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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에게서 살아남는 법-42화 (42/130)

42화 도와드리겠습니다

지금껏 일정 수의 인간들이 잡혀가면 키메라들은 만족한 듯 감옥에서 물러났다. 하지만 지금 키메라들은 완전히 끝장을 볼 것처럼 덤벼들었다.

딱! 딱! 딱!!

빛을 피해 아가리를 들이미는 키메라들. 섬뜩한 이빨이 허공을 한가득 채웠다.

“빌어먹을! 이것들 왜 이래!”

나는 주변을 빠르게 살폈다.

포위망을 뚫고 달린 지 상당한 시간이 지났다. 그런데도 시선을 돌리는 곳마다 키메라들이 눈에 밟혔다.

바위 뒤에도, 숲 사이에도, 냇가 주변에도, 뒤에서 맹렬하게 뒤쫓는 키메라 무리뿐 아니라 사방에서 키메라들이 쏟아지고 있었다.

도망치던 인간들은 씨가 말랐고, 이 공간에는 나와 엘튼만 존재하는 기분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쫓아오는 키메라의 수가 많아졌다.

어느 순간 엘튼의 자세도 흐트러졌다.

“괜찮아?”

“아직은…….”

엘튼은 괜찮다고 했지만, 표정은 무척 지쳐 보였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

난 이를 악물고 빛을 유지하는 데 집중했다. 유지에도 마나와 체력이 필요했다. 체력이야 엘튼에게 업혀 가는 상황이니 아낀다 쳐도 마나는 고작 2성일 뿐이었다.

빛 유지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서둘러 쉴 곳을 찾아야 하는데, 문제는 딱히 숨을 만한 장소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첫 번째로 키메라들의 시선을 피할 방법이 없었다.

“베텔의 독이 효과를 보이려면 시간이 얼마나 필요하지?”

“10분.”

“빌어먹을, 더럽게 오래 걸리네.”

“지금 상황에서 숨는 건 무리다.”

이대로 가다간 꼼짝없이 당할 판이다. 결국, 엘튼이 결단을 내렸다.

“내가 시선을 끌겠다. 넌 그 사이에 도망쳐.”

“지랄하네. 주변을 봐봐. 이게 지금 한 명이 시선을 끈다고 되는 상황으로 보여?”

“…….”

“닥치고 경계 쪽으로 가.”

“경계?”

“방법이 없다면 운에 맡겨야지.”

내 의도를 눈치챈 엘튼은 고개를 끄덕였다. 경계를 파고든 순간, 어딘지 알 수 없는 공간에 무작위로 이동되는 현상을 이용하려는 것이었다.

내 운빨은 최악이었기에 난 엘튼의 운빨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

“빌어먹을, 서둘러!”

서서히 흐릿해지는 빛무리.

식은땀이 줄줄 흘러나오는 것을 보니, 내 마나가 어느새 바닥에 다다르고 있었다.

빛이 껌뻑껌뻑하자, 키메라들의 접근 거리가 눈에 띄게 가까워졌다.

“…큭!”

어깨와 등 쪽에서 느껴지는 고통.

할퀴고 간 횟수가 점차 많아졌다.

엘튼은 이를 악물고 내달렸다.

마법진 경계는 다행히 이곳과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다.

칼이 표시해둔 경계선이 보였고, 난 두 눈을 질끈 감고 외쳤다.

“뛰어!”

엘튼이 나를 업은 채 바닥을 세차게 굴렀다. 허공에 뜬 우리는 그대로 마법진 경계를 넘었다.

공간이 비틀리는 감각.

감옥 내 어딘가로 이동됐다.

허공에 뜬 순간, 우리는 바닥을 뒹굴었다. 온몸이 두들겨 맞은 것처럼 아팠지만, 주변을 서둘러 살펴야 했다.

물먹은 솜처럼 무거운 몸을 일으키며 비틀거리듯 일어났다.

“없어! 어서 서둘러!”

