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고립(2)
함께 싸울지, 이곳을 벗어날지의 선택.
용병들은 고민도 없이 당장 벗어나는 선택을 주장했다.
난 주변을 둘러보며 크게 소리쳤다.
“드워프와 함께한다면 숲을 벗어날 때까지 보호를 약속해 드리겠습니다. 대신, 드워프들의 통제에 무조건 따라주십시오!”
“흥! 이 상황에 이종들을 믿으라고?”
“구해준 이들 아닙니까? 못 따를 것도 없지요?”
“지금 대낮이야. 도망치려면 지금밖에 없어. 해가 지면 이곳에 갇히겠지. 그때 더 많은 괴물이 돌아온다면? 게다가 붉은 괴물이 곧 나타날지 모른다며? 위험한 거 아니야?”
용병들은 내가 준 소식이 기회인 듯 재차 선동에 들어갔다.
이곳은 인간들 외에 이종들도 무척 많았다. 진짜 위기가 닥쳤을 때 과연 드워프들이 인간들을 지켜줄까?
“드워프들은 이종들을 먼저 보호하려고 할 거야!”
종족 간의 불신을 강조하며 선동에 들어간 용병들.
어느새 공터에는 드워프를 믿어보자는 인간들과 보내줄 때 탈출해야 한다는 인간들로 의견이 나뉘었다.
다만, 드워프의 구조를 받았기 때문인지 용병들보단 드워프의 통제를 따르려는 인간들이 더 많아 보였다.
물론, 용병들의 선동에 넘어가는 이들도 상당수 존재했다.
‘저들은 어쩔 수 없나?’
용병들의 시커먼 속내를 모를 리 없었다.
용병들이 전투 인원도 아닌 일반인들을 선동해 함께 움직이려는 이유.
키메라들과 마주칠 시, 시간을 벌어다 줄 제물이 필요한 것이었다.
함께하면 위기 시 가장 먼저 죽게 될 거다. 하지만 선동에 휩쓸리는 이들을 굳이 붙잡지 않았다.
머릿수가 충분히 채워졌다고 판단한 건가.
천여 명이 모여 입구로 다가왔다. 그중 통솔자로 보이는 얄팍한 용병이 내 앞에 섰다.
기세를 보면 무력이 용병 사이에서 중간쯤 되어 보이는데, 저 세 치 혀로 단숨에 분위기를 휘어잡고 이곳 통솔자가 된 녀석이었다.
어딜 가든 오래 살 놈 같은데, 이번에는 번지수가 틀렸다.
쭉 찢어진 눈가가 날 보며 휘었다. 명백한 비웃음.
“남게 된 걸 후회하게 될 거다.”
“그건 나중에 알게 되겠죠.”
“드워프들을 등에 업더니 간땡이가 부은 건가? C급 용병 알, 기억해 두지.”
날 지나치며 비아냥거리던 용병은 긴 행렬을 이끌고 틈새 바깥으로 움직였다.
드넓은 숲속으로 하나둘 사라지기 시작하는 행렬.
그 모습을 조용히 바라보고 있는데, 펜리가 슬쩍 다가왔다.
“너, 저들의 운명을 알고 있지? 대부분 죽을 거야.”
“그럴 확률이 높겠죠.”
“악당이 된 소감이 어때?”
“선택은 저들이 한 겁니다.”
“일부는 붙잡을 수 있었을 텐데?”
“용병들이 가만히 있었을까요? 그런 데 드잡이할 시간 없습니다.”
“붉은 괴물, 불사자의 심장은 네가 지어낸 거야? 마치 저들을 이용해서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것처럼 보이던데.”
“…….”
“설마 도미닉? 용병 머저리들에게 메시지를 딸려 보낸 거 그냥 한 짓 아니지?”
정말 눈치 하난 귀신같단 말이지.
지금 선택이 남은 이들을 살릴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침묵으로 긍정을 표하자, 입에서 곰방대를 뗀 펜리가 씨익 웃더니 손을 내밀었다.
“나랑 친구 어때?”
“갑자기 친구? 기준이 뭡니까?”
“돈 냄새가 진하게 풍기는 녀석들. 그런 녀석들은 오래 살아남고 크게 한탕 하더라고.”
“감입니까?”
“감이든 뭐든 친구 할 거야? 말 거야? 두 번은 제안 안 해.”
“후회하실 텐데?”
대답과 달리 난 그녀의 손을 냉큼 잡았다.
지금 친구라도 되어놔야 나중에 친구니 뭐니 하며 살려달라 부탁을 할 수 있다.
잠시 후, 내가 어떤 짓을 벌일 건데, 그 일로 그녀가 날 죽이려고 하면 곤란하거든.
“친구가 된 기념으로 부탁 하나만 해도 됩니까?”
“금액만 맞는다면?”
“…친구한테까지 돈을 받습니까?”
“할인은 해주지.”
망할 년, 진짜 돈 귀신이 붙었나.
다행히 내 곁에는 도르네프라는 돈줄이 있었다.
“이곳의 안전과 직결되는 일이라고?”
