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포위당했다
순식간에 키메라들이 몰려왔다.
키메라들에게 포위되자, 엘튼은 특성의 힘을 개방했다. 작은 개체뿐이지만 수가 많아 위협적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화르륵―!
입술을 깨문 채 그는 단검을 빠르게 휘둘렀다.
노출된 암살자는 더는 암살자가 아니다. 엘튼은 마치 전사처럼 키메라 무리와 싸웠다.
검날을 타고 뻗치는 이글거리는 불꽃.
불꽃은 모든 것을 태울 듯 사납게 일렁였다. 불꽃에 베인 키메라들은 불에 삼켜지며 발버둥을 쳤다.
매캐한 냄새가 숲을 가득 채웠다.
“헉. 헉. 헉….”
그을린 재로 화한 키메라들.
엘튼은 단검을 내리며 거친 숨을 헐떡였다. 특성 발현에는 많은 체력을 소비한다. 어지러움이 몰려왔다.
‘망할 새끼!’
엘튼은 나무 위를 노려봤다. 버티라는 신호만 남기고 사라진 녀석. 이 주변에 있는 것 같은데, 도움은커녕 구경만 하고 있다.
‘대체 무슨 꿍꿍이지?’
엘튼은 칼의 눈을 믿었다.
이리 자신을 미끼로 던져놓고 무책임하게 움직일 녀석이 아니었다. 계획이 있다는 뜻인데, 이런 식의 계획은 사절이었다.
퉁―!
“……!”
녀석이 나무 위에서 석궁을 쐈다.
엘튼은 볼트가 떨어진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우거진 숲 바로 앞에 박힌 볼트.
마치 조심하라는 듯 경고를 날린 느낌이었다.
쿵. 쿵. 쿵. 쿵.
“……뭐?”
볼트가 부르르 떨리며 지축이 거칠게 울렸다.
박힌 볼트 쪽 숲이 양 갈래로 쩍 갈라지더니, 거대한 그림자가 앞으로 돌진해왔다.
빠르다!
엘튼은 몸을 옆으로 날렸다.
크아아아앙―!
가슴을 쿵쿵 치며 괴성을 터트리는 압도적인 거체.
5미터에 이르는 대형 몬스터, 오우거의 형체를 띠었지만, 그보다 배는 비대한 몸통에 팔이 여섯 개나 달린 괴생명체였다.
크고 흉측하다.
엘튼은 짓쳐 오는 팔들을 회피하며 단검을 크게 휘둘렀다. 하지만 피부에 그슬린 자국만 남을 뿐, 불꽃이 타오르지 않았다.
화력 부족.
특성이 안 통한다.
“…큭!”
자신이 상대할 수 있는 괴물이 아니었다.
칼을 단숨에 삼켰던 거대 슬라임과 같은 등급의 키메라. 위의 녀석이 합류해도 쉽지 않을 것 같았다.
“도망……!”
엘튼이 다급히 외치며 몸을 빼려는 찰나, 사방에서 팔들이 쏟아졌다.
결국, 팔 하나가 엘튼을 벼락같이 낚아챘다. 잡힌 순간 지독한 압박감이 느껴졌다. 완력으로 풀 수 있는 성질이 아니다.
“…빌어먹을!”
욕설과 동시에 허공에 뜬 엘튼은 쩍 벌어진 입 속을 구경했다.
먹힌다!
엘튼의 표정이 급박함으로 물들었을 때, 그를 삼키려던 키메라가 멈칫했다. 올려다본 시선으로 눈부신 물체가 다가왔기 때문이다.
우웅―!
빛을 머금은 두 발의 볼트.
관통의 힘이 실린 볼트는 엘튼을 지나쳐 부릅뜬 키메라의 눈동자를 무참히 꿰뚫었다.
크아아아아악―!
키메라가 고통을 지르며 엘튼을 집어 던졌다. 나무에 처박히려는 엘튼을 누군가 부드럽게 받아냈다.
녀석이었다.
“이 미친 새끼가!”
“워, 진정하라고. 저런 무식한 괴물이 나올 줄 누가 알았나?”
“이따 다시 얘기하지.”
