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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에게서 살아남는 법-61화 (61/130)

61화 골든타임

공터를 채우던 빛이 사그라들고 어둠이 찾아왔다.

주변을 둘러본 나는 숨을 헐떡이며 주저앉았다. 거친 호흡에 정신을 차리기 힘들었다. 문양이 살짝 그을릴 정도로 무리하게 힘을 쏟아부었다.

‘아, 진짜 뭐 하나 쉽게 되는 일이 없네.’

단말마의 울부짖음.

내가 기다리던 신호였다.

근데, 울부짖음에 담긴 기운까진 예상치 못했다.

미믹의 것과 비슷하지만, 더욱 짙고 끈적한 기운.

뱀과 마주한 쥐가 공포에 몸이 굳듯, 울부짖음에는 포식자의 기운이 담겨 있었다.

그 기운에 삼켜져 사람들이 패닉에 빠졌다.

‘다행히 효과가 있다.’

미믹과 같은 기운이라 주저 없이 움직였고, 예상한 대로 고대 문양의 힘이 기운을 소멸시켰다.

사람들은 하나둘 머리를 흔들며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정신을 차린 그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조금 전까지 내비치던 원망 섞인 감정은 더는 보이지 않았다.

나의 다음 행동이나 말을 기다리는 모습인데, 방금 전 능력으로 확고한 신뢰를 얻은 것 같았다.

“괜찮나?”

“…혹시 포션 있습니까?”

“포션?”

“네. 꼭 필요합니다. 이럴 때 쓰려고 한 힘이 아니라서.”

도르네프가 다가오자, 난 바로 포션을 떠올렸다.

수천에 이르는 이들을 빛 안에 담기 위해 문양의 힘을 한계치까지 터트렸더니, 몸에 부담이 커졌다.

키메라 군단을 가로지르려면 문양의 힘은 필수였다. 컨디션 회복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내 말에 도르네프는 잠시 갈등하더니, 품에서 작은 병 하나를 건넸다. 오렌지 색감을 띤 맑은 액체가 든 병이었다.

“샤르바딘이 잘못됐을 때를 대비해서 가져온 것인데, 쓰게.”

“뭡니까?”

“요정의 눈물.”

“……!”

병의 이름을 듣는 순간, 난 눈을 번쩍이며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병을 잡았는데, 도르네프가 쉽게 놓지 않았다. 내가 힘을 주자, 탄식을 내뱉으며 병을 놨는데 굉장히 아쉬운 표정이었다.

난 물약을 마시지 않고 품 안에 넣었다. 그 모습에 도르네프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봤다.

“…뭐 하는 건가?”

“이런 물건을 지금 쓰면 욕먹습니다.”

“그럼 언제….”

“어련히 잘 쓰겠습니까? 감사합니다.”

요정의 눈물까지 준비한 것을 보면 샤르바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 같았다.

자꾸 피앙세, 피앙세 하며 소름 돋게 했는데, 이젠 인정해준다.

‘목숨 코인이 하나 더 늘었네.’

요정의 눈물은 최상급 포션보다 효과가 좋은 진귀한 물건이었다.

도르네프 정도의 이종 군주쯤 돼야 일 년에 한두 병 얻을 수 있는 치료제.

몸에 부담이 가는 정도로 복용하기엔 너무 아까웠다. 손끝에 힘조차 안 들어갈 때 마셔도 늦지 않았다.

뭔가 당했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도르네프.

쿵! 쿵! 쿵!

하지만 그 표정도 곧 동굴 안쪽을 돌아보며 딱딱하게 굳었다.

울부짖음이 멈추더니 이내 바닥이 거칠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뭔가가 오고 있다.

“뭐가 나타난 거지?”

“그겁니다.”

“그것? 설마….”

굳이 뭐라 언급할 필요도 없었다. 쿵쿵 소리의 간격이 점점 빨라지더니 더욱 가까이 들려왔다.

거대하고 육중한 무언가가 빠르게 오고 있다. 아니, 정확히 나오려고 하고 있다.

난 길게 숨을 내쉬곤 주먹을 움켜쥐었다 펴기를 반복했다. 손바닥에 땀이 배어 나오는 것이 긴장한 것 같았다.

붉은 혹, 아니 레토니칼스의 시험이 시작됐다.

나랑은 전혀 상관없는 시험이었다. 하지만 이곳에 머물고 있으면 휘말린다.

“골든타임입니다.”

어서 튀어야 했다.

“빌어먹을, 빨리도 말하는군.”

“시간이 없습니다. 어서!”

“움직인다!!!”

도르네프의 외침.

그 외침을 뒤로한 채 나는 다급히 입구 쪽으로 달려갔다. 분명 울부짖음이 터졌을 때 키메라들의 움직임이 일시에 멈췄다. 지금은 어떻게 됐을까?

바깥을 나와 펜리에게 물으니, 그녀는 짧게 혀를 차며 고개를 흔들었다.

“혹시나 했는데, 다시 움직인다.”

숲 주변을 둘러본 나는 나직이 신음을 내뱉었다.

