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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에게서 살아남는 법-62화 (62/130)

62화 헤어질 시간이다

“어서! 서둘러요!”

난 다급히 손을 흔들었다. 내가 가리킨 숲 방향으로 사람들이 정신없이 뛰어갔다.

돌파 시에는 가장 선두였지만, 이젠 포지션 변경이 필요한 상황.

도르네프에게 앞서 신호를 보내곤 난 후방으로 뛰었다. 워낙 사람들의 수가 많다 보니 후방까지 도달하는 데만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추적이 온다면 뒤쪽부터 당할 수밖에 없는 상황.

마음을 졸이고 있는데, 후미에 다다른 순간 키메라 진형에 변화가 생겼다는 것을 감지했다.

숲을 따라 들어오는 키메라들이 없다.

‘됐다!’

기척조차 느껴지지 않은 것을 보니, 키메라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제자리에서 헐떡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도미닉이 추적을 포기했다는 건, 그의 신경이 온통 붉은 괴물에 집중됐다는 뜻이다.

가장 큰 위기를 넘긴 셈.

행렬 꼬리 끝에 붙어 난 사람들을 독려했다.

안전거리 확보가 우선이었다.

콰앙―! 콰아아앙!

“…이크!”

어느 순간부터 피떡이 된 키메라들이 하늘에서 날아와 처박혔다.

끔찍하게 뭉개진 키메라들이 허공에서 쏟아지자, 사람들은 기겁하며 비명을 질러댔다.

끔찍한 몰골에 구역질하는 이들도 있었다.

이 거리까지 시체가 날아온다고?

아직도 살벌한 전투 현장 안에 있는 기분이었다.

‘진짜 무식하게 싸우네.’

붉은 괴물이 얼마나 무식하게 강한지 보여주는 흔적이었다.

그어오오오오오―!!

멀찍이 터져 나온 성난 울부짖음에 사람들은 겁을 집어먹고 정신없이 달렸다.

숲 사이를 가로지르는 길고 긴 행렬.

얼마나 달렸을까.

“커, 커억!”

“헉, 헉…….”

일부 사람들이 헐떡이며 쓰러지더니 일어나지 못했다. 그 수가 빠르게 늘어나자, 난 정지 신호를 보내곤 쓰러진 이들을 추스르게 했다.

주저앉아 쉬는 이들의 표정이 새하얗게 질려 있다.

대부분 며칠간 음식은커녕 물도 입에 대지 못한 이들이었다. 여기까지도 드워프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젠 안전거리라 판단했기에 난 충분한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장소를 찾아 움직였다.

“주변에 물을 구할 수 있겠습니까?”

펜리에게 묻자, 그녀는 고민 없이 한 곳으로 방향을 틀었다.

전과 달리 나는 여유를 가지고 일행들을 이동시켰다.

잠시 후, 큰 냇가와 마주하자 지쳐 쓰러져 갔던 사람들의 표정에 활기가 돌았다.

“……물!”

누가 뭐라 할 것도 없이 사람들은 허겁지겁 냇가로 다가가 얼굴을 처박았다. 그건 드워프들도 마찬가지.

갈증이 해결되자, 일행의 표정에 생기가 차올랐다.

“용케 이런 데를 찾았네요?”

“천 골드 값은 해야지.”

그녀에게 수색을 맡긴 건 확실히 잘한 선택이었다.

모두가 냇가에 기대어 휴식을 취하는 사이, 도르네프가 다가와 내게 손을 내밀었다.

“또 신세를 졌어.”

샤르바딘을 구해주고, 불가능할 것 같았던 탈출도 성공시켰다.

탈출에 실패했다면 도르네프의 군대는 도미닉과 부딪쳤을 것이고, 많은 피를 흘렸을 것이다. 덕분에 큰 피해를 막았으니, 도르네프 입장에선 내게 큰 빚을 진 셈이었다.

“난쟁이, 상도덕도 없냐? 말 한마디로 퉁치려고?”

“내가 너 같은 줄 아나?”

펜리의 핀잔에 도르네프는 미간을 구기더니 품에서 작은 패를 내게 던졌다. 망치가 음각된 황금패. 그 패를 본 펜리가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대장장이의 정원을 열려고?”

“자격이 충분하니까.”

“그럼 나는?”

“돈으로 달라며?”

“대장장이의 정원이라면 말이 다르지!”

“하나만 해. 이 암코양이년아!”

둘이 티격태격하는 사이, 난 손바닥보다 작은 황금패를 만지작거렸다.

‘대장장이의 정원.’

인물들의 대화 속에 익숙히 언급됐던 장소였다.

학살자의 손에 베네타가 무너지면서, 대장장이의 정원도 함께 사라져 버렸다.

도르네프가 정원을 스스로 불태워 버렸다는 소문도 있었는데, 난 정원이 숨겨진 위치를 알고 있었다.

물론, 안다고 들어갈 수 있는 장소도 아니었다.

