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오르도르의 숲
“시끄럽다고!”
전과 달라진 상황이 있다면 릴리의 반응이었다. 그녀는 전처럼 거울을 보고 놀라는 모습 대신 양손을 허리에 올리고 마녀들 앞에 섰다.
최대한 화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빵빵해진 양 볼은 귀여움만 불러왔다.
“……귀여워.”
안 먹힌다…….
되려 마녀들이 릴리의 표정에 헤죽거리며 놀리는 듯 손가락을 까닥거리자, 릴리가 빽― 소리를 질렀다.
“나, 나가!”
“아이고, 고막이야. 릴리, 너 저번에 분명….”
“모른다고! 몰라!”
“…자, 잠깐만!”
어디서 나타났는지 빗자루들이 마녀들을 포위하곤 투닥투닥 매타작을 시작했다.
처음에 버티던 마녀들은 이내 두둥실 날아오는 큰 솥단지를 보곤 질겁하며 도망갔다.
마녀들을 내쫓은 릴리는 손을 탁탁 털어내곤 큰 거울 앞에 다시 섰다. 그러곤 몰래 했던 것처럼 다시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하, 나도 이해가 안 된다고.”
마녀들 앞에선 평상시처럼 행동했지만, 사실 그녀는 저번 때보다 더욱 놀란 상태였다.
신명을 보는 자들 사이에선 암묵적인 규칙이 존재했다.
신명의 목록은 변할 수 있어도, 한 번 점지된 ‘신명’은 절대 변하지 않는다.
그런데 ‘균열 속의 은둔자’가 눈앞에서 새로운 신명으로 탈피했다.
탈피가 맞을 것이다.
그토록 눈 부신 빛은 처음이었으니까.
오래도록 이어진 규칙이 깨진 것이다.
신명의 빛을 보는 자라면 지금쯤 난리가 났을 것이다.
‘아케인이 똥줄 좀 타겠는데?’
아케인은 그 누구보다 신명의 규칙을 신봉하던 자였다. 신명을 계시로부터 나오는 신의 말씀이라 여기던 자였으니 혼란스러울 것이다.
신이 말을 번복한 것이었으니까.
“헹, 쌤통이다.”
자신과 아케인은 신명을 정의하는 방향이 완전히 달랐다. 오늘 사건을 계기로 그녀는 자신의 정의가 더 옳았다는 것을 확신했다.
그래서일까.
그녀는 거울 속에 비친 신명의 주인에게 무척 큰 호기심을 느꼈다.
세상에 커다란 파문을 가져온 존재.
누굴까?
그리고 왜 마녀 중 유독 자신의 눈에만 저 신명의 내용이 보이는 것일까.
“아서 클레이튼, 인간일까? 아, 누군지 진짜 궁금하네.”
그녀는 거울 위 점지가 사라질 때까지 멍하니 거울을 응시했다.
턱을 괴며 고민하는 표정인데, 거울에 비친 자신의 표정이 무척 낯설게 느껴졌다.
생각해보니 살면서 고민이란 것을 해본 적이 없었던 것 같았다.
큰 고민은 도르타들이, 자잘한 고민은 그 제자들이 모두 해주었으니 고민의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살아왔다.
그런 만큼 지금 고민은 릴리에게 아주 큰 결심이었다.
“그래, 한번 해보는 거야!”
궁금한 것을 절대 못 참는 성격이었다.
지금까지 궁금한 것들은 도르타들이 해결해줬지만, 이번만큼은 힘들어 보였다.
그럼, 이 궁금증을 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직접 만나보면 알겠지!”
고민은 짧았다.
결심이 선 순간 그녀는 화장대를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일단 귀여운 강아지가 박힌 토트백을 꺼내 그 안에 화장품과 향수를 쓸어 넣었다.
미용에 관심이 많은 자신을 위해 마녀들이 선물해 준 것인데, 바깥세상에서 구할 수 없는 것들이라 1순위로 챙겨야 했다.
빗과 머리띠, 장신구들을 종류별로 챙긴 그녀는 거울 앞에 앉아 꽃단장을 시작했다.
허리까지 내려온 찰랑거리는 흑발.
큰 빗으로 머리를 가지런히 빗던 그녀가 홀린 듯 거울 앞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투명하고 새하얗다.
그리고 작고 귀엽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볼 때마다 항상 느끼는 거지만,
“이뻐!”
거울을 보고 자화자찬하는 건 그녀의 중요한 취미 중 하나였다.
이쁜 리본으로 단장을 마친 그녀는 거울 위에 손을 대었다. 펑―! 소리와 함께 큰 거울이 손거울 크기로 변했다.
토트백에 손거울을 챙긴 그녀는 오두막을 씩씩하게 걸어 나왔다.
마을 숲은 오늘도 평화로웠다.
릴리는 마을 숲 중심에 수백 년 먹은 거대한 나무로 향했다.
나무 밑동 그늘진 공간에 흔들의자를 놓고 낮잠을 즐기는 마녀가 있었는데, 릴리는 그 뒤로 몰래 다가가 의자를 장난스레 흔들었다.
