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꽃길 따윈 없다
질 좋은 광맥이 흐르는 풍요의 땅.
드워프들이 그 땅 근처에 도시를 짓고 문명을 이룬 도시가 베네타였다.
광맥의 존재가 베네타의 시작이라 할 만큼 내가 언급한 폐광산은 한때 드워프들에게 무척 중요한 장소였다.
“거길 어떻게 안 거야?”
“폐광산이요?”
“그래.”
진열된 술병들을 구경하고 있던 나는 펜리의 물음에 자리로 돌아왔다.
푹신한 소파에 몸을 묻고 주변을 둘러봤다.
도르네프가 머무는 영주실.
드워프 아니랄까 봐. 내부는 멋들어진 은빛 갑주와 무구들로 장식이 되어 있었고, 벽 쪽에는 술병들이 잔뜩 진열되어 있었다.
“유명한 사건 아니었습니까?”
“광산 폐쇄는 유명한 사건이긴 하지. 하지만 폐쇄 이유가 ‘저주’라는 건 도르네프나 원로들 정도만 아는 정보야. 아까 반응 보면 몰라?”
하긴 좀 뜨거웠었지.
도르네프가 직접 내 입을 틀어막고, 원로들은 다급히 회의를 파해버렸으니까.
그게 저주란 단어 때문이었어?
“저주는 누구한테 들은 거지? 나도 혈맹을 맺고서야 듣게 된 정보인데.”
누구긴 누구야 바로 당신이지.
토바른을 떠나 가혹한 세계에 던져진 펜리는 늘 폐광산의 존재를 아쉬워했다. 그 폐광산을 드워프들이 이용할 수 있었다면 학살자의 손에 그리 쉽게 무너지지 않았을 거라고 말이다.
“무슨 저주인지 알고 말하는 거야?”
아주 잘 알고 있다.
그것도 당신이 얘기해 줬거든.
하지만 이 정도로 쉬쉬할 줄은 몰랐다. 게다가 폐광산의 저주가 알려진 시기는 펜리가 6성에 오르고 스폐셜에 등극했을 때였다. 그녀가 가장 강력했던 시기에 방문한 장소란 뜻이었다.
그럼에도 내가 도전할 수 있는 이유는,
‘레토니칼스의 심장을 얻었으니까.’
심장의 능력이 있으니 비벼볼 수 있는 거였다.
펜리의 질문에 더 언급하면 안 될 것 같아 난 침묵을 택했다.
진실의 눈은 확실히 피곤하다.
내 반응에 펜리는 피식 웃고는 술이 든 잔을 집어 들었다.
“혈맹을 맺고도 속마음을 감추려 든다면 언제고 넌 내 손에 죽을 거야. 난 너한테 많은 걸 걸었어. 알지?”
“…….”
하여간 눈치는 더럽게 빨랐다.
그래도 미래의 당신이 알려준 내용이라고 어떻게 말을 해?
조용히 있으니, 술을 홀짝이던 그녀는 소파에 몸을 묻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도르네프가 오기 전까진 여유가 있으니, 녀석이 정보를 알든 모르든 도움 될만한 정보를 알려줄 생각이었다.
넬라가 말했다.
운명이 녀석을 이끌 거라고.
자신은 녀석의 뒤를 받치며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
녀석은 길잡이였으니까.
“도르네프 이전의 전대 가주들이 광산의 저주를 풀려다가 목숨을 잃었어. 50년간 베네타의 성주가 네 번이나 바뀐 사실은 너도 잘 알겠지. 그때 함께 사라진 정예 기사단만 3대대, 350명이 넘어가지. 병사들은 당연히 셀 수 없이 많고.”
“저주에 대해 알려진 바가 있습니까?”
“들어가면 아무도 돌아오지 못했어. 그럼에도 드워프들은 눈물을 머금고 기다림보단 폐쇄를 선택했지. 광산은 그들에게 보금자리 이상의 장소야. 그만큼 저주가 지독했다는 뜻이겠지. 그리고 넌 지금 그곳을 제 발로 들어가겠다고 선언한 거고.”
“…….”
도르네프 앞에 있을 땐 혈맹의 자격을 증명하기 위해 지른 감이 있었는데, 펜리의 말을 듣고 보니 사지(死地)에 못 들어가서 안달 난 변태 새끼가 된 기분이었다.
‘생각해보니 서둘러 들어갈 필요가 없잖아?’
처맞고 기절한 후 어제 막 눈을 떴다.
혈맹 자격에 유통 기한이 있는 것도 아니고, 눈치 좀 보다가 천천히 움직여도 되는 거였다.
출발 날짜를 좀 뒤로 물릴 수 있나 고민하고 있을 때, 문이 벌컥 열리며 도르네프가 모습을 드러냈다.
