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당에게서 살아남는 법-75화 (75/130)

75화 시발, 탄 맞았다.

“3개월?”

“네. 3개월이요.”

허겁지겁 빵을 집어 먹던 난 멈칫하곤 넬라를 바라봤다.

무려 3개월 동안 의식이 없었다고?

접시 위에 빵을 슬며시 내려놓고 이불을 들어 몸을 살폈다.

헛기침 소리가 들렸지만, 지금 그런 거 신경 쓸 때인가?

적재적소에 자리 잡은 단단한 근육, 영양 크림을 듬뿍 바른 것 같은 탄력 있는 피부까지.

이게 3개월 굶은 몸이라고?

“정말 아무것도 안 먹었습니까? 몸이 이런데?”

“네.”

“입으로 음식을 넣어줬다든가….”

“그런 일은 결단코 없었습니다.”

넬라가 미간을 찡그리곤 단호히 고개를 젓자, 난 어색한 미소를 짓고는 빵을 입에 물었다.

아니면 아닌 거지. 왜 그렇게 질색하는 건데?

‘오랫동안 굶어도 멀쩡한 몸이라….’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지만, 이곳 자체가 원래 상식 밖의 세상이니 깊게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원인만 파악하면 되는데, 아무래도 심장의 영향이 아닐까 싶었다.

물론, 한 가지를 꼭 확인해야 했다.

바로 심장의 유무.

내가 그 소유자인지 말이다.

“펜리 님을 만나고 싶은데요.”

“마스터는 지금 베네타에 없어요.”

“무슨 일이 생겼습니까?”

“사건이 있긴 한데…… 아직은 말씀드릴 수 없군요.”

“그럼, 그녀가 떠나기 전에 내게 남긴 말 같은 거 없습니까? 분명 있을 텐데.”

“잠시만요. 쪽지가 있어요.”

넬라는 품에서 작은 쪽지를 꺼냈다. 쪽지를 건네받으며 난 넬라의 복장을 유심히 살폈다.

첫 만남 때는 노출이 심한 원피스를 입었는데, 지금은 수수하고 편한 차림이었다. 마치 잠옷 같달까.

부스스한 금발을 큰 리본으로 마무리했는데, 붉은 리본을 보자 문득 의문이 들었다.

“빨간 리본이네요.”

“그런데요?”

“혹시 릴리 베이스를 좋아해요?”

“…….”

릴리 베이스.

오르도르 숲의 마녀가 언급되자, 넬라는 잠시 멈칫했을 뿐, 침묵한 채 날 가만히 응시했다.

싫다고 하지 않은 걸 보니 마녀 릴리에게 호감이 있는 것 같았다.

“그 리본 유명하잖아요.”

인간과 달리 이종족은 릴리 베이스를 동경 혹은 좋아해서 릴리의 상징인 붉은 리본을 자주 달고 다닌다고 알고 있었다.

“근데, 푸른 장미 콘셉트에 변화가 생긴 겁니까? 섹시에서 친근한 여동생 콘셉트로 바뀐 거 같은데.”

“이건 영업 전 복장이에요. 오해 마시길.”

이젠 눈초리까지 싸늘해졌다.

살짝 경계하는 눈초리인데 정확한 이유를 모르겠다.

입맛을 다시며 펜리가 남기고 간 쪽지를 읽어봤다.

[네 말대로 먹였다.]

[목 깨끗이 씻고 기다려라.]

“…망할.”

심장의 유무는 바로 알 수 있었다.

펜리가 내 부탁대로 레토니칼스의 심장을 먹인 것 같았다. 그럼 장기간 굶어도 멀쩡했던 이유가 설명된다.

레토니칼스의 심장은 불사자의 심장으로 그 소유자는 생존에 관해서 초인적인 능력을 발휘했다.

굶주림에 대한 저항도 그 능력 중 하나일 것이다. 다른 능력은 차차 알아가면 될 일이고, 문제는 쪽지에 적힌 다음 문구였다.

목 깨끗이 씻고 기다리라니.

성격 더러운 여자의 말이라 더 살벌했다.

“그녀가 혹시 제게 많이 화났습니까?”

“글쎄요. 가끔 아서 님이 코를 골면 무기를 꺼내시곤 했습니다.”

“…….”

번뜩이는 크로우가 떠오르자 마른침이 넘어갔다.

이거 눈치 봐서 튀어야겠는데?

펜리의 살기가 여기까지 느껴졌다.

하지만 그런 걱정도 곧 잊혔다.

간소한 애피타이저가 끝나고 종업원들이 음식이 든 접시를 한가득 가져오자, 뭐에 홀린 듯 손이 움직였다.

조금 전까진 별다른 느낌이 없었는데, 고기가 배 속으로 들어가자, 두 눈동자에 핏기가 서리며 짙은 고양감이 올라왔다.

두근―

심장이 뛴다.

머리가 더 많은 음식을 원하고, 갈구했다. 식욕이 터진 느낌이랄까.

이성의 끈마저 끊어진 기분이었다.