잠을 방해받은 마녀가 귀찮다는 듯 손사래를 쳤다. 쭈글쭈글한 손등과 얼굴, 이 숲에서 나이가 가장 많다는 장로 마녀였다. 장로는 릴리가 왜 자신을 귀찮게 구는지 잘 알고 있었다.
“…요것아, 또 뭐가 궁금한 것이냐?”
“장로 할머니! 숲 바깥으로 나가면 가장 필요한 게 뭐야?”
“숲 바깥? 돈이 필요하겠지.”
“돈? 얼마나 필요한데?”
“많을수록 좋지.”
“난 돈이 없는데?”
“릴리는 필요 없어. 어딜 가든 도르타들이 붙을 테니까.”
장로는 대충 대답하곤 다시 눈을 감았다. 기분 좋은 바람이 부는 날이었다. 이 시간을 방해받고 싶지 않았다.
그 옆에 선 릴리는 메모장을 꺼내 방금 한 대화를 꾹꾹 눌러 적었다.
돈이다. 돈이 필요했다.
그리고 돈은 많을수록 좋았다.
금붙이를 자랑하던 마녀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중에는 장로 할머니 것도 있었다. 아무래도 큼지막한 보따리를 챙겨야 할 것 같았다.
릴리가 사라지고 잠시 후, 잠이 든 장로가 흠칫 떨며 몸을 웅크렸다.
앞날을 예견한 것일까.
마치 악몽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꾸루― 꾸루―
오르도르 숲은 밤이 일찍 찾아왔다.
마녀들이 모두 잠든 야심한 밤, 숲과 어우러진 오두막 마을에는 풀벌레 우는 소리만 들렸다.
그 어둠 사이로 검은 그림자가 불쑥 튀어나왔다.
한 오두막에서 몰래 총총 걸어 나오는 가녀린 인영. 모자에 달린 긴 챙이 흔들리며 시야를 방해하자, 릴리는 챙을 위로 접어 올렸다.
“끙, 무겁네.”
몸뚱이보다 두 배나 큰 봇짐이었다.
주술로 마녀들을 재우고 금붙이와 보석들을 닥치는 대로 긁어모았다. 만만한 마녀들 위주로 마을을 한 바퀴 쭉 돌았는데, 금붙이를 챙기면서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난 거지였어!’
돈 한 푼 없고 받기만 하는 이들을 거지라고 했던 걸 들었다.
릴리는 말없이 토트백 안을 들여다봤다. 금붙이는 없고, 전부 받은 것들뿐이다. 거지가 맞는 것 같았다.
하지만 괜찮았다.
이젠 마을에서 가장 돈이 많은 마녀가 됐으니까.
뭔가 큰 사람이 된 것 같아서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마을을 벗어났다.
마을 숲 중심부는 여느 숲과 똑같았다.
하지만 중심부와 멀어질수록 숲 분위기가 달라졌다. 뿌연 안개가 시야를 가렸고, 나부끼는 바람은 을씨년스러웠다.
우우우우―
이상한 소리도 들려왔다.
큰 나무들로 빽빽이 찬 풍경에 들어섰는데, 나무들 사이로 희끄무레한 존재들이 배회하고 있었다.
숲의 망령으로 망령들은 오르도르 숲 바깥 지역을 배회하며 침입자들을 공격했다.
일명 유령의 숲(haunted forest).
오르도르 숲의 결계 중 하나로 마녀들은 1년에 한 번씩 큰 의식을 통해 유령의 숲을 유지하고 있었다.
끝 모를 망령들이 인간 냄새를 맡고 릴리에게 모여들었다.
오싹한 광경.
하지만 릴리가 하품을 하며 손을 휘휘 내젓자 망령들은 괴성을 흘리며 뿔뿔이 흩어졌다. 그녀를 두려워하는 것처럼 보였다.
숲 끝자락에 다다르자 확 트인 너른 들판이 펼쳐졌다. 다만, 들판 풍경이 살짝 일그러져 보였는데, 숲을 보호하는 대결계 때문이었다.
마녀들만 드나드는 결계 출구에 도착하자, 릴리를 반기는 작은 존재가 있었다.
작은 체구의 귀여운 강아지.
릴리의 토트백에 그려진 검은 털의 강아지와 똑 닮았다. 시바견을 닮은 쫑긋한 두 귀와 탐스러운 꼬리, 날렵해 보이는 몸을 지닌 강아지였다.
강아지는 출구 앞에 몸을 웅크린 채 잠을 자고 있었다.
릴리는 그 강아지 앞에 쭈그리고 앉아 풀때기로 코를 간질였다. 코를 움찔하던 강아지가 눈을 사납게 뜨며 으르렁거리자, 릴리는 강아지 얼굴에 손을 내밀며 활짝 웃었다.
“댕댕! 잘 있었어?!”
