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숙주가 이리 약해서야
스토리에서 펜리 체이서의 신명 각성은 제법 시간이 흐른 뒤에 이뤄진다.
기반을 모두 잃고 토바른을 떠나 새로운 지역에서 기틀을 다지는 시기.
이방인, 이종족.
견제와 배척이 당연시되는 모진 세계관에서 새로운 보금자리를 세우는 것이 순탄할 리 없다.
그 고난 속에서 피어난 한 줄기의 빛이 바로 6성 각성이다.
그때 펜리에게 부여된 신명이 ‘엘프족의 큰 나무’였다.
‘기존 스토리보다 훨씬 앞당겨졌다.’
나의 개입으로 펜리의 운명에 변화가 생긴 것 같았다.
설마 나와 깊게 엮인 건 아니겠지?
부여받은 신명을 볼 수 있다면 감이 잡힐 것 같은데, 지금 내 눈에는 후광만 보일 뿐, 전에 봤던 룬 문자들은 없었다.
룬 문자는 ‘사냥’을 시작해야 보이는 것 같았다.
멈춰 선 펜리의 손에는 여러 장의 서류가 들려 있었다.
“넬라가 이게 필요할 것이라 하던데.”
“아, 직접 오실 필요까지는 없었는데. 고맙…….”
“누가 너 준대?”
내가 넬라에게 부탁했던 정보였는데, 역시나 저 엘프 년이 쉽게 줄 리 없었다.
“내게 할 말 없어?”
“큰 빚은 샤르바딘 님을 만나보고 알려드릴게요.”
“제법 눈치는 있네.”
월급쟁이 생활에 눈칫밥 없으면 시체지.
그녀가 가져간 다크 로즈(Dark rose)로 딜을 해볼까 생각했지만, 목숨 빚을 갚은 것으로 퉁치기로 했다.
펜리에게 잘 어울리는 물건이기도 했고, 레토니칼스의 심장을 얻으면서 다크 로즈의 축복 효과도 크게 기대하기 힘들었다.
이럴 땐 시원하게 주고 더 큰 것을 노리는 게 맞다. 혈맹을 맺으면 앞으로 신세 질 일이 더 많아질 것 같았으니까.
눈앞의 정보도 그중 하나였다.
달라진 미래를 대비하려면 검은 장미의 정보력이 꼭 필요했다.
내가 방긋 웃고는 손을 내밀자, 펜리가 서류를 건넸다.
그런데,
“그 한 장은 왜 안 줍니까?”
“이건 내가 알아 온 정보니까.”
“혈맹 관계에 네 것 내 것이 어딨습니까? 건넨 김에 시원하게 주시죠.”
“여기에 적힌 몇 줄이 고대 아티팩트 하나에 90만 골드의 가치를 지녔어.”
“…….”
내가 좀 뻔뻔하긴 한데, 저건 양심상 그냥 달라고 하기가 그랬다. 정보의 가치를 들어보니 무슨 정보인지도 알 것 같았다.
블랙마켓 정보.
최근에 각성한 신명 주인들의 리스트가 분명했다.
각성한 펜리를 보자 남은 이들의 정체도 궁금해졌다.
넬라가 셋은 알려줄 수 있을 거라 했는데, 펜리를 제외하면 남은 두 명이 저 종이에 적혀 있을 것이다.
“혈맹을 수락하면 신명 정보도 공유한다고 넬라가 약속했습니다.”
“넬라가 마스터야? 내가 마스터인데 누가 결정해.”
“뭐 그렇다고요.”
계급이 깡패이니 넬라에게 따지기도 뭐했다.
딱 보니, 저 배배 꼬인 성깔로는 그냥 줄 것 같지 않았다.
달라고 조르면 때릴 것 같아서 침묵하고 있는데, 펜리가 종이를 살짝 흔들며 다가왔다.
웃고 있는 얼굴인데 살짝 미묘했다.
꿍꿍이가 있는 미소.
“최근에 각성한 주인이 몇 명인지 알지?”
“다섯 아닙니까?”
“그래, 죽은 아레나를 제외하면 네 명이지.”
“그 넷이 적혀 있는 겁니까?”
