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꿈이었다
‘…뭐야.’
난 눈앞의 상황을 멍하니 응시했다.
눈을 뜨니 상황 파악이 안 된다고 해야 하나? 이거 무슨 상황인 거지?
‘설마…… 꿈?’
맞다. 꿈이었다.
정신을 똑바로 차리자, 현실이 아님을 바로 눈치챘다.
어둑한 막사 안, 학살자 카멜이 코앞에서도 날 인지하지 못했고,
[도네콜린트, 적군에게 공포가 뭔지 보여줘라.]
[비명이 전장을 뒤덮을 겁니다. 기대하셔도 좋을 겁니다.]
내 손에 죽은 흑주술사 도네콜린트가 카멜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있었기 때문이다. 손등에 새겨진 도네콜린트의 고대 문양, 세이렌의 비명을 보자 더욱 확신이 들었다.
저 문양의 주인은 나다.
이건 꿈이 맞았다.
그런데 꿈이 너무 생생했다.
설마 죽은 건가?
가능성이 있었다. 아레나를 고기 방패로 삼아 붐(Boom)을 터트렸는데, 그녀의 육신이 작다 보니, 폭발에 휩쓸리면서 팔다리가 완전히 아작 났다.
펜리가 내게 레토니칼스의 심장을 먹였다면 살 확률이 있겠지만, 이곳에선 확인이 불가능했다.
일단 내 육신이 안 보였거든.
학살자에게 예를 표한 도네콜린트가 등을 돌리곤 나를 그대로 통과했는데, 마치 존재감 없는 유령이 된 것 같았다.
난 홀린 듯 도네콜린트의 뒤를 따라 바깥으로 나갔다.
둥― 둥― 둥―
새벽안개가 자욱한 병영에 묵직한 북소리가 울려 퍼졌다.
눈부신 보름달 아래임에도 짙은 안개 덕에 병영 분위기는 을씨년스러웠다.
근데, 병사들은 어디 간 거지?
병영치곤 너무 조용했다.
그때, 안개 너머로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끄아아아악!”
“모조리 죽여라!”
동시에 긴박한 외침과 처절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알고 보니, 전쟁터 한복판이었다.
도네콜린트는 십여 명의 복면인을 대동한 채 비명이 터진 안개 속으로 빠르게 사라졌다.
그의 뒷모습을 보고 있자,
[비명이 전장을 뒤덮을 겁니다.]
막사에서 도네콜린트가 내뱉었던 말이 떠올랐다. 그 대사를 곱씹으며, 난 안개를 허겁지겁 헤치고 도네콜린트를 쫓았다.
‘지금 이 상황…….’
눈앞의 상황, 대사, 분위기에서 소설 ‘악당들이 강해지면 벌어지는 일’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학살자에게 영입된 도네콜린트의 첫 전투 장면.
한때 소설에 푹 빠져 이따금 상상해보던 주요 장면이기도 했다.
메인이벤트, 백(百) 개의 심장 하이라이트 내용이자, 카멜이 날개를 펴고 비상을 시작했던 사건.
‘베네타의 몰락.’
걷던 발걸음이 점점 빨라지더니, 이내 난 전력 질주를 하고 있었다.
마음이 급해졌다.
거친 뜀박질 사이로 안개가 서서히 걷혔다. 뿌연 시야가 사라졌고, 선명해진 눈앞에 처절하고 잔혹한 전쟁터가 펼쳐졌다.
제자리에 선 채 타오르는 붉은 화마(火魔)를 멍하니 올려다봤다.
드워프들의 오랜 손길로 쌓아 올린 아름다운 성벽. 이종들의 도시, 베네타.
성벽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불을 끄기 위해 다양한 이종들이 성벽 위를 미친 듯이 뛰어다녔다. 하지만 이내 쏟아지는 불비에 비명과 함께 불타오르며 사라졌다.
주술사들의 둥지.
그들이 펼친 지옥불에 베네타가 무너지고 있었다.
뜨겁다.
그리고 역겹다.
…이게 꿈이라고?
꿈이라고 하기엔 너무나도 생생했다.
고개를 돌리니, 말을 탄 카멜이 친위대를 이끌고 나타났다.
메마른 표정으로 전장을 천천히 둘러보던 학살자 카멜.
카멜의 등장에 도네콜린트가 뒤엉킨 전장 안에서 오른손을 천천히 추켜들었다.
번쩍―!
고대 문양이 섬뜩한 빛을 토해냈다.
불결하고 끈적한 빛무리.
동시에 두 귀로 흘러오는 주술적 비명이 전장을 집어삼켰다.
끼아아아아아아악―
세이렌의 비명이 전장을 강타했다.
성문을 지키던 용병들과 이종 군대가 환각에 걸려 아군에게 창칼을 겨누기 시작했다. 성벽 방어선이 삽시간에 무너졌고, 블라이어 기사단을 막아내며 악착같이 버티던 드워프 기사단이 퇴로가 막히면서 포위당해 섬멸당했다.
