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당에게서 살아남는 법-83화 (83/130)

83화 그자에게 황금패를 선물했다

“아니, 그 옷 말고 저 옷으로 하죠.”

“…….”

“너무 튀어요. 좀 더 심플한 걸로. 아, 그게 좋겠네요.”

넬라의 말 한마디에 종업원들의 손이 부산스럽게 움직였다.

삽시간에 옷이 바뀌고, 머리 스타일이 변했다. 전문 살롱이라서 그런가, 종업원들의 손놀림이 범상치 않았다.

졸지에 넬라의 인형 놀이 상대로 전락한 기분마저 들었다.

“성주인 도르네프 님이 당신을 호출했어요. 바깥에 마차를 준비했으니 서두르세요.”

“…저 방금 깨어난 사람인데요?”

“마스터가 당신이 깨어나면 바로 보내라고 했거든요.”

“펜리 녀… 아니 펜리 님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영주성이요.”

펜리가 영주성에는 무슨 일이지?

눈빛으로 물음을 던졌는데, 넬라는 내 옷매무새를 살피느라 눈빛 따윈 무시하고 있었다.

잠시 후, 그녀는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잘 빠졌다.

특히 살짝 화난 것 같은 저 휘어진 눈매와 백금색 눈동자. 귀공자처럼 꾸미니 묘하게 매력적이었다.

피부도 웬만한 엘프보다 좋았는데, 3층 바텐더 자리에 세워놓으면 매출에 크게 이바지할 것 같았다.

그래서 더욱 아쉬웠다.

13000골드.

외상을 없애는 게 아니었는데 말이다.

‘무서워. 이 여자야.’

넬라의 눈빛이 심상치 않아 앞섶을 꽉 여미고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종업원들이 물러나자, 그녀가 입맛을 다시곤 뒤늦게 이유를 말해줬다.

“혈맹에는 특별한 의식이 필요해요. 당신도 예외가 될 순 없죠.”

“혈맹 의식을 영주성에서 한단 말입니까?”

“참고로 베네타는 검은 장미와 이미 혈맹 관계예요. 당신을 혈맹으로 받아들이는 데 도르네프 님의 동의가 필요하다는 뜻이죠. 동의가 떨어지면 영주성에서 함께 의식을 치를 거예요.”

“그 동의라는 거… 될까요?”

“마스터가 갔으니까. 지켜봐야죠.”

펜리는 도르네프를 설득하러 간 것 같았다.

웬 인간 하나를 혈맹으로 받아들이는 데, 베네타가 과연 허락할지 모르겠다.

내가 도르네프의 반려인 샤르바딘의 은인이긴 하지만 이종족의 혈맹은 세력 간의 운명을 결정하는 중요한 행사다.

베네타와 검은 장미 그리고 나.

세력 가치를 봤을 땐 굴지의 대기업 총수들이 동네 슈퍼 주인에게 협력하자고 손을 내미는 것과 같았다.

인간들의 혈맹이라면 백이면 백, 동네 슈퍼가 잡아먹히겠지만 이종족의 경우엔 특별했다.

하나의 세력으로 인정받는다.

다수결 시에 결정적인 한 표를 행사할 수 있다는 의미였다.

혈맹의 투표수는 셋.

그중 내 표가 캐스팅보트가 될 확률이 높았다.

전에 말한 대로 내겐 더럽게 유리한, 이종족들에겐 더없이 불공평한 거래였다.

“왜 이렇게까지 하는 겁니까?”

“마스터가 설명 안 했나요?”

설명은 무슨.

압박 취조 후에 두들겨 맞은 기억밖에 없구만.

“곧 알게 될 거예요. 하나만 기억해요. 저흰 검은 장미예요.”

검은 장미.

돈에 환장하는 마스터 펜리가 수장으로 있는 집단.

절대 손해 보는 장사는 안 한다는 의미였다.

‘베네타의 가신들이 날 죽이려 들면 어떡하지?’

도르네프는 군주다.

군주 밑에는 가신들이 존재하고, 그들은 영지의 수많은 이권에 개입한다.

가신들에게 내 존재는 굴러온 돌일 것이다.

게다가 인간.

불신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검은 장미의 경우엔 펜리가 꽉 잡고 있어서 분란이 없었지만, 베네타의 경우엔 다를 것이다.

진짜 날 죽이려 들면 답이 없다.

난 세력 하나 없는 외톨이였으니까.

“왜 눈만 뜨면 고난이 시작되는 것일까.”

얼마 전엔 펜리 년에게 죽을 뻔했는데, 오늘은 또 난쟁이 새끼들의 망치질에 대가리가 깨질 것 같았다.

정말 눈을 감아야 마음의 안식이 찾아오려나?

뒈져야 편해지는 세상이라니.

마차에 올라탄 나는 한숨을 내쉬며 창가에 기대었다.

하늘이 참으로 맑다.

하지만 오늘도 꽃길보단 가시밭인 것 같았다.