“네. 펜리 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망할 암고양이.”
도르네프는 펜리를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손가락 하나를 살살 흔드는 그녀가 보인다.
천 골드.
도르네프가 짧게 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이자, 펜리는 이를 드러내며 웃고는 그림자 사이로 사라졌다.
그녀의 실력이라면 숲 어디에 위협이 존재하든 빠르고 안전하게 돌아다닐 수 있을 것이다.
난 그녀에게 주변 수색을 부탁했다.
‘연합군이 이 주변에 있는지 확인이 필요해.’
카멜의 존재는 내 계획에 늘 치명적인 변수 덩어리였다.
연합군이 숲 주변에 매복해 있다가 기습적으로 나타난다면?
‘예측 불가능한 개판으로 상황이 흘러가겠지.’
카멜이 이 주변에 없길 간절히 바랐다. 일이 복잡해지는 건 사절이었으니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연구실에 마지막까지 남았던 친위대장 나토네가 남은 이들을 모두 이끌고 복귀했다.
공터에 한데 모인 머릿수를 가늠해보니 6천 정도 되어 보였다.
난 바쁘게 인파를 누비는 나토네에게 다가갔다.
떠날 때 한 가지 부탁을 했기 때문이다. 바로 제단에 있는 붉은 혹을 살피는 것.
“마지막에 어떻던가요?”
“붉은 혹은 이제 미믹의 덩치보다 커진 상태야. 거대한 바위처럼 계속 자라나고 있네.”
더 커졌다.
곧 뭔가 튀어나올 것 같은데, 일단 펜리가 오기 전까진 판단을 보류해야 했다.
잠시 후, 태양이 뉘엿뉘엿 지기 시작하며 내 뒤 그림자가 늘어졌을 때, 누가 내 엉덩이를 툭툭 건드렸다. 시선을 돌리니 하품을 하는 펜리가 보였다.
반가우면서도 한숨이 나왔다.
“어떻게 됐습니까?”
“주변에 인간 군대의 흔적은 없어.”
“키메라들은요.”
“예상보다 훨씬 많아. 사방이 키메라 천지야.”
카멜이 이곳에 없다.
다행히 최악은 면했다.
“도미닉은 보셨습니까?”
“그 녀석은…….”
인상을 살짝 찡그린 펜리가 한쪽을 가리켰다.
그 순간,
푸드득―!
가리킨 방향에서 날갯짓 소리가 들려왔다.
드넓은 숲 위로 지는 붉은 노을, 그 위로 새들이 일시에 날아올랐다.
그저 하나의 장면에 불과했지만, 나는 그 장면에서 하나의 신호를 읽었다.
용병들이 사라진 방향이다.
내 예측을 증명하듯,
“도미닉이 사냥을 시작했다. 벌써 반수 이상이 죽거나 잡혀갔어.”
펜리가 사실을 확인시켜줬다.
골든타임이 조만간 찾아온다.
난 서둘러 사람들을 한데 모았다.
상황이 급해졌다.
* * *
에토르 영지의 접대실.
화려한 식탁에 만찬이 준비됐다.
보기 드문 귀한 음식들 앞에 두 명이 자리했다.
“푹 쉬었나?”
“덕분에.”
“귀한 손님이라 신경 써서 준비했네. 앉지.”
에토르의 성주, 톰자엘 자작은 와인잔을 들며 눈앞의 사내를 맞이했다.
카멜 블레이저.
육십에 이른 자신의 나이에 절반도 안 되는 새파란 애송이지만, 쉽게 볼 수 없는 상대라 경계가 필요했다.
자작이 보랏빛 잔을 흔들며 말했다.
“렛샤포 블랑, 이 와인을 아나?”
“엘레토르 성곽에서 넘어온 귀한 술이군요. 클라크 대공이 가장 즐겨하는 기호품으로 알고 있습니다.”
“견식이 제법이군.”
“부친이 좋아하셨습니다.”
“부친 일은 유감이네. 형도 함께 잃었다지?”
“운이 없었습니다.”
“운이 없었다라….”
자작은 카멜의 의자 뒤에 시립한 리옹의 표정을 살폈다.
무표정으로 호위를 서고 있는 블라이어의 대표 기사.
감정을 읽기 힘들자, 자작은 짧게 혀를 차곤 식기를 들었다.
딸그락― 딸그락―
무거운 식사 시간이었다.
십수 명의 기사들이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는 모습이 펼쳐졌다.
음식을 나르는 시종들은 기사들을 지나칠 때마다 식은땀을 흘리며 마른침을 삼켰다.
바로 어제 두 가문의 군대가 큰 피해를 입고 에토르 영지에 입성했다.
언제든 책임 공방이 험악하게 나올 수 있는 자리.
침묵 속에서 식기 부딪치는 소리만 나직이 들려왔다. 잠시 후, 디저트가 식탁에 올라왔을 때, 자작이 와인을 음미하며 천천히 입술을 뗐다.
“보고 받았네. 피해가 상당하더군.”