“……응?”

정신을 차렸을 땐 넬라는 자리에 없고, 미모의 엘프 종업원 셋이 곁에서 바삐 시중을 들고 있었다.

“무, 뭐야?”

식탁 옆에 산더미처럼 쌓인 빈 접시를 보며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양손에 쥐어진 큼지막한 고깃덩어리.

설마 내가 다 먹은 건 아니겠지?

기억의 필름이 살짝 끊어졌다가 돌아온 것 같았다. 기억이 전혀 나질 않았다.

정말 이성의 끈을 놓고 먹었다.

이게 정상일까?

그럴 리가. 그럼 원인은 하나였다.

일단 고깃덩어리를 마저 다 먹고 심장을 만지작거렸다.

‘골칫덩어리가 하나 더 늘어난 것 같은데.’

레토니칼스의 심장을 얻으면서 몸에 큰 변화가 생긴 것 같았다.

인간의 몸이되, 인간과 거리가 있는 육체. 그리고 정신까지.

얻는 게 뭔지, 대가가 뭔지, 잃은 게 뭔지 우선적으로 파악이 필요해 보였다.

“다 드셨습니까?”

“아, 네.”

“그럼 여기…….”

“이게 뭡니까?”

“계산서입니다.”

이쁜 엘프 종업원이 생글 웃으며 종이를 내밀었는데, 종이엔 금액이 적혀 있었다.

258골드.

음식값이었다.

두 눈을 끔뻑이곤 종업원을 올려다보니 더 밝게 미소로 답하는 그녀가 보였다.

“…전부 제가 시킨 겁니까?”

“물어봐도 대답이 없으셔서 넬라 님이 대신 주문하고 나가셨습니다.”

‘…이년이!’

입꼬리를 올리며 떠나는 넬라가 떠오르는 건 왜일까.

잠시 깜빡하고 있었다.

이곳은 푸른 장미, 방심하면 영혼까지 털리는 악마의 소굴이란 것을 말이다.

“오, 외상 됩니까?”

“그건 넬라 님께 여쭤봐야 합니다. 그럼 나머지 추가 요금도 외상으로 처리할까요?”

“……나머지 추가 요금?”

“VIP룸에서 숙박하신 요금이 밀려있습니다. 모두 3달 치입니다.”

“…….”

“소지품 보관료도 있는데, 찾으시려면 추가로 요금을 더 지불하셔야 합니다.”

‘타짜2’ 하이라이트 영상을 보면 탄 맞는 주인공이 나온다.

그때 주인공이 상대 타짜에게 고스톱으로 탄 맞아서 신장이 털렸었지?

탄 맞아서 골로 갔다고.

그래, 맞다.

시발, 탄 맞았다.

* * *

“시부랄 놈들, 도둑놈들, 사채업자도 울고 갈 놈들!”

11800골드.

쌓인 계산서를 내밀며 푸른 장미가 내게 청구한 금액이었다. 무슨 VIP숙소가 하룻밤에 100골드나 하냐고.

세 달 치 숙박료를 계산하니 무려 9천 골드가 나왔다.

더 억울한 건 VIP숙소에서 머문 기억이 반나절도 안 된다는 것이었다. 난 오늘 아침에서야 VIP숙소에 머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어쩐지 방 안에 돈지랄이 남다르더라니.

이 정도면 펜리 년에게 사기당한 거나 다름없었다.

강력히 따지려고 넬라를 찾아갔는데 불편한 손님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넬라의 접견실에 함께 있던 검은 장미들.

펜리에게 무슨 언질을 들었는지 내가 돈 얘기를 꺼내자 무기를 꺼내며 날 노려보기 시작했다.

무효를 외치면 바로 칼이 날아올 것 같은 분위기.

설마, 이것까지 계산한 건가.

펜리 이 무서운 년….

“…그래, 이 정도면 싸게 먹힌 거지.”

펜리에게 구함을 받은 목숨값치곤 저렴한 편이라며 스스로 위안 삼았다.

11800골드.

역시나 가슴이 쓰린 건 어쩔 수 없었다. 접견실을 도망치듯 나온 후 계단을 내려왔다.

당장 돈을 벌 궁리부터 해야 할 것 같았다. 다행인 건 가진 능력이 있어서 못 갚을 금액은 아니라는 거다.

별것 아니라는 생각이 들자, 마음에 여유가 생겼다.

건물 안은 영업 전인지 한산했다.

5층부터 1층까지 내려오며 눈이 돌아갈 만한 예쁜 엘프들과 마주쳤다. 여긴 눈이 즐거워서 좋긴 하네.

“개인 훈련장이 마련되어 있다고 했지?”

혹시 이것도 돈 받는 거 아니야?

우려와 달리 VIP숙소 손님에겐 무료로 제공하고 있었다.

당장 확인하고픈 게 있었기에 프런트에 서 있는 남자 엘프에게 개인 훈련장을 요청했다.

푸른 장미 건물 주변에는 수많은 창고가 즐비했는데, 그 창고 일부를 개인 훈련장으로 쓰는 것 같았다.

