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당에게서 살아남는 법-71화 (71/130)

71화 신명의 빛(2)

아케인의 시선이 카멜에게 향했다.

조금 전 드러난 신명의 주인공을 확인하기 위해 자신을 찾아온 인물.

그가 자신을 찾아와 ‘그’를 언급한 순간 이 같은 사건이 벌어진 게 과연 우연일까.

“얘기를 끝까지 듣지 못했다. 그자의 신명이 뭐지?”

“…….”

조금 전 렌구아와 빠르게 귓속말을 주고받은 카멜은 아케인의 침묵에 눈을 반짝였다.

렌구아는 신명을 읽지 못했다. 하지만 신명의 내용이 변했다는 건 알고 있었다.

“신명 목록이 바뀌었으니, 다시 이야기해야겠지. 안 그런가?”

“…‘그’는 어떤 사람입니까?”

되려 ‘그’에 대해 묻고 있는 아케인의 반응에 카멜은 확신했다.

조금 전, 렌구아가 본 신명의 빛은 세이렌의 찬가를 지닌 주인의 것이 분명했다.

불변의 법칙이라 불리는 신명마저 변화시키는 존재다.

‘놈이야. 놈밖에 없어.’

신명의 주인이 더욱 ‘그’일 것이란 확신이 들었다.

“내가 아는 ‘그’에 대해 알려주지. 이번에도 거래를 거절할 텐가?”

“…….”

카멜의 물음에 아케인은 전과 달리 의자에 천천히 앉았다.

아케인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그’에 대한 관심이 흥미를 넘어 눈빛에 짙은 경계를 담고 있었다.

[영혼을 꿰뚫는 통찰력]

카멜의 뇌리에 자신의 신명 목록이 스쳐 지나갔다.

불현듯 떠오른 생각이 이 신명의 영향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카멜의 머리가 빠르게 굴러가기 시작했다.

생각지 못했던 인물을 곁에 둘 기회가 생긴 것 같았다. 그래서 가장 큰 미끼를 던졌다.

“‘그’를 잡을 수 있는 계획이 내게 있다. 함께할 텐가?”

“‘그’를 잡으면 어찌할 생각입니까?”

카멜은 이를 드러내며 사납게 웃었다.

굳이 물어볼 필요 없을 것 같았다.

“전 ‘그’와 만나고 싶을 뿐입니다.”

“자리를 마련해주지.”

아케인은 잠시 고민했지만, 제안을 거절하려고 했다.

자신은 ‘계시(啓示)’를 받드는 존재.

계시 없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런데,

“……!”

아케인의 귀걸이가 일순간 부르르 떨리더니, 그의 눈동자가 푸른 벼락처럼 번뜩였다. 찰나의 변화였기에 카멜 일행이 알아보지 못할 정도였다.

잠시 후, 아케인은 표정을 고치곤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한시적인 동행이라면 허락하겠습니다.”

한시적인 동행.

언제든 곁을 떠날 수 있다는 말이었지만, 상대가 운명의 아케인이라면 잠시 곁에 두는 것만으로도 환영이었다.

아케인이 지닌 신명의 정보와 자신의 회귀 경험이 합쳐진다면?

세상의 흐름을 엿볼 수 있는 존재들이 뭉쳤다. 그 파급력을 떠올리자, 절로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카멜은 손을 내밀었고, 두 사람은 손을 마주 잡았다.

운명의 아케인과 학살자 카멜.

‘그’란 존재를 사이에 둔 임시적 동맹이 만들어진 순간이었다.

* * *

쿠쿠쿠쿠쿠쿵―!

라웁 숲 전체가 흔들렸다.

한때 도미닉의 연구소로 불리던 절벽이 붉은 괴물의 난동으로 아슬아슬하게 버티고 있다가 결국, 폭발의 여진에 무너져 내렸다.

수많은 돌무더기가 한바탕 숲을 휩쓸었다.

숲 한가운데서 흡사 산사태가 일어난 것처럼 보였다.

붉은 대지에 즐비하게 널린 수천 마리의 키메라의 시신도, 거대한 붉은 괴물도, 도미닉의 시신도 흙더미 아래로 파묻혔다.

피어나는 짙은 먼지가 주변 시야를 뿌옇게 가렸다. 잠시 후, 그 연기 사이를 뚫고 한 인영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콜록! 콜록! 이런 시부랄!”

흙먼지를 뒤집어쓴 펜리가 거친 기침을 토해냈다. 그녀의 몰골은 진흙을 뒤집어쓴 것처럼 엉망진창이었는데, 멀리서 보면 다크 엘프인지 모를 정도였다.

잔해들을 거칠게 헤치고 평평한 바닥에 선 그녀는 안고 있던 존재들을 내려놨다.

조심스러운 손길과 달리 펜리는 사내를 내려놓으며 사납게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1만 골드 새끼가 다크 엘프 잡네. 시발, 이제부터 검은 장미 의뢰금에 1만 골드짜리는 없어. 무조건 2만 골드부터 시작이다.”