엘튼은 거칠게 나를 밀어내곤 자세를 바로잡았다. 그는 키메라를 빠르게 살폈는데, 키메라는 두 눈을 움켜쥔 채 쓰러져 있었다.
“쓰러트린 건가?”
“글쎄, 아직 확신하긴 일러.”
“뇌까지 타격이 간 것 같은데.”
두 발의 볼트가 정확히 두 눈동자를 관통했다. 엘튼의 말처럼 뇌까지 휘젓고 들어갔을 거다.
애초에 노린 것이긴 한데.
뇌가 곤죽이 됐다면 보통은 즉사하겠지만, 눈앞의 괴물은 시체들을 이어 붙인 키메라였다.
상식으로 판단하면 안 된다는 뜻이고, 그 말은 곧 사실로 다가왔다.
비틀거리며 일어나는 놈이 보인다. 눈동자가 파괴됐음에도 놈은 정확히 우리 쪽으로 몸을 튼 채 그르렁거렸다.
쿵쿵 발걸음을 내딛는 모습.
엘튼은 질린 듯 신음을 흘리며 내 어깨를 꽉 붙잡았다.
물러나자는 뜻.
하지만 난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금이 아니면 거대 키메라를 사냥하는 건 불가능하다.
조금 전 전투를 지켜보며 한 가지 확신이 생겼다.
‘살기를 드러내지 않아.’
수거 명령이 내려진 키메라는 실험체를 죽이지 않는다.
삼키는 행위는 실험체를 마법진 바깥으로 꺼내기 위함이지 잡아먹기 위함이 아니었다.
숲 바깥에선 저 주먹에 곤죽이 될 테지만, 이곳에서 저놈의 패턴은 삼키는 행위로 정해져 있었다.
지금이 사냥 기회.
첫 번째 기습에서 처리했다면 좋았겠지만, 아무래도 계획했던 대로 움직여야 할 것 같았다.
“저놈이 쓰러지면 날 찾아서 꺼내줘.”
“뭐? 그게 무슨…!”
엘튼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난 단검을 움켜쥔 채 거대 키메라를 향해 돌진했다.
설명은 사치다.
듣는 순간, 날 미친 또라이 새끼라고 할 테니까.
후―
짧게 숨을 내뱉곤 오른쪽 소맷자락을 걷어 올렸다.
오른손 문양이 모습을 드러내자, 떨렸던 마음이 빠르게 가라앉았다.
고대 문양의 능력을 믿는다.
나는 이를 악물곤 키메라를 향해 몸을 날렸다.
“못생긴 괴물 새끼야! 식사 시간이다!”
뒤쪽에서 엘튼의 새된 비명이 들려왔다. 저 녀석 눈에는 내가 자살특공대로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이건 합리적인 움직임이라고.
‘이미 한 번 증명된 방법이기도 하고.’
허공에서 날 덥석 움켜잡은 녀석은 본능적으로 날 집어삼켰다.
씨발, 괴물 아가리 안으로 스스로 들어가는 꼴이라니.
알고 있어도 심장이 덜컥 내려앉은 기분이다.
예상대로 놈은 씹지 않고 날 그대로 꿀꺽 삼켰다.
좁은 통로로 미끄러지듯 들어갔다.
끈적이는 체액이 내 몸을 뒤덮었다.
불쾌한 감촉과 역겨운 냄새, 그리고 서서히 무뎌지는 감각.
슬라임 때처럼 몸이 마비됨을 느꼈다. 키메라의 체액은 이렇듯 실험체를 마비시키는 건가?
꿀렁이는 목구멍을 지났을 때, 팔다리가 저릿했다. 몸이 굳기 전에 움직여야 했다.
꿀렁―
공간이 있는 피부 벽에 철퍼덕 쓰러진 순간 단검이 번뜩이며 눈 부신 빛을 발했다.
인챈터의 능력.
관통의 기운이 실린 단검으로 피부 벽을 힘껏 찌른 나는 단검을 움켜잡곤 두 눈을 부릅떴다.
“크아아아아!”
번쩍!
손목에 새겨진 문양에서 황금빛이 감돌기 시작했다.
* * *
“…아.”
엘튼은 입을 벌린 채 머리를 움켜잡았다. 이성적인 사고가 마비된 것 같았다.