주변에 키메라가 보이지 않는다. 난 베텔의 독을 꺼내 들며 빠르게 엘튼을 바라봤다. 독을 사용해 몸을 숨길 절호의 기회.

하지만 자빠져서 하늘을 멍하니 올려다본 엘튼은 헛웃음을 흘리며 하늘을 가리켰다.

“있다. 빌어먹게도.”

펄럭―!

“……!”

거친 날갯짓 소리에 난 고개를 쳐들었다. 그리고 한 존재를 발견했다.

키에에에에에에에엑―!!!

“이런 시발….”

성인 아나콘다도 새끼 뱀으로 보일 법한 거대한 뱀 형태의 괴물이 여러 날개를 펄럭이며 우리 쪽으로 쇄도하고 있었다.

전에 봤던 그 거대 키메라였다.

늑대 무리를 피해왔더니, 호랑이와 마주친 격이다.

서둘러 손등을 뻗었지만, 마나가 바닥났는지, 문양은 반응이 없었다.

난 바닥에서 돌을 줍곤 엘튼에게 외쳤다.

“뱀 대가리가 사라지면 넌 베텔의 독을 사용해!”

“자, 잠깐!”

“미끼 역할은 이럴 때 하는 거라고!”

뱀 괴물을 향해 돌을 냅다 던진 나는 숲을 향해 미친 듯이 달렸다.

놈의 시선을 끄는 데는 성공했는데, 놈의 비행 속도는 생각지 못했다.

입을 쩍 벌린 채 짓쳐 오는 괴물이 보인다.

더럽게 빨랐다.

퍼억―!

삼켜지는 건 피했는데, 놈의 비늘에 부딪히며 허공을 붕 날았다. 바닥을 수십 바퀴는 구른 것 같았다.

“…커억!”

잠시 끊겼던 의식이 돌아왔다. 입 속에 들어온 흙을 뱉어내며 힘없이 바닥을 기었다. 시발, 이젠 진짜 티끌만큼의 힘도 없었다. 발악도 이게 마지막인가?

쉬쉭―

“이, 미친 꼼장어 새끼가….”

괴물의 소리가 머리 위로 들려왔다.

먹힌다.

먹혀도 죽지는 않을 거다. 연구실로 끌려가겠지. 그 후를 도모해야 하나? 아니, 마비된 상태면 답이 없다. 결론은 뒈진다는 건데, 여기서 콱 죽어버려?

별의별 생각을 떠올리며 힘겹게 몸을 뒤집었다.

근데,

“…응?”

나를 가로막고 있는 인영이 있었다.

설마 엘튼?

병신 같은 놈이 도망치지 왜 이곳에…….

아니, 그가 아니었다.

엘튼이라고 하기에는 외형이 작았다.

여성스러운 굴곡이 강조된 호리호리한 몸매.

허공에 흩날리는 금발.

그 사이로 드러난 뾰족한 귀.

‘뾰족한 귀라고?’

거기까지 생각을 마쳤을 때, 인영의 양팔이 활짝 펼쳐지더니, 주먹을 움켜쥐었다. 번뜩이는 빛과 함께 뻗어 나온 짐승의 발톱. 아니, 무기다. 두 개의 크로우가 모습을 드러냈다.

칠흑으로 물든 두 자루의 크로우.

어디선가 들어본 적 있는 무기다.

인영이 몸을 튼 순간 난 볼 수 있었다. 새하얀 이빨을 드러낸 채 사납게 웃고 있는 검은 피부의 다크 엘프를.

“다, 당신……!”

내 말이 끝나기 전에 그녀의 신형이 사라졌다.

그리고 후드득 떨어지는 핏방울 소리.

시선을 허공 위로 돌리니, 수십 조각으로 잘린 뱀 키메라가 붉은 소나기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으악!”

난 살덩이들을 피해 몸을 웅크렸다. 다시 두 눈을 깜빡이니, 바로 옆에 그녀가 팔짱을 낀 채 서 있었다.

두 눈을 끔뻑이며 그녀를 멍하니 올려다봤다. 그녀가 그제야 내 얼굴을 알아보곤 미간을 구겼다.

