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당에게서 살아남는 법-44화 (44/130)

44화 난 1인분이야. 한 마리만 오라고!

거래의 시작은 이곳, 실험체 감옥을 벗어나면서부터다.

이동할 매개체인 키메라들은 굳이 찾을 필요 없었다. 눈앞에 물 반 고기 반처럼 깔린 게 키메라였으니까.

다만, 이동 전에 몇 가지 준비가 필요했다.

‘공짜 마석을 포기할 순 없지.’

난 조금 전 펜리가 조각낸 뱀 키메라의 시신을 뒤적거렸다. 나로서는 얻기 힘든 보랏빛 마석이 눈앞에 있는 상황이라 기회가 생겼을 때 챙겨야 했다.

혹시 몰라 그녀의 눈치를 살폈는데, 별다른 말 없이 그녀는 등을 돌린 채 키메라의 시신을 들추고 있었다.

“체액 성분이 귀찮게 구성됐네.”

그녀는 시체 조각에서 체액을 맛보거나, 냄새를 맡는 기행을 보였는데, 내가 부탁한 것을 해결하기 위함이었다.

‘체액을 막을 만한 마법이나 물건이 필요한 상황이니까.’

두 번의 경험을 통해 키메라의 체액에 특별한 독이 있다는 것을 파악했다.

삼킨 실험체를 마비시키는 효과였는데, 이동의 매개체로 키메라를 이용하려면 이 독부터 해결해야 했다.

얼마나 머물러야 할지 모르는 상황이라 마나로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녀의 반응을 보니, 금세 방법을 찾을 것 같았다. 그 사이, 난 마석을 발견하곤 주머니에 넣었다.

‘이것으로 두 개인가?’

사냥도 확신하지 못한 상태에서 구한 것이라, 일이 무척 잘 풀린 상황이었다.

이 정도라면 좋은 결과를 기대할 수 있을까?

물론, 고통과 부작용을 버틸 수 있을 때의 얘기였다.

“마석의 위험성을 잘 아는 눈치던데, 아니었나?”

안 보고 있는 줄 알았더니, 내 행동을 전부 보고 있었나?

어색하게 웃으며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데, 그녀가 주머니를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그 돌에는 산 자의 섭리를 거스르는 기운이 담겼어. 널 망가트릴 거다.”

기운에 민감한 엘프답게 펜리는 마석의 부작용을 단박에 파악하곤 베네타의 군주에게 경고를 한 상태였다.

소문에 폭발적인 반응을 보인 에토르와 달리 베네타가 소문에 크게 흔들리지 않은 이유였다.

“쓸데가 있습니다.”

“뭐, 계획에 방해만 안 된다면야.”

“방해될 일은 없을 겁니다. 이번 계획은 저에게도 무척 중요하거든요.”

“목숨 귀한 줄은 아나 봐?”

확신이 있는 베팅이라 목숨은 걱정하지 않았다.

다만 이번 계획에서 얻고자 하는 바가 서로 달랐기에 조심스럽게 움직여야 했다.

샤르바딘의 구출이 목적인 그녀와 달리, 내 목적은 레토니칼스의 심장에 있었으니 말이다.

생명의 징표도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과정에 지나지 않았다.

나를 응시하던 펜리는 다시 체액을 살피는 데 집중했다.

그사이 나는 두 개의 마석을 잘게 빻아서 주머니에 넣었다. 이제 복용만 하면 되는데, 복용 시기와 장소는 이미 생각해둔 바가 있었다.

“받아.”

잠시 후, 그녀가 머리를 풀어 헤치더니 목걸이를 건넸다.

푸른 돌이 장식된 목걸이였는데, 조금 전까지 그녀가 착용하고 있던 물건이었다.

“축복이 걸린 내 애장품이다. 체액으로부터 보호해 줄 거야.”

“축복…?”

“눈빛이 불경한데? 탐낼 생각은 버려. 위치 추적 마법이 걸려 있거든?”

“…….”

눈치 하난 귀신같네.

아쉽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곤 목걸이를 목에 걸었다. 순간, 포근한 기운이 나를 감싸는 게 느껴졌다.

세계수의 축복이라서 그런가.

역시 효과가 죽인다.

펜리의 애장품인 이 목걸이는 소설에서도 제법 유명했다.

“더 해줄 말은?”

“키메라들이 물러나기 전에 서둘러야 한다는 거?”

“바로 움직이면 되겠네.”

그녀라면 알아서 체액에 대비할 테니, 굳이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손가락을 가볍게 튕기자, 무슨 마법을 부렸는지 곰방대가 허공에서 사라졌다.

본격적으로 움직이겠다는 그녀의 신호였다.

“흐응, 어떤 녀석이 좋으려나.”

나도 그녀를 따라 주변을 둘러봤다.