조금 전까지 군데군데 채우던 키메라들의 수가 엄청나게 늘어났다. 검은 그림자 떼가 순식간에 숲 전체를 채우며 절벽을 에워쌌다.

완벽히 포위한 채 빠르게 좁혀오는 모습.

“시발, 진짜 너무하네.”

“망한 거야? 얼른 말해.”

“왜요? 혼자 튀려고요?”

“혼자 튀긴 그렇고, 서넛 정도는 가능해.”

나와 도르네프 그리고 샤르바딘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었다.

생명의 징표가 있으니 그나마 나까지 신경 써주는 거겠지.

“어쩔 거야?”

“움직여야죠. 골든타임입니다.”

“뭐? 도망칠 공간이 어디 있다고?”

키메라 떼가 사나운 기세로 다가오고 있었다.

난 키메라 떼 주변에서 흘러나오는 보랏빛 운무에 집중했다.

도미닉이 움직였다.

“말하지 않았습니까? 정면 돌파 할 거라고.”

“미친놈. 저걸 보고도?”

“저쪽입니다.”

난 다가오는 키메라 떼 좌측을 가리켰다. 다가오는 키메라 떼 중 좌측에서 흘러나오는 운무가 가장 옅었다.

운무가 가장 짙은 우측에 도미닉이 자리하고 있다는 의미고, 좌측을 뚫고 가야 도미닉과 마주치지 않고 탈출할 수 있었다.

“앞장서라고 말 안 할 테니, 그런 눈으로 보지 마시죠?”

“그 힘으로 뚫고 가려고?”

“알면서 물었습니까?”

“머릿수가 달라. 지쳐서 나가떨어질 거다.”

“저도 그게 고민이었는데, 방금 해결됐습니다.”

내가 품을 두드리며 자신 있게 말하자, 펜리는 미간을 좁혔다.

동굴에서 백 단위 키메라를 단숨에 무력화시킨 능력이 떠올랐다.

다만 지금은 그때보다 수도 많았고, 지키는 이들도 있었다.

과연 녀석이 버티면서 돌파할 수 있을까?

“확실해?”

“제가 헛소리하는 거 봤습니까?”

단 한 번도 실망하게 한 적 없는 녀석의 확신.

곰방대를 집어넣은 펜리가 양손에 크로우를 소환했다.

“내가 도와줄 일은?”

“웬일입니까? 돈도 안 받고 움직이다니.”

“의뢰금을 줄 저 난쟁이 새끼가 빠져나가야 돈을 받지. 추가 수당까지 합쳐서 청구할 거니까, 넌 신경 꺼.”

“더럽게 고맙네요.”

문양을 유지하는 데 집중해야 했기에 펜리에겐 호위를 부탁했다.

입구 쪽을 돌아보니 도르네프가 샤르바딘을 업고 달려오고 있었다. 그 뒤쪽에서 들려오는 다급한 외침.

“여자들과 아이들은 모두 업혀!”

“이제부터 앞만 보고 달린다!”

“서둘러!”

도르네프를 선두로 드워프들이 여인과 아이들을 업고 빠르게 따라붙었다. 그 뒤로 건장한 이들이 자리했다.

이제 길잡이인 나만 바라보는 상황.

난 고개를 끄덕이곤 키메라 방향으로 몸을 틀었다.

떼거리로 뭉쳐 있는 키메라 군단의 좌측.

방향을 잡은 후 숨을 길게 들이켠 난 달리기 시작했다. 내가 길을 이끌자, 내 뒤로 기다란 행렬이 만들어졌다.

이젠 멈춰도 죽고, 잘못돼도 죽는다.

“날 실망시키지 마라.”

도르네프의 한마디에는 묵직함이 담겨 있었다.

아마 이번 탈출의 결과에 따라 베네타와 내 관계가 정해질 것이다.

솔직히 요정의 눈물을 끝까지 아끼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 쓰지 않고 버티다, 계획에 실패하면 베네타를 등에 업을 기회를 영원히 잃게 된다.

“분명히 말하지만, 낙오자는 버리고 갑니다.”

“이미 다 전달했다.”

기호지세(騎虎之勢).

호랑이 등에 탄 상황으로 멈춘 순간 죽는다.

난 사람들에게 경고의 쐐기를 박은 뒤 속도를 점차 올리기 시작했다.

바깥 상황을 모르던 사람들은 시야에 드러난 광경에 기겁했다.

성벽처럼 똘똘 뭉쳐 있는 키메라 군단.

그 아가리 속으로 내가 주저 없이 질주를 시작하자, 뒤쪽에서 당황스런 비명이 터져 나왔다.

“무, 뭐야!?”

“아아아악…! 괴물!”

“앞사람 뒤통수만 봐! 멈춘 순간 버리고 갈 것이다!”

도르네프의 매서운 외침.

미리 언질을 줬음에도 막상 키메라 군단과 마주하자 사람들은 공포에 사로잡혔다.

공포는 빠르게 전염이 된다.

삼삼오오 분열되기 전에 내가 나서야 했다.

나는 병따개를 따곤 병을 입에 물었다.

요정의 눈물.

아껴 마셔야 하는데, 남을지 모르겠다.