키메라의 입 속으로 스스로 몸을 던진 미친 새끼.
이 상황을 칼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혼란도 잠시, 괴성을 듣고 빠르게 몰려드는 키메라 무리에 엘튼은 흠칫하곤 다급히 주변 나무 위로 올라가 몸을 숨겼다.
거대 키메라도 벅찬데 사방이 키메라로 빠르게 채워지는 상황.
동료의 구조는커녕 자신의 안위조차 위태로워 보였다.
‘어떡하지?’
엘튼이 이도 저도 못 하고 끙끙대고 있을 때였다.
번쩍―
“……!”
갑작스러운 빛무리.
엘튼은 황급히 나뭇가지 사이로 몸을 웅크렸다. 그 틈 사이에서 엘튼은 빛의 진원지를 찾았다.
쩍 벌어진 거대 키메라의 입에서 황금빛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이 무슨!?”
쿵―!!!!!
상황을 파악할 틈도 없었다.
키메라의 입에서 황금빛이 터진 순간, 키메라가 힘없이 축 늘어졌다.
몰려오던 키메라들도 무슨 이유인지 괴성을 지르며 사라져 버렸다.
거대한 동체는 완전히 죽어버린 것처럼 아무런 미동도 보이지 않았다.
갑작스레 벌어진 일.
순간,
[저놈이 쓰러지면 날 찾아서 꺼내줘.]
녀석이 떠나가기 전에 했던 말이 떠올랐다.
엘튼은 다급히 나무에서 내려와 쓰러진 키메라에게 다가갔다. 거대한 동체 위에 오른 그는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삼켜진 지 얼마 되지 않아 빛이 터졌다. 키메라의 목과 가슴 부위에 귀를 대고 있던 엘튼은 멈칫했다.
무언가가 안에서 두드리는 감각.
녀석이다!
그는 단검을 꺼내 갈비뼈 아래 가죽을 힘껏 찔렀다.
“이익!”
5m가 넘어가는 동체.
가죽이 질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죽은 키메라 가죽을 가르는 건 시간만 있다면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었다.
피부를 갈라 손바닥 크기의 틈을 만들고, 틈 사이로 양손을 넣어 젖 먹던 힘으로 틈을 벌렸다.
흉물스러운 키메라의 내장이 드러났다. 안쪽을 살펴보니, 내장은 갈가리 찢겨 엉망이 되어 있었다. 녀석이 안에서 몸부림친 흔적.
“이, 이봐!”
그 살덩이들에 파묻혀 있던 녀석을 발견하곤, 엘튼은 그를 힘껏 끄집어냈다.
녀석은 정신을 잃은 채 의식이 없었다.
눈에 띄는 건 한 손에 움켜쥔 보랏빛 보석이랄까.
엘튼은 그를 업고 바닥으로 내려왔다.
끈적이는 체액을 뒤집어쓴 모습. 고약한 냄새에 엘튼은 얼굴을 구기곤 그의 가슴에 귀를 댔다.
미약한 숨결이 느껴지자, 그는 가슴을 여러 차례 압박하며 힘껏 후려쳤다.
“…커억!”
반응이 나타났다.
녀석이 정신없이 기침을 토하며 내장 조각을 뱉어냈다.
“정신이 좀 드나?”
“헉, 헉, 헉… 시발, 뒤질 뻔했네.”
난 목구멍에 걸린 살점 덩어리를 뱉어내며 욕설을 내뱉었다.
키메라를 쓰러트리고 마석을 취하는 것까지 계획대로 흘러갔지만, 변수가 발생했다. 놈이 죽자, 호흡이 턱 막히는 현상이 벌어진 것이다.
키메라의 숨구멍이 막히면서 호흡 곤란이 온 것인데, 엘튼이 조금만 늦었다면 처음으로 괴물 배 속에서 질식사하는 인간이 될 뻔했다.
“덕분에 살았다.”
“대화는 잠시 미루고 일단 움직여야 해. 또 몰려온다.”
엘튼은 나를 부축한 채 단검을 들어 올렸다.
크르르르르―
빛이 사그라들고 잠시 후, 주변을 서성이던 키메라들이 피 냄새를 맡고 다시금 몰려들었다.
