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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에게서 살아남는 법-82화 (82/130)

82화 레토니칼스식(式) 전투

‘일단 여기까지인가?’

펜리는 팔짱을 낀 채 검은 고치처럼 제압된 녀석을 올려다봤다.

실력을 가늠했을 때 풀어주지 않는 이상, 빠져나오는 것은 힘들어 보였다.

팔짱을 풀고 몸 상태를 살폈다.

아직도 팔다리가 무겁고 감각이 둔했다.

펜리는 빛바랜 화살을 떠올렸다.

맞은 순간 온몸을 짓누르는 탈력감이 찾아왔다. 게다가 무슨 마법을 부렸는지 화살을 피할 수가 없었다.

아레나와 싸울 땐 공격하는 쪽이라 몰랐는데, 당해보니 알겠다.

‘치명적인 능력이야.’

찰나지만 4성인 녀석에게 밀렸다.

팔다리가 묶인 상태로 싸우는 기분이었다.

반대로 녀석은 점점 더 강해졌다.

만에 하나 녀석이 5성에 오른다면?

‘신명의 주인들이 제법 위협을 느끼겠어.’

신명 사냥꾼.

직접 경험해보니 확실히 대단한 능력이다.

‘대단한 능력이긴 한데….’

아쉬움이 느껴졌다.

녀석의 잠재적인 적들은 신명의 주인들이 될 확률이 높았다.

사냥의 대상 자체가 특별한 존재들이란 뜻이다.

지닌 무기는 특별하지만, 무기에 걸맞은 사냥꾼의 실력이 한참 모자랐다.

넬라는 이 녀석에 대해 확신이 있었지만, 자신은 한 세력을 책임지는 수장.

녀석과 혈맹을 맺으면 맹약처럼 돌이킬 수 없기에 확신을 얻고 싶었다.

녀석이 뭔가를 보여주길 바라는 마음이 컸는데,

‘기대가 너무 컸나?’

라웁 숲에서 보인 녀석의 활약은 그만큼 비상식적이었고 놀라웠다.

블랙마켓에서도 이 녀석의 신명을 무척 중요히 여기는 듯 보였고.

“성장 가능성만 본다면 놀랍기는 하지.”

첫 만남에서 고작 1성에 불과했던 놈이, 4성의 벽을 뚫는 데 반년도 채 걸리지 않았다.

녀석의 성장 속도는 무서울 정도다. 도와준다면 그 시간마저 더 단축할 수 있을 것이다.

종합적으로 봤을 때, 자신이 생각한 혈맹의 마지노선을 겨우 넘긴 찝찝한 합격이었다.

펜리는 짧게 한숨을 내쉬곤 움켜쥔 주먹을 천천히 풀었다.

더 놔두다간 호흡 곤란이 올 것 같아서 녀석의 압박을 풀려고 했다. 주먹에 힘을 빼자, 그림자 주술의 압박도 약해졌다.

그런데,

“……응?”

꿀렁―!

검은 고치가 그녀의 눈앞에서 출렁대더니, 앞쪽으로 쭉― 늘어났다.

코앞까지 늘어난 검은 그림자.

당장에라도 뚫고 나오려는 움직임이다.

‘아직도 여력이 있나?’

펜리는 흥미로운 표정으로 펴던 주먹을 반대로 움켜쥐었다.

압박 수위를 재차 높이려는 의도였다.

얼마나 버티나…….

“큭……!”

압박이 강제로 풀린다.

움켜쥐던 주먹이 마비된 듯 경직되더니 서서히 펴지기 시작했다.

자의가 아닌 녀석에 의해 벌어지는 현상.

주술을 밀어내는 엄청난 반탄력이었다.

손가락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이 마치 그림자들이 비명을 지르는 것처럼 보였다. 결국, 펜리는 이를 악문 채 몸을 튕겼다.

그 자리 위로,

콰자자작―!

