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죽이고 싶다. 진심으로.
군주 도르네프의 장인의 혼으로 제작된 다크 로즈(Dark rose).
흑요석에 깃든 힘은 주인의 생존에 필요한 축복 효과를 부여했다.
미믹 제단에선 샤르바딘의 목숨을, 도미닉과의 전투에선 내 목숨을 구해준 고마운 물건.
그 물건을 펜리가 허락 없이 홀라당 가져가 버린 것이다.
‘다크 로즈가 원래 6성에 오른 펜리의 상징 각인물이긴 한데.’
스토리대로라면 펜리의 손에 들어가도 이상할 건 없었다. 확실히 다크 로즈는 그녀와 무척 잘 어울렸으니까. 다만, 샤르바딘이 생존하면서 그 소유권이 내게 넘어왔다는 거다.
조금 전 펜리의 태도를 보니, 다크 로즈에 큰 욕심이 있어 보였다.
하긴, 검은 장미를 닮은 보석인 데다, 축복 효과까지 있으니 펜리 입장에선 욕심낼만한 물건이었다.
‘생명의 징표를 한 번 더 요구해 봐?’
아니, 이건 생존을 우선시하는 내 원칙에 반하는 행동이었다.
징표의 ‘징’ 자만 꺼내도 죽을 거다.
다크 로즈 건은 나중에 생각하기로 했다. 내 소유이긴 해도 은인으로서 받은 물건. 샤르바딘의 동의를 구해야 물건 양도가 가능했다.
펜리도 그 사실을 모르진 않았기에, 큰 빚을 언급하며 간접적으로 협박한 것이었다.
가서 샤르바딘의 동의를 구해 오라고.
다크 로즈와 별개로 어차피 도르네프를 만나러 가야 했다.
‘꿀단지가 코앞에 있는데, 안 가면 내가 벌이 아니고 파리 새끼지.’
도르네프에게 선물 받은 망치가 음각된 황금패가 떠올랐다.
베네타 가문에 대대로 내려온 대장장이의 정원 1회 교환권.
그 안에 어떤 보물이 숨겨져 있을까.
기대감이 벅차오르기 시작하자, 5층을 나온 내 발걸음이 더욱 빨라지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1층으로 후다닥 내려온 후 기생오라비같이 생긴 남자 엘프에게 계약서를 내밀었다.
“소지품을 찾으러 왔습니다.”
그가 날 보며 기계적으로 한마디를 내뱉었다.
“보관료는 가져오셨습니까?”
“이거 보고 다시 얘기하시죠.”
“이게 뭡니까?”
“제가 오늘 경제적 자유를 얻었다는 계약서입니다.”
펜리가 1층 보관함에 내 가방을 넣어놨는데, 하루 보관료가 무려 20골드에 달했다.
석 달 하고도 사흘.
1860골드가 없어서 지금껏 내 가방을 내 가방이라 외칠 수 없었다.
그렇다고 펜리를 욕할 수도 없었다.
“내 가방!”
“…….”
가방을 홱― 낚아채곤 안을 다급히 확인했다.
도미닉의 연구 일지.
도네콜린트의 마녀 목걸이.
마르샤가(家)의 직인.
망치가 음각된 황금패.
붐(Boom)을 봉인한 팔찌와 보랏빛 마석 더미까지 야무지게 잘 챙겼다.
물건들을 확인하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 물건들의 가치를 생각했을 때, 보관료 따윈 공짜나 다름없었다.
펜리가 물건을 꿀꺽하고 모르쇠로 일관해도 알 수 없는 일. 오히려 챙겨준 것에 감사할 뿐이었다.
이제 부의 자유를 만끽할 차례다.
훈련장을 갈 때마다 1층에서 내 발길을 잡았던 그 향긋한 간식. 돈 없어서 바라보기만 했던 그것을 원 없이 먹어볼 차례였다.
“여기 팬케이크 종류별로 부탁해요.”
“가격이…….”
“여기 계약서요.”
이 정도면 블랙 카드인데?
식탁에 쫙 깔린 팬케이크들을 보며 실실 웃었다.
이 세상을 경험하면서 처음 알게 된 사실이 있는데, 엘프들의 팬케이크 굽는 솜씨가 대륙 최고라는 것이다.
푸른 장미 1층에 팬케이크 가게가 따로 있을 정도고, 이 케이크를 먹기 위해 방문하는 손님도 생각보다 많았다.
“으음!”
살살 녹는다.
요리사가 누군지 모르겠지만, 현대로 데려가면 케이크 시장을 씹어 먹고도 남을 것 같았다. SNS 메인에 있는 케이크 맛집과 비교해도 압도적이었다.
누가 케이크 요리사를 데려갈지 모르겠지만, 음식 복 하나는 타고난 놈일 거다.
