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새로운 이름이 필요하다
위엄 어린 도르네프의 당찬 선언.
베네타의 군주가 혈맹 찬성에 손을 들었다.
보통 군주가 뜻을 내비치면 그 휘하 가신들은 그 뜻을 받들거나, 승복하는 모습을 보이지만, 아쉽게도 이곳은 이종족의 도시 베네타였다.
이종족들의 권위는 수직보단 수평적인 성향이 강했다.
수평, 즉 만만하단 소리였다.
“…황금패까지?!”
“들었지? 신명의 주인이 되더니 머리가 이상해진 게 틀림없어.”
“토바른의 방패? 이 정도면 그 인간의 방패 아니야?”
쑥덕대는 원로들의 대화에 도르네프의 수염이 부르르 떨었다. 다른 이라면 모를까, 오래 산 드워프인 원로들에겐 군주의 위엄이 통하지 않았다.
한 다리 한 다리 건너면 모두 혈족이고, 가족이니 당연했다.
게다가, 무려 혈맹이다.
원로들의 반응이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었다.
“군주, 그자는 베네타를 아우를 정도로 강합니까?”
“아니오.”
“검은 장미처럼 세력이 있습니까?”
“아니….”
“돈은 많습니까?”
“…….”
“솔직히 말해주십시오. 그자에게 약점 잡혔습니까?”
혈맹도 어느 정도 급이 맞아야 수긍이 가는데 달랑 인간 한 명이라니, 아무리 군주의 뜻이라도 거부감을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그는 특별합니다!”
보다 못한 단장 나토네가 앞으로 나섰다.
“자꾸 그, 그, 하는데, 이름도 모르면서 왜 옹호하는 거요? 군주에게 뒷돈이라도 받은 거요?”
“뒤, 뒷돈!? 기사를 모욕하지 마십시오!”
“그럼, 그 잘난 이름이나 한번 들어봅시다! 그자의 이름이 뭐요!?”
“그, 그건!”
다시 도르네프가 나섰다.
“그자의 이름은 혈맹을 맺으면 알려주겠다!”
“이름에 무슨 황금이라도 발라놓은 겁니까? 절대 안 됩니다!”
다시 논쟁에 불이 붙었다.
한 인간을 두고 찬성과 반대가 팽팽히 맞섰다. 드워프들의 목청이 좀 크던가, 도르네프까지 가세하니 가히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펜리는 이마를 잡곤 한숨을 내쉬었다.
“예상은 했지만, 정말 엉망진창이네.”
“…으, 그러게요.”
펜리 곁에 자리 잡은 샤르바딘은 쩌렁쩌렁 울리는 소음에 귀를 바짝 접었다. 오래 있었더니 머리까지 울렸다.
그러다 가끔 도르네프와 눈이 마주치면 손가락 하트를 날렸는데, 하트를 받은 도르네프는 헤벌쭉하곤 기세를 올려 혈맹을 밀어붙였다.
확실히 샤르바딘을 데려온 건 잘한 선택이었다.
“이 분위기면 혈맹이 무산되는 거 아닌가요?”
“혈맹은 이뤄질 거야.”
“어떻게 확신하죠?”
“넬라가 확신했거든. 운명이 녀석을 이리로 이끈다나?”
“뜬구름 잡는 소리네요. 차라리 혈맹에 그분을 넣으려는 진짜 이유를 알려주는 게 더 빠를 것 같은데.”
“아직은 안돼.”
“그럼 어쩔 수 없죠. 근데 하나만 물어봐도 돼요?”
“안돼. 물어보지 마.”
“은인께 건넨 다크로즈가 왜 펜리님께 있는 거죠?”
무시하고 물어보는 걸 보니, 어지간히 궁금했나 보다. 펜리는 입맛을 다시곤 금발을 쓸어내렸다. 흑요석 머리 장신구가 그녀의 금발을 더욱 화려하게 빛냈다.
“강탈이라면…….”
“아직은 아니거든? 녀석에게 물어봐.”
“언제쯤 오시는데요?”
“깨어나면 넬라가 성으로 보낼 거야.”
“빨리 뵙고 싶긴 한데, 오늘은 안 왔으면 좋겠네요.”
“그렇지?”
“네. 분위기가 살벌해요.”
군주 도르네프마저 성토하며 인간의 편을 들기 시작하자, 이 논쟁의 시발점인 인간에게 반대파 드워프들의 분노가 쏟아졌다.
대장장이들이 망치를 휘두르며 저주를 퍼붓는데, 눈앞에 인간이 나타나면 용암 화로로 끌고 가 담금질을 할 기세였다.
상단을 맡던 드워프들도 노예로 팔아버릴 거라고 외치고 있을 때였다.
“이, 인간이 도착했습니다!!!!”
바깥을 지키던 경비병이 다급히 들어와 인간의 방문을 알렸다.
“…….”
광장이 순간 침묵으로 가라앉았다. 수백의 눈동자가 번뜩이며 경비병에게 쏠리자, 그는 딸꾹질하며 다급히 뒤를 가리켰다.
시선이 스윽 넘어가더니 드워프들의 눈빛에 불꽃이 튀기 시작했다.
