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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에게서 살아남는 법-48화 (48/130)

48화 환상 마법진

스아아아―!

3성의 마나를 빨아들인 문양은 눈부신 물결로 사방을 황금빛으로 물들였다. 고립된 공간, 그 안에서 황금빛에 잡아먹힌 키메라들은 그대로 돌처럼 굳어버렸다.

[……!]

빛이 사그라들고, 휑해진 공간.

천천히 내가 등을 돌려 펜리를 바라보며 손을 내린 순간,

쿠쿠쿠쿠쿠쿵―!

수백의 키메라들이 약속한 것처럼 쓰러졌다. 손짓 한 번에 모든 것을 무너트린 압도적인 광경.

“너 이 새끼….”

펜리의 표정에 처음으로 놀라움이 드러났다.

두 눈을 살짝 치켜뜬 채 나를 한참 응시하던 그녀는 무구를 해제하곤 곰방대를 물며 생각에 잠겼다.

아서 클레이튼.

첫 만남에선 별 볼 일 없는 놈이었는데, 알면 알수록 기준이 계속 달라지는 녀석이었다.

까면 깔수록 새로운 모습이 나타난달까.

“양파 같은 놈이네. 힘을 숨기고 있었어?”

“전 숨긴 적이 없습니다만.”

“엉덩이 만질 때 분명 1성이었는데, 이상해. 내 감각이 틀릴 리가 없는데.”

“…….”

첫 만남에서 엉덩이를 만진 게 그런 의미였냐?

검은 장미에서 펜리를 처음 만났을 때 1성이었으니, 그녀의 판단은 정확했다.

너무 짧은 시간 안에 3성에 올랐기에 그녀의 혼란은 당연했다.

내 각성 속도는 확실히 비정상적이었으니까.

모두 생체 마석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기적이었다.

“게다가 꼴에 특성 개화자? 무기에 능력을 부여하는 지원 계열인가? 그 빛은 또 뭐지? 설마 신력?”

수백의 키메라를 단숨에 제압했던 빛.

그 힘은 일반적인 특성과 달랐다. 특별하다고 해야 하나?

펜리는 호기심이 담긴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 시선에 난 짧게 호흡을 내쉬며 이마를 슬쩍 훔쳤다.

과도한 마나 소비로 어지럼증이 올라왔다.

‘일단 목적은 달성한 것 같은데.’

내가 오버페이스로 그녀 앞에서 능력을 드러낸 건, 샤르바딘을 찾은 직후를 대비한 것이었다.

그때부턴 계약이 아닌, 필요에 의한 동행이 될 텐데, 펜리의 무력을 빌려야 하는 상황에선 절대 그녀에게 끌려다녀서는 안 됐다.

‘주도권이 필요한 상황이지.’

적어도 이 장소에서만큼은 그녀보다 강력한 능력을 보유했음을 보여줘야 했다.

그래야 추후 내 의견이 먹힐 테니 말이다.

문양의 빛은 키메라에 한해선 그녀보다 압도적인 힘을 보여줬다.

“키메라에게 천적인 능력이라, 그 미치광이가 알면 널 씹어 먹으려고 들겠네.”

“비밀 지켜주시리라 믿습니다.”

“하는 거 봐서. 또 숨기는 거 없어? 다른 능력이라든가. 다 털어놔봐.”

이 망할 엘프가 춥다고 옷 빌려줬더니, 팬티까지 벗기려고 하네.

물론, 내 패를 전부 깐 것은 아니었다.

이번에 ‘새로운 패’가 생겼거든.

바로 3성에서 각성한 개화 특성.

무특성이면 어쩌나 했는데, 적어도 불운 덩어리는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정 궁금하시면 정보 교환할까요? 저도 펜리 님의 능력이 궁금하거든요.”

“내가 왜?”

“싫으면 관두고요. 이럴 시간 없습니다.”

그녀가 내 얼굴에 연기를 후 내뱉었다.

콜록! 매워. 맵다고. 이 빌어먹을 년아.

“흐응, 어디 나가서 보자고.”

그녀는 내게 의미심장한 미소를 남기곤 철문에 집중했다.

제단과 통하는 철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가져와.”

“네네.”

짧게 한숨을 내쉬며 죽은 관리인의 손을 자른 뒤 그녀 뒤에 섰다.

그녀가 비켜서자, 난 관리인의 손을 철문에 가져다 댔다.

잠시 후, 쿠쿵―! 소리를 내며 거대한 철문이 느릿느릿 열리기 시작했다.

뒤쪽에 잡혀 온 이들이 신경 쓰였지만, 당장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판단했다.

한두 명이라면 모를까.

백 단위가 넘어가는 이들을 전부 책임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잠시만.”