사흘간 규칙적으로 행해졌던 훈련 루틴이 조금 변할 것 같았다.
훈련 전 팬케이크, 훈련 후 팬케이크 말이다.
오늘부터 이 팬케이크는 내 거다.
* * *
푸른 장미 건물 내의 비밀 공간, 펜리 체이서의 사무실.
펜리는 오물거리면서 빈 접시를 내려놨다.
“이제 좀 살 것 같네. 며칠 전부터 단게 엄청 땡겼거든.”
“밖에서 사드시지 그랬어요?”
“입맛 버릴 일 있어? 여기 넬라표 팬케이크가 있는데.”
“표정을 보니, 일이 잘 풀렸나 보네요?”
“잘 풀렸지. 출혈이 예상보다 커졌다는 것만 빼면.”
“얼마나 들었나요?”
“90만 골드, 그리고 내 목걸이까지.”
“…목걸이요? 그걸 건넸단 말이에요?!”
“두 번째 신명의 주인, 그 녀석의 정보가 번외더라고.”
번외.
돈으로 구할 수 없는 정보란 뜻이었다.
접시를 치우던 넬라는 펜리 앞으로 얼굴을 바짝 들이밀었다.
굳이 목걸이를 건넨 이유를 묻는 표정이었다.
“큰 기회를 놓치긴 아까웠어.”
“무슨 기회요?”
“잘만 풀리면 단시간에 큰 힘을 얻을 기회.”
미끼를 통해 수집된 고대 아티팩트 세트를 강탈.
하지만 이 계획에는 중요한 정보가 빠져 있었다.
“흑막이 건드릴 수 없는 상대라면 어쩌려고요?”
“그 수준이라면 상급 수준의 아티팩트가 아니라, 최고를 원했을 거야. 충분히 할 만한 도박이야.”
“그래도 검은 장미로는 안 될 거예요.”
“내가 직접 움직여.”
“알았어요.”
넬라는 더는 묻지 않고 물러났다.
마스터가 성공을 자신했으면 할 만한 것이었다. 적어도 침투와 은신에서 마스터를 따를 자는 없었으니까.
“그래서 내가 말한 건 얻어 왔나요?”
“기대한 만큼은.”
“지금도 돈 버리는 짓이라 생각해요?”
“전혀.”
펜리가 허공에 대고 손짓하자, 주변에 있던 인기척들이 빠르게 멀어져 갔다. 자신의 직속 호위들을 멀찍이 물린 후 그녀는 블랙마켓에서 얻어온 신명 정보를 넬라 앞에서 천천히 풀었다.
한 마디 한 마디가 적막한 공간 안에서 흘러나왔다.
잠시 후, 넬라가 속이 시원하다는 듯 말했다.
“잠금 해제! 이제야 대화가 되겠네요.”
“내가 말한 것 중에 모르는 게 있어?”
“아직까진 없어요.”
신명을 받드는 자가 신명의 발설로부터 자유로워지려면 눈앞의 과정이 필요했다.
다른 곳을 통해 신명 정보를 알게 된 경우, 마스터가 알고 있는 인지 범위 안에선 신명의 정보 공유가 가능했다.
넬라가 모든 정보를 사전에 알고 있음에도 펜리에게 정보를 알아 오라 시킨 이유였다.
“알다시피 마스터의 신명은 ‘세계수의 그림자’예요.”
“어떻게 해석했지?”
“엘프족의 터전 완성.”
넬라의 답에 펜리는 나직이 신음을 흘렸다. 엘프족의 터전 완성이라니, 대담한 펜리조차 어깨가 무거워지는 말이었다.
“베네타와 검은 장미는 혈맹 관계예요. 이종 간의 혈맹은 인간들처럼 가볍지 않죠.”
“베네타의 난쟁이와 내가 동시에 신명을 각성한 게 혈맹과 관련 있다는 거야?”
“도르네프 님의 신명은 ‘토바른의 방패’, 베네타가 토바른 내에 지켜야 할 것이 생긴다고 해석할 수 있어요.”
“지켜야 할 것? 그게 세계수다?”
“제가 생각하는 해석은 그래요.”
“토바른에 세계수는 없어.”
“대륙 어디에도 세계수는 없죠. 세계수가 단순히 엘프족의 터전을 뜻한 것일 수도 있고, 진짜 신화 속의 세계수를 지칭하는 단어일 수도 있어요.”
“그걸 어떻게 알아내고 찾지?”
“길잡이가 찾아주겠죠. 그자가 세계수로 저흴 이끌어줄 테니까.”
길잡이.
그 단어를 듣는 순간, 펜리는 그 녀석을 떠올렸다.
아서 클레이튼.
어째서 넬라가 단 한 명의 인간과 혈맹을 맺으려고 하는지 이해가 됐다.
“그 녀석이 길잡이란 근거는?”
