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고립
“무슨 일이야?”
“아, 별일 아닙니다.”
발걸음을 갑자기 멈추자, 일행들이 나를 돌아봤다. 난 어색하게 웃으며 다시 움직였다.
미소도 잠시, 내 미소는 빠르게 굳어졌다.
‘블라이어와 에토르가 도미닉을 습격했다고?’
기존 스토리를 빠르게 되새겨보며 미간을 좁혔다.
‘도미닉의 후퇴 과정에서 두 가문의 개입은 없었어.’
없던 사건이 일어났다.
자신의 개입으로 스토리의 흐름이 바뀌었으니, 새로운 사건의 발생 가능성도 늘 염두에 두었다.
에토르의 주인, 톰자엘 자작은 마석 수집에 광적인 집착을 보인 인물, 키메라를 습격해도 예상 범주 안이었다.
하지만,
‘블라이어는 절대 아니야.’
학살자 카멜은 회귀한 주인공이다.
지금 군대를 움직이면 흙탕물에 발을 담근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텐데, 에토르와 함께 움직였다.
‘학살자의 군대가 움직이는 시기는 백 개의 심장을 얻은 도미닉이 베네타와 상잔할 때야.’
그 전까지는 조용히 웅크리고 있다가 정복 야심을 드러냈는데, 스스로 흙탕물에 발을 담근 것이다.
‘카멜이 톰자엘 자작을 움직였어.’
가만히 있던 에토르가 움직인 데는 카멜의 입김이 작용했을 것이다.
톰자엘 자작은 경험 많은 노회한 귀족이다. 절대 목적 없이 움직일 위인이 아니었다.
‘그리고 절대 손해 보는 성격도 아니지.’
숨겨진 의도가 있었다.
예측을 완전히 벗어난 카멜의 움직임.
무엇이 주인공의 행동에 변화를 준 것일까.
‘뭘 노리는 거지?’
학살자의 변칙적인 움직임에 머리가 복잡해졌다.
다만, 내겐 그 고민을 숙고할 시간이 없었다. 새로운 골칫거리가 나타난 것 같았으니까.
“주, 주군!”
“응? 저 난쟁이들은 뭐야?”
“부단장이다. 구조의 책임자지.”
바깥으로 통하는 통로에서 일련의 드워프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도르네프를 발견하곤 허겁지겁 달려왔다.
“주군! 큰일 났습니다!”
도르네프 앞에 선 드워프들은 납치당한 이들을 연구실 바깥으로 탈출시키던 병력이었는데, 그 임무를 맡던 부단장이 백지장처럼 질린 얼굴로 나타났다.
“구출 작업이 마무리 단계라 숲으로 길을 낸다고 하지 않았나?”
“그, 그게……!”
“진정하고 천천히 말해.”
“포위를 당한 것 같습니다.”
“뭐? 포위? 누가?”
“아무래도 이곳 주인이 돌아온 것 같습니다!”
도미닉의 키메라 군단.
심드렁하던 도르네프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펜리는 짧게 혀를 찼고, 난 신음을 흘리며 멈춰 섰다.
‘타이밍이 참 뭐 같네.’
반나절의 시간만 더 주어졌어도 충분히 준비하고 도미닉을 맞이할 시간이 있었을 텐데, 상황이 급하게 꼬여버렸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부단장에게 물었다.
“키메라의 수가 얼마나 됩니까?”
“이 인간은 누구……?”
“묻는 말에 답이나 해줘.”
손짓으로 입을 막은 도르네프가 지시를 내리자, 부단장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정확히는 모릅니다. 다만, 세 방향의 숲으로 척후조를 여러 번 보냈는데 전부 소식이 끊겼습니다.”
“척후조 전부?”
“네. 열 명으로 이뤄진 파티로 두 차례 보냈지만, 단 한 명도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빌어먹을.
포위당한 게 맞는 것 같았다.
절벽을 둘러싼 숲은 무척이나 넓었다. 척후조로 나선 드워프 중 기사급이 한 명씩 포함됐다는 걸 감안하면 키메라들의 수가 백 단위는 가볍게 넘어갈 것 같았다.
‘최소 수천 단위.’
지금 숲으로 진입하면 도미닉의 손에 죽는다.
의문이 든 난 도르네프를 바라봤다.
“대규모 연합군이 도미닉의 키메라 군단을 습격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했지. 큰 전투가 벌어졌어. 두 세력 전부 피해가 엄청날 만큼.”
“그럼 키메라의 수가 줄어들어야 정상 아닙니까?”
“그 전투의 결과는 나도 자세히 알지 못해. 우리는 이동에만 집중했으니까.”
블라이어와 에토르.
토바른 3강 중 두 곳의 연합군이 맥없이 패배할 리 없을 텐데, 키메라 수가 이 정도라고?
