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생명의 징표
그녀의 사나운 기세에 엘튼은 무기를 움켜잡고 물러났다. 하지만 난 오히려 앞으로 나아갔다.
‘검은 장미는 웬만해선 손님들과 척을 지지 않아.’
마스터인 그녀가 정한 규칙이었기에 길드의 존속이 달린 최악의 상황만 아니라면 내게 살수를 펼치지는 않을 것이란 확신이 있었다.
이럴 때일수록 더욱 뻔뻔하게 나가야 했다. 앞으로 벌어질 거래를 위해선 대화 포지션이 중요했으니까.
일단 도발부터.
“혼자서는 불가능할 겁니다.”
“날 우습게 보는 건가? 네깟 놈이?”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말귀가 먹은 놈인가? 네놈이랑 더는 할 말 없어.”
“생명의 징표를 원합니다.”
“푸하하하!”
그녀가 박장대소를 터트렸다. 무시로 일관하는 내 태도가 기가 막혔던 모양이었다. 그녀는 손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하며 나를 응시했는데, 살기를 억누르는 행위처럼 보였다.
이건 좀 무서운데.
“별 볼 일 없는 놈 주제에 생명의 징표를 다 알고 있어? 듣는 귀가 밝은 모양이네.”
“홀로 움직이는 사람 중에는 누구보다 밝은 편이라 자부합니다. 특히 라웁 숲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에 대해선 더더욱 말이죠.”
귀가 밝다.
정보 획득에 능하다는 말이었다.
[진실]
내 눈을 살핀 펜리는 미간을 좁혔다.
입을 열 때마다 헛소리를 내뱉고 있는데, 담긴 의지에는 거짓이 없다.
전부 진심이라는 뜻인데,
자신을 이리 헷갈리게 만드는 놈이라니, 실로 오랜만이었다.
그래서일까.
놈을 무시하려고 하는데 쉽게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구출 대상에 관한 단서가 전혀 없는 것도 미련을 남게 했다. 결국, 그녀는 미간을 구기곤 내게 물었다.
“혀가 길면 잘리는 법이야. 핵심만 말해.”
“엘프 샤르바딘.”
“…….”
“그녀를 찾고 있는 거 아닙니까?”
손을 쥐었다 펴던 움직임이 딱 멈췄다. 표정 변화는 없었지만, 속으로 상당히 놀랐을 거다.
“그리 생각하는 이유는?”
“말하지 않았습니까? 이종들을 봤다고. 추측한 겁니다.”
“이종들이 샤르바딘에 대해 말했나?”
“직접 들은 건 아니고, ‘간접적’으로 알게 된 내용입니다.”
소설에서 읽은 내용이니, 직접 들었다고 말하면 안 된다.
잠시 내 눈을 바라본 펜리가 바위에 걸터앉았다.
일단 대화 분위기를 만드는 데는 성공한 것 같았다.
정보 출처에 대해 집요히 파고든다면 곤란했기에 난 서둘러 그녀의 관심을 끌 대화 주제로 넘어갔다.
“실종에 관한 소문이더군요. 바깥 외출 후 사라진 그녀를 도르네프가 애타게 찾고 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엘프 샤르바딘은 푸른 장미 5층 출신이라고 들었습니다. 그곳의 수장이 당신이니 혹시나 해서 짚어본 겁니다.”
“정확히 짚었어. 그녀를 찾고 있다.”
펜리는 실속을 중요시하는 인물.
도움이 될 것 같다는 판단이 들자, 그녀는 순순히 자신의 의뢰를 밝혔다.
그녀가 직접 움직인 이유는 샤르바딘, 그녀의 가치가 실로 크기 때문이다.
베네타의 군주 도르네프가 질긴 구애 끝에 얻은 하나뿐인 반려.
샤르바딘은 베네타와 검은 장미를 잇는 가교이자, 베네타를 뒷배로 둘 수 있는 정치적인 도구로서 절대 잃어선 안 되는 인물이었다.
“그래서 무슨 도움을 줄 수 있지?”
“생명의 징표를 원합니다.”
“…….”
생명의 징표는 그녀가 징표를 준 자에 한해 목숨을 한 번 살려주는 일종의 구원 증표였다.
증표의 주인을 죽이려는 자와 계산 없이 싸워야 했기에 리스크가 무척 큰 대가였다.
솔직히 말도 안 되는 대가다.
그런데도 펜리는 바로 거절하지 않았다.
그 모습에서 나는 샤르바딘의 가치가 예상보다 더욱 크다는 것을 파악했다.
그녀가 잠시 고민하는 사이, 나는 서둘러 엘튼을 잡아끌곤 속삭였다.
“넌 이곳을 당장 떠나.”
“뭐? 너는?”
“같이 움직일 상황이 아니잖아? 가서 숨을 장소를 찾고 버텨.”
“차라리 저자와 같이…….”
“위험해.”
펜리라면 교섭 우위를 위해 칼 일행을 인질로 잡을 수도 있다.