엘프가 한 창고로 날 안내하곤 공손히 물었다.

“VIP고객에겐 시중을 들어줄 아리따운 종업원들을 보내드리고 있습니다. 수련에 필요한 편의 물품도 제공하고 있는데 불러올까요?”

“아뇨. 됐습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당연히 괜찮죠.”

푸른 장미는 겉으로는 술과 웃음을 파는 살롱 업소의 형태를 띠지만, 본질은 검은 장미의 정보 조직이나 다름없었다.

훈련실에 시중을 붙인다는 건, 그 사람의 능력이나 실력을 파악하려는 목적이 더 클 것이다.

내 실력이야 이곳 마스터가 나보다 더 잘 알고 있으니 굳이 숨길 필요는 없지만, 불필요한 노출은 피하고 싶었다.

안내자가 물러가고, 텅 빈 훈련소에 나만 남았다.

작은 놀이터 넓이에 장비들이 좌판처럼 장식된 간소한 훈련장이었다. 각종 무기에 강철 갑옷까지 구색은 다 맞춰진 장소라 혼자 수련하기엔 안성맞춤이었다.

후―

짧게 호흡을 내뱉은 나는 일단 달리기 시작했다.

그것도 전력 질주로.

* * *

아침 햇살로 가득 찼던 훈련장에 어둑한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했다.

해가 진다.

수련장 안이 어두컴컴해서 시야가 보이지 않았을 때, 그제야 난 비로소 달리는 걸 멈췄다.

“헉, 헉, 헉….”

거친 호흡을 뱉어내며 램프를 찾았다. 철그럭 철그럭 움직일 때마다 귀에 걸리는 쇠 긁는 소리가 들렸다.

온몸이 물먹은 솜처럼 무거웠다.

램프에 빛이 들어오자, 내 모습이 램프 유리에 비쳐 보였다.

두꺼운 갑주를 걸친 모습.

“…와, 이 미친 체력 보소.”

설마 했는데, 진짜 해냈다.

강철 갑옷을 걸치고 순수 체력으로 점심부터 저녁까지 한 번도 멈추지 않고 달리는 데 성공한 것이다.

전력 질주는 무리였지만, 속도 조절을 하면 밤새 달리는 것도 가능할 것 같았다.

스스로의 체력에 질렸다는 표정을 지으며 무거운 갑주를 낑낑거리며 벗어 던졌다.

살 것 같다.

난 대(大)자로 누워 호흡을 골랐다.

금세 안정되어가는 호흡.

난 체력보단 이 회복력에 놀라는 중이었다.

“체력전에선 지려고 해도 질 수가 없겠네.”

그뿐만이 아니었다.

갑주가 헐거운 탓에 뛸 때마다 이음매에 피부가 찢기고 멍이 들었다.

근데 몸은 피투성인데 상처가 말끔히 아물어 있었다.

생존에 특화된 재생과 회복 능력.

살아남는 것이 목표인 내겐 최고의 힘이나 다름없었다.

주인공인 카멜조차 기피했던 메인이벤트, 백(百) 개의 심장.

불가능에 가까운 미션인 만큼, 보상은 확실했다.

대박이다.

목숨을 걸었던 것이 안 아까울 만큼.

‘하지만 부작용도 분명 있겠지?’

직접 두 눈으로 지켜봤기에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크리스탈 미믹, 붉은 괴물, 그리고 아레나 후아튼까지.

레토니칼스의 심장이 머문 숙주의 말로는 죽음이었다. 그리고 알게 모르게 심장의 통제를 받았다.

이런 부작용을 경계했기에 붐(Boom)을 터트릴 때 의식을 잃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는데, 폭발 강도가 예상치를 벗어나서 의식이 날아갔다.

“다행히 잠식을 당하는 건 피한 거 같은데.”

정신 방벽을 계산에 깔고 벌인 도박이기도 했다.

도박에 성공했을 때의 이득이 이렇듯 엄청났으니까.

하지만 조금 전 식사를 할 때 잠시나마 이성을 잃은 것을 보면 완벽히 부작용을 피했다고 볼 순 없었다. 다음에도 이와 똑같은 반응이 나타난다면 심각하게 고민해볼 일이었다.

‘가진 능력 안에서 해결하는 것이 가장 좋은데.’

머릿속으로 내가 지닌 능력들을 나열해봤다.

정신 방벽.

인챈트.

고대 문양.

성력과 신명 사냥꾼.

그리고 레토니칼스의 심장까지.

모처럼 여유가 생겼을 때 한 가지씩 테스트해보며 몸 상태를 살펴봐야 할 것 같았다.

3개월 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으니까.

창밖을 바라보니, 구름이 잔뜩 낀 밤이라 달빛이 보이지 않았다.

램프에 핀 작은 불꽃에 의지해야 하는 어두운 밤.

출렁이는 불꽃을 잠시 감상하고 있는데, 뒤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기분 나쁜 밤이네요.”

푸른 장미의 주인, 넬라가 날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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