쿵딱― 쿵딱― 쿵딱―

창고를 수리하는 요란한 소리가 내 마음을 더 심란하게 만들었다.

심란함을 잊고자 품에서 두 장의 봉투를 꺼냈다.

하나는 흰색, 다른 하나는 붉은색이었다.

넬라가 마차에 타기 전에 배웅하며 건네준 것이었다.

[원하는 정보는 여기에 다 있어요.]

흰 봉투에는 석 달 동안 벌어진 토바른의 주요 사건이, 붉은 봉투에는 나에 대한 중요한 정보가 담겨 있다고 했다.

[붉은 서신은 마차 안에서 읽고 바로 처리하세요. 절대 타인의 손에 들어가면 안 돼요.]

이유를 물으니, 넬라도 고개를 가로저었다.

붉은 봉투는 마스터의 비밀 서신.

넬라도 허락 없이 읽을 수 없다고 했다. 두어 차례 신신당부를 한 것을 보니, 펜리 년이 단단히 경고하고 간 모양이었다.

“음, 뭐부터 읽을까.”

두 서신 모두 궁금했기에 작은 갈등이 생겼다.

고민도 잠시, 난 붉은 봉투부터 뜯었다.

이 붉은 색감을 보라.

느낌부터가 위험해 보였다.

얼른 읽고 처리해야 마음이 놓일 것 같았다.

덜컹―

마차는 어느새 시내를 벗어나 중앙대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흔들리는 마차 안에서 난 붉은 봉투 안에 든 서신을 활짝 폈다.

내용은 한눈에 담겼다.

단 네 줄.

그런데 그 내용이 가히 충격적이다.

[펜리 체이서 – 세계수의 그림자(암(Shadow))]

[도르네프 가더 – 토바른의 방패(냉기(冷氣))]

[렌구아 필드 – 블러드 오크 샤먼의 후인(광기(狂氣))]

신명의 주인들이 적혀 있었다.

최근에 각성한 주인들.

전부 알고 있는 익숙한 이름들이었다.

그리고,

[이름 미상(未詳) ― 신명 사냥꾼]

“…이런 시발.”

마지막 줄에선 마음속에서 우러난 욕설이 흘러나왔다.

마차가 흔들려서 잘못 본 건가.

잠시 맑은 하늘을 조용히 올려다보곤 서신을 다시 응시했다.

아니, 노려봤다.

내 눈은 틀리지 않았다.

신명 사냥꾼.

내겐 너무나도 익숙한 신명이었다.

베일에 감춰진 마지막 신명의 주인이 나라고?

사흘 전 펜리가 내 앞에서 신명 사냥꾼을 언급했던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

미상(未詳)이라 적고 이름을 적지 않은 건 펜리의 뜻일까. 아님, 정보의 부재일까.

이건 중요한 문제였다.

만약 신명과 함께 이름까지 밝혀진 상태라면,

‘최악의 시나리오인데.’

C용병 알로 활동한 기간이 대부분이라 내 진짜 이름을 아는 이는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다.

하지만 신명이 밝혀졌으니 신명의 주인들이 가만히 있을 리 없다.

밝혀지는 건 시간문제였다.

정보의 부재이길 기도해야 하나?

‘꽃길은 얼어 죽을….’

가시밭길이 삼만 리나 펼쳐질 악몽 퍼레이드가 그려졌다.

욕설을 내뱉으며 서신을 갈가리 찢었다. 빈 부분은 창밖에 버리고, 신명이 적힌 부분은 입 안으로 삼켰다.

종이 때문인지 걱정 때문인지 입맛이 썼다.

순간 궁금증이 올라왔다.

‘이름이 밝혀졌다면 아서 클레이튼일까? 아니면 내 진짜 이름일까?’

이름을 알 수 있다면 세계가 날 바라보는 시선을 알 수 있으리라.

뭐가 됐든 무서운 일이다.

이 세계가 나를 주시하기 시작했다는 뜻이니까.

머리가 복잡했지만, 지금은 고민할 때가 아니었다.

변한 미래의 분위기를 읽으려면 정보가 필요했다. 다행히 내겐 정보가 있었다.

짧게 심호흡을 하며 흰 봉투에서 서신을 꺼냈다. 두툼했는데, 석 달의 정보를 모아놔서인 것 같았다.

서신을 다급히 넘기며 이름 하나를 찾았다.

[블라이어 성주, 카멜 블레이저의 동태.]

“…….”

난 가장 필요한 정보부터 읽어 내려갔다.

드르륵― 드르륵―

조용히 바퀴 굴러가는 소리만 들린다.

성안으로 들어온 모양.

마차가 멈출 때까지 난 죽은 듯이 서신을 읽는 것에 집중했다. 종이 넘어가는 소리만 조용히 들려오고, 사락거리는 종잇장 소리가 길어질수록 난 확신했다.

‘살길은 꼭 열어주네. 이 빌어먹을 세계는.’

검은 장미와 베네타를 주축으로 한 이종의 혈맹.