들판을 빽빽이 채운 키메라 무리가 보인다. 거대 키메라는 더는 보이지 않았다. 개체 수가 그리 많지 않은 모양.

하긴 거대 키메라를 과자처럼 찍어낼 수 있었다면 1챕터의 주인공은 카멜이 아니라 도미닉이 됐을 것이다.

그녀가 키메라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자, 그녀 뒤를 쫓으며 숲 너머를 응시했다.

‘엘튼은 잘 찾아갔겠지?’

큰 소란이 없는 것을 보면, 칼 일행과 잘 합류한 것 같았다.

난 칼의 다음 행보를 떠올렸다.

‘이것으로 악당 조력자 칼 바스타인은 사라지게 되는 건가?’

소설 속 내용이라면 칼 일행은 숲을 벗어난 뒤 에토르에 비밀 거점을 두게 되는데, 이는 학살자와의 운명적 만남으로 이어지면서 칼의 운명을 악당 조력자로 이끌었다.

‘이번에는 그 운명과 반대로 움직이게 되겠지.’

내가 끼어들면서 운명적 만남이 비틀렸다.

악당 조력자가 아닌 칼은 이제 나의 조언자이자, 학살자를 견제할 세력으로 자리 잡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번 계획까지 성공하게 된다면?’

펜리와 엮이면서 큰 흐름을 타게 됐다.

샤르바딘을 구출하고, 백(百) 개의 심장으로 각성할 아레나 후아튼까지 막는다면 베네타의 몰락을 막을 수 있었다.

베네타가 건재하면 토바른을 집어삼키려는 카멜의 행보에 큰 차질이 생긴다. 놈을 상대할 시간을 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훼방을 놔도 시간을 버는 게 고작이겠지. 소설 속 위치가 실감 나긴 하네.’

소설 속 세상은 주인공 중심으로 돌아가기 마련이다.

한 번 엎어지면 끝장인 엑스트라와 달리, 주인공은 이 위기를 극복할 힘과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주인공과 엑스트라의 차이.

이 괴리를 바로잡으려면 앞으로가 중요했다.

“저 녀석으로 하지.”

“…선택 기준이 뭡니까?”

“그나마 동물처럼 생긴 거?”

“그렇긴 하네요.”

한쪽을 가리키며 그녀가 나를 빤히 바라봤다.

먼저 먹히라는 신호.

하긴, 직접 보기 전까진 믿기 힘들겠지.

난 짧게 숨을 내뱉고는 달리기 시작했다.

황소를 베이스로 한 키메라 무리가 보였다. 단단한 두 개의 뿔과 악어 입을 닮은 무시무시한 비주얼을 자랑했는데, 거대 키메라가 사라진 지금, 저 키메라가 그나마 승차감(?)이 좋아 보였다.

물론,

키에에에에엑―!

그 승차감을 느끼는 곳이 키메라의 등짝이 아닌 입 속이란 것이 끔찍했지만 말이다.

마법이 풀리자, 키메라들이 동시에 나를 노려봤다.

실로 섬뜩한 광경.

키에에에엑―!

카아악!

키메라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나를 향해 입을 쩍 벌리며 돌진해왔다.

“시, 시발! 난 1인분이야! 한 마리만 오라고!”

난 그중 가장 순해(?) 보이는 녀석의 위로 몸을 날렸다.

쩍 벌어진 수백 수천 개의 주둥이가 보인다.

순간, 식인 물고기를 다룬 영화, 피라냐가 떠오른 건 왜일까.

감옥 바깥이라면 영화 피라냐처럼 갈가리 찢겨 사라질 운명이지만,

“으아아악!”

이곳에선 고통 대신 어둠이 찾아왔다.

악취는 덤이었다.

* * *

키메라에게 먹힌 횟수만 세 번째.

내 지독한 불운을 엿볼 수 있는 횟수였다. 그래도 이미 경험해 봤다고 배 속에 머물러 있으면서도 침착함을 유지할 수 있었다.

키메라의 내부는 협소해서 움직일 공간이 없었다. 질척거리는 압박감이 느껴졌는데, 마치 답답한 고치 안에 갇힌 느낌이었다.

잠시 후, 뜨겁고 끈적이는 액체가 온몸을 적셨다. 익숙한 냄새와 감촉, 키메라의 체액이었다.

체액이 몸에 닿은 순간, 따스한 빛이 가슴팍에서 흘러나왔다.

펜리가 준 목걸이였다.

밝아진 시야 사이로 몸을 꿈틀대며 감각을 살펴봤다.

‘효과가 있네.’

마비 증상이 느껴지지 않았다.

꿀렁거리는 내부에서 난 잠시 대기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됐나?’

흔들림에 집중하던 나는 슬그머니 눈꺼풀을 올렸다.

불규칙적으로 움직이던 흔들림이 어느 순간부터 규칙적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한 방향으로 키메라가 움직이고 있는 것 같았다.