그때 펜리가 수레 쪽을 잠시 둘러보더니, 품에서 수정을 꺼냈다.

손톱 크기의 붉은 수정.

저 수정의 용도는 나도 잘 알고 있는 것이었다.

과거 넬리토리 협곡을 향할 때 그녀가 내게 건네줬던 물건으로, 저 수정을 으깨면 현재 위치 신호가 검은 장미들에게 전달되는 메커니즘이었다.

즉, 그녀가 제단의 위치를 누군가에게 알려주고 있다는 말이 된다.

“누구에게 보내는 겁니까?”

“저들의 주인.”

수레 안에는 납치당한 이종들이 의식을 잃은 채 쓰러져 있었다.

이종들의 주인?

토바른 지역에서 이종들을 대표하는 인물은 단 한 명뿐이다.

난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베네타의 군주, 도르네프.

“어째서 도르네프에게.”

“이번 의뢰는 그 난쟁이의 반려와 관련되어 있으니까. 성격 급한 난쟁이 녀석이 가만히 날 기다릴 것 같아?”

“도르네프가 설마 이곳으로 온다는 말입니까?”

“오는 내내 신호를 보냈으니 따라붙었겠지.”

“혼자 움직이는 거 아니었습니까?”

“정확히 각자 움직이고 있었지. 내가 샤르바딘의 위치를 찾았기 때문에 녀석이 움직인 거야.”

의뢰 초기에는 도르네프와 신호를 주고받으며 움직였던 모양인데, 도르네프를 이곳까지 끌어들인 건 내 정보가 한몫한 것 같았다.

이건 희소식이다.

“도르네프의 합류 시기를 정확히 알 수 없는 겁니까?”

“다리 짧은 난쟁이들만 움직이는 상황이라 살짝 불안하긴 한데, 그래도 반나절 안에는 도착할 거야.”

드워프들로 이뤄진 병력이라면 템빨 죽이는 정예 중 정예일 것이다. 문제는 합류 타이밍인데, 시기가 공교로웠다.

“도미닉의 병력과 부딪칠 수도 있겠는데요?”

“부딪칠 일은 없어. 난쟁이가 피할 테니까. 그 미치광이 곁에 진짜 괴물 새끼가 붙어 있거든. 저번에 부딪혔다가 도르네프가 호되게 당했지.”

예상대로 베네타의 영토에서 도미닉의 군단과 베네타의 군대가 한 차례 붙었던 모양이었다.

그나저나 미치광이 곁을 지키는 진짜 괴물이라.

‘아레나 후아튼.’

난 그 괴물의 정체를 바로 눈치채곤 빠르게 물었다. 그 전투에 펜리도 있었을까?

“혹시 그 괴물과 싸워보셨습니까?”

“아직. 하지만 도르네프가 절대 혼자 싸우지 말라고 경고하던데.”

“그래서요?”

“닥치라고 했지. 그딴 괴물은 내 한주먹거리도 안 돼.”

아, 어째 불안한데.

미완성체인 아레나 후아튼이라면 펜리 홀로 감당할 수 있을 거라 판단했는데 도르네프의 경고대로라면 판단 미스일지도 모르겠다.

‘이러면 샤르바딘의 생사가 더 중요해지는데….’

한 지역의 군주인 만큼 도르네프도 펜리만큼 강한 드워프였다.

샤르바딘을 곁에 둘 수 있다면 도르네프까지 내 계획에 끌어들일 수 있을 것 같았다.

거기다 후속 병력까지 도착하면 내 계획이 훨씬 순조로워진다.

‘제발 살아있어라.’

샤르바딘을 떠올리며 활짝 열린 문 너머를 응시했다.

둘러싼 붉은 벽을 제외하곤 내부는 휑했다.

보이는 거라곤 중심부에 자리한 작은 구덩이뿐.

근처로 다가가 구덩이 밑을 살펴보니 어두워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구멍 너비는 마을 우물보다 약간 큰 정도였는데, 잡아 온 이들을 이 구멍 안으로 던져 넣은 것 같았다.

“이게 제단이라고? 그냥 구덩이인데?”

“밑은 다르지 않을까요?”

“밑?”

이 밑에 먹이를 사냥하며 돌아다니는 존재가 있을 것이다.

그 존재를 펜리에게 정확히 알려주고 싶지만, 이곳 관리인조차 알지 못하는 정보를 내가 알려준다면 의심부터 할 게 뻔했다.

‘걱정할 필요도 없는 실력이고.’

그녀보단 오히려 나를 더 걱정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나도 저 구덩이 안으로 들어가야 했으니까.

“기다려봐.”

펜리가 구덩이 쪽으로 손바닥을 펴더니 주문을 외웠다.