“그래.”
“……그, 그래?”
넷이 다 적혀 있다고?
그럼 베일에 가려진 주인마저 알고 있다는 말이잖아.
블랙마켓이 알아낸 것일까.
더 궁금해졌다.
“그냥 원하는 걸 말하세요. 돌려 말하는 거 싫어하시면서.”
“네놈의 정체.”
“정체? 라웁 숲에서 밑천까지 싹싹 긁어서 보여드렸는데요?”
“그래, 보여줬지. 마치 모든 걸 알고 있는 사람처럼.”
“…….”
“곰곰이 생각해보면 말이야. 전부 네가 말한 대로 이뤄졌어. 이상하지 않아?”
“운이 좋았습니다.”
“석 달은 너란 인간을 알아보기 충분한 시간이야. 너 처음부터 심장을 노린 거지? 날 만나기 전부터 말이야.”
“흘러가다 보니 그렇게 된 겁니다.”
“아니, 그 흐름을 잡은 건 네놈이야. 생명의 징표도 그중 하나겠지.”
“아니, 그건….”
“아레나 후아튼을 저격하기 위한 도구, 흰나비 소환 스크롤. 구입 시기를 내가 모를 줄 알아?”
이건 예상 못 했다.
설마 환상 스크롤을 짚고 넘어갈 줄이야.
내 과거를 조사했다면 한참 전에 구입했다는 것을 알아냈을 것이다. 환상 스크롤을 구입한 곳이 다른 곳도 아닌 베네타였으니까.
펜리와 생사고락을 함께하면서 너무 많은 정보를 드러낸 것 같았다.
내가 펜리의 밑천을 알고 있듯이, 그녀도 내 밑천에서 수상함을 눈치챈 것이다.
다만, 내 적은 학살자이지 그녀가 아니었다.
혈맹이 될 사이니, 아군에 가깝다고 할 수 있었다.
오해를 풀어야 한다.
방법을 찾고 있는데, 침묵이 그녀를 자극했다.
“난 이래서 인간이 싫어. 머리를 굴리거든.”
“……자, 잠깐!”
순간 그녀의 신형이 사라졌다.
시야에 잡히진 않지만 4성에 오르면서 느낄 수 있었다. 방어 자세를 잡고 이를 악물었다.
온다!
퍼억―!
“커억!”
교차한 팔 아래로 묵직한 발차기가 솟구쳤다.
막았지만 충격을 흘리기엔 무력 차이가 너무 컸다.
신형이 하늘로 솟구쳤고,
콰자자작―!
천장을 뚫고 지붕 위로 굴러떨어졌다.
시발, 더럽게 아프다.
피를 게워내며 몸을 벌떡 일으켰다.
두근―!
신체의 자극에 심장의 맥동이 요동친다.
고통은 사라지고 육체엔 활력이 돌기 시작했다.
사흘 전과 달리 밤하늘엔 커다란 달이 떠올랐다.
짙은 그림자.
난 전력으로 내 그림자를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내 육체 능력은 심장을 얻으면서 이미 인간의 수준을 벗어났다.
질기고 단단하다.
그리고 강했다.
콰앙―!
묵직한 감각이 느껴졌다.
맞았다.
동시에 지붕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잠시 후, 지붕이 무너지더니 천장이 내려앉았다. 다시 훈련장 아래로 발을 디뎠을 때, 달빛이 공간 전체를 비췄다.
환해진 공간.
“4성?”
“알고 있던 거 아니었습니까? 엉덩이를 보면 안다면서요.”
“4성은 선 넘은 거지. 석 달 전에 3성에 오른 놈이 할 말은 아니잖아? 날 속였지?”
“어젯밤에 벽을 넘었습니다.”
“그걸 나보고 믿으라고?”
“엘프면서 진실, 거짓도 파악 못 합니까?”
“기분 나쁠 정도로 엘프에 대해서 잘 알아. 또 뭘 알고 있지?”
“절 못 믿는 겁니까?”
“너 같으면 믿겠냐?”
주변에 드리운 그림자들을 둘러보며 욕설을 내뱉었다.
오해를 풀기엔 상대가 안 좋았다.