“키메라 수가 예상을 훨씬 웃돌았습니다.”
“정예병을 2천이나 잃었다지? 속이 쓰리겠어.”
“기사단 하나를 잃으신 자작님만큼 하겠습니까?”
톰자엘 자작은 카멜의 대답에 눈썹을 찌푸렸다.
며칠 전 카멜이 키메라들의 이동 경로가 그려진 라웁 숲 지도를 내밀며 합동 토벌을 제안했다.
최소 천 개 이상의 마석 수급이 가능하리라 확신했던 토벌 계획.
당연히 구미가 당겼고, 제안을 받아들인 자작은 상당히 신경 써서 토벌대를 보냈다.
결과적으로 천오백 개에 달하는 마석을 전리품으로 가져왔으니, 성공적인 토벌이었다.
다만, 피해가 무척이나 뼈아팠다.
“그 안에 무시무시한 괴물이 있단 정보는 못 들었는데?”
“저도 알지 못했던 존재입니다.”
토벌에 큰 피해가 난 이유는 작은 괴물의 존재였다.
작은 체구의 여인.
그 괴물 앞에 이백(二百) 인으로 구성된 기사단 하나를 밀어 넣었는데, 단 한 명도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
그 압도적인 살육에 연합군의 사기가 곤두박질쳤고, 토벌은 큰 피해를 남기고 끝이 났다.
본래라면 서로의 책임을 물으며 고성이 오가는 살벌한 식사 자리가 돼야 했었다.
하지만 톰자엘 자작이 만찬에서 카멜을 미소로 맞이한 건 그가 정예병 2천을 희생해 퇴로를 열었고, 어젯밤 보내온 교섭 제안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었다.
“잘못된 정보를 들고 제안한 그대의 책임이 크긴 하지.”
“그래서 다시 제안드린 겁니다.”
“들었지. 붉은 마석을 내게 모두 넘기겠다고?”
“대신 다른 것을 원합니다.”
“원하는 것을 말해보게.”
“밀 1만 포대를 원합니다.”
“밀 1만 포대라.”
약조한 대로라면 50대 50 비율로 마석을 나눠야 했지만, 카멜은 마석 대신 식량을 원하고 있었다.
자작은 고민하는 척했다. 그는 이미 속으로는 계산을 끝내고 카멜의 제안을 받아들인 상태였다.
밀 1만 포대가 부담스러운 것은 사실이지만 충분히 지급 가능한 양이었다.
‘똑똑한 줄 알았더니, 아직 애송이로군.’
식량이야 반년 안에 밀 추수가 끝나면 배로 충당될 소비재였다.
하지만 마석은 다르다.
마석은 제한적인 만큼 무척이나 귀했다. 게다가 기사들을 대거 잃은 자작에게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이기도 했다.
게다가 더 기대되는 건,
‘천오백 개의 마석이라면 5성급 각성자가 나타날지도 모르지.’
수백 수천의 희생이 따라도, 단 한 명의 5성 각성자만 추가로 배출시킨다면 블라이어 성주조차 자신의 눈치를 보기 시작할 것이다.
두 명이 나온다면?
‘더 큰 욕심을 낼 수 있겠지.’
혀로 입술을 축이며 자작은 기사 단장을 바라봤다.
단장은 주군의 시선에 리옹 마트레인을 살피곤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자신과 동급인 5성 기사라는 것을 확인한 건데, 리옹은 몇 달 전까지 4성을 전전하던 부단장 출신이었다.
정보 조직이 알아 온 소식에 의하면 최근 5성에 오른 리옹이 무언가 복용했다고 했는데, 마석일 확률이 높다는 정보가 들려왔다.
‘최근에 확보한 마석 실험으로 3성까진 각성이 가능한 것으로 확인됐지.’
이번에 확보한 천오백의 마석이라면 5성도 가능하지 않을까 판단하고 있었다.
전혀 손해가 없는 거래란 뜻이었다. 그럼에도 자작은 쉽게 그 조건을 수락할 생각이 없었다.
“큰 희생으로 확보한 마석을 포기하다니, 혹여 마석에 관해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된 건가?”
“그저 가문의 재정이 좋지 않아 내린 판단입니다.”
“어려운 상황인가 보군?”
“아실 텐데요?”
자작은 어깨를 으쓱이며 빈 잔에 와인을 따랐다.
‘큰 화재로 광물 창고들이 모두 불타 궁핍하다고 하더니 사실이었군.’
지금 카멜의 상황에선 마석보단 식량이 더 중요한 자원일 수도 있었다. 승계가 불안정한 상황에선 내실이 중요한 시기였으니까.
“밀 7천 포대로 하지. 1만 포대는 너무 과해.”
“마석을 원하는 성주들은 많습니다. 편지도 여럿 받은 상태죠. 제 몫이 750개였던가요?”
“8천 포대.”
“그럼 8천 포대에 추가로 골동품 하나를 받도록 하겠습니다.”
“골동품?”
“판매를 거절하신 그 물건 말입니다.”
“아, 그 지팡이 말인가?”
“그렇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