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소리 없는 찬가
“괴, 괴물! 오지 마!”
“아아아아악―!”
피로 물든 숲 너머로 비명 섞인 바람만 불어닥쳤다.
대지에 너부러진 시신들은 모두 찢기고 갈라져 끔찍한 몰골을 하고 있었다. 그중 살아남은 이들은 괴물들에게 잡혀 사지가 뜯기는 중이었다.
“먹이들이 도망쳤군요.”
메마른 표정의 중년인이 큰 책을 들고 앞에 섰다. 얼굴에 묻은 핏방울을 닦아내며 중년인, 아니 도미닉은 눈앞의 용병에게 물었다.
“불사자의 심장이라고 했습니까?”
“사, 살려주시… 아악!!!”
“전 죽음을 싫어합니다.”
눈앞의 용병을 심문하는 건 용병이 이 행렬의 책임자로 보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흥미로운 소식이 그 용병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불사자의 심장.
왜일까.
그 단어를 듣는 순간, 도미닉의 심장이 두근두근 뛰기 시작했다.
“다, 다 말하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물음에 답하신다면.”
“부, 분명 들었습니다! 제단에서 붉은 괴물이 튀어나와 드워프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고!”
“제단? 방금 제단이라고 했습니까?”
용병은 조금 전까지 천여 명의 행렬을 이끌고 라웁 숲을 벗어나는 중이었다.
키메라 무리가 나타났을 때, 제물로 던져줄 이들이 수백이 넘어갔다.
시선을 돌리고 도망치기 충분해서 용병들은 탈출을 자신했다.
하지만 그건 크나큰 착각이었다.
‘드, 드워프들의 말이 맞았어.’
제물을 던지고 던져도 키메라들은 끝도 없이 몰려왔다.
제물마저 부족해지자 키메라들은 용병들로 만찬을 시작했고, 목줄이 풀린 키메라들은 먹잇감을 게걸스럽게 먹어 치웠다.
천여 명이 몰살당하는 데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는 이제 이곳의 유일한 생존자다.
‘이곳에서 죽을 수 없어…….’
그리고 아직 삶의 희망을 놓지 못했다. 살기 위해 그는 떠오른 모든 정보를 토해내기 시작했다.
연구실에 나타난 드워프들과 연구실에 남은 자들.
지금 연구실의 상황.
소식을 전달한 C급 용병 알이란 이름까지.
두서없이 그는 입을 쉬지 않고 조잘거렸다. 눈물범벅이 되고, 표정에 절망이 서렸다.
간절히 삶을 원하는 용병을 도미닉은 감정 없이 바라봤다.
인간은 식용돼지를 보며 가여움을 느끼던가?
“사, 살려주시는 겁니까?”
고개를 끄덕인 도미닉은 아레나를 바라보며 손짓했다.
“영원한 삶을 약속하겠습니다. 대신 머리는 필요 없으니 몸통만 가지고 가지요.”
“그 무슨 개소… 끄아아악!”
아레나의 손에 용병의 머리가 뽑혔다.
그녀는 잘린 머리를 한쪽에 던졌다. 그곳에는 그녀에게 살육당한 용병들이 무덤처럼 쌓여 있었다.
도미닉은 피로 물든 그녀를 손수건으로 닦았다.
“…….”
그 사이 그녀는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멍하니 연구실 방향을 응시하는 소녀.
작은 변화였지만 도미닉은 그녀의 반응에 눈을 반짝였다.
인형처럼 움직이던 그녀가 연구실에 가까워질수록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끌림을 느끼는 듯한 반응.
저 공허한 눈으로 무엇을 바라보고 있는 것일까.
“불사자의 심장.”
그 단어를 중얼거리자, 딸의 시선이 자신을 향했다.
그 반응에 확신할 수 있었다.
연구실에서 도망친 먹이들이 전해온 한 가지 정보.
딸의 반응은 불사자의 심장과 분명 관련이 있었다.
‘미믹이 죽고 붉은 괴물이 나타났다라.’
미믹과 교감이 끊긴 순간, 미믹의 죽음을 눈치챘다.
드워프들의 짓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들로 미믹을 잡기란 불가능했다.
강력한 실력자가 존재한다.
“도르네프. 베네타의 군주가 직접 움직인 건가?”
도르네프가 어떻게 자신의 연구실을 찾은 것인지, 왜 급습했는지 이유는 모른다.
아니, 더는 알 필요 없다.
도미닉의 신경은 오직 하나, 붉은 괴물에 집중되어 있었다.
오랜 세월 미믹에 대한 정보를 캐내며 마석의 비밀을 파악했다.
‘마석은 부산물에 불과해.’
마석을 생산해내는 고대의 힘.
그 힘이 크리스탈 미믹의 진정된 가치였다.
미믹은 마석이라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다.
거위의 배를 가르지 않은 건 아레나의 육체가 완성되기까지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힘이 배를 가르고 나왔다면 더는 지체할 수 없었다.
‘아레나의 신(新)동력 원천.’
그 붉은 괴물은 자신의 것이다. 누구도 욕심내선 안 됐다.