‘카멜이 질 싸움을 할 리 없어.’
머리가 워낙 뛰어난 놈이라, 의도 파악이 힘들었다.
대체 무슨 꿍꿍이인 거지?
여기서 고민해봤자 뚜렷한 답은 안 나왔다. 바깥 상황을 보고 판단하는 게 정확할 것 같았다.
“일단 움직이시죠.”
내가 선두에서 달리기 시작하자, 일행들이 빠르게 뒤따랐다.
의견을 묻지 않고 움직였는데 도르네프도 펜리도 내 말에 즉각 반응을 보였다.
도르네프에게 난 반려의 은인이었고, 펜리에겐 생명의 징표자로 선택받았다.
그 영향력 때문일까?
나도 모르는 사이, 난 이 파티를 이끄는 통솔자가 되어 있었다.
“저기요!”
“왜 자꾸 부르… 무, 무슨 일이십니까?”
그 분위기를 읽은 것인지, 책임자는 도르네프의 따가운 눈빛에 즉각 말투를 바꿨다.
“바깥 상황을 더 자세히 알고 싶습니다.”
“그게…….”
상황을 간략히 전달받았다.
연구실에서 탈출시킨 이들이 대략 4천에 달했다. 그들은 현재 입구를 벗어나지 못하고 절벽 틈새에 고립된 상태였다.
‘연구실에 남은 친위대장 나토네가 남은 구조 병력까지 데리고 복귀한다면….’
도르네프의 군대.
구조된 사람들.
전부 합치면 대략 7천 정도 될 것 같았다.
머릿수로 따지면 도미닉의 키메라 군단과 엇비슷할 것 같았다.
‘이거 골치 아픈데.’
문제는 전투력의 부재다.
7천 중 절반 이상이 비전투 인원에 해당했다. 아니, 발목만 안 잡아도 다행이려나.
그런데 포위당한 상태.
상황이 좋지 않다.
분위기가 무겁게 흘러가자, 달리던 샤르바딘이 도르네프의 손을 꽉 붙잡았다.
“괜찮을까요? 도네프?”
그녀를 보며 안심하라는 듯 미소를 보인 도르네프가 곧 표정을 굳히곤 내게 물었다.
“방법이 있나?”
“제게 방법을 묻는 겁니까?”
“암고양이가 그러더군. 의견을 들어봐도 손해는 안 볼 거라고.”
암고양이란 말에 펜리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인간 전부를 사기꾼으로 보는 난쟁이가 인간에게 의견을 구하다니, 샤르바딘 때문에 겁먹은 거야?”
“시비 거는 거냐? 돈 받기 싫어?”
“이 사기꾼 똥자루 놈이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돈에 환장한 년 같으니라고.”
달리면서도 둘은 티격태격했다.
암고양이와 난쟁이.
서로 부르는 호칭이나 태도를 봤을 때, 제법 오랜 시간 인연을 이어온 느낌이었다.
어울리지 않는 친구 사이를 보는 느낌이랄까.
난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타이밍을 봐서 돌파를 시도할 겁니다.”
“돌파? 우린 상관없어. 하지만 잡혀 온 이들 대부분이 죽을 거다.”
잡혀 온 이종들도 상당수 섞여 있으니 우려를 표한 것이겠지. 단순하고 다혈질인 줄 알았더니, 군주는 군주라는 건가.
“타이밍이 중요합니다.”
“타이밍?”
“빠져나갈 상황이 분명 생길 겁니다. 문제는 그 골든타임이 무척 짧다는 거죠.”
“상황? 무슨 상황 말이지?”
“제단에 있는 그것.”
“그것? 자라나는 혹 말인가?”
난 고개를 끄덕이며 붉은 혹을 떠올렸다.
지금도 계속 자라나고 있을 붉은 혹.
그 존재에 해답이 있었다.
혹의 정체가 도미닉이 그토록 고대하던 아레나의 동력 원천임을 알게 된다면 도미닉은 우리 따윈 눈에 뵈지도 않을 것이다.
어떻게든 동력 원천을 확보하려고 할 텐데, 그 타이밍이 중요했다.
너무 빨리 움직이면 숲에서 키메라의 공격을 받게 될 테고, 너무 늦어 입구에 고립된다면 앞뒤로 포위를 받게 될 테니까.
‘상상하기도 싫은 가정이지.’
몰살을 피하려면 그 찰나의 골든타임을 이용해야 했는데, 그 타이밍이 언제 올지 모르는 상황.
‘모르면 만들어야지.’
기다리는 건 하책이다. 도미닉을 자극해서라도 먼저 움직이게 해야 했다. 그에 대해 고민하고 있는데,
“입구입니다!”
환한 빛이 통로 끝자락에 나타났다.
연구실 바깥으로 통하는 입구 중 하나.
