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신명의 빛
아케인의 물음에 카멜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그’는 신명의 주인일까?
“신명의 주인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이상한 답이군요.”
“‘그’라 의심 가는 녀석의 신명 목록을 알고 있다.”
“…….”
이어진 카멜의 답에 아케인의 몸이 앞으로 기울어졌다. 가느다란 눈매가 날카롭게 변했다.
“당신에게 신명의 내용을 발설한 어리석은 이가 누굽니까?”
“광의의 예언자.”
아케인은 안타까운 듯 짧게 혀를 찼다.
신명의 빛을 본 자가 신명의 내용을 함부로 발설하면 저주를 받게 된다.
광의의 예언자도 신명의 빛에 무척 밝은 인물로 꼽히는 자였다.
클라크 대공에게 끌려다니며 능력을 팔고 다니더니, 결국 이렇게 망가지는가 싶었다.
“신명 목록이 뭡니까?”
“맨입으로 말하긴 그런데, 거래하지.”
“주인장, 잘 마셨습니다.”
아케인은 테이블 위에 동전을 올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련 없이 돌아서는 모습에 카멜은 미간을 좁히곤 그를 막아섰다.
“거래 내용조차 듣지 않을 건가?”
“우리 사이에 거래는 이것뿐일 텐데요.”
아케인은 금화 주머니를 흔들고는 품에 넣었다. 얼굴을 보여주는 것으로 당신과 거래가 끝났음을 알려주는 행동이었다.
“‘그’에게 관심이 있었던 거 아닌가?”
“당신의 말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알 방법이 제겐 없습니다.”
“없는 신명 목록을 만들 순 없지.”
“원하는 게 그 신명 목록을 지닌 주인의 정보 아닙니까?”
“그렇다.”
“전 광의의 예언자와 달리 저주를 두려워해서 말이죠. ‘그’가 확실치 않은 단계에서 굳이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있을까요?”
“작은 힌트라도 상관없다.”
“듣고도 제가 알려드리지 못한다면요?”
“그게 무슨 뜻이지?”
“신명의 주인들에 대해 제가 모든 것을 알고 있으리라 생각지 마십시오.”
등을 돌린 아케인이 발걸음을 옮기자, 그 앞을 리옹이 막아섰다.
검을 뽑으려는 행동에 렌구아가 황급히 리옹을 저지했다.
아케인의 무력은 신비로 가려져 있다. 제압에 실패한다면 그 뒷일을 감당키 어려웠다.
아케인은 회유하거나, 억압이 통할 상대가 아니었다.
카멜도 그 사실을 알고 있기에 리옹에게 물러나라 신호를 보냈다.
자신이 이곳에 찾아온 이유는 그 말대로 ‘세이렌의 찬가’를 지닌 인물의 힌트를 얻기 위함이었다.
문제는 아케인이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신명을 발설하고도 저주로부터 자유로운 존재니까.’
어떤 방법으로 저주를 상쇄시키는지 알 수 없지만, 아케인은 신명의 내용을 타인에게 발설해도 저주를 회피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죽일 수 없다면 되도록 적이 되어선 안 된다. 그는 신명의 주인들에 대해 누구보다 많은 정보를 지니고 있고, 발설할 수 있는 존재였으니까.
“원하는 게 있나?”
“거래를 원한다면 정보가 먼저입니다.”
“세이렌의 찬가(Siren's Hymn). 그리고 가장 최근에 신명을 각성한 존재라는 것.”
카멜은 고민 없이 광의의 예언자에게 얻은 정보를 풀었다.
어차피 이 단서로는 ‘그’를 찾을 한계가 명확했기에 한발 물러난 것이다.
신명 목록을 들은 아케인은 세이렌의 찬가를 나직이 중얼거리며 한동안 제자리에 서 있었다.
귀걸이를 만지작거리며 눈을 감은 모습인데, 감정을 읽기가 힘들었다.
잠시 후, 아케인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가장 최근에 각성한 존재는 아닌 것 같군요.”
“혹시 근래에 또 다른 이가 각성했나?”
“당신이 찾아오기 직전 새로운 주인이 탄생했습니다.”
새로운 신명의 주인.
카멜은 그 주인을 짐작한 듯 다시 물었다.
“위치를 알 수 있나? 그대라면 대략적인 위치를 알 수 있을 텐데.”