고치를 찢고 주먹이 사납게 튀어나왔다.

콰아앙―!

주먹질에 바닥이 움푹 꺼지고 지반이 갈라지며 무너져 내렸다.

마치 폭탄이 터진 것 같았다.

그 흩어지는 돌조각 사이로,

“끄아아아악!”

주술을 찢고 나온 녀석이 웅크린 채 비명을 터트렸다. 내지른 어깨를 움켜잡고 있었는데, 얼굴이 고통으로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부러졌다.’

어깨뼈가 뒤틀린 모습.

조금 전 주먹질이 얼마나 거셌는지, 어깨가 버티지 못한 것 같았다. 그것도 잠시, 펜리는 헛웃음을 흘리며 전투 자세를 잡았다.

“인간이 아니라 트롤 새끼였네.”

뒤틀린 어깨를 바로잡고 팔을 크게 돌리는 녀석. 재생력이 이미 인간의 범주를 벗어났다.

녀석과 눈을 마주쳤다.

붉게 충혈된 눈.

혼잣말로 뭐라 중얼거리는데 다행히 초점엔 생기가 있었다. 제정신인 듯 보이는데, 분위기가 달라졌다.

녀석이 발을 굴렀다.

쿵―

“……!”

신형이 사라졌다.

아니, 미친 듯한 속도로 돌진해왔다. 두 눈을 깜빡인 순간 등 뒤로 녀석이 솟구치듯 나타났다.

빠르다.

둔해진 감각에 반응이 늦었지만, 그래도 펜리가 더 빨랐다.

날카로운 크로우로 녀석의 허벅지를 꿰뚫고 아킬레스건을 무참히 베어냈다.

발을 디딘 순간 꼬꾸라지는 치명적인 상처.

그런데,

콰아아앙!

“…큭!”

거센 발길질에 펜리의 신형이 쭉 날아갔다. 주저앉은 그녀의 두 팔이 마비된 듯 덜덜 떨렸다. 막았는데도 이 정도라고?

앞을 바라보니, 녀석이 절뚝거리며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발목이 뒤틀렸고 정강이뼈가 피부를 뚫고 튀어나왔다. 구멍 난 허벅지에선 핏물이 줄줄 새어 나왔다.

그런데도 걸어온다.

아니, 서서히 속도를 높이고 있었다.

“…이 미친 변태 새끼가.”

욕설과 달리 펜리는 질린 듯한 표정을 지었다.

한 방 한 방이 위협적이다.

방어 따윈 없었다.

뼈를 내주는 일격 필살의 전투 스타일.

다가오는 녀석에게 처음으로 압박감이란 감정을 느꼈다.

가볍게 상대할 수 없는 상대.

더 하다간 녀석을 정말 죽일 것 같았다.

어찌 제압할지 고민하는 그때,

쿵―

“…….”

성큼 걸어오던 녀석이 돌연 바닥에 머리를 박고 쓰러졌다.

트롤 같은 재생력을 경험했기 때문일까.

펜리는 무기를 거두고 녀석의 머리에 돌멩이를 던졌다.

퍽―

좀 세게 던졌는지 뒤통수가 깨지며 피가 주르륵 흘러나왔다.

그럼에도 미동이 없다.

의식을 잃은 건가?

펜리는 그림자 주술을 사용해 녀석을 자신 앞으로 조심스레 옮겼다.

기절한 녀석이 보인다.

그를 내려다보는 펜리의 표정은 조금 전과 달랐다.

묘한 흥분을 띤 미소.

‘조금 전 그 힘은 뭐였지?’

눈앞의 아서에게 뭔가를 발견한 눈빛이었다.

* * *

“…커억!”

거친 호흡과 함께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주변을 둘러보니 푸른 장미 VIP룸이었다.

하, 또냐.

지독한 악몽을 꾸었다.

태산(泰山)처럼 큰 벌레 새끼한테 짓눌려 숨이 막혀 죽는 꿈.