이 사건의 주인공.
멀끔하게 차려입은 인간 하나가 두 눈을 멀뚱히 뜬 채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아서 클레이튼.
녀석이다.
펜리는 녀석의 등장에 헛웃음을 흘렸다.
“타이밍 한 번 죽이네.”
녀석이 자신을 발견하곤 손을 반갑게 흔들자, 펜리는 슬쩍 시선을 돌렸다. 그건 샤르바딘도 마찬가지였다.
* * *
마차가 영주성 입구에 도착했을 때, 마부가 날 ‘베네타의 귀한 손님’이라 소개했다. 그때부터 경비들이 호위처럼 곁에 붙었고, 검문 하나 없이 이곳까지 안내되었다.
날 안내하던 경비병들의 태도는 예상외로 호의적이었다.
날 보며 기적을 부르는 사내라든가, 구원의 성자라고 수군댔는데, 이유를 물어보니 라웁 숲 사건으로 제법 유명세를 탄 것 같았다.
TV는커녕 미디어나 흔한 댓글에도 언급된 적 없던 나다.
기분이 좋아야 정상인데, 오히려 난 유명세에 식겁했다. 설마 이름이 알려진 건가 걱정했는데, 이름을 묻는 경비병들이 많아 그건 아닌 것 같았다.
나를 보며 인사를 건네는 시종들이 보인다.
나를 맞이하는 성 분위기가 괜찮았다.
그래서 혈맹에 관한 얘기가 의외로 잘 풀렸다고 생각했는데,
“분위기가 왜 이래?”
광장에 들어선 순간 분위기가 급변했다.
날 노려보는 눈빛들이 살벌했는데, 세렝게티 임팔라가 사자 우리 안에 갇힌 기분이었다.
먹잇감을 노려보는 맹수들이 따로 없다. 입 한 번 잘못 놀렸다간 단체로 잡아먹을 분위기.
펜리를 발견하고 손을 흔들며 도움을 청했지만, 무시당했다.
망할 년.
‘불렀으면 책임을 지라고!’
멱살을 움켜쥐고 떽떽 소리치고 싶은데 주변 분위기가 워낙 살벌해서 눈치가 보였다.
어색하게 걷다 보니 도르네프 앞이었다.
갑주가 아닌 평상복을 입은 도르네프는 수염이 긴 인상 좋은 땅딸보 아저씨였다. 근육만 본다면 쇠질 3대 500은 우습게 칠 것 같았지만 말이다.
막상 앞에 서니 할 말이 없었다.
귀띔도 없이 이곳으로 끌려왔다.
뭘 어쩌라는 거야?
“베네타의 귀한 손님이 도착했구만. 소식은 들었네. 몸은 좀 괜찮나?”
“네. 신경 써주신 덕분에 다 나았습니다.”
“몸조리가 필요할 텐데, 이리 불러서 미안하네. 중요한 사안이니 이해해주게.”
“당연한 말씀입니다.”
눈치껏 빈말이 오갔다.
도르네프는 내게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다. 단장 나토네도 안부를 물으며 호감을 드러냈다.
문제는 저 반대편 난쟁이들이었다.
쌍심지를 켜며 날 사납게 노려보는데, 작은 고추가 맵다고. 드워프 중에서도 유난히 매워 보이는 놈들이었다.
“자네가 혈맹을 제안한 인간인가?”
“제안? 제가요?”
“이름이 뭐지? 혈맹을 제안했으면 대외적으로 소개가 필요한 법인데, 이름을 아는 이가 없어. 인간들은 원래 이리 무례한 건가?”
“아니, 그게…….”
“핑계라도 대보게.”
“오늘 의식을 차렸습니다.”
“핑곗거리가 그것뿐인가?”
아니, 진짜라니까?
이 난쟁이 새끼들이 심보가 처음부터 틀려먹었다. 애초에 적개심을 깔고 가는 분위기인데.
원로 중 한 명이 이름을 걸고 넘어지자, 주변에서 신분을 밝히라는 성토가 쏟아졌다.
첫 질문부터 골치가 아파 왔다.
평소라면 고민 없이 이름을 외쳤겠지만, 서신을 읽은 뒤로 조심스러웠다.
난 펜리를 바라봤다.
펜리가 고개를 살짝 젓고는 입술을 작게 달싹였다.
[서신]
두 글자를 끝으로 그녀는 입을 닫았다. 보는 눈이 워낙 많아 조심하는 모습이었다.
사실 펜리를 먼저 만나 말을 맞추고 이 자리에 섰어야 했다.
타이밍이 구렸다고 해야 하나? 하필 모두가 모인 회의장에 끌려왔다.
‘서신이라….’
그래도 펜리와 함께 구른 짬밥이 있다 보니 그녀가 뜻하는 바를 알 것 같았다.
서신 어디에도 내 이름은 없었다.
도르네프도 이름을 언급하지 않았다. 그리고 날 안내했던 경비들도, 광장에 모인 이들도 내 이름을 모른다.
그 뜻은 하나로 귀결됐다.
‘이름을 알려주면 안 된다.’