각성 장소가 가까운 탓에 아케인도 대략적인 장소를 특정할 수 있었다. 그만큼 특정 범위가 넓은 장소였기 때문이다. 받은 정보가 있었기에 아케인은 굳이 이 사실을 숨기지 않았다.
“라웁 숲.”
“…라웁 숲.”
광범위한 장소지만, 카멜에게 그 단서 하나면 충분했다.
도미닉 후아튼이 자리한 곳.
지금쯤 각성할 시기이기도 했다.
라웁 숲을 중얼거리며 렌구아를 바라보자, 렌구아가 송구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연구 일지를 회수하는 임무에 실패한 데다가 라웁 숲 정보를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주술 인형마저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곧 복구될 주술 인형의 기억에 중요한 단서가 있길 바랄 뿐이었다.
아케인의 눈에는 무엇이 보이는 것일까. 잠시 허공을 응시하던 그가 불현듯 말을 이었다.
“이자군요. ‘세이렌의 찬가’를 지닌 신명의 주인이.”
그 말에 카멜의 두 눈이 번뜩였다. ‘그’에게 다가갈 가장 중요한 단서가 나왔다.
하지만 아케인의 입에서 나온 정보는 예상과 달랐다.
[XX XXXX ― 균열 속의 은둔자]
[X XX XX]
[세이렌의 찬가(Siren's Hymn)]
“이름은 모릅니다. 제가 알려드릴 수 있는 건 ‘신명’뿐입니다.”
“…이름을 모른다고?”
“모릅니다. 읽을 수 없습니다.”
“…….”
읽지 못한다.
광의의 예언자에게 들었던 말을 아케인에게 듣게 될 줄은 몰랐다.
아케인조차 전부 알지 못하는 신명이라니, 도대체 어떤 놈이길래 이토록 베일에 싸인 것일까.
다만, 아케인의 표정이 생각보다 평온했다. 이런 일이 익숙한 것일까?
“혹시 자주 일어나는 일인가?”
“희귀한 경우입니다. 다만, 읽지 못한 내용에 크게 얽매이는 편이 아닙니다. 시기의 차이일 뿐 언제고 전부 밝혀지니까요”
“그자의 신명이 뭐지?”
“그 전에 당신의 신명 목록을 열람하고 싶군요.”
카멜은 미간을 좁힌 채 물었다.
“내 신명 목록? 내가 각성할 때 신명의 빛으로 봤을 텐데?”
“지금 상황처럼 당신 또한 각성 시 읽지 못하는 목록이 존재했습니다. 전 그 내용을 알고 싶습니다.”
“그걸 알 수 있다고?”
“당신이 허락해준다면.”
처음 듣는 얘기다.
문득 카멜도 자신의 신명이 궁금해졌다. 회귀 전과 회귀 후의 자신의 인생은 확실히 달라졌기 때문이다.
“내 신명 정보를 이 자리에서 공유하고 싶다.”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열람을 허락하시겠습니까?”
“허락한다.”
순간, 아케인의 귀걸이에서 푸른빛이 흘러나오더니 카멜에게 쏟아졌다.
그 강렬한 빛에 시선을 돌린 것도 잠시, 카멜의 머리에 붉은 후광이 생기더니 글자가 적히듯 몇 가지 잔상이 떠다니기 시작했다.
[카멜 블레이저 – 두 길을 걷는 탐욕 군주(시간(時))]
[통제 위의 카리스마]
[영혼을 꿰뚫는 통찰력]
카멜의 신명 정보가 아케인의 시야에 박히듯 들어왔다.
아케인이 읽지 못했던 카멜의 신명 정보는 고유 속성이었다.
바로 ‘시간(時)’.
속성이 시간이라니, 무척 희귀한 속성을 지닌 이였다.
시간 속성은 어떤 힘을 발휘하는 것일까.
서로가 만날 운명이 아닌데도 지금 만난 것처럼 운명을 거스르는 것과 관련 있을까.
아케인은 ‘그’보다 먼저 눈앞의 사내에게 호기심이 생겼다. 관심을 두고 지켜볼 가치가 있는 자였다.
확인한 신명 정보를 카멜에게 쪽지로 전달해준 뒤 아케인은 만족스럽게 웃었다.
“광의의 예언자처럼 되고 싶지 않다면 혼자 보는 걸 추천드립니다.”