빌어먹을 암고양이.
그래도 진실을 말해줄 순 없다.
내가 알고 있는 진실은 파급력이 너무 크거든.
“절 죽일 겁니까?”
“넬라는 네놈이 꼭 필요하다고 하더군. 혈맹을 맺어야 한다고. 그런데 난 네놈을 못 믿겠어. 그러니 내가 납득할 수 있도록 증명해.”
“……증명?”
악당들이 판치는 세상에 증명할 거라면 하나밖에 없다.
바로 실력.
이 엘프 년이 지금 나랑 싸우고 싶어 하는 거 맞지? 아니, 패고 싶은 건가?
내가 상대될 리 없잖아.
5성과 4성 차이는 고작 한 단계지만 전투의 결이 다르다고 보면 된다.
4성이 다구리를 쳐도 5성 하나를 이기지 못한다는 소리다.
“그냥 패고 싶다고 말하세요. 뺨 대드려요?”
“웃기지 마. 네 밑천을 본 나야. 방법이 있잖아? 날 보면서 느껴지는 게 없어? 이래 봬도 ‘신명의 주인’인데.”
“…….”
빌어먹을, 내 고유 능력을 눈치챈 건가?
전투를 함께 했다지만, 능력을 알려준 적은 없는데 어떻게 알았지?
“신명 사냥꾼.”
펜리의 쐐기에 내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졌다. 바닥에 뒹구는 단검을 움켜쥐고 전투 자세를 잡았다.
시치미 떼긴 글렀다.
내 비밀을 알고 있다.
다만, 분위기를 보니 내게 뭔가 원하는 게 있는 것 같았다.
‘정말 증명을 바라는 거라면….’
성력이 꿈틀대는 것이 느껴졌다.
사실 펜리를 본 순간 성력이 조금 전부터 반응을 보였다.
사냥하겠냐고.
한 번 발동하면 원하는 때 멈출 수 있을까?
갈등은 그리 길지 않았다.
신명의 주인이 전부 적이란 보장이 없었다. 아군도 있을 터.
언제고 한 번쯤 경험해야 하는 일이었으니까.
“사냥하겠다.”
그 물음에 답한 순간,
번쩍―!
내 몸 주변으로 새하얀 아지랑이들이 뻗어 나왔다.
달빛조차 삼키며 퍼지는 눈부신 빛무리.
순간 세상이 느릿하게 움직이는 것 같았다. 감각이 날카로워지며 온몸에 힘이 들어갔다.
넘쳐흐르는 마나량.
사냥꾼 전투 모드로 주변을 둘러보자, 그녀가 은신해 있는 장소에 검은 오오라가 피어올랐다.
신명 목록을 읽어내는 사냥꾼의 눈.
개안(開眼).
[펜리 체이서 – 세계수의 그림자(암(Shadow))]
[다크 엘프족의 축복받은 몸놀림]
[진(眞) 다크 엘프의 갈퀴나무 손톱]
[그림자 일족의 주술]
‘세계수의 그림자?’
펜리의 신명이 변했다.
신명 목록을 보며 많은 생각이 들었지만, 모조리 털어버리고 지금은 단 하나만 생각했다.
사냥.
일단 증명이 먼저다.
“이제 저도 모릅니다. 알아서 감당하세요.”
“꼴값 떨고 있네. 네놈 목숨 걱정이나 해.”
내가 정확히 그녀를 노려보고 있자, 그늘진 곳 사이에서 펜리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그녀의 두 손에는 크로우가 들려 있었다.
[진(眞) 다크 엘프의 갈퀴나무 손톱]
크로우의 이름이 갈퀴나무인 모양이었다.
그녀의 고대 아티팩트가 신명 목록에 적혀 있었다. 고대 문양처럼 소환을 통해 실체화하는 무구란 뜻이었다.
후―
길게 호흡하며 활 쏘는 자세를 잡자, 그녀가 땅을 박차고 돌진해왔다.
주저하면 끝나는 전투.
다급히 뒤쪽으로 몸을 튕기며 두 눈을 부릅떴다.
오오라 주변에 떠도는 룬 문자의 향연.