절벽이 만들어낸 쩍 벌어진 틈새에 도착했다.
틈새 너머로 펼쳐진 푸른 숲이 보인다. 틈새에 다다르니 거대한 공터가 펼쳐졌다. 다만, 그 공터는 이미 다른 이들이 꽉 채우고 있었다.
공터를 채운 인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
입구를 틀어막고 있는 드워프 기사단과 인간들의 대치도 이뤄지고 있었다.
분위기가 무척 험악했다.
“입구를 왜 막아서는 거야!”
“지금 나가는 건 위험하다. 인간.”
“숲을 코앞에 두고 뭐 하는 짓이야! 괴물 놈들이 돌아오면 어쩌려고?!”
“척후조가 돌아오지 않았다. 기다려봐야….”
“상관없으니 비켜! 여기부턴 우리가 알아서 갈 테니까!”
구출된 인간 중 일부가 입구에서 드워프들과 실랑이 중이었다.
잡혀 온 이들을 살펴봤는데, 전부 멀쩡히 돌아다니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체액의 부작용이 전부 사라진 모양이었다.
‘시장통이 따로 없네.’
역시 사람이 많이 모이면 꼭 말썽이 벌어진다.
조용히 드워프의 지시를 따르는 이종들과 달리 인간들은 길을 막고 있는 드워프들에게 불만을 표하고 있었다.
바깥 상황을 말해줘도 이종인 탓에 불신하는 모습이었다.
“구해줘도 인간들은 만족을 모르지. 내가 이래서 인간들을 싫어해.”
도르네프가 으르렁거리며 앞으로 나서려고 하자, 내가 그 앞을 잠시 막아섰다.
“제가 해결하겠습니다.”
“같은 인간이라고 편드는 건가?”
“설마요.”
편은 무슨.
곧 천재지변에 버금가는 전투가 벌어질 텐데, 통제도 안 되는 폭탄들을 데리고 함께 움직이라고?
인간들을 하나하나 붙잡고 설득할 시간이 있을 리 없다.
도주할 골든타임은 찰나처럼 짧았고, 그 타이밍을 놓치면 앞뒤로 휩쓸려 몰살당할 것이다.
난 악당도 영웅도 아니다.
그저 내 목숨이 소중한 하나의 인간일 뿐.
통제할 수 없다면 이용이라도 해야 했다.
난 곁에 있는 부단장에게 따라오라고 손짓한 뒤 입구를 막고 있는 드워프들 앞에 섰다.
부단장이 돌아오자, 드워프들이 막던 무기를 거두었는데, 난 물러나는 드워프들 앞에 나서며 말했다.
“길을 열어주십시오.”
“넌 뭐지?”
“당신의 주인이 보낸 사람입니다.”
내가 부단장을 바라보자, 부단장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부단장의 긍정에 드워프들은 미련 없이 길을 열었다. 열린 틈 사이로 드넓은 숲이 펼쳐지자, 인간들이 틈새 앞으로 우르르 몰려들었다.
대략 오백 정도 되려나?
하지만 정작 나가려고 하니 주저하는 표정들이었다.
“길을 열어줬는데, 안 갑니까?”
“저들이 왜 네놈 말에 길을 열어준 거지?”
어느새 이곳에 모인 이들의 시선이 내게 집중되고 있었다.
말 한마디에 드워프들을 움직였으니 내 정체가 궁금했겠지.
“용병입니다.”
“용병? 그럼 우리랑 같은 편이잖아? 어디 출신이야?”
“블라이어 C급 용병 알입니다.”
내가 C급 용병패를 내밀자, 덩치 큰 사내들이 코웃음을 치며 내 앞에서 위협적인 표정을 지었다.
전부 용병들이었는데, 잡혀 온 이들 중 용병끼리 합심해서 뭉친 듯 보였다.
선동질하는 놈들이 이들인가?
“드워프들에게 뭐라 말한 거야?”
“안쪽 상황을 드워프들에게 알려줬습니다.”
연구실을 언급하자, 용병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 지옥을 경험했다면 확실히 저런 표정이 가능하지.
“무슨 상황인데?”
“붉은 괴물이 제단에서 나타났는데, 드워프들이 힘겹게 막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곳까지 뚫릴지도 모르죠.”
“뚜, 뚫린다고? 어떤 괴물이길래?”
“죽여도 죽여도 계속 살아납니다. 그 괴물은 자신을 불사자의 심장을 가진 존재라 했습니다.”
“불사자의 심장?”
붉은 괴물의 존재가 용병들을 통해 주변으로 빠르게 퍼져나갔다.
괴물 소식에 주변 분위기가 더욱 어수선해졌다.
난 그들에게 선택지를 제시했다.
“이곳은 곧 방어진을 치고 붉은 괴물과 싸울 준비를 할 겁니다. 당신들은 어쩌실 겁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