베네타의 기사 단장, 나토네의 머리가 리옹의 검에 떨어졌다.
[주, 주술사를 죽여!]
베네타의 남은 기사들이 도네콜린트를 죽이기 위해 달려들었다. 하지만 그들도 곧 도네콜린트 주변에 은신해 있던 암살자들의 손에 죽임을 당했다.
도네콜린트 곁을 호위하는 암살자 부대. 그 앞에선 외팔이 사내가 지휘하는 장면이 시야에 잡혔다.
칼 바스타인.
스토리상 흘러갔던 악당 조력자 칼의 모습에 난 신음을 삼켰다.
내가 만들어낸 새로운 스토리가 아닌, 본래 소설의 내용대로 흘러가는 장면.
베네타의 성문은 결국 무너졌고, 블라이어의 전 병력이 성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난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더는 볼 필요도 없었다.
안쪽 병력은 이미 몰살 직전일 테니까.
베네타의 성안은 이미 폐허나 다름없었다. 모든 건물이 무너져 내렸고, 성주인 도르네프도 상처투성이에 기력을 다했다.
혹한의 망치는 부러졌고, 갑주는 찢겨 나간 채 주저앉아 있었다.
그를 돕던 조직, 검은 장미도 마찬가지.
검은 장미들의 시체가 성 한가운데 잔뜩 널브러져 있었다. 그 중심에 멍하니 서 있는 펜리.
블라이어가 도착하기 전에 대부분의 전력이 몰살당한 흔적이었다.
그 엄청난 피해를 안고 얻은 건, 단 한 구의 시체였다.
절뚝거리며 선 펜리는 한 손에 든 아레나 후아튼의 머리를 움켜잡곤 이를 바드득 갈았다.
백(百) 개의 심장.
이 끔찍한 괴물이 베네타의 대부분을 집어삼키는 동안, 블라이어가 기습적으로 쳐들어왔다.
아레나 후아튼을 죽이는 데 성공했지만, 모든 것을 잃었다.
막을 수 없다.
반파된 갑주를 벗어 던진 도르네프는 암담한 표정으로 하늘을 올려다봤다.
죽은 샤르바딘의 복수는 성공했지만, 그 끝은 파멸이었다.
[베네타의 군주를 내 앞에 꿇려라.]
담담히 명하는 카멜의 지시에 리옹이, 렌구아가, 칼이, 각자 세력을 이끌고 돌격해왔다.
“도망쳐! 멍청이들아! 못 이긴다고!”
난 도르네프와 펜리 곁에서 도망치라고 외쳤다. 하지만 이건 내 바람일 뿐이다. 상황은 스토리대로 흘러갈 뿐이었다.
[도망쳐라. 암고양이. 넌 혼자가 아니잖아?]
[닥쳐, 이 난쟁이 새끼야. 이젠 거시기마저 쪼그라든 거냐?]
[베네타의 역사가 곧 파묻혀 사라질 거다. 그때 네가 잘하는 걸 하면 돼. 도망치는 것.]
주인 잃은 할버드를 움켜쥔 도르네프가 남은 이들을 데리고 적들을 막아섰다.
콰아아아아앙―!!!!
큰 폭발이 터지며 도르네프 주변이 불바다가 되었다.
주술사들의 둥지.
렌구아가 중심이 되어 발악하는 상대를 향해 엄청난 화력을 퍼부었다. 순식간에 도르네프의 잔여 병력이 갈려 나갔다.
검게 탄 시신들이 즐비한 가운데, 리옹과 칼이 도르네프를 압박하며 그 육신을 난자하기 시작했다.
쿠쿠쿵―
큰 지진이 일어나고, 베네타의 성이 땅속으로 푹 꺼지며 내려앉기 시작했다.
도르네프는 손수 베네타의 모든 역사를 무너트렸다. 이제 베네타의 영광을 기억하는 건 살아남은 자들뿐이다.
[펜리 체이서!]
도르네프의 울부짖는 외침에 펜리의 신형이 그림자 아래로 빠르게 스며들었다.
피가 날 정도로 움켜쥔 두 손, 잔뜩 일그러진 얼굴. 그리고 슬픈 눈동자.
고개를 푹 숙이며 사라진 펜리의 도주를 끝으로 베네타의 저항이 마무리되었다.
[수고했다.]
첫 전투를 성공리에 끝내고 데뷔한 도네콜린트는 학살자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잠시 후, 처참한 몰골로 포박되어 끌려온 도르네프가 카멜 앞에 꿇려졌다.
[비, 비겁한……!]
스걱―
한 번의 손짓.
리옹의 검에 목이 날아가는 도르네프가 보였다.
베네타의 몰락.
1년에 걸쳐 벌어진 메인이벤트, ‘백(百) 개의 심장’ 마지막 장면이었다.
난 처형 광경 앞에 서서 가슴을 움켜잡았다.
이것도 작은 인연이라고.