표정이 좋아 보인다.
근데 왜 난 불안하지?
“얘기가 잘 끝났다! 이젠 해결만 하면 돼!”
“아, 저 그게 출발 시기를…….”
“내일 출발한다! 이미 도장 찍듯 선언까지 했으니 원로들도 결정을 뒤집진 못할 거야. 크하하하하!”
“…아. 시발.”
따로 원로들만 모여 회의를 진행했는데, 내 제안이 먹힌 것 같았다.
인간이 폐광산의 저주를 해결한다면 혈맹으로 받아들이는 건 물론 종족의 은인으로 대우하기로 말이다.
근데 왜 하필 내일이야?
창가를 응시하니, 밤하늘에 뜬 달이 기울고 있다.
곧 동이 틀 것 같다고.
‘어째 인생에 꽃길은 보이지도 않냐.’
내 선택이긴 한데, 어째 살려고 발악할수록 더 생존과 멀어지는 기분이었다.
도르네프 뒤로 시종들이 우르르 따라 들어왔다. 그들의 손에는 서류 더미가 잔뜩 들려 있었는데, 내 앞 테이블 위로 차곡차곡 쌓이기 시작했다.
당연히 내 시야에는 난쟁이 도르네프가 가장 먼저 사라졌다.
“…이게 뭡니까?”
“폐광산에 대한 자료.”
“이렇게나 많습니까?”
“그만큼 절실했으니까.”
일부 서류를 훑어보니 실질적으로 도움 되는 내용은 없어 보였다.
광산에서 나온 생존자가 없는데 쓸만한 정보가 있을 리가 없다.
작은 도움이라도 주려는 도르네프의 배려. 그만큼 나에게 거는 기대가 크다는 뜻이었다.
‘대체 뭘 믿고?’
눈앞의 드워프도, 저 옆의 엘프도, 내게 불안할 정도로 우호적이다.
난 서류 더미를 한쪽으로 쭉 밀어내곤 두 사람 앞에 섰다. 눈앞의 서류보다 저들의 심중을 확인하는 게 더욱 중요했다.
“이제 얘기해 주시죠?”
“뭘?”
“이 혈맹에 제가 필요한 이유.”
나도 혈맹이 필요하지만, 저들이 왜 날 필요로 하는지 꼭 알아야 했다.
둘은 잠시 시선을 교환하더니, 펜리가 곰방대를 물며 입을 열었다.
“길잡이.”
“…길잡이?”
“이번 신명으로 우리 운명이 바뀌었거든. 넬라는 엘프족 사이에서 몇 안 남은 신녀야. 그녀가 그러더군. 네 녀석이 우리 운명을 이끌 길잡이라고.”
“…무슨 뜻입니까?”
“네 녀석 때문에 우리가 신명을 받았다는 뜻이다.”
나 때문에 신명을 받아?
‘틀린 말은 아닌데….’
내 개입으로 스토리가 많이 바뀌었다. 그중 저 둘의 변화가 가장 컸다.
하지만, 나를 중심으로 저들의 신명이 부여될 줄은 예상치 못했다.
이런 일이 반복된다면?
지금 상황이 내게 득이 될지, 실이 될지는 지켜봐야 할 것 같았다.
다만,
‘당장은 득이 되겠지.’
저들이 내민 손은 진심이었다.
난 그 손을 움켜잡고 살아남아야 했다.
“이유를 말해줬으니, 넌 해야 할 일에 집중해. 실패하면 다 끝인 거 알지?”
“네네.”
서류가 도움은 안 될 것 같지만, 목숨이 달린 일이라 살펴는 봐야 했다.
난 서류를 뒤적거리며 둘에게 폐광산 외에 여러 가지 질문을 던졌다.
블랙마켓에 관한 이야기.
흑주술사 렌구아의 신명.
그리고 카멜 블레이저까지.
넬라가 준 토바른 정보도 많은 도움이 됐지만, 눈앞의 둘은 토바른의 주요 수장들이다.
비교할 수 있는 정보의 질이 달랐다.
격랑처럼 변화하는 토바른의 새로운 바람과 분위기.
그 중요한 정보들이 내 머릿속에서 쉴 새 없이 업데이트되고 있었다.
미래가 바뀐 만큼 나도 변화해야 했다.
* * *
“처음에는 서운했는데, 은인의 목숨값이라면 이해해야죠.”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샤르바딘 님.”
하루가 지나고 아침 일찍 샤르바딘을 찾았다. 어제는 정신이 너무 없었던 탓에 시간을 내어 방문하지 못했다.
그녀는 다크 로즈를 펜리에게 준 것을 서운해했는데, 사정을 설명하자 이해해주는 모습이었다.
역시 이쁜 사람은 마음씨도 이쁘다니까.