“1만 골드? 뭐야, 마력 파장을 쫓아왔더니, 네가 왜 이곳에 있어?”

검은 장미 수장, 펜리 체이서.

그녀가 내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 * *

“우리 인연이 제법 깊나 봐? 안 그래?”

곰방대를 뻐끔뻐끔 내뱉으며 만사가 귀찮은 듯 내리깐 눈빛.

저 재수 없는 눈빛을 보니, 확실히 펜리, 그녀가 맞았다.

5성급 실력자의 등장은 나도 전혀 예상치 못했다.

실험체 감옥에 그녀가 갑자기 왜?

“무, 뭡니까?”

“그러니까. 너 뭐냐? 도망친 거 아니었어?”

“도망쳤습니다.”

“1만 골드를 써서 도망친 곳이 여기라고?”

“뭐, 그렇게 됐습니다.”

“이거 웃긴 물건이네.”

펜리는 별 괴상한 물건을 보는 것처럼 낄낄 웃었다.

그래, 내가 생각해도 현 상황이 인생 코미디 그 자체인데, 얼마나 웃기겠냐.

이 꼴이 된 데에는 10분짜리 타임 어택을 준 저년의 지분도 상당했는데, 저리 비웃고 있으니 심사가 뒤틀렸다.

속으로는 욕을 해댔지만, 그녀 앞에선 최대한 눈치를 봤다. 그녀 곁에 머물면 안전이 보장된 셈이니 당연했다.

그렇다고 방심의 끈을 놓지 않았다. 아니 더욱 긴장하며 정신을 똑바로 차렸다.

‘이곳에 우연히 나타난 것일까?’

답은 ‘아니오’다.

그녀는 목적 없이 움직일 위인이 아니었다.

확인이 필요했다.

“여긴 어쩐 일입니까?”

“사람 하나를 찾고 있어.”

펜리에 관해 많은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일까. 그녀의 답에서 난 바로 힌트를 찾았다.

‘엘프 샤르바딘 실종 사건!’

드워프 도르네프가 펜리에게 의뢰한 샤르바딘 실종 의뢰는 무척 유명한 내용이었다.

펜리의 경력에 큰 오점으로 남은 유일한 사건이었으니 당연했다.

그녀는 의뢰에 실패한다. 그녀가 발견한 건 녹아 문드러진 샤르바딘의 뼛조각뿐이었으니까.

‘잠깐만, 이거….’

펜리가 뼛조각을 발견한 장소를 떠올린 나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5성급 실력자, 펜리 체이서.

그녀를 본 순간 뭔가 길이 보였다. 이 상황을 잘만 이용하면 풀리지 않던 마지막 퍼즐이 맞춰질 것만 같은 느낌.

일단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사람?”

“정확히 여자 엘프다. 혹시 엘프를 본 적 있나?”

“엘프라….”

내가 정신없는 틈을 타 그녀는 바로 본론을 물었지만, 난 그 장단에 맞춰줄 생각이 없었다.

답만 듣고 떠나 버릴 위인이었기 때문이다.

“답을 듣기 전에 우리의 안전부터 확보해 주시죠.”

“우리?”

난 엘튼을 가리켰다.

거대 키메라는 죽었지만, 이곳은 여전히 키메라들의 천국이었다. 안전을 확보하는 게 먼저였다.

“돈도 안 되는 일을 내가 왜?”

“답을 듣기 싫으십니까? 후회할 수도 있을 텐데요.”

“뭔가 아는 눈치인데?”

“후회는 안 할 겁니다.”

“그럼, 다른 이들에게 물어보면 되겠네?”

“없을 겁니다. 이미 알고 절 구한 거 아닙니까?”

펜리는 가치 없는 일에 절대 나서지 않는다. 그런데 전혀 상관도 없는 거대 키메라를 죽이고 날 구했다. 내가 그만큼의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기에 구한 것이다.

그녀의 기세에 주눅 들지 않고 내가 자신감 있게 받아치자, 그녀는 잠시 곰방대를 피우곤 내 눈을 바라봤다.

