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이곳이 바로 악의 소굴
푸른 장미 5층은 베네타의 명물로, 하루 이용료만 300골드가 넘어갔다.
한껏 치장한 아찔한 외모의 엘프들과 일대일로 은밀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프라이빗한 장소.
오늘 밤도 수많은 손님이 엘프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돈을 바리바리 싸 들고 찾아왔다.
그리고 그 손님들 사이엔 나도 떡하니 한 자리 차지하고 있었다.
내 지명 상대는 다름 아닌 이곳의 마담뚜 넬라였다.
“…뭐라고요?”
“이해 못 했습니까? 두 번 말하기 입 아픈데.”
“지금 그딴 제안을 하려고 절 여기로 부른 건가요?”
은하수를 떠올릴 법한 몽환적인 공간. 보석으로 치장된 은폐된 방 안에 들어온 넬라는 고운 이마를 찡그리곤 푹신한 소파에 등을 기대었다.
영업시간이라 그런지 마담뚜 포스가 물씬 풍겼다.
“그딴 제안이라고 하면 섭섭하죠. 무려 ‘혈맹’에 관한 대화 아닙니까?”
“그러니까. 접견실에서 해도 되는 이야기를 왜 이곳에서 하냐는 거죠. 돈도 없는 사람이 방은 또 어떻게 잡았죠?”
“얘기하니까 다 들어주던데요?”
난 위스키를 흔들곤 쭉 들이켰다.
푸른 장미에서 가장 비싼 술을 달라고 했는데, 종업원들이 군말 없이 제공해주었다.
날 외상으로 독박 씌우려는 펜리의 지시가 분명했다.
VIP룸에 재웠을 때부터 알아봤다고.
“유명한 곳인데, 저번에 저만 구경을 못 했거든요. 방 분위기가 참 좋네요. 어둡기도 하고.”
남정네들 마음에 불을 지피기 딱 좋다는 뜻이었다. 손만 뻗으면 닿을 거 같거든.
“영업의 기본이니까요.”
“영업도 잘하시는 분이 유독 저한테 까탈스러운 이유가 뭡니까?”
“제안이 형편없으니까요.”
“혈맹을 먼저 제안했으면 그 정도는 해줘야죠.”
날 바라보며 잠시 헛웃음을 짓던 넬라는 미간을 꾹꾹 눌렀다.
내 행동이 기가 막혔나 보다.
“그래서 장부에 달린 외상값을 전부 없애 달라? 앞으로 달릴 것도 쭉?”
“쪼잔하게 혈맹끼리 무슨 돈을 받으려고 그래요. 혈맹 프리패스 모르십니까?”
“…혈맹 프리패스?”
“혈맹끼리는 돈돈거리면 안 된다는 뜻이죠.”
바뀐 육체를 살피고 적응하는 데 사흘 정도가 걸렸다. 목숨이 걸린 일이라, 잠시 깜빡 잊고 있던 게 있는데, 이곳이 바로 악의 소굴, 푸른 장미란 것이었다.
사흘이 지난 지금, 11800골드가 13000골드가 됐을 때, 난 결심해야 했다.
막 나가기로.
‘나도 살아야지.’
펜리 년이 작정하고 날 염전 노예로 만들려는 게 분명했다.
생명의 징표 일로 앙심을 품고 날 담그려는 것 같은데, 어림도 없었다.
그렇다고 다른 숙소로 옮겨 가느냐??
‘이 좋은 데를 놔두고 굳이 왜?’
개인 수련장도 있지, 음식 잘 나오지, 침대도 죽이지.
거기다 이쁜 엘프들도 있어서 눈도 즐거웠다.
현대로 따지면 5성급 스위트 프리미엄 VIP 호텔보다 좋은 곳인데 떠나는 게 바보였다.
더군다나 거래 우위에 있는 지금이라면 더더욱.
“혈맹 제안으로 무척 싼 대가 아닌가요?”
저들이 왜 날 혈맹으로 붙잡으려는지 모른다. 다만, 손해를 보고라도 날 잡아야 하는 이유가 있다는 거다.
펜리 년이 오기 전에 이 거래를 마무리 지어야 했다.
그년은 솔직히 무섭다고.
“아, 정보 공유도 추가로 넣겠습니다. 혈맹끼리 서로 알 건 알아야죠.”
학살자의 소식을 알고 싶은데, 터무니없는 요금을 요구해서 아직도 궁금증을 풀지 못했다. 이것도 지금 짚고 넘어가야 나중에 딴말이 안 나온다.
“당신, 생명의 징표가 사라진 건 알고 있나요?”
“알죠. 정신 차리자마자 바로 확인했는데.”