녀석을 끄집어내기 위해 시간을 너무 소비한 것 같았다. 사방이 키메라들로 가득했다.
포위당했다.
“산 넘어 산이로군.”
“날 업고 그대로 달려.”
“저것들 사이로?”
“날 믿어.”
조금 전 황금빛을 떠올린 엘튼은 군말 없이 날 업고 키메라 무리 사이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칼이 언급했던 내 능력에 대해 어느 정도 눈치챈 듯한 모습이었다.
난 그 기대에 보답했다.
파아아아앗―!
빛이 터진 순간, 키메라들이 홍해의 기적처럼 쭉 갈라졌다. 빛에 노출되는 것 자체를 지독히 꺼리는 몸짓이다.
그 반응에 난 확신할 수 있었다.
‘키메라들에게 능력이 완벽히 먹힌다.’
거대 키메라를 잡으면서, 눈앞의 상황을 지켜보면서 능력이 완벽히 증명됐다.
도미닉이 제작한 키메라들을 더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말이다.
‘이러면 계승자의 신기를 노려볼 만한데.’
아레나 후아튼의 동력 원천, 레토니칼스의 심장.
실험체 감옥에 처음 떨어졌을 때만 해도 심장을 훔칠 계획을 떠올리긴 했지만, 시도는 엄두도 못 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도미닉의 가장 강력한 무기인 키메라를 무력화할 카운터가 생겼다.
불가능한 도박에서 목숨을 걸어볼 만한 도박으로 바뀐 것이다.
‘불사자의 심장이라면 목숨을 걸만한 가치가 있지.’
강력한 독 저항력, 지치지 않는 체력, 목이 잘리지 않는 이상 죽지 않는 초재생력.
레토니칼스의 심장이 백(百) 개의 심장으로 불리는 이유였다.
심장의 능력을 얻게 되면 앞으로 살아남는 데에 엄청난 도움이 될 거다.
‘눈덩이는 굴릴수록 커지듯, 시간이 지날수록 강해지는 속도에서 차이가 벌어질 거야.’
학살자는 물론, 앞으로 등장할 재앙 같은 놈들을 상대하기 위해서도 계승자의 신기를 얻을 필요가 있었다. 획득만 한다면 생존 난이도 자체가 달라질 테니까.
다만, 한 가지 문제점이 남았다.
‘그녀를 상대할 방법이 없어.’
아레나 후아튼.
그녀가 문제였다.
거대 키메라의 경우엔 몸속에서 빛을 터트렸기에 쓰러트릴 수 있었다.
하지만 아레나 후아튼은 인간형 생체 병기였다. 덩치가 나보다 작은 키메라였기에 빛은 피해 버리면 그만이었다.
치고 빠지다가 주먹 한 번 휘두르면 그대로 즉사.
그녀의 괴력은 기사조차 갑옷째 찢어버릴 정도로 강력했다.
도미닉을 제거하려면 그녀를 뚫어야 하는데, 그녀를 처리할 방법이 없었다.
‘이 퍼즐만 풀면 모든 게 해결되는데. 가장 큰 산이네.’
“이봐!”
“아…!”
신경이 딴 데로 쏠린 사이 빛이 옅어지자, 키메라들이 바로 이빨을 들이밀며 개미 떼처럼 달려들기 시작했다. 나는 빛을 바로잡으며 정신을 바짝 차렸다.
딴 생각 할 때가 아니었다.
피 냄새를 맡고 온 키메라들이 엄청나게 몰리면서 사방이 키메라 떼로 가득 찼기 때문이다.
방심한 순간, 잡혀갈 게 분명했다.
주변에 도망치던 인간들은 모조리 잡혀간 듯 키메라들의 시선은 나와 엘튼에게 몽땅 쏠려 있었다.
지옥에서 온 아귀가 따로 없었다.
문득 의문이 들었다.
“엘튼, 이 정도면 키메라들이 슬슬 물러날 시간 아니야?”
“이미 물러나고도 남을 시간이다!”
“그런데…….”
난 엘튼의 등 위에서 주변을 둘러보며 나직이 신음을 흘렸다.
“어째서 키메라가 더 몰리는 느낌이지?”
뭔가 이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