그중 하나를 노려보곤 벼락처럼 시위를 놨다.
스아아아아―
빛바랜 화살이 그녀에게 빗살처럼 쏟아졌다.
화살을 본 그녀가 지그재그로 신형을 튕기며 회피 기동에 들어갔다.
하지만 내 표적은 그녀가 아닌 그녀의 신명.
신명의 화살을 피하는 건 불가능하다.
번쩍―!
“……!”
화살이 허공에서 사라지더니, 펜리의 후광에서 빛이 터져 나왔다.
멈칫한 그녀의 표정이 일순간 당혹으로 물들었다. 그것도 잠시, 옆쪽에서 드리운 그림자에 그녀는 다급히 몸을 비틀었다.
이전과 다른 무거운 움직임.
그녀가 날 죽일 듯이 노려봤다.
“…큭! 너 이 새끼! 뭔 짓을 한 거야!?”
대답 대신 난 미친 듯이 단검을 휘둘렀다.
3성 때는 봉인을 유지하는 것도 벅찼는데, 4성이 되면서 공격도 가능해졌다.
[다크 엘프족의 축복받은 몸놀림(봉인)]
신명의 화살로 목록 하나를 잠재웠다.
그녀를 상대로 그나마 내가 비벼볼 수 있는 것이 육체 능력이었다.
다크 엘프 특유의 민첩함을 봉인하고 힘으로 밀어붙이자 그녀가 밀리기 시작했다.
다만, 그것도 오래가지 못했다.
서걱―
“…시부랄. 템빨 지리네.”
단 한 번의 휘두름에 단검이 두부처럼 잘려나갔다. 바닥에 떨어진 무기들을 낚아채서 찌르고 베고 던졌는데, 연습용 무기론 일격도 버티지 못했다. 결국, 쫄려서 나중엔 붙질 못했다. 시발, 스쳐도 팔이 잘릴 것 같은데 어떻게 비벼.
미친 절삭력이었다.
“내 더럽고 치사해서……!”
피투성이가 된 채 물러났다.
아무리 펜리가 느려졌어도 공격이 날카롭기 그지없었다. 육체 재생으로 버티는 것도 한계였다.
숨을 고른 후 다른 방법을 시도하려고 하는데, 여유를 주자 뒤쪽에서 검은 손들이 튀어나와 나를 옭아맸다.
그림자 주술이었다.
엄청난 수의 손들이 내 그림자에서 끊임없이 뻗어 나와 날 압박했다.
삽시간에 내 육신은 검게 물들었고, 검은 꼬치가 되어 옴짝달싹도 하지 못했다.
지독한 압박감.
숨 쉬기가 힘들었다.
“으아아아악!”
답답함에 비명을 지르며 고대 문양을 소환했지만, 그림자 속성에겐 별다른 타격을 주지 못했다.
황금빛이 허무하게 흩어졌다.
“고작 그게 다야?”
“……!”
치사하고 더러운 년이라 욕하고 싶었지만, 입이 틀어막혀 외칠 수 없었다.
“악착같이 심장을 얻으려고 하길래, 뭔가 대단한 게 있는 줄 알았는데, 진짜 별거 없네. 고작 그것 따위에 목숨을 건 거냐? 날 개고생 시키면서?”
고작 그것 따위.
펜리의 빈정거림에 내 얼굴은 종잇장처럼 일그러졌다.
레토니칼스의 심장은 고작 그것 따위가 아니다.
소설 주인공조차 포기한 메인 스토리의 힘이란 말이다.
외치고 싶었다.
심장을 느낀 지 고작 사흘밖에 안 됐고, 시간만 주어진다면 달라질 거라고 말이다.
너 따윈 곧 씹어 먹을 수 있다고 당당하게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건 소리 없는 아우성일 뿐이다.
‘당장은 할 수 있는 게 없다.’
짙은 무력감에 두 눈을 질끈 감았을 때였다.
[쯧, 숙주가 이리 약해서야.]
“……?”
[씹어 먹는 거야 어렵지 않지. 넌 오래 걸리겠지만.]
내 속마음을 읽기라도 하듯,
[레토니칼스식(式) 전투를 보여주마.]
이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