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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에게서 살아남는 법-86화 (86/130)

86화 밑밥은 깔아 놔야지

마차는 성문을 통과해 광활한 대지로 나아갔다.

흔들리는 마차 안에서 서서히 멀어지는 베네타의 성을 구경하고 있는데, 창가를 몇 차례 둘러보던 펜리가 묘한 표정을 짓고는 도르네프에게 물었다.

“어디로 가는 거지?”

“알면서 왜 물어?”

“폐광산에 가기 전에 들러야 할 곳이 있잖아.”

“대장장이의 정원 말인가?”

“당연하지. 가서 뒈지면 쓰지도 못할 황금패인데 임무 전에 쓰는 게 맞잖아.”

뭐, 뒈져?

이 엘프 년이 못 하는 소리가 없네.

하지만 난 발끈하지 않고 기다렸다. 펜리의 말에 코를 후비는 도르네프의 저 행동이 이해가 갔기 때문이다.

“지금 가는 중이잖아.”

“뭐? 지금 영지 바깥으로 나가는 중인데?”

“대장장이 정원은 영주성에 없어.”

도르네프의 말에 펜리는 멈칫하곤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대장장이 정원은 영주성 어딘가에 꼭꼭 숨겨진 비밀 공간으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검은 장미인 자신조차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보물 창고를 영지 바깥에 모셔놨다고?

“속임수였어?”

“해마다 보물을 노리고 성으로 잠입하는 날파리들이 얼마나 많은 줄 알아?”

“보물 창고가 떡하니 있는데 날파리가 꼬이는 건 당연한 거라고.”

“그래서 대비했잖아. 너도 눈치 못 채게.”

“눈치 못 챈 게 아니라 관심이 없었던 거지. 깡그리 다 훔쳐줘?”

“암고양이… 자꾸 그러면 대가리 깨진다?”

둘이 또 투덕대며 으르렁하는 것을 내가 막았다. 마차 뒤로 의심스러운 움직임을 포착했기 때문이다.

“꼬리가 붙었네요?”

“꼬리?”

“네. 그것도 상당히 많이요.”

영지에선 잘 숨어서 따라왔는데, 밖은 확 트인 평지라 숨을 장소가 없었던 모양이었다.

둘은 내가 가리킨 방향을 살펴보곤 헛웃음을 흘렸다.

나타나는 이들이 점점 늘어났다. 서로 눈치를 보다가 몇몇이 숨기를 포기하자 결국 모두가 모습을 드러내며 따라 나온 모양새였다.

“뭐야, 저것들은?”

“전부 인간이네. 실력은 형편없고.”

“정보 길드 같아요. 복장을 보니 한두 군데가 아니네요.”

“베네타 쪽은 아니야. 전부 타지에서 온 녀석들이란 건데. 표적이 누구야? 난 아닐 테고, 너도 아닐 테니.”

나와 펜리가 도르네프를 바라보자, 그는 멀뚱히 두 눈을 깜빡이곤 자신을 가리켰다.

“나라고?”

“너밖에 더 있어? 저 녀석은 좆밥이고, 난 건들면 다 죽을 텐데.”

좆밥이라니.

근데, 반박하기 애매해서 그냥 다물고 있었다.

“제가 봐도 도르네프 님 같습니다.”

“뭘 노리고?”

“베네타에 꿍꿍이가 있는 이들이겠죠?”

“꿍꿍이?”

“근래에 저런 이들이 늘지 않았습니까?”

내 물음에 도르네프도 뭔가를 느낀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맞아. 날파리들이 근래에 엄청나게 들어오긴 했지. 암고양이에게도 의뢰를 넣었는데?”

“아, 저들의 의뢰주가 누군지?”

“혹시 누군지 아십니까?”

“역추적 중이라 곧 정체가 밝혀질 거야. 누군지 몰라도 돈지랄을 못 해서 안달 난 놈 같거든.”

도르네프는 수염을 쓰다듬으며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나저나 폐광산으로 움직인 건 어떻게 안 거지? 최대한 은밀히 움직였는데. 설마, 내부에 세작이…….”

“지랄하네. 그 번쩍번쩍한 갑주를 보고도 그런 소리가 나오냐? ‘나 도르네프예요!’라고 광고하고 다니는데 어떤 머저리가 못 알아봐.”

“시끄럽다!”

잠시 투덕거린 둘은 더는 뒤쫓는 이들에게 신경 쓰지 않고 마차에 몸을 묻었다.

위협적인 이들도 아니었고, 도르네프 말로는 폐광산에 진입하면 알아서 떨어져 나갈 것이라 했기 때문이다.

다만, 내 경우에는 달랐다.

난 저들의 존재가 신경 쓰였다.

‘누가 보낸 건지 알 것 같거든.’

도르네프 한 명에게 붙은 눈들이 저 정도면 베네타 내의 인원은 훨씬 더 많을 것이다.

이 시기에 베네타의 정보에 아낌없이 돈을 쏟아부을 존재는 한 명뿐이다.

학살자 카멜.

그 녀석밖에 없었다.

‘무슨 꿍꿍이일까.’

이미 카멜은 신명을 통해 모든 계획이 물거품으로 변했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아레나 후아튼이 죽었으니까.’