“그럼 지금 제안이 마스터의 귀에 들어가면 죽을 수도 있다는 것도 알겠네요?”
“넬라 님이 막아주실 거라 믿습니다.”
“무리예요.”
“무리라는 게 못 막는다는 겁니까? 안 막겠다는 겁니까? 엘프로서 솔직해지시죠?”
“…….”
넬라는 고운 이마를 찡그렸다.
엘프와 인연이 없어 보이는데, 눈앞의 사내는 엘프의 언령에 대해 잘 아는 것 같았다. 교묘히 말을 돌려도 바로 짚어내곤 집요히 물어온다.
‘알면 알수록 모르겠어.’
중요 인물이 될 수 있기에 아서 클레이튼이란 인물의 과거를 탈탈 털어봤다.
과거 크룩스 출신의 암살자란 것과, 블라이어와 사이가 안 좋다는 것, 그리고 최근에 아서 클레이튼이란 이름을 쓰고 다녔다는 것 정도였다.
그 전의 과거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이름 없는 존재라니.’
고아 출신.
노예 출신.
암살자 출신.
출신만 알 뿐 이름이 없었다.
뭘 알아내기가 힘들다는 뜻이다.
다만, 조사를 하면서 한 가지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바퀴벌레 같은 생존력을 자랑한다는 거.
죽을 것 같으면서도 악착같이 살아남았고, 약한 것 같으면서도 벌어진 전투는 늘 승리했다.
신기한 사내.
오랜만에 넬라의 관심을 잡아끈 인물이었다.
“그 제안은 마스터가 오면 물어보세요.”
“누구 허리 접히는 꼴 보려고 하십니까? 어쩔 수 없네요. 지금 떠나겠습니다.”
“…떠나요?”
“여기 있으면 빚만 늘어날 텐데, 어쩌겠습니까? 돈 갚으려면 떠나야지.”
“일거리를 중개해 줄 수 있어요.”
“고양이 앞에 생선을 맡기지. 뭘 믿고요? 됐습니다.”
“담보 없인 보내드릴 수 없어요.”
“이걸 담보로 맡기죠.”
“…….”
내가 가슴에 달린 검은 브로치를 툭툭 건드리자, 넬라는 잠시 입을 다물고 침묵했다.
다크 로즈(dark rose).
베네타의 보물을 맡기고 간다는데 잡는다는 건 억지나 다름없었다.
“저 갑니다?”
식탁 위에 다크 로즈를 올려놓고, 엉덩이를 살짝 들썩였다.
겉으론 뻗댔는데, 속으로는 살짝 쫄렸다.
안 잡으면 나가린데.
그래도 확신을 두고 움직이는 거였다.
사흘 동안 훈련장에 콕 박혀 지냈다. 그 사이 넬라는 하루에 한 번은 꼭 시간을 내서 날 찾아왔다.
많은 주제로 내게 말을 걸었는데, 내 눈치가 또 백 단이라 그녀의 의도를 단박에 파악했다.
나란 사람이 어떤 인물인지 알고 싶은 것이다.
나한테 큰 관심이 없다면 보일 수 없는 모습.
“하, 좋아요. 일단 앉아요.”
문고리를 소리 나게 잡자 넬라가 항복을 선언했다. 몰래 웃음 짓던 난 표정을 바로 고치곤 등을 돌렸다.
품에서 서류 한 장을 꺼낸 후 그녀 앞에 내밀었는데, 서류를 살핀 넬라는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날 올려다봤다.
“……검은 장미 계약서, 우리 의뢰에 쓰는 계약서를 당신이 어떻게 가지고 있는 거죠?”
“지붕에 있는 녀석들에게 부탁하니 들어주던데요?”
“……하.”
마스터가 구해 온 생존자, 그리고 자신이 혈맹을 제안하며 직접 챙기는 모습까지.
따로 언질을 주지 않았던 것이 오해를 불러온 것 같았다.
아니, 귀한 손님이 맞긴 한데, 인정하기 싫다고 해야 하나.
마스터의 말대로 밉상이었다.
“바쁘신 것 같아서 제가 미리 준비했습니다. 지장 찍으세요.”
“예상했던 것보다 더 약으셨네요?”
“마스터에게 제 얘기 못 들었습니까?”
“육포처럼 떠버릴 테니, 잡아두라고만 하셨어요. 근데 저도 동참할까 생각 중이에요.”
“…못 들은 거로 하겠습니다.”
넬라는 피식 웃고는 계약서에 사인을 했다. 조금 전까지 내 제안에 강한 거부감을 드러냈던 엘프 맞나 싶었다.
진짜 육포를 뜨려고 마음먹은 거 아니야?
“태세 전환 빠르네요?”