살아남으려면 이 혈맹에 무조건 들어가야 했다. 날 보호해줄 둥지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 * *

영주성 1층에 자리한 대광장.

거대한 원형 돔이 떠오르는 웅장한 공간에는 수많은 이종족들이 한데 모여 갑론을박을 펼치고 있었다.

고성과 성토가 오가는 무척 소란스러운 장면이었다.

“혈맹은 절대 불가합니다!”

“인간 놈들은 뒤통수치는 게 본능인 것들입니다. 믿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는 다릅니다. 베네타에선 구원의 성자로 불리고 있습니다. 라웁 숲에서 구함을 받은 이종족들이 상당합니다.”

“이종족들을 구한 것은 도르네프 님과 기사단입니다. 고작 한 명의 인간이 뭘 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부풀려진 이야기입니다!”

“그자의 가치는 검은 장미의 수장 펜리 체이서가 보증했습니다. 지금껏 그녀가 먼저 나선 적이 있었습니까?”

“그녀의 영향력은 무시할 순 없지만, 베네타의 운명을 그녀의 한마디에 맡길 순 없습니다. 베네타는 검은 장미와 다릅니다.”

중앙 홀을 중심으로 수백의 이종족들이 한데 모여 설전을 벌였다.

베네타에서 나름 영향력을 행사하는 이들이었다.

크게 기사단, 대장장이 연합, 상인들로 구성됐는데, 세 파벌의 중심에는 원로 드워프들이 대표로 나와 있었다.

그중 인간을 옹호하는 드워프는 다름 아닌 기사 단장 나토네.

그는 기사단의 대표로 혈맹 찬성에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나토네는 도미닉 연구소에서 그 인간을 직접 보고 경험한 드워프였다. 누구라도 그 황금빛 기적을 눈앞에서 본다면 생각이 바뀔 것이라 확신했다.

하지만 인간들에게 잦은 피해를 본 상인이나 대장장이들은 달랐다.

인간에 대한 불신이 바탕에 깔린 탓에 반대부터 하고 나섰다.

혈맹이 주는 의미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원로 드워프 중 하나가 도르네프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주군의 생각을 알고 싶습니다.”

원로의 물음에 대광장의 시선이 상석에 앉은 도르네프에게 쏠렸다.

도르네프를 바라보는 시선에는 부러움과 경외가 담겨 있었다.

펜리가 가져온 소식 때문이었다.

베네타에 신명의 주인이 탄생했다.

토바른의 방패란 신명을 얻은 도르네프는 이전보다 더욱 큰 기대를 받으며 이종족들의 신뢰를 받게 되었다.

도르네프는 원로의 질문에 눈썹을 찡그렸다.

원로들은 자신의 생각을 이미 알고 있다.

검은 장미의 제안으로 이 회의가 열렸지만, 이를 수락한 것이 자신이기 때문이다.

원로들의 생각은 뻔했다.

직접 언급하고 책임을 지든가. 회의를 파하라는 것이었다.

‘드워프면 단순한 맛도 있어야지. 하여튼 나이를 먹으면 전부 너구리가 된다니까.’

도르네프는 입맛을 다시곤 펜리를 바라봤다.

펜리는 대광장 가장 앞쪽에서 다리를 꼰 채 발목을 까딱거리고 있었는데, 시선을 마주치자 눈을 돌렸다.

모르쇠로 일관하는 뻔뻔함에 도르네프의 수염이 부르르 떨렸다.

‘빌어먹을 암고양이, 귀찮은 걸 알아 와서.’

샤르바딘과 단꿈에 취한 것처럼 행복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데, 불현듯 찾아와 재 가루를 팍팍 뿌렸다.

다만, 귀찮아도 펜리가 전한 이야기는 무시하기엔 사안이 무척 중했다.

혈맹으로 이어진 두 개의 신명.

‘세계수의 그림자’와 ‘토바른의 방패’가 만에 하나 넬라의 예언처럼 흘러간다면 이는 곧 토바른 내에 큰 전쟁이 벌어진다는 뜻이었다.

도르네프는 이 사달을 만든 한 인간을 떠올렸다.

‘아서 클레이튼’

도르네프는 아서에 대해 완벽히는 모르지만 한 가지는 잘 알고 있다.

단 한 명의 인간이 미래를 어떻게 바꾸는지 말이다.

모두 라웁 숲의 일로 자신을 칭송하지만, 도르네프와 나토네, 그곳에 있던 기사들은 잘 안다.

그 인간이 아니었다면 자신들의 운명이 어떻게 흘러갔을지 말이다.

펜리는 그를 ‘길잡이’로 표현했다.

길잡이.

표현이 정확했다.

그는 라웁 숲에서도 완벽한 길잡이였다.

그래서 결심은 어렵지 않았다.

“그자에게 황금패를 선물했다.”

그를 혈맹으로 받아들인다.

도르네프는 이 한마디로 자신의 의견을 함축했다. 황금패는 베네타의 귀한 손님을 의미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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