내가 혀를 끌끌 차며 펜리를 바라보자, 뻐금뻐금 곰방대를 펴던 그녀가 뭐냐는 눈빛으로 날 노려봤다.
“은인에서 은인에게라, 뭔가 나쁘지 않아요.”
샤르바딘은 살포시 웃으며 펜리의 머리맡에 장식된 다크 로즈를 흐뭇하게 바라봤다. 뭔가 다크 로즈에 의미를 부여하려는 모습인데, 검은 장미의 꽃말이 ‘당신은 영원히 나의 것’이란 것을 알게 된다면 기겁할 거다.
아니, 그 전에 도르네프가 먼저 망치를 들고 날 죽이려 들지도.
몸을 부르르 떨고 자리를 털고 일어나자 샤르바딘이 아쉬운 듯 따라 나왔다.
“도네프에게 들었어요. 오늘 바로 폐광산으로 출발하신다고.”
“그렇게 됐습니다.”
“위험한 장소라고 들었는데, 너무 서두르시는 거 아닌가요? 준비를 확실히 하시는 게.”
그러니까.
그 땅딸보 아저씨가 성격이 좀 급해야지.
그녀의 부군이라 앞에선 욕도 하기 힘들었다. 그저 어색하게 웃으며 자신감을 드러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제 생존력 아시지 않습니까?”
내 능청스러움에 샤르바딘은 마주 보고 웃었다.
눈앞의 사내는 미믹의 제단에서 피 웅덩이 위를 함께 구른 사이다. 불가능할 것 같았던 일도 사내가 나서면 해결이 됐다. 누구보다 잘 해낼 것이라 믿었다.
“안 갑니까?”
“내가 왜?”
내가 손짓하자, 소파에서 쿠키를 집어 먹던 펜리가 표정을 와락 구겼다.
“싫으면 말고요.”
“죽고 싶어서 환장한 놈 같네.”
“함께하면 제가 살 확률이 올라가겠죠?”
“하, 내가 어쩌다 너 같은 인간이랑 엮여서.”
“거절해도 됩니다. 거래 물릴까요?”
“그럼 ‘그거’는?”
“누구 좋으라고요. 품에 안고 죽을 겁니다.”
“이 미친 돌아이 새끼가.”
어제 머리를 굴려봤다.
폐광산의 저주에 대해선 안다.
그런데 알아도 혼자 들어가면 생존할 거란 확신이 없다. 그럼 방법은 하나뿐이다.
‘확실한 보험을 데려가야지.’
이번 일만 마무리되면 난 드워프들의 은인이 된다. 그럼 황금패 하나쯤은 더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슬쩍 떠보니 도르네프가 확신을 줬다.
황금패 1+1이 가능한 상황.
전대 가주들이 공들여 만든 드워프 장비 교환권이면 탐욕에 찌든 엘프 하나 정도는 꼬실 수 있을 것 같았다.
특히 다크 로즈로 그 성능을 확인한 펜리라면 더더욱 이 미끼를 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의도한 건 아닌데, 다크 로즈가 물고기 떡밥이 돼버렸다.
“황금패가 두 개나 생길 것 같은데, 어쩐다.”
“…….”
“필요하시면 언제든 말씀하세요. 하나 정도는…….”
“닥쳐!”
아직 미끼를 콱 물진 않았지만, 대장장이 정원까지만 데려가면 안 물고는 못 배길 거다.
황금패 떡밥은 못 참지.
내일만 살 것처럼 그녀 눈앞에서 황금패를 살랑살랑 흔들고 있는데, 도르네프가 멋들어진 갑주를 걸치고 나타났다.
“도네프! 조심해요!”
“내 사랑 샤딘, 꼭 살아오겠소.”
“꼭이에요!”
“약속하리다.”
둘이 포옹하고 뽀뽀하고 애틋한 눈빛을 교환하며 사랑을 나누는데, 저 아저씨는 폐광산 입구까지만 안내할 거면서 왜 저러는지 모르겠다.
갑주는 대체 왜 입고 온 거야?
“가지.”
도르네프를 따라 성 밖으로 나가니 마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농장에서 흔히 쓰는 평범한 마차였다.
우리는 마차를 타고 성을 벗어났다.
마차에 탄 일행은 도르네프와 펜리 그리고 나 셋뿐이었다.
이번 폐광산 임무는 나 혼자 맡기로 한 상태였다.
베네타에서 도움을 주려는 손길이 있었지만, 전부 거절했다.
드워프 전대 가주들이 정예 기사단을 끌고 가도 돌아오지 못하는 곳이다.
‘거긴 머릿수로 해결이 안 되는 곳이거든.’
눈앞의 도르네프나 펜리 정도가 아니면 오히려 방해만 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