도르네프 가(家)의 조상들이 대대로 모아 놓은 장비들이 수집된 장소, 드워프의 허락 없이는 절대 발을 디딜 수 없었다.

내 손에 들어온 황금패는 그 대장장이의 정원에 수집된 장비 하나를 소유할 수 있는 일회용 교환권 같은 것이었다.

나에 대한 베네타의 평판이 신뢰 이상으로 올라갔다는 뜻이기도 했다.

‘이건 대박인데.’

탈출 확률을 높이기 위해 도르네프와 함께 한 것인데, 예상치 못했던 선물을 받았다.

안 그래도 쓸만한 장비를 장만하려던 참이었다.

‘좋은 장비일수록 살아남을 확률이 올라가니까.’

그 시작이 대장장이의 정원이라면 분에 넘치는 수준이었다.

어떤 장비가 좋으려나?

‘행복한 고민이긴 한데, 지금 고민할 때는 아니지.’

난 도르네프에게 감사를 표하곤 황금패를 품에 넣었다. 지금 이렇게 한가히 다리를 뻗고 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내 진짜 목적은 이곳에 없었으니까.

얼른 계획의 피날레를 찍으러 가야 했다.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데.

“제 일은 여기까지인 것 같습니다.”

“무슨 소린가?”

“이쯤에서 헤어지자는 소리입니다.”

투덜거리던 두 사람은 멈칫하곤 나를 바라봤다. 내 의도가 궁금하다는 표정이다. 하긴 막 위기를 벗어났는데 헤어지자고 하니 궁금하겠지.

“베네타로 움직일 거 아니었어?”

“중요한 일이 있어서요.”

“중요한 일? 설마 돌아갈 생각은 아니지?”

펜리가 절벽 쪽을 가리켰다.

멀찍이 숲 한가운데 솟구친 가파른 절벽.

레토니칼스의 시험이 진행 중인 도미닉이 자리한 장소로, 한창 끔찍한 사투가 벌어지고 있는 공간이었다.

펜리와 눈을 마주치자 난 짧게 혀를 차곤 고개를 끄덕였다. 진실을 파악하려는 저 엘프의 눈, 완벽히 속일 수가 없으니 확실히 거슬렸다.

“눈치 한번 빠르시네요.”

“혼자서는 위험할… 아니지. 네놈에겐 특별한 능력이 있으니 괜찮으려나? 이유가 뭐야?”

“저곳에 모인 존재들에게 관심이 있습니다.”

“진저리가 난 줄 알았는데?”

“제 능력에 거부 반응을 보이는 존재들 아닙니까? 그 이유가 궁금합니다. 지켜본다면 단서를 얻을 수도 있겠죠.”

“단서라… 멀리서 지켜만 보는 거지?”

자신의 일이 아니면 무관심인 그녀가 집요하게 내 행보를 캐물었다. 생명의 징표를 의식하는 것이 분명했다.

내가 미친 척 도미닉 앞에서 개지랄 떨면 보호를 해야 하는 입장이니 당연했다.

이런 리스크가 있으니 되도록 징표를 주지 않으려고 한 것이겠지.

“지켜만 볼 겁니다.”

“정말이지?”

난 미소를 띤 채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지켜만 볼 것이다. 그 후에 대해선 교묘히 말을 돌렸다.

머릿속에 있는 내 계획을 이 여자가 알게 된다면 날 기절시킨 뒤 베네타로 끌고 갈지도 모른다.

어디로 통통 튈지 모르는 여자라 일단 안심시킨 후 보내야 했다.

‘그녀는 소환하면 그만이니까.’

징표의 효력은 일방적이다.

내가 갑이란 소리였다.

충분한 휴식을 취한 뒤 도르네프를 중심으로 베네타로 갈 행렬이 만들어졌다.

그 행렬에서 제외된 건 나뿐이었다.

헤어질 시간이다.

샤르바딘이 떠나기 전, 날 찾아왔다.

“이걸 왜 제게….”

“제 옆에는 이제 도네프가 있으니까요.”

그녀가 내민 것은 검은 장미로 세공된 흑요석 장신구였다.

다크 로즈(dark rose).

본래라면 펜리 체이서의 상징물이 될 보석이지만, 샤르바딘의 생존으로 그 가치가 바뀌어 버린 물건.

다크 로즈에겐 뛰어난 축복이 걸려 있었다.

이 귀한 것을 왜 내게?

“위험한 곳에 가신다고 들었어요. 도움이 될 거예요.”

“이 물건은 도르네프님이 주신 선물 아닙니까?”

“허락받았어요. 도네프가 더 좋은 것으로 만들어준다고 했어요. 그러니 받으세요.”

다크 로즈를 거부하면 미친놈이지.

다만, 보는 눈들이 워낙 많아서 냉큼 가져오진 못하고 몇 번 생색낸 후에 가슴에 브로치처럼 달았다.

황금패에 이어 다크 로즈까지 얻었다.

불운 덩어리에게 이런 날도 오나?

갑자기 불안한데?