아서 클레이튼.

베네타에서 1만 골드 의뢰로 엮인 인연 때문에 녀석의 말을 귀담아들었다가 여기까지 왔다.

태어나서 이토록 자신을 개고생시킨 존재가 있었던가. 눈앞의 사내를 살리기 위해 정말이지 먼지 나도록 구른 것 같았다.

맹약만 아니라면 진즉 버리고 왔을 것이다. 아니 눈앞에서 죽도록 패버렸을지도.

하지만 사나운 눈빛과 달리 아서를 만지는 두 손은 아이를 다루듯 조심스러웠다. 그래서 더 억울하고 분했다.

징표자의 문양이 살아있는 한, 절대 죽어선 안 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뒈지면 반칙인 거 알지? 무조건 버텨라.”

아서의 몸 상태는 솔직히 죽었다고 표현하는 게 정확할 만큼 처참했다.

도미닉에게 당한 아랫배 관통만 해도 무시무시한 치명상인데, 날아간 왼팔부터 시작해 왼쪽 옆구리와 양쪽 허벅지는 뼈가 드러날 정도로 파여 있었다.

전투에 쐐기를 박은 대폭발의 참극이었는데, 그 폭발의 원인은 그녀도 잘 알지 못했다.

다행이라면 망가진 육체가 빠르게 회복되고 있다는 점이었다.

출혈은 진즉 멈췄고, 살이 돋아나는 게 보인다고 해야 하나?

혀를 내두를 정도의 빠른 재생력이었다.

조금 전 자신이 녀석의 입에 욱여넣은 심장과 눈앞의 현상이 관련 있을 것이다.

[저, 절 살리고 싶지 않습니까?]

온몸이 피투성이였다.

끔찍한 몰골로 생명이 꺼져가던 녀석이 움켜잡고 있는 작은 소녀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이 아이가 삼킨 심장이 필요합니다.]

펜리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생명의 징표.

그 징표가 살아있는 한, 펜리의 최우선 목적은 눈앞의 녀석을 살리는 것이었다.

펜리는 갈가리 찢긴 아레나의 육체에서 심장을 찾아 뜯어냈고, 아서에게 주저 없이 먹였다.

그 결과가 바로 눈앞의 상황이었다. 아서의 혈색이 서서히 회복되고 있었다.

펜리는 바위에 걸터앉은 채 곰방대를 물었다.

길게 빨았다가 후― 뱉어내니 긴장이 풀리는 게 느껴졌다.

하늘을 바라보니,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인생에서 가장 길고 고되고 엿 같은 하루란 생각이 들었다.

곰방대를 털며 아서 곁에 축 늘어진 아레나 후아튼의 시신을 응시했다.

온몸 곳곳이 찢기고, 심장마저 뜯긴 참혹한 몰골이다.

굳이 함께 데려온 이유는 저 작은 괴물이 죽어서도 녀석을 부둥켜안고 끝까지 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끝까지 자신을 개고생시키는 망할 녀석.

펜리는 빠르게 계산기를 두드렸다.

‘손해지. 아주 손해야.’

큰 도움을 받았기에 생명의 징표를 녀석에게 줬다지만, 이 녀석의 경우는 선을 좀 많이 넘었다. 한 번이 아니라 최소 열 번은 살려준 것 같았다. 그때마다 자신은 눈물 쏙 빠지게 굴러다녔다.

이건 무조건 추가 요금을 받아야 한다. 그것도 아주아주 많이.

“저 물건이면 충분할 것 같은데, 선불 겸해서 지금 가져올까?”

펜리의 반짝이는 시선이 흑요석이 박힌 다크 로즈(dark rose)에 닿아있었다. 아서의 가슴팍에 달려 있었는데, 몰래 떼어내려다가 빛을 머금는 것을 보고 일단 놔뒀다.

축복 효과가 유지되는 데에는 이유가 있을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펜리는 다크 로즈에서 시선을 떼며 입맛을 다셨다. 검은 장미로 세공된 탓에 유독 더 탐이 났다. 원래 자신의 것 같은데, 왠지 빼앗긴 기분이랄까?

“어설프게 입 닦으려고 하면 각오해야 할 거야.”

그땐 골수까지 쭉쭉 짜서 값을 받아낼 생각이었다.

다만 우려가 되는 건, 녀석이 깨어난 후의 정신 상태였다.

과연 눈을 떴을 때 그는 아서일까, 아니면 또 다른 존재일까.

심장에게 먹힌 존재들을 봐왔기에 대비를 해야 했다.

자신의 손으로 징표자를 죽여야 하는 상황이 펼쳐질지도 몰랐으니까.

펜리가 생각하는 가장 최악의 상황이었다.