내가 칼을 언급하지 않고 말을 아낀 이유다. 그녀의 청각이라면 지금 대화쯤은 엿듣고도 남았을 테니까.
역시나,
“누가 떠나도 된다고 했지?”
펜리가 바로 제지를 해왔다. 엘튼이란 카드를 이용하려는 것 같은데, 어림도 없다.
난 바로 말을 받아쳤다.
“샤르바딘이 어딨는지는 모릅니다. 하지만 그녀에게 갈 수 있는 가장 확률 높은 방법을 알고 있습니다. 방법을 듣고 싶다면 그를 보내겠습니다.”
“…….”
엘튼이라면 위장 마법이 유지되는 시간 안에 칼 일행과 합류할 수 있을 것이다.
엘튼은 앞으로 칼과 인연을 이어갈 중요한 인물. 다음 만남을 위해서라도 꼭 보내야 했다.
“날 믿지?”
“…….”
“숲에서 이틀 정도 죽은 듯이 버텨.”
“이틀?”
“버티면 길이 열릴 거야. 그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말고 숨어 있어.”
처음에는 키메라의 움직임에 당황했는데, 지금까지도 어슬렁거리는 키메라들을 보자, 한 가지 가정이 떠올랐다.
감옥 폐쇄 현상.
도미닉이 연구실로 후퇴를 결정했을 때 나타나는 전조 증상인데, 그 시기가 다가온 것 같았다.
지금 모습을 보면 폐쇄 전에 모든 실험체를 싹 다 수거하는 과정 같았다. 그 후 키메라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면 마법진은 폐쇄되며 사라진다.
처음 펜리를 발견했을 때, 그녀가 칼 일행을 탈출시킨 계기가 아닐까 생각했지만, 소설 속에서 칼과 펜리는 인연이 없었다.
즉, 칼 일행은 베텔의 독으로 감옥 폐쇄까지 버티다가 빠져나간 것이 분명했다. 그럼에도 이틀을 강조한 건 내가 끼어들면서 칼 일행의 미래가 바뀌었기 때문에 조언을 한 것이었다.
“붉은 보석에 관한 소문은 함정이니까, 믿지 마. 욕심내다간 대가리 제대로 깨질 거다.”
내 말은 모두 칼에게 전달될 거다.
꼭 필요한 핵심 사안을 더 전한 뒤 엘튼을 거칠게 밀어냈다.
“마법이 풀리기 전에 서둘러!”
“…….”
잠시 서서 나를 응시하던 엘튼은 입을 꾹 다물더니 등을 돌리고 달리기 시작했다.
고지식한 녀석이라 버티면 어쩌나 했는데, 다행이었다.
“자, 이제 말해봐.”
“뭘 말입니까?”
“방법.”
“아직 확답을 듣지 못했습니다만.”
“내가 저 녀석을 그냥 보내줬다고 생각해? 마법이 걸린 이상, 내 눈을 피하긴 힘들어.”
“그래서 증표를 줄 겁니까? 안 줄 겁니까?”
“하, 빌어먹을 새끼.”
뻗대는 내 모습에서 펜리는 교섭의 불리함을 인정했다.
그녀가 아무리 말을 돌려봤자 소용없다. 샤르바딘의 가치를 난 너무 잘 알고 있거든.
“대가 없이 말하라니 양아치 아닙니까? 나 때는 아주 껍질째 벗겨 먹었으면서.”
“그럼 증표 말고 돈을 주지.”
“100만 골드.”
“…이거 완전 또라이 새끼네.”
“100만 골드 이상의 가치가 있을 텐데요. 선택을 서둘러야 할 겁니다.”
“시간을 끌면 위험하다?”
“그녀가 도미닉에게 납치됐다면 당장 움직여도 아슬아슬합니다. 연구실 앞에선 인질의 가치 따윈 상관없습니다. 인간과 이종의 구분만 있을 뿐이죠.”
펜리는 헛웃음을 흘리며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녀석의 말대로 샤르바딘은 100만 골드 이상의 가치를 지녔다. 귀가 누구보다 밝은 녀석이라더니, 귀찮은 상대를 만났다.
겁박도 어렵고, 시간도 없는 상황.
그런데 저놈의 입에 샤르바딘의 유일한 단서가 있다면? 이번 교섭에선 아무래도 손해를 봐야 할 것 같았다.
“이렇게 하지.”
펜리는 곰방대를 물었다. 잠시 연기를 내뱉던 그녀가 말을 이었다.
“날 그녀 앞으로 데려다 놔. 그럼 증표를 내주지.”
“조건부라는 겁니까?”
“그래. 대신….”
펜리는 내 얼굴에 연기를 후― 뿜으며 말했다.
“그녀를 찾지 못한다면 책임을 물을 거다. 검은 장미의 이름으로 네놈과 지금 떠난 저놈 그리고 너희들과 엮인 인연까지 찾아서 모조리 척살할 거야. 이건 길드의 존속과 관련된 사안이거든. 동의하나?”