동력 원천을 손에 넣고, 아레나가 진정한 힘을 각성한다면 도미닉은 딸과 함께 그를 찾아갈 생각이었다.
‘베르센 클라크! 기다려라.’
클라크 대공을 떠올린 순간, 감정 없던 도미닉의 표정에 균열이 갔다.
언제고 대공을 키메라로 만들어 복수의 마침표를 찍을 것이다.
‘도착하는 대로 일지부터 챙겨야겠어.’
손을 내밀자, 아레나가 그 손을 잡고 따라왔다.
“오늘이 너의 생일이구나. 탄생을 기념하는 파티를 시작해야겠다.”
도미닉이 책을 활짝 펼쳐 들자, 숲에 흩어져 있던 키메라들이 멈칫하더니 동시에 절벽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키에에엑!
쿠웩!
잠시 후, 키메라들이 신호를 받은 것처럼 절벽으로 돌진하기 시작했다.
새까만 구름이 숲을 가득 채웠다.
잠시 후, 엄청난 키메라 떼가 숲을 뚫고 드넓은 들판을 밟았다.
그 순간,
그오오오오오오오오―!
“……!”
눈앞의 절벽에서 섬뜩한 울부짖음이 터져 나왔다.
키메라 떼가 일순간 멈춰 설 정도로 울부짖음이 담고 있는 기운은 거칠고 폭력적이었다.
그들의 위에 군림하는 기운.
도미닉은 그 기운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본체다.
본체가 나타났다!
이곳 키메라들은 저 본체의 부산물로 만들어진 실험체들이라, 기운이 터진 순간 움츠러들었다.
오직 아레나만 그 기운에 대항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두렵다.
그런데 미칠 듯이 기뻤다.
‘드디어!’
도미닉의 눈동자가 희열로 가득 찼다.
그는 빠르게 책 페이지를 넘겼다. 이 책에는 미믹에게서 얻은 많은 고대 지식이 담겨 있다. 잠시 후, 책이 떨리더니 보랏빛 운무가 키메라들을 둘러쌌다.
운무 속에서 변화가 일어났다.
“가라.”
키에에에에엑!
멈칫하던 키메라들이 입을 벌린 채 울부짖는 방향으로 사납게 질주하기 시작했다.
울부짖음에도 더는 주춤하지 않는 모습.
쿠쿠궁―!
울부짖음에 절벽이 흔들리며 비명을 토했다. 절벽 안쪽에서 무언가가 꿈틀거리며 일어나는 움직임.
“…….”
도미닉은 저 멀리 절벽 입구에 고립된 먹이들을 발견했다.
숫자가 많지만, 그에겐 방해물에 지나지 않았다.
작은 손짓 하나.
처형 명령이 떨어졌다.
* * *
“이봐.”
“네.”
“내 눈에는 네가 말한 골든타임이 끝난 것 같은데?”
“무슨 뜻입니까?”
“ㅈ된 거 같다고.”
펜리는 바깥을 나와 절벽을 등졌다. 팔짱을 낀 그녀는 숲 너머 기운을 살폈다.
좌우 그리고 정면, 세 방향에서 광폭한 키메라들의 기운이 쏟아지고 있었다.
이미 한바탕했는지, 바람 사이로 피 냄새가 물씬 풍겼다.
드넓은 숲이 괴물들을 토해내는 끔찍한 광경이 머릿속으로 그려졌다.
일반인은 마주 보는 것만으로도 오줌을 지릴 것이다.
“저 안쪽도 난리가 난 것 같고.”
펜리는 곰방대를 물곤 입구 쪽을 바라봤다. 난리인 건 뒤쪽도 마찬가지였다.
후드득―! 두둑!
“까아아악!”
“저, 절벽이!!!”
수천 인파가 한데 모인 공터가 지진이 난 것처럼 흔들리기 시작했다.
벽 전체가 쩌적 갈라지며 돌조각을 토해냈는데, 흔들림의 강도가 점점 더 심해졌다.
당장에라도 무너질 것 같은 분위기.
사람들은 삽시간에 공포로 물들었다.
“무, 무너지기 전에 나가야 해!”
“멈춰라, 신호를 기다려!”
“하, 하지만…!”
“통제를 따른다고 약조했을 텐데?”
나가려는 이들을 드워프들이 무기로 가로막았다.
드워프들도 이곳이 위험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당장 벗어나고픈 마음도 있었지만, 도르네프가 도끼눈으로 노려보고 있는 터라 표정을 숨긴 채 통제에 들어갔다.
입구 쪽에 홀로 서 있는 존재.
저 인간이 신호를 보낼 때까진 대기하고 있어야 했다.
한참 전부터 뭘 살피고 있는 거지?
모두의 시선은 자연스레 입구에 서 있는 한 사람에게 집중됐다.
붉게 저무는 하늘을 감상하듯 우두커니 서 있는 모습.
처음에는 그 뒷모습을 기대 어린 눈빛으로 바라봤지만 이젠 두려움으로, 나중에는 원망으로 바뀌었다.
그 분위기를 읽은 것일까.
“기다려 주세요. 우리는 모두 살아서 나갈 거예요.”
샤르바딘이 나섰다.