댕댕은 손 냄새를 킁킁 맡고는 그녀를 왕! 덮쳤다. 볼을 할짝거리며 꼬리를 휙휙 흔들어대는 것이, 릴리를 알아보고 격한 반가움을 표하는 것 같았다.
놀아달라는 댕댕의 애교에 릴리는 목적을 잊고 댕댕과 숲 주변을 뛰어놀며 시간을 보냈다. 이따금 댕댕을 안고 둥근 달을 향해 높이 던지기도 했는데, 댕댕의 정체를 알고 있는 마녀들이 봤다면 놀라 자빠졌을 것이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았더니, 밤이 지나갔다. 어둠이 서서히 걷히자, 릴리는 손뼉을 탁― 치곤 현실을 자각했다.
“장로 할멈이 깨기 전에 도망쳐야 해!”
릴리는 봇짐을 짊어지곤 댕댕의 머리를 토닥토닥 두드렸다.
“댕댕, 숲 잘 지키고 있어. 나갔다 올게!”
“멍!”
“그치? 댕댕이 봐도 짐이 너무 많지? 뭐? 도와준다고? 이렇게?”
릴리는 봇짐을 풀어 댕댕 앞에 내놓았다. 시선 교환으로 댕댕과 의사소통을 하는 모습이었다.
휘황찬란한 금붙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댕댕은 살짝 눈치를 보더니, 금붙이들을 흡― 빨아들였다.
댕댕의 덩치가 봇짐보다 한참 작았는데도, 봇짐에 든 모든 내용물을 삼키곤 릴리 앞에 앉아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같이 데려가 달라는 몸짓 같았다.
“아, 댕댕한테는 아공간이 있었지. 흠, 어쩐다. 널 데려가면 장로 할멈이 화낼 텐데.”
하지만 릴리는 걸어 다니는 가방을 포기할 수 없었다. 같이 다니면 편할 것 같았다. 혼자 다니는 것보다 심심할 것 같지도 않고.
“멍!”
“그치? 큰 문제 없겠지? 결계 의식도 마무리됐잖아. 1년은 안전하겠지?”
“멍!”
“2년도 우습다고?”
강아지(?)에게 설득당한 그녀는 결국 댕댕에게 손을 내밀었다.
“우리 저 멀리 산책이나 하러 갈까?”
“멍!”
“뭐? 뼈다귀를 챙겨야 한다고? 묻어둔 데가 어딘데?”
사이좋게 룰루랄라 주변 땅을 파헤치며 돌아다닌 것도 잠시, 여인과 강아지는 동이 트는 오르도르의 숲을 뒤로한 채 숲에서 사라졌다.
* * *
“내, 내 금반지가!”
“우아앙! 보석함이 없어졌어.”
“감히, 누가 내 금니를…!”
“스, 습격이다!”
날이 밝고 여느 때처럼 평화로워야 할 오르도르 숲이 발칵 뒤집혔다.
1년에 한 번 모일까 말까 한 대표 도르타들이 오두막에 모여들었다.
각 계파의 수장을 맡은 이들로, 그들은 마녀 사회에서 원로라 부를 수 있는 핵심 전력이었다.
마녀들이 이리 긴급하게 모인 이유는 하나였다.
릴리가 사라졌다!
장로, 메데이아는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을 느끼며 이마를 꾹꾹 눌렀다.
그녀의 오두막으로 도르타들이 모인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한 가지는 그녀가 오르도르 숲을 관장하는 장로 신분이었고, 다른 하나는 릴리를 본 마지막 마녀였기 때문이다.
“돈 되는 건 다 털어갔다고?”
“…네. 누굴까요? 릴리에게 그런 몹쓸 짓을 알려준 마녀가.”
“그 마녀를 찾아서 중징계를 내려야 합니다!”
“당장 가서 잡아 오……!”
“지, 지금 그런 것을 따질 때인가?! 릴리가 사라졌어!”
장로 메데이아는 황급히 식탁을 쾅쾅거리며 본론으로 들어갔다.
릴리의 행동에 원인을 제공한 마녀가 바로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어째 꿈자리가 사납더라니.
메데이아는 또 말이 나오기 전에 릴리와 함께 사라진 숲의 파수꾼, 케로스를 언급했다.
얼핏 보면 귀여운 강아지로 보이지만, 파수꾼 케로스는 절대 일반적인 존재가 아닌 만큼 도르타들의 관심을 돌리기 충분했다.
금붙이를 가지고 간 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릴리와 파수꾼, 이 두 존재가 바깥세상으로 나갔다는 게 중요했다. 겉모습과 달리 두 존재는 움직이는 폭탄 덩어리나 마찬가지였다.
도르타들이 릴리의 보호자 역할을 맡았던 이유였는데, 지금은 그 보호자조차 없는 상황이다.
심각성을 인지하자 마녀들은 머리를 부여잡고 신음을 삼켰다.
“이제 좀 악명이 잊히나 싶었는데….”
“큰일이군요. 마녀사냥이 또다시 재현되는 건 아닐는지….”
10년간 잠잠했던 마녀의 악명이 또다시 불거질 수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