“한번 결정하면 미련을 안 두는 편이라.”
“계약도 맺었으니, 하나만 물어봅시다.”
방금 계약을 통해 혈맹에 한 발 담갔다고 해도 무방했다.
그래서 그동안 참았던 질문을 던졌다.
“저 같은 자에게 혈맹을 제안한 이유가 뭡니까? 이제는 말해줄 수 있지 않습니까?”
“생명의 징표요.”
“생명의 징표? 징표는 이미 써버려서 이젠 끗발이 없을 텐데?”
“그 징표가 사라진 날, 검은 장미의 미래가 바뀌었거든요.”
“무, 뭐가 바뀌어요?”
“미래요.”
아서 클레이튼.
이 사내와 마스터 간의 징표 맹약이 끝나는 그날, 마스터와 도르네프가 신명을 동시에 각성했다.
‘세계수의 그림자.’
그리고 토바른의 방패.
신명을 내다본 순간 감이 왔다.
이 사내를 절대 놓쳐선 안 된다는 것을.
“그게 무슨 말…….”
뜻 모를 말이라, 자세히 답을 구하려는데,
“요놈 깨어났네?”
“……헉!”
절대 들려선 안 되는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넬라가 내 뒤를 바라보곤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그녀가 예를 표하는 존재는 이곳에서 한 명뿐이다.
이곳의 마스터.
펜리 체이서가 내 그림자를 밟고 띠꺼운 표정으로 곰방대를 물고 있었다.
“하하하… 여기서 뵙네요.”
“여기서 뵙네요? 웃기고 자빠졌네.”
넬라와 잠시 눈빛을 교환한 그녀가 내 손에 쥐어진 계약서를 낚아챘다.
계약서를 읽어 내려가는 그녀의 표정이 보인다. 일그러지면서 딱딱하게 굳어지는데 무슨 호러 영화를 보는 것 같았다.
“아니, 그게…….”
“열한 번이야.”
“…네?”
“네놈이 징표를 발동하고 내가 네 목숨을 구해준 횟수가 자잘한 거 빼고 무려 열한 번이라고. 생명의 징표라도 이대로 퉁치기엔 솔직히 수지 타산이 안 맞잖아. 명색이 검은 장미 마스터인데.”
독한 년.
그걸 일일이 다 계산하고 있었냐?
순간 육포를 떠버리겠다는 넬라의 말이 떠올랐다.
목을 깨끗이 씻고 기다리란 쪽지도 있었지.
난 펜리가 계약서를 쫙쫙 찢고, 내 몸도 쫙쫙 찢을 줄 알았다.
그런데, 펜리는 덤덤한 표정으로 계약서를 다시 내게 돌려줬다.
“그래서 이번이 마지막이야. 내가 손해 보는 짓은. 계약서대로 해주지.”
“…뭡니까? 더 불안하게.”
돈을 안 받겠다고?
저 구두쇠 펜리가?
갑자기 왜?!
펜리가 눈짓하자, 넬라가 고개를 숙이곤 방을 총총 벗어났다.
은하수가 쏟아질 것 같은 몽환적인 공간에 그녀와 단둘이 남았다.
푸른 장미 5층이 이렇게 무서운 데였어?
펜리가 내게 다가오더니 귀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
“한 가지만 기억해.”
“…….”
“넌 내게 큰 빚이 있어. 알지?”
“…큰 빚?”
“깊이 새겨두라고. 여기에.”
그녀가 내 심장을 툭툭 두드리자, 난 신음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레토니칼스의 심장.
확실히 난 그녀에게 큰 빚이 있었다.
그녀가 아니었다면 심장을 얻지도, 그 자리에서 살아남지도 못했을 테니까.
“그 빚 지금 받아갈게.”
“…뭐요?”
“싫어?”
“아, 아닙니다.”
“잘 생각했어. 잘 처리할 거라 믿는다.”
“……?”
내 어깨를 툭툭 두드린 펜리는 미소를 지으며 방을 휙 벗어났다.
뭘 처리하라는 거야?
처음엔 저 엘프 년이 뭔 소리인가 했다. 그런데 주변을 둘러본 순간 난 어이없는 눈빛으로 펜리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봤다.
“다크 로즈는 또 언제 가져갔대.”
흑요석 브로치가 사라지고 없었다.
두 엘프가 눈빛을 교환하더니, 넬라가 냉큼 가져간 모양이었다.
이토록 쿵짝이 잘 맞는 것을 보니, 피부 다른 자매가 분명했다.
설마 그 목숨 빚을 다크 로즈로 대신하겠다는 건 아니겠지?
예나 지금이나, 틈만 주면 코 베어 가려는 건 똑같았다.
역시, 이곳은 악의 소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