“시발! 오늘 한번 죽어보자!”

번쩍―!

노을이 지고, 어둠이 찾아온 숲.

그 숲을 가로막은 키메라 떼 사이에 눈 부신 빛이 터져 나왔다.

황금빛 물결.

그 빛에 닿자 키메라들의 육체가 검게 그을리기 시작했다. 뭉쳐 있던 키메라들이 비명을 지르며 퍼드득 발광하며 물러났다.

좌측 대열이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다.

“빛을 따라가라!”

내가 요정의 눈물을 한 모금 들이켜며 오른손을 번쩍 들자, 사람들의 시선이 빛에 머물렀다.

사방에서 들려오는 괴물들의 비명과 거친 숨소리.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지만, 사람들은 홀린 듯 빛을 따라 발을 미친 듯이 굴렀다.

번쩍―!

전보다 더 눈 부신 빛이 터져 나왔다.

연달아 터지는 빛은 마치 폭죽을 연상케 했다.

포위망이 홍해가 갈라지듯 빠르게 갈라졌다.

도르네프의 등에 업혀 움직이던 샤르바딘은 그 광경을 멍하니 바라봤다.

그녀는 빛이 만들어낸 광경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이건 마치,

기적(奇蹟) 같다고.

* * *

“…….”

도미닉은 굳은 표정으로 한 곳을 응시했다.

어둠을 밀어내는 황금빛 물결.

그 물결 사이로 키메라들이 튕겨 나오고 있었다. 공격을 지시했지만, 키메라들은 마치 막힌 벽을 둔 것처럼 빛 가까이 가지 못했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수백 수천의 샘플 연구.

도미닉은 수많은 연구를 행하고 수집하며 키메라의 모든 것을 파악했다고 자부했다.

그런데 눈앞에서 펼쳐진 키메라들의 반응은 그조차 처음 보는 것이었다.

빛을 거부한다?

‘아니, 두려워한다.’

멀리서 보는 것만으로도 강렬한 거부감이 드는 빛이다. 저 황금빛은 확실히 자신에게 위협적이었다.

빛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 아레나를 그쪽으로 보내려는 순간이었다.

그어어어어어어어어어―!!!

“…….”

코앞에서 울부짖음이 터져 나왔다. 도미닉은 빛에서 시선을 떼곤 정면을 응시했다.

좌측에서 키메라의 비명이 시끄럽게 들려왔지만, 반응하는 대신 책을 들어 올리곤 눈앞의 전투에 들어갔다.

쿵―!!!!!!!!

절벽 틈새를 비집고 붉은 무언가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자신이 부리는 거대 키메라보다 두 배 가까이 큰 엄청난 덩치.

물컹거리는 육체를 지닌 이족 보행의 괴물이었다.

인간의 형태 같은데, 얼굴 부분이 붉은 혹처럼 튀어나와 있었다.

‘블러드 골렘?’

고대 시절에 개발된 액체 골렘을 닮은 형태.

하지만,

그어어어어어어어―!

괴물의 넓은 가슴이 쩍 벌어지며 그 안에서 사나운 울부짖음이 터져 나왔다.

가슴에 기괴하고 큰 입이 달렸다.

게다가 벌어진 입 속에서 눈에 띄는 것을 발견했다.

거대한 심장이 펄떡펄떡 뛰고 있다.

붉게 타오르는 심장.

불타는 심장을 본 순간 도미닉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신동력 원천!’

도미닉은 책을 펼치고 지시를 내렸다.

그 순간, 좌측, 우측에 넓게 퍼져 있는 키메라들이 도미닉을 중심으로 뭉치기 시작했다.

인간들을 포위하던 진형이 삽시간에 무너지며 먹이들이 숲 안으로 도망치는 것을 봤지만 진짜 목표가 눈앞에 있는 상황이라 신경 쓰지 않았다.

작은 개체들이 뭉치고 뭉쳐 거대한 무리를 이뤘다. 붉은 괴물의 덩치보다 수배는 커다란 진형이 완성됐다.

“아레나.”

도미닉의 딱딱한 한마디에, 본능적으로 앞서 나가던 작은 소녀가 멈칫하더니 도미닉 곁으로 다가왔다.

아레나가 점점 멀어지자 붉은 괴물이 분노한 듯 괴성을 질러댔다.

붉은 괴물도 아레나를 의식하고 있었다.

익숙하면서 닮은 기운.

먹음직스럽다.

아니, 먹고 싶다.

그건 아레나도 마찬가지.

그녀는 뒤로 천천히 물러나며 입술을 혀로 핥았다.

잡아먹은 자가 ‘진짜’가 되는 전투.

도미닉은 이 순간을 기다렸다.

“먹어 치워라.”

명령이 떨어진 순간, 엄청난 키메라 떼가 침을 흘리며 득달같이 달려들기 시작했다.

그아아아아아아아아―!

키에엑!

크아앙!

붉은 괴물이 사납게 포효하며 이빨을 들이밀었다.

붉은 괴물과 키메라들이 서로를 노려보는 눈빛은 같았다.

먹이다.

포식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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