내용을 읽은 카멜은 그대로 쪽지를 목구멍으로 삼킨 뒤 아케인을 바라봤다.
“이제 거래 성립인가?”
“그자의 신명을 알고 싶으십니까?”
카멜이 고개를 끄덕이자, 아케인은 허공에 시선을 두었다.
그의 입이 천천히 열린다.
“그자의 신명은 ‘균열 속의 은둔…….’”
아케인의 말이 막 끝맺음을 하려는 때였다.
번쩍―!!!
“……!”
1층 식당이 눈 부신 빛으로 밝아졌다. 빛의 진원지는 두 군데였다.
하나는 아케인의 귀걸이.
귀걸이에 달린 사파이어가 엄청난 빛을 토해냈다.
그 빛과 공명하듯 반응하는 또 다른 빛.
그 빛은 전혀 예상치 못한 인물에게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렌구아는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의 구슬을 앞으로 내밀었다.
“주, 주군!”
구슬에서 눈 부신 빛이 번뜩이고 있었다. 렌구아는 이미 이 빛의 정체를 한 차례 목격한 바가 있었다. 전(前)대 기사 단장인 록터 펠리스가 주군께 충성 맹세를 했던 그날, 자신에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찾아온 한 줄기의 빛 말이다.
“시, 신명의 빛입니다!!!!”
구슬에 신명의 문자가 새겨지기 시작했다. 렌구아는 자신에게 찾아온 두 번째 신명에 흥분하며 구슬을 노려봤다.
저번에는 아무것도 읽지 못했다. 이번에는 다를 것이라 확신했고, 인형 소멸로 추락한 자신의 가치를 다시 주군께 증명할 절호의 기회였다.
그런데,
“빌어먹을…!”
[XX XXXX – XX XX XXX]
[X XX XX]
[XXXX XX]
이번에도 전혀 읽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렌구아는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문자를 읽을 순 없었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이 신명의 주인.
전에 자신이 받은 신명의 주인과 동일인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또다시 신명이 나타난 거지?
그때였다.
“……헉!”
[XX XXXX – XX XXX(X)]
[X XX XX]
[XXXX XX]
[XXXXXX XX]
갑자기 문자가 늘어나더니, 신명의 내용이 바뀌었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어떤 변화가 나타났길래, 신명의 빛이 재차 나타날 정도일까.
이 의문을 해소해줄 존재가 떠올랐다.
렌구아의 시선이 아케인에게 향했다.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터진 신명의 빛.
아마 자신과 같은 것을 보고 있으리라.
신명의 신비에 가장 밀접해 있는 이는 이 신명의 빛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
전부 읽었을까?
미치도록 궁금했지만 차마 입을 열지 못했다.
주군과 마주할 때도 여유롭게 반응하던 아케인의 표정이 더할 나위 없이 굳어있었으니까.
[XX XXXX― 균열 속의 은둔자]
[X XX XX]
[세이렌의 찬가(Siren's Hymn)]
분명 조금 전까지 봤던 신명의 내용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신명의 빛이 재차 나타난 것일까.
게다가 이 빛무리.
너무나도 눈 부시다.
처음 벌어진 상황에 의문이 든 것도 잠시,
“……!!”
아케인의 눈동자가 서서히 경악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문자가 늘어나며 신명이 실시간으로 변화하고 있었다.
[XX XXXX ― 신명 사냥꾼(X)]
[X XX XX]
[세이렌의 찬가(Siren's Hymn)]
[XXXXXX 심장]
“…이게 무슨!”
신명의 신비에 가장 밀접해 있는 인물, 운명의 아케인.
그조차도 처음 경험해보는 현상이 눈앞에서 펼쳐졌다.
계시를 통해 운명처럼 정해지는 신명은 절대 변할 수가 없다. 아니, 그렇게 확신하고 살아왔다.
그런데 ‘균열 속의 은둔자’란 신명이 눈앞에서 실시간으로 변하고 있었다. 그리고 완성된 새로운 신명은,
‘신명 사냥꾼……?’
새로운 신명을 마주 본 순간 아케인은 가슴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신명 사냥꾼이라니, 신명의 주인들이라면 무척 위협적으로 느낄만한 신명이었다.
순간 카멜이 했던 말이 떠오른 건 왜일까?
[그대가 맹신하는 운명이란 것을 가볍게 비틀어버린 놈이지. 지금처럼.]
꺼림칙한 느낌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