판단은 빨랐고, 곧장 행동으로 이어졌다. 난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며 목소리를 높였다.
“내 이름은……!”
내 이름이 어지간히 궁금했나 보다.
쥐죽은 듯이 조용했다.
수백의 눈동자가 재촉하듯 날 노려봤지만, 난 슬쩍 미소를 지으며 여유로운 모습을 보여줬다.
긴장이 전혀 안 된다.
라웁 숲의 전투가 날 성장시킨 것 같았다. 살기(殺氣)로 가득 찬 키메라 수천 마리에게 둘러싸여 봐라. 웬만한 정신력으로는 절대 못 버틴다.
당연히 저들의 눈빛 따윈 간지럽게 느껴졌다.
“제 이름은 알렉스입니다.”
“…뭐? 알렉스?”
“들어본 적 없는 이름인데?”
구원의 성자로 작게나마 명성을 얻고 있으며 군주인 도르네프가 혈맹으로 밀고 있는 인물.
기대한 것과 달리 별것 없자, 광장에 모인 이들은 김빠진 표정을 지었다.
“귀족인가?”
혹시나 하는 원로의 물음에 난 품에서 패 하나를 꺼냈다.
반짝이는 금패.
돈이 될 것 같아서 라웁 숲에서 쭉 가방에 넣어뒀던 건데. 이런 용도로 쓰일 줄은 예상치 못했다.
당분간 내 새로운 신분을 증명해줄 금패는 바로,
“전 마르샤 가(家)의 후계자입니다.”
용아의 망토를 노린 학살자에게 몰락당한 대(大)상인 마르샤 가문의 인장이었다.
학살자의 근황을 알게 된 직후 새로운 신분이 필요함을 느꼈다.
알이란 가명으로 활동했던 C급 용병패가 있었지만 더는 쓸 수 없었다.
‘블라이어 수배자 명단에 올랐거든.’
한 달 전에 카멜이 토바른 전역에 거액의 수배를 때렸는데, 그 수배 명단에 C급 용병 알이 포함되어 있었다.
C급 용병패는 카멜이 만들어 준 것이었다. 그가 내 흔적을 쫓고 있다.
언제고 발각되겠지만 시간을 벌려면 알이란 신분은 당장 버려야 했다.
마르샤 가문이란 말에 여러 반응이 나왔다.
좋은 반응은 아니었다.
악덕 대상인이란 이미지가 강했으니까. 다행인 건 이곳 드워프들과 악연으로 엮인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아니, 건드릴 수 없었다는 게 더 정확했다. 베네타는 마르샤가 건들기엔 부담스럽거든.
“마르샤는 몇 달 전 몰락했을 텐데?”
“네. 지금은 잿더미만 남은 몰락한 가문입니다.”
“결국, 빈털터리란 소리군.”
혹시나 기대했지만, 역시나 몸뚱이밖에 없는, 혈맹에 전혀 도움이 안 되는 인간이었다.
원로들이 실망한 표정으로 도르네프를 바라보자, 움찔하던 도르네프가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그는 영지민을 구한 영웅이다.”
“그걸로는 자격이 부족합니다. 그리고 군주의 위업을 축소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영지민을 구한 건 군주입니다.”
“제, 제 은인이에요!”
샤르바딘이 용기 내어 목소리를 높였지만, 원로들은 고개를 절레 가로저었다.
“그 빚은 이미 갚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도르네프의 황금패.
샤르바딘이 준 다크로즈면 은인의 대우는 충분히 해준 셈이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더는 날 옹호하며 혈맹을 우기기가 힘들어 보였다.
도저히 답이 나올 것 같지 않자, 난 짧게 한숨을 내쉬곤 반대파 쪽으로 걸어갔다. 판은 대충 깔린 것 같으니, 부족한 부분은 내가 채워야 할 것 같았다.
자격.
내게 필요한 건 자격이다.
베네타에서 저들의 반대를 짓누를만한 자격이 뭐가 있을까?
난 이 혈맹에 꼭 포함되어야 한다.
서신의 내용을 잠시 떠올렸다.
학살자 카멜.
그의 행보는 지금 내 목줄을 서서히 조이고 있었다.
행보에 맞서 대항하려면 세력을 등에 업어야 하는데, 그 대항마로는 현재 베네타밖에 없었다. 학살자를 홀로 상대하는 건 달걀로 바위를 치는 것보다 더 바보 같은 짓이었으니까.
잠시 베네타에 대해 떠올려봤다.
베네타의 스토리 중에 혈맹 자격을 논할 수 있는 이벤트가 있을까?
그러던 중 대장장이의 정원처럼 대화 속에서만 등장했던 장소 한 곳이 떠올랐다.
‘거기라면…….’
내가 성큼 다가오자, 원로들의 시선이 내게 향했다. 시선이 같잖다는 표정인데 반응을 한 번 봐야겠다.
“저주받은 폐광산.”
“……!”
“그, 그걸 어찌 인간이…!”
원로들의 격한 반응에 확신했다.
이 정도면 먹힐 것 같았다.
일단 지르고 본다.
“제가 그 폐광산의 저주를 풀어드리죠. 그럼 자격이 되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