길드의 존속.
확실히 샤르바딘을 잃으면 검은 장미는 베네타라는 뒷배를 잃는다. 그 책임을 묻겠다는 뜻.
“찾았는데, 샤르바딘이 죽었다면? 제 책임입니까?”
“기간은 일주일, 그 안에 그녀가 죽었다면 네게 책임을 묻지 않겠다.”
일종의 면죄부도 주어졌다.
생존과 상관없이 일주일 안으로 그녀를 샤르바딘 앞으로 데리고 가는 조건이었다.
난 잠시 고민했다.
목숨이 걸린 살벌한 거래였다. 하지만 목숨을 걸어볼 만한 도박이기도 했다.
일단 샤르바딘이 죽은 장소가 도미닉의 연구소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 말이다.
여기서 조금 더 욕심내볼까.
증표 외에 다른 것을 더 요구한다면?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비록 조건부 대가이지만, 방법조차 듣지 않고 그녀는 거래를 받아들였다. 이 이상 선을 넘으면 모든 것이 어그러질 수 있었다.
“거래 성립이군요.”
난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하지만 펜리는 내 손을 잡지 않았다.
“난 아직 아무런 내용도 듣지 못했어.”
난 짧게 심호흡을 한 뒤 그동안 구상해둔 계획을 들려줬다.
처음 라웁 숲에 떨어졌을 때부터 생각해둔 계획, 다만, 실행 가능성이 너무 희박해서 줄곧 망설였던 계획이기도 했다.
하지만 펜리가 이 계획에 합류하면서 그 가능성이 열렸다.
‘아레나 후아튼을 막아줄 존재.’
내게 부족했던 무력을 대신해줄 카드.
마지막 퍼즐이 풀린 것이다.
소설의 주인공인 학살자조차 포기한 도미닉의 연구실 습격 계획.
이건 펜리에게도 나에게도 도박인 계획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펜리는 곰방대를 들고 있을 뿐 입에 물지 않았다. 곰방대를 피우는 것도 잊은 채 내 말에 집중했다는 게 정확했다.
잠시 후, 그녀가 헛웃음을 흘리며 곰방대를 물었다.
“미친 또라이 새끼.”
내 계획은 들은 첫 소감으로 그녀는 날 또라이로 지목했다. 그럼에도 표정은 웃고 있었다. 그녀를 설득하는 데 성공한 것 같았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는 거지?”
“허를 찌르려면 상대방의 움직임을 이용하는 게 확실하니까요.”
“내키는 방법은 아닌데… 괜찮단 말이지. 빌어먹을.”
펜리는 샤르바딘에게 갈 수 있는 가장 높은 확률의 방법이 무엇인지 들었다.
‘스스로 키메라에게 잡아먹히라니.’
듣도 보도 못한 파격적인 방법이었다.
키메라가 알아서 샤르바딘이 잡힌 장소로 데려다준다나.
설명대로 잡힌 실험체들이 도미닉의 연구실로 모조리 모이는 전개라면 확실히 가능성 있는 작전이었다. 샤르바딘이 키메라에게 잡혔다는 확신이 있었으니까. 그 흔적을 쫓아 이곳까지 오지 않았나.
“키메라의 움직임을 어떻게 파악한 거지?”
“두 번이나 키메라에게 먹혀보면서 알게 됐습니다. 키메라의 움직임에 대해 저보다 잘 아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혹시 모르니, 네 녀석이 먹히고, 내가 그 키메라를 쫓아가는 방식은 어때?”
“이곳에 펼쳐진 결계를 아십니까?”
“이미 확인했어.”
“뚫을 수 있겠습니까?”
“단시간에는 어려워.”
“연구실 주변에는 이보다 더 강력한 결계가 쳐져 있을 겁니다. 따라올 수 있겠습니까?”
“…음.”
도발처럼 들렸지만, 펜리는 냉정하게 판단했다.
이곳 결계는 일반적인 마법과 달랐다.
고대의 지식이 결합한 마법진이라 단시간에 파훼하기는 어려웠다. 아니 실패할지도 모른다. 결국, 녀석의 말대로 키메라를 매개체로 이용하는 게 가장 확실하고 안전한 방법이란 결론이 나왔다.
펜리는 상대의 눈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진실을 재차 확인하려는 모습. 이 녀석의 말만 믿고 움직이는 건, 그녀에게 큰 도박과 같았다.
“어쩌실 겁니까?”
손을 가볍게 흔드는 녀석이 보인다. 마치 자신의 말대로 될 것이라 확신하는 표정이었다. 그 표정이 마음에 안 들어서 면상을 후려갈기고 싶었지만, 펜리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맨땅에 헤딩보단 가능성이 큰 계획.
잠시 고민하던 그녀는 천천히 눈앞의 손을 마주 잡았다.
“펜리 체이서, 내 이름이다.”
“아서, 아서 클레이튼입니다.”
거래가 성립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