‘생각해보니, 징표자가 날 죽이려고 하면 손을 쓸 수가 없잖아? 맹약을 손 좀 봐야겠어. 아니, 이참에 없애버릴까?’

시달린 것을 생각하니, 없애는 것도 한 방법일 것 같았다.

이런저런 상황에 고민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펜리 주변으로 호리호리한 그림자들이 벼락처럼 내려앉았다.

스물에 달하는 복면인들이 그녀를 둘러싼 상황. 펜리는 그들을 둘러보곤 한심한 듯 혀를 찼다.

검은 장미들이었다.

“내가 사라진 지가 언제인데 이제 얼굴을 들이미는 거야? 내 몰골 안 보여?”

“…죄송합니다.”

“기껏 키워놨더니 돈값을 못 하네. 돈값을!”

장미들이 고개를 푹 숙이고 있자, 펜리는 그들의 얼굴에 연기를 길게 뿜는 것으로 상황을 마무리했다.

갑작스럽게 흔적도 없이 사라졌으니, 검은 장미들이라도 쉽게 자신을 찾기 어려웠을 것이다. 아니, 찾아온 것 자체를 칭찬해야 하나?

저 녀석을 업고 가기 귀찮았는데 잘됐다 싶었다. 그런데 순간 펜리의 표정에 긴장감이 서렸다. 수하들을 보자 중요한 것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돈은? 돈은 챙겼지? 그렇지?”

“침대 위에 뿌려놓으신 금화를 말씀하시는 거라면 전부 수거해서 푸른 장미로 옮기는 중입니다.”

“침대 밑도 찾아봤고?”

“네.”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것마저 잘못됐다면 저 녀석을 정말 잘근잘근 씹었을지도 모른다.

“저 녀석을 옮겨.”

“함께 있는 시신은 어찌할까요?”

펜리는 곰방대를 물곤 잠시 작은 괴물을 바라봤다.

“태워버려.”

주변을 찬찬히 둘러보니, 전장의 흔적이 무너진 흙더미에 모조리 파묻혀 버렸다.

이젠 누구도 이곳에서 어떤 처절한 전투가 벌어졌고, 어떤 기적이 벌어졌는지 모를 것이다.

산 자는 산 자대로 살아나가고, 죽은 자는 이곳에 묻히는 게 맞았다.

“알겠습니다.”

잠시 후, 검은 연기가 타올랐다.

검은 장미들은 타오르는 작은 시신을 뒤로했고, 아서를 업은 채 빠르게 사라졌다.

아서가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며 펜리는 가죽 가방을 가볍게 둘러멨다.

녀석의 가방을 혹시나 해서 챙겼다. 이것도 물론 추가 요금이 붙을 것이다.

그녀는 마지막까지 남아 펼쳐진 잔해들을 둘러봤다.

홀로 서 있는 장소엔 공허한 바람만 불어닥쳤다. 타다 남은 소녀의 재 가루만 허공을 떠다닌다. 검게 그을린, 이젠 흔적조차 사라진 바닥을 응시하며 펜리는 작게 중얼거렸다.

아서 녀석이 기절하기 직전 작은 괴물에게 속삭였던 말.

“다음 생엔 인간 말고 꽃으로 태어나라.”

도미닉 후아튼의 역작이라 불리던 백(百) 개의 심장, 아레나 후아튼의 최후였다.

* * *

오르도르 숲.

마녀들의 마지막 안식처라 불리며, 인간들의 발길을 거부하는 폐쇄적인 장소. 그렇다고 인간 냄새가 전혀 없는 삭막한 숲은 아니었다.

인간의 발길이 끊어졌기에 오히려 평화롭고 조용한 공간이었다.

그 고즈넉한 숲에 작은 소란이 일어났다.

“리, 릴리!”

“아악! 밀지 마!”

문이 부서지듯 펑퍼짐한 로브를 걸친 여인들이 우르르 그녀의 방으로 몰려들었다. 우당탕! 구르고 넘어지는 마녀들의 손에는 지팡이, 구슬, 장신구 등등 눈 부신 빛을 머금은 오브제(objet)들이 쥐어져 있었다.

신명의 빛.

상급 마녀 ‘도르타’들의 설레발에 릴리는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몇 달 전의 광경이 겹쳐 보였기 때문이다.

역시나,

“우, 우리 중에 내용을 해석한 이가 한 명도 없어!”

“단 한 글자도!”

“릴리라면…!”

똑같은 상황이 펼쳐졌다.

어떻게 대사까지 똑같을 수가 있지? 릴리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자신의 큰 거울을 바라봤다.

거울에서 은은하게 흘러나오는 빛.

[아서 클레이튼 ― 신명 사냥꾼(성(Divine))]

[제3의 정신 방벽]

[세이렌의 찬가(Siren's Hymn)]

[레토니칼스의 심장(R.H)]

거울 위로 막 변화를 끝낸 신명의 내용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것도 아주 정확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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