저번 악몽에는 학살자가 나오더니, 이젠 붐(Boom)을 닮은 끔찍한 벌레 새끼가 등장했다.

식은땀으로 흠뻑 젖은 채 몸을 살폈다.

상처 하나 없는 깨끗한 육신.

어깨뼈가 뒤틀리고, 다리가 반병신 됐던 결투가 꿈처럼 느껴졌다.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창가로 걸어갔다.

커튼을 치우고 창문을 열자, 내리쬐는 햇살에 눈살이 찌푸려졌다.

눈에 고통이 느껴질 정도다.

얼마나 기절해 있었던 거지?

설마 이번에도 석 달은 아니겠지.

펜리 년이 설마 나를 크로우로 담글지는 몰랐다.

보통 사람이었다면 죽었다고.

펜리를 향해 욕설을 쏟아내곤 눈에 힘을 팍 줬다.

실눈을 뜬 채 수많은 창고에서 내가 쓰던 개인 훈련장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훈련장 바닥은 뭔가 터진 것처럼 내려앉아 있었고, 그 위로 인부들이 무너진 지붕을 수리하는 모습이 눈에 담겼다.

펜리와 사투를 벌인 전투 흔적이 고스란히 보이자, 탄식을 내뱉었다.

“역시 꿈일 리가 없지.”

전투 흔적이 지금껏 남아 있는 것을 보니 기절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듯 보였다.

“끔찍한 고통이었어. 꿈이었으면 바로 깼을 거야.”

무의식적으로 펼친 새로운 전투법.

몸 근육과 신경 다발이 갈가리 찢기고 뜯기는 지독한 고통이었다.

다시 경험해보고 싶지 않은 통증.

그 통증이 떠오르자, 통증을 준 존재를 상기시켰다.

[숙주가 이리 약해서야.]

목소리의 강렬했던 여운이 지금도 머릿속에 맴돌았다.

누군가가 내게 보낸 마법 메시지 따위가 아니었다.

[레토니칼스식(式) 전투를 보여주마.]

레토니칼스.

이벤트의 당사자인 도미닉 후아튼조차 파악하지 못했던 심장의 이름을 알고 있고, 그 이름을 입에 담을 수 있는 존재.

그리고 날 ‘숙주’라고 불렀다.

내 손은 조심스레 가슴에 닿았다.

범인은 심장밖에 없었다.

설마, 대화도 가능했던 거야?

잠시 고민하던 내 입술이 달싹거렸다.

“……심장아?”

시발, 첫 만남에 내뱉은 인사말치고 진짜 없어 보였다. 소개팅을 처음 접해본 어수룩한 소개팅남이 된 기분이랄까.

목소리의 존재는 소설 속에서 다룬 적이 없던 만큼 크게 긴장한 탓도 있었다.

잠식이 아닌 목소리로 반응했다.

이건 큰 변수다.

하지만 그 의문은 바로 풀 수 없었다. 수차례 말을 걸어봐도 묵묵부답.

반응이 없었다.

졸지에 허공에 혼잣말하는 미친놈이 된 기분이다.

“미, 미쳤어요?”

실제로 넬라가 내 모습을 지켜보곤 날 미친놈 취급했다.

창가에서 알몸을 드러낸 채 허공에 혼잣말을 중얼거리고 있으니, 그리 보일 만했다.

그나저나 언제 또 문을 열고 들어온 거야?

그리고,

“왜 자꾸 제 옷을 벗겨놓는 겁니까? 알몸 페티시라도 있으세요?”

“피투성이 상태로 오면 어디가 상처인지 알 수가 없잖아요. 상처를 살피려고 그런 거예요.”

“보다시피 깨끗한데요?”

“사흘 전에는 아니었어요.”

“사흘? 그렇게 오래 잠들어 있었습니까?”

“잠들어요? 당신 죽을 뻔했어요.”