“마스터와 도르네프 님의 각성 날이, 마스터가 그자를 구해온 날이니까요.”
“…빌어먹을.”
“마스터의 신명과 분명 깊은 관련이 있어요. 곁에 둬야 해요.”
넬라의 근거에 펜리는 짧게 욕설을 내뱉었다. 이렇게 되면 녀석과 완벽히 엮이게 되는데 블랙마켓에서 느꼈듯이 돌아가는 상황이 심상치 않았다.
“무슨 문제 있나요?”
“잘못되면 적들이 굉장히 많이 생길 것 같아서.”
“…네?”
“도착 전까지 난 그 녀석을 버릴지, 이용할지를 두고 고민했어. 함께 갈 사이로는 절대 생각하지 않았다고.”
“그는 길잡이가 맞아요.”
“그럼, 절대 죽어선 안 되는 거잖아.”
“왜 그의 죽음에 신경 쓰죠?”
“가시밭길이 보이니까.”
펜리는 갑자기 머리가 지끈거렸다.
절대 죽어선 안 된다라.
[절 살리고 싶으십니까?]
순간 그 녀석의 재수 없는 면상이 떠올랐다. 끔찍했던 그때의 과거, 징표 소환의 날이 다시금 도래하려고 했다.
‘그냥 거기서 죽였어야 했나?’
기껏 개고생해서 살려 데려왔더니, 생명의 징표보다 더 빡센 상황이 만들어졌다.
아레나 후아튼?
그 정도 괴물은 앞으로 벌어질 후폭풍에 비하면 동네 양아치 수준이었다.
“아, 두 번째 신명의 주인, 그 정보를 듣지 못했어요.”
“내가 알아 온 건 신명뿐이야. 그래서 미치도록 심란한 상태지.”
펜리는 잠시 주저하더니 그녀에게 새로운 신명 정보를 전했다.
신녀 넬라도 보지 못했던 신명 정보.
“신명…… 사냥꾼?”
넬라는 그 신명을 여러 번 중얼거렸다.
그동안 보아왔던 신명 중 가장 강렬한 존재감이었다. 해석에 따라 신명의 주인을 사냥하는 존재로 비칠 수도 있었으니까.
“그 정보가 전부인가요?”
“모르지. 하지만 하나는 확실해. 누구도 그 주인의 이름을 알지 못한다는 거.”
“정말 궁금하네요. 이 정도로 베일에 감춰진 주인이라니.”
“그렇지? 그 주인의 정보를 선점해 판다면 황금산을 쌓을 수 있겠지?”
“황금산 정도가 아니라 그 이상도 바라보겠죠.”
“나도 조금 전까지 그렇게 생각했어. 안 먹어도 배가 불렀지. 하지만 이젠 아니야. 시발!”
안 먹어도 체할 것 같은 답답함.
도미닉 후아튼과의 전투에서 치명상을 입었을 때, 빈사 상태에 빠진 녀석의 중얼거림을 들었다.
[…신명 사냥꾼.]
그래서 쪽지를 읽은 순간 신명의 주인이 누군지 떠올릴 수 있었다.
오직 자신만 알고 있는 두 번째 주인의 이름.
신명 사냥꾼, 아서 클레이튼.
‘그리고 신명의 주인을 사냥하는 존재.’
근래에 제거된 신명의 주인, 아레나 후아튼의 전투를 녀석과 함께 했다.
빛바랜 신묘한 화살.
그는 신명의 주인, 아레나 후아튼을 사냥했다.
녀석의 신명은 진짜다.
‘이 정보를 팔면 뭘 받을 수 있을까?’
신명의 주인이라면 모두가 바라는 특급 정보.
그 가치가 가늠도 안 된다.
펜리는 넬라의 표정을 살폈다.
그 녀석에 대해 많은 정보를 알려준 상태라 눈치챌 수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신명 사냥꾼을 은밀히 조사해봐야겠어요.”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하긴 가진 무력도 애매한 데다 얼빵한 이미지가 있다 보니, 길잡이의 존재로 인식하면서도 신명의 주인까진 연결이 안 되는 모양이었다.
다행인 건가?
“뭐가 다행이냐. 그 새끼는 전생에 나랑 원수를 졌나.”
“…?”
운명이 참으로 얄궂다.
스트레스 때문인지 단것이 또 당겼다.
“팬케이크 하나만 더 부탁해.”
“다 떨어졌어요.”
“…뭐?”
“조금 전에 계약자님께서 싹 다 담아가셨거든요.”
“…계약자님?”
“기억 안 나세요?”
넬라가 어깨를 으쓱이며 위를 가리키자, 펜리의 입이 잠시 벌어지더니, 서서히 일그러졌다.
“이런 찢어 죽일…….”
아서 클레이튼.
죽이고 싶다.
진심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