마법진을 벗어나, 그 지긋지긋했던 실험체 감옥을 드디어 빠져나온 것이다.

하지만 좋아하긴 일렀다.

‘그보다 더한 장소로 가고 있으니까.’

앞으로 도착할 장소는 도미닉의 연구실로 불리는 장소.

키메라들을 찍어내는 둥지나 다름없었다.

목걸이의 빛 덕에 시야가 확보됐는데 차라리 안 보는 편이 좋을 뻔했다.

꿀렁거리는 내장 덩어리는 보기만 해도 혐오스러웠다.

차라리 독으로 정신을 잃었다면 좋았겠지만, 내 정신은 목걸이의 축복 때문인지 어느 때보다 또렷했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다.

오감 자체가 민감해졌다고 해야 하나.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악취가 점점 짙어지는데 머리가 지끈거릴 정도였다.

‘이 망할 엘프가 설마…!’

차고 있던 애장품을 줄 때부터 뭔가 찝찝했는데, 오감이 증폭되는 효과도 있는 건 아니겠지?

정말 그렇다면 실로 악마 같은 년이었다.

탈출 욕구가 불쑥 올라왔지만, 다시 아가리 속으로 들어가는 게 불가능했으니 참아야 했다.

‘잘 따라오겠지?’

펜리를 잠시 떠올렸다.

얼마나 배 속에 머물지는 정확히 알지 못해 말해주지 않았다.

길어야 하루 이틀 정도로 생각하고 있겠지.

예민하고 까칠한 성격을 봤을 때, 제법 고역의 시간이 될 게 분명했다.

‘벌써 날 떠올리며 이를 갈고 있을지도.’

다행히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민감해졌던 후각이 무뎌지는 게 느껴졌다.

시간이 제법 지난 것 같은데, 내부는 일정한 흔들림만 느껴졌다.

슬슬 움직일 시간인가?

몸을 살짝살짝 뒤틀면서 가방을 천천히 뒤적거렸다.

그러다 마른 육포를 발견하곤 짧게 신음을 흘렸다.

식량을 주는 걸 깜빡했다.

‘엘프는 며칠 굶어도 괜찮겠지?’

이런 곳에선 식욕이 감퇴할 것이니 괜찮을 거다.

스스로 위안을 삼으며 가방에서 주머니를 꺼낸 뒤 안을 살폈다. 마석을 빻아 넣은 보랏빛 가루가 눈에 들어왔다.

하릴없이 배 속에서 멍 때리고 있을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다.

주머니 안에 있는 마석 가루를 이 자리에서 모조리 흡수할 생각이었다.

‘3성.’

연구실에 도착하기 전까지 등급 각성을 시도할 계획이었다.

2성과 3성의 차이는 일반적인 등급 차이와 달랐다.

특성 개화가 이뤄지는 단계.

특성 개화자로 각성한다면 내 생존 확률은 전보다 압도적으로 높아진다.

시도할 가치가 충분히 있었다.

‘설마 무특성이 뜨진 않겠지.’

불운 덩어리로 살아온 터라, 애써 부정한 생각을 털어버리며 주머니 안에 손을 넣었다.

까슬까슬한 감촉.

삼키면 목에 생선 가시가 걸린 듯 고통스러울 것 같았다.

하지만 산 자의 섭리를 거스르는 기운, 이 망할 기운을 짓밟고 잡아먹어야 강해질 수 있었다.

정신 방벽과 고대 문양의 능력이 없었더라면 시도조차 하지 못했을 미친 짓.

아니, 이보다 더 미친 짓을 해야 했다.

‘키메라에게 영향을 주지 않을 정도로 미약하게 고대 문양을 사용해야 하니까.’

문양의 능력은 2성에 오르면서 어느 정도 빛을 통제할 수 있게 됐다.

‘한 번만 실수해도 끝이다.’

키메라가 날 뱉는 순간, 돌이킬 수 없다.

아주 조금씩, 그리고 아주 긴 시간, 그렇게 인내를 가지고 복용을 시도해야 할 것이다.

무척 고통스러운 시간일 수도.

하지만 살아남기 위해선 해야 할 일이었다.

잠시 후, 나는 아주 끈적하고 불결한 공간에서 그보다 더더욱 거칠고 불결한 가루를 입 안에 털어 넣었다.

“흡!”

지독한 고통이 뇌리를 뚫고 몰려온다.

죽을 수도 있겠다는 두려움과 강해지고 싶다는 욕망, 그 외의 복잡한 감정이 혼재된 잡념을 털어버리고 천천히 눈을 감았다.

키메라 배 속에서의 수련.

마석의 기운이 들끓기 시작하자,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진득한 피맛.

이 비린 맛에 익숙해지며 훗날 이때의 과거를 추억하며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3성에 오를 때가 가장 ㅈ같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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