잠시 후, 허공에 작은 빛 구체가 소환되더니 그녀의 시선을 따라 밑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빛이 퍼지며 서서히 드러나는 바닥 시야.

밑바닥은 그리 깊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당황할 정도로 얕았다.

5미터 정도?

순간 의문이 들었다.

“깊이가 얕은데요? 이상하지 않습니까?”

“뭐가?”

“이 정도 깊이면 누구든 탈출할 수 있었을 텐데, 어째서 단 한 명도 구덩이 바깥으로 나오지 못한 걸까요?”

구덩이 주변에 감시자나 경비를 따로 세운 흔적은 없었다. 그런데 구덩이를 빠져나와 탈출했다는 정보는 들은 바가 없었다.

“전부 기절한 상태로 끌려갔다면?”

“그럼 흔적이 남았을 텐데, 바닥에 흔적이 전혀 없습니다. 샤르바딘을 포함해서 수백 명이 먹이로 던져졌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랬지.”

“그럼 밑바닥에 뭔가 남아야 하는 게 정상 아닙니까? 적어도 핏자국이라든가.”

내 말에 펜리도 고민하는 눈치였다.

드러난 바닥은 너무나도 깔끔했다.

전부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의문은 많은데, 뚜렷하게 풀리는 게 없는 상황이었다.

‘소설의 시간보다 빠르게 움직이니까, 곤란한 점도 있네.’

구덩이 밑의 제단은 도미닉이 죽고 한참 뒤에 그 실체가 드러나게 된다.

그때 이곳은 완전히 무너져서 제단의 기능을 상실한 상태였다.

그때처럼 생각하고 움직이면 곤란했다.

‘아직 도미닉이 작업하기 전 단계이니까.’

내가 아는 건 이 제단의 정체뿐, 현재 이 밑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알지 못했다.

“모르겠으면 부딪쳐 봐야지.”

“그래야겠죠?”

“그런 의미에서 수고해.”

“…예?”

내 몸이 순간 휘청이더니 구덩이 밑으로 빨려 들어갔다. 펜리가 내 목덜미를 붙잡고 던진 것이다.

추락하는 순간 웃으면서 손을 살랑살랑 흔드는 펜리가 보였다.

“안전하면 곧 따라갈게.”

이런 망할 년이!

욕설을 한 바가지를 날리려는데,

“……!?”

나를 바라보던 펜리의 모습이 갑자기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대신 어둠이 찾아왔다.

어둠?

의문도 잠시,

콰자자작―!

“크윽!”

곧 나는 무언가에 부딪치며 바닥에 처박혔다. 나와 부딪친 것들은 잘게 부서지며 사방으로 튀어 올랐다.

이것들은 뭐지?

분명 바닥을 확인했을 땐 아무것도 없었는데.

“끄응!”

허리를 붙잡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다행히 다친 곳은 없었다.

허리를 두드리며 찡그리고 있던 두 눈을 뜬 순간이었다.

“…….”

난 돌처럼 굳은 채 주변을 둘러봤다.

붉은 벽에서 흘러나오는 광택 덕분에 시야는 흐릿하게 확보가 되었다. 물론, 썩 좋은 풍경은 아니었다. 내부는 핏빛으로 물든 오싹한 세상처럼 보였으니까.

하지만 더 오싹한 건.

“시발, 이게 다 뭐냐.”

두 발에 치이도록 쌓여 있는 뼛조각들이 보였다. 엄청난 양의 뼛조각이 바닥에 너부러진 광경.

잡혀 온 이들의 유해 같았다.

대체 얼마나 많이 잡아먹힌 거야?

게다가 위에서 바라볼 땐 분명 아무런 흔적도 없었다.

이 뼛조각들은 도대체 어디서.

‘설마…!’

다급히 위쪽을 확인했고, 난 얼굴을 와락 일그러트렸다.

구덩이가 사라졌다.

구덩이 대신 천장은 붉은 벽으로 꽉 막혀 있었다. 더듬거리며 천장 벽을 살펴봤는데 허상이 아니었다.

모두 진짜였다.

“펜리! 이 개 같은 년아!”

맞을 각오를 하고 그녀를 크게 불러봤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없었다.

펜리의 존재감마저 사라져 버린 상황.

순간 라웁 숲의 실험체 감옥이 떠올랐다.

‘환상 마법진!’

설마 이곳에도 환상 마법진이 존재하는 것이라면?

그럼 관리인들이 구덩이 밑으로 접근하지 못한 이유와 던져진 이들이 빠져나오지 못한 것이 모두 설명된다.

들어올 순 있어도 허락 없이 나갈 수 없는 장소.

‘이것까진 생각지 못했는데?’

아주 큰 변수가 발생했다.

갑자기 머릿속에 경고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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