들어준 인물이 바로 도미닉 후아튼이었다.

토바른의 3강으로 불리는 블라이어, 에토르 그리고 베네타의 힘의 균형을 무너트린 미치광이 마법사의 등장.

한숨 자고 일어난 사이, 학살자의 버프 이벤트인 ‘백(百) 개의 심장’이 시작된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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