무심한 눈빛, 솔직히 쫄린다.

하지만 난 당당하게 마주 봤다.

엘프이니, 내 눈에서 거짓이 없다는 것 정도는 파악할 수 있을 거다.

“흐응, 저번 거래에선 웬 호구 하나 물었다고 생각했는데, 너 꽤나 까다롭구나?”

잠시 후, 펜리가 뿌연 연기를 후― 뱉으며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엘튼!”

난 다급히 엘튼을 손짓으로 불렀다.

엘튼은 다가오지도, 도망치지도, 베텔의 독을 사용하지도 않았다. 그저 이곳만 바라보고 있었는데, 펜리의 등장이 그를 혼란스럽게 한 모양이었다.

내 부름에 엘튼은 어물쩍 다가와 펜리의 눈치를 보았다.

거대 키메라를 한순간에 조각낸 실력자니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 사이, 펜리는 곰방대를 내 주변에 탁탁 털고 있었다. 재 가루가 반짝이며 머리와 몸 주변에 한가득 묻었는데 난 잠자코 있었다.

얼핏 보면 담배빵보다 더 심한 짓거리를 하는 건데, 난 이 재 가루의 정체가 엘프석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엘프석을 하루에 담배 두 갑씩 피워대듯 소비하고 있으니, 돈에 환장할 수밖에.’

느리지만 확실하게 강해지는 방법.

다만, 돈이 있어도 수급이 어려운 보석이라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엘프 종족을 책임지는 그녀이기에 가능한 성장 방법.

잠시 후, 그녀의 입에서 마법어가 흘러나왔다.

나와 엘튼은 몸 주변을 신기한 듯 살폈다.

옷 주변에 묻은 가루가 푸르게 물들며 몸에 스며들었기 때문이다.

“무슨 마법이 걸린 겁니까?”

“위장(Camouflage).”

거짓 꾸밈을 통해 잠시 동안 키메라들에게 동족으로 보이게끔 하는 위장 마법이었다.

“머리통이 빈 녀석들이라 속이기 쉽지.”

펜리의 말은 사실이었다.

이쪽으로 몰려오던 키메라들이 제자리에 멈추더니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그러곤 먹잇감을 찾아 각기 다른 방향으로 빠르게 흩어졌다.

“효과는 얼마나 지속됩니까?”

“반나절 정도? 이제 네 차례야. 내 물음에 답해야지?”

펜리는 곰방대를 물곤 바위에 걸터앉았다.

난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내 목적을 이루려면 그녀의 도움은 필수다. 도움을 받으려면 어떻게 접근해야 할까.

그녀의 성격을 한번 떠올린 나는 입을 열었다.

“이종들은 봤지만, 엘프는 못 봤습니다.”

“…….”

내 답에 펜리는 두 눈을 가늘게 좁혔다. 예상과 달리 전혀 도움이 안 되는 답이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내 눈을 지그시 응시했다.

뭔가를 파악하려는 시도 같은데, 소용없다. 단지 진실을 파악하는 것으로 내 속마음을 알 수 없을 테니까.

“거짓은 아닌데, 어째 꼼수를 부리네. 후회는 안 할 거라고? 벌써 후회되는데?”

“대신 제가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도움? 네놈이 뭘 알고?”

“엘프를 찾는 일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근데?”

“도와드리겠습니다.”

“빌어먹을, 시간만 낭비했어.”

펜리는 곰방대를 내려놓고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눈빛이 가라앉은 것이 화가 단단히 난 것 같은데, 이대로 흘러가면 곤란했다.

그녀는 악당은 아니지만, 철저한 중립 인물, 상황에 따라 악당보다 더 잔인해질 수 있는 인물이었다.

그런 면에서 그녀와 한 차례 손님으로 인연을 맺었던 건 나에겐 천운이었다.

“검은 장미의 손님만 아니었다면 넌 내 손에 죽었어.”

적어도 한 번, 그녀를 설득할 기회가 주어진 셈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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