“그를 믿을 수 없다면 베네타를 믿어 주세요. 당신들을 위해 이곳까지 찾아온 그대들의 군주입니다.”
토바른 지역의 3강이자, 이종들의 정신적 지주.
그녀의 입에서 도르네프가 언급되자, 혼란은 빠르게 가라앉았다.
다행히 설득이 먹힌 모습.
모인 이들의 시선이 샤르바딘 쪽을 향했다.
정확히 큰 키의 샤르바딘을 어부바하고 있는 도르네프를 바라본 것이었다.
군주의 위엄이라곤 전혀 느낄 수 없는 모습.
도르네프도 어색했는지 허허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그녀를 업은 건 이유가 있었다.
자신뿐 아니라 대다수 드워프들이 곁에 여인과 아이를 끼고 있었다.
신호가 떨어지면 바로 업고 달리기 위해서였다.
‘전투보단 전력 질주가 될 것이라 했지.’
샤르바딘의 불안정한 숨결이 느껴졌다.
내색은 안 했지만, 그녀도 이곳이 무너지지 않을까 불안해하고 있었다.
피앙세를 불안하게 만든 괘씸한 존재.
도르네프는 입구 쪽에 선 사내를 바라봤다.
아서 클레이튼.
샤르바딘의 은인이라지만, 펜리 체이서의 보증이 아니었다면 절대 이런 미친 짓은 안 했을 것이다.
돈만큼이나 자신의 목숨에 민감한 다크 엘프.
도르네프는 아서보단 펜리의 감을 믿었다.
그녀는 아서의 지시를 따르는 것이 모든 이의 생존 확률을 높이는 일이라 확신했다.
무엇을 보고 그런 판단을 내린 것일까.
도르네프는 아서란 인물에 호기심을 느꼈다.
그때 두 사람의 대화가 들려왔다.
“아직 움직일 때가 아닙니다.”
“이 미친놈아, 너만 살려고 하는 거면 미리 말해. 나라도 살아야지.”
“제가 말하지 않았습니까? 타이밍은 찰나일 거라고.”
“그 찰나가 어느 정도인데? 네놈 짝짓기 시간보다 짧아?”
“당연히 짧죠.”
“조루는 아니지? 1분도 안 되면 곤란하잖아.”
“절 못 믿으십니까?”
“내가 어떻게 믿어. 너랑 짝짓기도 안 해봤는데.”
“…….”
이 상황에 저런 헛소리나 하고 있다니.
도르네프는 갑자기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이에 한마디 하려고 움직이려는데,
그오오오오오오오오―!!!!
“……!!!”
거친 바람과 함께 안쪽 통로에서 매서운 울부짖음이 터져 나왔다.
찌릿찌릿―!
그 울부짖음에 도르네프는 살짝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평범한 소리가 아니다.
온몸을 짓누르는 듯한 기운이 담겨 있다.
절대적 존재인 드래곤 피어와 비교할 순 없지만, 비슷한 압박을 느꼈다.
“…이런.”
역시나 안 좋은 예감은 맞았다.
샤르바딘의 몸이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주변을 살펴보니 마나 유저를 제외한 다른 이들도 하나같이 돌처럼 굳어버렸다.
표정에는 두려움이 담겨 있었다.
도르네프는 마나를 퍼트려 샤르바딘의 몸을 풀어줬다.
굳은 몸은 마나로 풀어줘야 한다.
도르네프가 서둘러 기사들에게 지시를 내리려는 순간이었다.
크에에엑―!
“고, 괴물입니다!”
“도미닉이 공격해 오고 있습니다!”
바깥에 키메라들이 나타났다.
“빌어먹을! 하필 이 타이밍에!”
도르네프는 순간 당황했다.
울부짖음에 굳어버린 이들만 수천에 달했다. 기사들이 움직여도 현 상황을 해결하려면 상당한 시간이 소요될 터, 이대로라면 신호가 떨어져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다급한 마음에 입구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응?”
그런데 그 녀석은 이미 안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무슨 짓을 하려는 거지?’
수천이 모인 공터 중앙에 선 녀석이 갑자기 소매를 걷었다. 주먹을 움켜쥐고 잠시 두 눈을 감던 녀석이 두 눈을 부릅뜬 순간,
번쩍―!!
“……!”
황금빛이 공터를 가득 채웠다.
화려한 빛의 물결이 허공을 따라 빠르게 퍼져나갔다.
빛에 뒤덮인 순간, 등에 업혀 있던 샤르바딘이 막힌 호흡을 내뱉으며 거친 숨을 내쉬기 시작했다. 그녀를 시작으로 빛의 물결이 한데 모인 이들을 살포시 훑고 지나갔다.
순간 사방에서 거친 호흡이 터져 나왔다.
모두 죽다 살아난 표정이었다.
두려움도 잠시, 사람들의 표정에 안정감이 깃들었다.
사람들은 본능처럼 두 눈을 감고 빛을 받아들였다. 마치 빛에 귀를 기울이는 듯한 모습.
“…이건.”
도르네프는 그 광경에 알 수 없는 기분에 사로잡혔다.
이 빛은 마치,
소리 없는 찬가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