“꼭 베네타에 방문해 주세요.”

“조만간 방문하겠습니다.”

“꼭이에요! 꼭!”

그녀는 몇 번이고 신신당부한 뒤 돌아갔다.

제단에서 함께 시간을 보냈던 것이 그녀에게 큰 의지가 되었던 모양이었다.

아낌없이 퍼주는 미모의 엘프라니.

좋은 호ㄱ… 아니 좋은 인연을 얻었다.

“집으로 돌아간다!”

도르네프의 힘찬 외침.

그 외침에 드워프들이 힘찬 함성으로 답을 했다. 그 뒤를 따르던 이들도 도르네프의 외침에 많은 감정을 떠올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집으로 돌아간다.

그제야 살아남았다는 것을 피부로 느낀 것 같았다.

비탄의 감정은 안도감으로.

일그러진 얼굴에는 옅은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 동질감에 서로 시선을 교환하며 위로를 보내던 사람들은 곧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한 사내를 응시하기 시작했다.

떠나는 샤르바딘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는 앳된 청년.

길에서 마주한다면 그냥 지나칠 평범한 분위기를 풍겼지만, 사람들의 눈동자에 담긴 청년은 가슴 속에 큰 존재로 다가왔다.

이름은 알지 못했다.

아니, 물어봤지만 그는 미소로 답할 뿐 알려주지 않았다.

그래서 이름은 모른다.

하지만, 사내가 이뤄낸 기적만큼은 뇌리에 영원토록 각인되었다.

황금빛의 기적.

그리고 구원.

‘기적을 부르는 사내.’

‘구원의 성자.’

베네타로 돌아가는 길.

생존자들 사이에서 알음알음 사내의 존재감이 퍼지고 있었다.

* * *

“많이도 살아남았네.”

숲으로 사라지는 6천의 인파를 배웅하며 묘한 감정에 사로잡혔다.

본래 스토리 상 악당 도미닉에게 죽음이 예정됐던 이들이었다. 저들 하나하나가 살아남아 세상에 영향을 끼친다면 기존 스토리에도 크고 작은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

‘당장 샤르바딘의 생존만 해도 많은 것들이 바뀌었으니까.’

미래 사건을 아는 건 내게 엄청난 힘이 된다.

그 미래가 내 선택으로 인해 실시간으로 바뀌고 있었다.

그래서 후회가 되냐고?

“아니, 전혀.”

난 등을 돌려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암살자 신분으로 카멜과 처음 만난 순간부터 이 세상은 더는 내가 알던 세상이 아니었다.

스토리는 이미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흐르고 있었고, 난 그 사이에서 이용할 것을 추슬러 내 힘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그 힘을 이용해 세상을 손에 넣거나, 군림하거나 그런 헛된 망상 따윈 애초에 없었다.

‘살아남는 것.’

그게 내 목표이자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이었다.

‘백 개의 심장’도 마찬가지.

이 메인 이벤트도 학살자를 위한 이벤트로 놔둘 생각 없었다.

‘날 위한 이벤트로 만들어주마.’

강해질수록 선택의 폭도 넓어질 것이다.

그렇다 보면 차차 다음 목표도 생각나겠지.

가방을 챙긴 후 장비를 정비했다.

단검 세 자루와 석궁 하나.

도미닉을 상대하기엔 비루하기 짝이 없다.

‘하지만 손에 닿을 수 있을 만큼 도미닉 숨통까지 다가갔지.’

호흡을 길게 들이쉰 뒤 힘차게 달리기 시작했다.

움직일 시간이다.

* * *

그어어어어어어어―!

붉은 괴물은 압도적인 덩치를 자랑했다.

힘 또한 마찬가지.

팔다리를 붕붕붕 휘둘러 키메라들을 벌레처럼 짓뭉갰고, 여러 마리를 한 번에 움켜쥐고 허공에 매섭게 내던지기도 했다.

가슴에 달린 거대한 입이 쩍 벌어질 때면 허공에 피가 튀고 수많은 키메라가 잡아먹혔다.

일방적인 살육.

인간이라면 그 압도적인 위용에 움츠리며 도망갔을 것이다.

하지만 키메라들은 달랐다.

이지를 상실한 부정한 존재들.

그들은 지시만 따르는 인형에 불과했다.

키에에엑!

쿠어억!

한 마리가 죽으면 두 마리가.

두 마리가 죽으면 네 마리가.

네 마리가 죽으면 그보다 더 압도적인 머릿수가 붉은 괴물에게 득달같이 달라붙었다.

마치 벌레 떼 같다.

콰작―! 콰자자작!

그리고 키메라들은 그 작은 벌레 떼처럼 찢기고 터져나갔다. 수많은 혈흔에 주변에 피바람이 불어닥쳤다. 그 악취에 코를 틀어막으며 난 나직이 중얼거렸다.

“시발, 미쳤네.”

눈앞의 전투를 이 한마디로 정의했다.

비위가 상할 정도로 끔찍한 전투.

광기가 깃든 사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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