시리도록 아프다.
도르네프의 죽음, 베네타의 사람들이 몰살당한 것에 슬픔을 느끼는 것일까.
끓어오르는 분노에 카멜을 사납게 노려봤다.
그런데,
“……!”
카멜이 말 위에서 날 노려보고 있었다. 검을 꺼내 든 그가 날 겨누며 사납게 웃었다.
이를 드러낸 명백한 살의(殺意).
[다음은 너다. 아서 클레이튼.]
* * *
“커헉!”
막혔던 숨을 터트리며 벌떡 일어났다.
거친 숨을 내쉬며 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다. 뚝뚝 흘러내리는 식은땀이 조금 전 악몽을 다시금 상기시켜줬다.
다음은 나라고?
스토리대로 잘 흘러가다가 마지막에 왜 지랄인 건데.
“…….”
문득 든 생각에 조심스레 왼팔을 들어 올렸다.
왼팔이 붙어 있다.
그러자 더 욕심이 생겼다.
제발…… 다음은 나라고 했다고.
잠시 두 눈을 감았다가 눈을 살며시 뜨며 오른손을 살폈다.
“아…….”
손등에 선명히 새겨진 고대 문양을 난 멍하니 바라봤다.
잠시 후 씁쓸히 웃으며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괜한 기대였나.
혹여나 그동안의 일이 진짜 꿈이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내가 태어난 곳, 내가 살았던 곳으로 돌아간 것 아닐까 하고 말이다.
그러나 여전히 난 새로운 세상에서 여행 중이었고, 날 데려온 존재는 아직 날 돌려보낼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그나저나…….”
여긴 어딜까?
방 내부가 무척 화려했다. 내가 누워 있는 침대만 해도 킹사이즈 세 배 크기에, 이불 감촉 또한 남달랐다.
돈지랄이 상당했을 거 같은데.
일단 침대를 나와 몸을 살폈다. 기절하기 직전 내 몸 상태를 떠올려봤다. 왼팔은 당연히 날아가고, 다른 부위도 뼈가 드러날 정도로 찢겨 나갔다.
‘좀비 그 자체였는데.’
내가 살아날 방법은 그 당시 한 가지뿐이었다.
레토니칼스의 심장을 얻는 것.
“펜리가 성공한 건가?”
성공했을 것이다.
그러니, 지금 내가 멀쩡히 이곳에 서 있는 것이겠지.
생명 보험 하나는 확실히 들었다고 생각했다.
심장에 손을 얹어봤는데, 특별한 변화는 느껴지지 않았다. 별다른 것이 없는 느낌인데, 이건 펜리를 만나보고 물어봐야 할 것 같았다.
“아니, 좀 많이 변한 것 같기도 하고.”
일어나니 나신이었다.
눈앞에 비친 거대한 거울이 나를 반겼다. 알몸 자태에 난 어색하게 손을 흔들어봤다.
거울 속의 내가 손을 흔든다.
확실히 내가 맞단 말이지.
옅은 브론즈 머리카락.
눈매는 매섭게 휘어졌지만, 백금색의 밝은 눈동자가 매서운 느낌을 부드럽게 희석해줬다.
심장의 영향인지 피부가 아이 피부처럼 투명했는데, 탄탄한 몸과는 잘 안 어울렸다.
꼭 자이언트 베이비 같잖아?
그 덕에 여자 여럿 울릴 것 같은 외모가 됐다.
변화한 외모가 신기해서 거울 앞에서 이런저런 포즈를 잡아봤다.
이렇게 말끔한 모습으로 내 외모를 살펴본 적이 있었던가?
살아남느라, 그딴 거 살펴볼 여유가 없었다.
쨍그랑―
잠시 후, 무언가 깨지는 소리에 뒤를 돌아봤다. 열린 문 사이로 수수한 복장을 한 엘프가 무척 당황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음식을 가져오다가 내 알몸 쇼를 보곤 쟁반을 떨어트린 모양인데, 어째 익숙한 얼굴이었다.
푸른 눈동자에 금발의 미녀 엘프.
난 이불로 몸을 가리며 멋쩍게 그녀를 반겼다.
“엘프 넬라. 오랜만이네요.”
“…이제야 의식이 돌아왔군요.”
“제가 오래 잠들어 있었습니까?”
“오래됐죠.”
한숨을 내쉬며 넬라는 종업원을 불러 주변을 치우게 하곤 음식을 새로 내오게 했다.
그녀는 곧장 창가로 걸어가 커튼을 걷어냈다.
쨍쨍한 햇살이 통창을 통해 스며들고, 바깥 풍경이 내 시야에 들어왔다.
조금 전 꿈에서 봤던 불타는 성을 보고 와서일까.
저 멀리, 도르네프가 머무는 영주성이 눈에 담기자, 감흥이 새로웠다.
[베네타의 역사가 곧 파묻혀 사라질 거다.]
눈앞의 베네타는 여전히 건재했다.
그것도 아주 찬란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