“…죽어요? 제가?”

“네.”

죽을 뻔했다니 이해하기 힘들었다.

펜리에게 펼쳤던 레토니칼스식 전투법.

이 전투의 기억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었다. 타오르는 파괴 본능에 몸을 맡기긴 했지만, 강제적이진 않았다.

내 허락이 무의식적으로 깔린 움직임이었는데, 더럽게 아프긴 해도 상처 재생이 바로바로 진행되는 것을 느꼈다.

즉, 상처가 심해서 죽을 일은 없었다는 거다.

“마나 고갈?”

“고갈 수준이 아니에요. 짜낼 것도 없는 말라비틀어진 장작처럼 보였으니까.”

심한 고뿔을 앓는 것처럼 보였다는데, 펜리도 처음 보는 현상이라 무척 당황했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마지막에 기억이 절단된 것처럼 끊겼다.

마나 고갈로 의식이 날아간 건가?

“그럼, 전 어떻게 살아난 겁니까?”

“시간이요.”

“시간?”

“하루 정도 지나니까, 얼굴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어요. 마스터가 남긴 말을 지금 전달할게요. 그 힘, 함부로 쓰지 마세요. 폐인으로 전락하고 싶지 않다면.”

펜리가 경고한 힘이 무엇인지 안다.

뼈를 내주고 목숨을 취하는 일격 필살의 공격 방식.

유지하는 데만 마나 고갈과 근육이 녹아내리는 고통을 받는다.

이 전투법은 확실히 위험하다.

나도 이를 인식했는데, 목소리가 마지막에 남긴 메시지가 있었다.

[본능이 저항하는 한계를 넘으면 새로운 세상이 열리지.]

‘본능이 저항하는 한계…?’

무슨 뜻인지 감이 안 왔다.

죽을 날짜를 받아놓은 노인들만 한다는 선문답이다.

심장을 빙자한 꼰대 새끼면 어떡하지?

다만, 나를 해코지할 존재는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다.

전투를 펼치며 본능에 따라 움직이는 일시적 동화(同和)를 경험했는데, 목소리의 말투나 분위기에는 살기(殺氣)가 없었다.

잠식의 의지 대신 나른함과 무료함을 느꼈다.

권태에 찌든 듯한 감정.

수백 수천의 세월 동안 닳고 닳은 메마른 절벽과 마주한 느낌이었다. 그 권태의 감정 틈새에는 나를 향한 작은 관심도 있었다.

초탈한 것 같은 존재가 그토록 살벌하고 무식한 전투를 고집하는 이유가 뭘까.

궁금했고, 대화하고 싶었다.

하지만 문을 두드려도 상대는 반응이 없다.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았다.

“좀 드세요.”

“오, 팬케이크! 역시 센스가 남다르시네.”

“좋아하시는 것 같아서요. 이젠 못 먹겠지만.”

“…네? 왜요?”

“출입 금지가 떨어졌거든요.”

“…넬라 님이요?”

“아니, 그쪽이요.”

마스터가 내게 출입 금지령을 내렸단다.

가게 입구만 다가가도 이제 검은 장미들이 저지한다나?

줬다 뺏는 게 더 잔인한 짓임을 펜리 년은 모르는 건가?

불만이 있으면 직접 찾아오라고 하는데, 어떤 해코지를 당하려고 거길 찾아가.

결국, 돈 주고 먹으라는 얘기였다.

불쌍한 표정으로 넬라에게 푸념해봤지만, 돌아온 건 알몸을 가릴 옷가지 폭탄이었다.

화려한 옷들이 머리 위로 후드득 떨어졌다.

귀족들이 입을 법한 귀공자 코스프레 옷 같았다.

멍하니 옷가지에 파묻혀 두 눈을 끔뻑이는데 종업원들이 후다닥 다가와 옷을 강제로 입히기 시작했다.

…뭐야? 갑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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