백(百) 개의 심장, 베네타와 공멸할 아레나 후아튼이 죽었다. 그러니, 저 움직임은 다른 꿍꿍이를 위한 정보 수집이 분명했다.

계획이 틀어졌다고 베네타를 포기할 인간이 아니었으니까.

아직 카멜은 철저히 웅크린 채 존재감을 숨기고 있는 상태. 하지만 슬슬 학살자의 존재를 두 사람에게 언급할 때가 된 것 같았다.

“의뢰주는 블라이어 성주일 겁니다.”

“블라이어 성주? 이번에 성주에 오른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녀석 아닌가?”

“그 꼬맹이는 아닐 거야.”

“왜 그리 생각하십니까?”

내가 묻자 펜리가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석 달 전 에토르 행에서 키메라 토벌에 정예 수천을 잃었거든. 복구도 빠듯한 예산에서 천문학적인 돈을 베네타에 쓸 여유도 이유도 없어.”

아, 들은 적이 있다.

도르네프와 기사단이 도미닉 연구소로 빠르게 도착했던 이유 중 하나.

에토르와 블라이어 연합군이 키메라 군단의 발목을 붙잡았기 때문이다.

그 전투에서 학살자가 정예 수천을 잃었다고?

‘카멜, 이 새끼. 어디서 뻥카를 치려고.’

다른 이는 몰라도, 내겐 안 먹힌다.

주변 세력의 방심을 불러오려는 밑장 빼기가 분명했다.

펜리까지 속을 정도면 진짜 수천 명을 미끼로 던졌다는 건데, 피도 눈물도 없지만 무섭다는 생각부터 들었다.

‘저들이 아직 카멜의 위험성을 알 때는 아니니까.’

카멜이 움직이기 전이고, 직접 부딪쳐 보지 않았으니 모르는 게 당연했다.

카멜의 무서움을 지금 설득할 생각 따윈 없었다. 혈맹이 되고 난 후에 경고해도 늦지 않다.

다만,

‘밑밥은 깔아놔야지.’

내가 말한 대로 상황이 흘러간다면 추후 계획에서 내 말에 힘이 실린다. 이는 내게 꼭 필요한 일이었다.

저 둘은 한 세력의 수장인 만큼 확실한 것이 아니라면 움직이려 하지 않을 테니까.

“의뢰주야 곧 밝혀질 테니 그때 제 말이 틀렸는지 맞았는지 알 수 있겠죠. 그리고 블랙마켓에서 운명의 아케인이 움직였다고 말씀하셨죠. 그 뒤에 누군가 있을 것 같다고.”

“그 녀석도 곧 밝혀질 거야. 미끼를 뿌렸거든.”

“그 미끼가 아까우실 겁니다. 그 범인도 블라이어 성주일 확률이 높으니까.”

“…….”

펜리는 날 조용히 노려봤다.

잠시 생각하는 표정인데, 곧 고개를 털곤 생각을 포기한 듯 물었다.

“확신하는 이유가 뭐야?”

“세이렌.”

“세이렌? 그거 블라이어 수배 명단 리스트에 있는 거잖아. 10만 골드짜리.”

하여튼 저 엘프 년은 돈과 관련된 건 귀신같이 알아챘다.

“그리고 넌 5만 골드짜리고. C급 용병 알 씨.”

“제 이름은 알렉스입니다.”

“지랄하네. 푼돈이라 그냥 넘어간 거야. 고맙게 생각해라.”

“…정말 고맙네요.”

“헛소리 그만하고 세이렌과 아케인이 뭔 상관인데?”

카멜의 성명으로 배포된 수배자 명단 리스트는 총 세 명이었다.

그중 한 명이 5만 골드 현상금의 C급 용병 알이고, 또 다른 하나가 ‘세이렌’과 관련된 인물 정보였다.

이와 관련된 작은 정보만 알려줘도 10만 골드를 주겠다는 엄청난 정보 제공료가 현상금으로 걸린 것이다.

“직접 수배하지 않고 정보만 원하는 이유가 뭘까요?”

“나도 그게 이상하긴 했어.”

“세이렌은 신명 목록과 관련 있습니다. 아케인 정도만 알 수 있는 정보죠.”

내 답에 펜리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세이렌이 신명 목록이라고?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그저 침묵했을 뿐인데, 펜리의 눈동자가 점점 커졌다. 잠시 후엔 ‘너, 너…’를 더듬거리더니 이내 주변을 둘러봤다.

내게 바짝 다가온 그녀가 작게 속삭였다.

“너, 알고 있었어? 네 신명 목록.”

“모릅니다. 저도 알고 싶네요.”

“자꾸 헛소리하면 혀를 뽑아버린다.”

“이것만 알고 있습니다. 세이렌이란 단어, 이거 제 신명 목록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나도 넬라가 준 정보 서신을 읽고 얼마나 기겁했는지 모른다.

세이렌 하면 바로 떠오르는 도네콜린트의 신명.

‘세이렌의 비명’이 있었기 때문이다.

즉, 카멜이 쫓는 건 신명의 주인이 된 나였다.

“아케인 정도만 알고 있는 ‘신명 사냥꾼’의 신명 목록 일부를 카멜이 뿌린 것을 보면 대충 감이 오지 않습니까?”

“…백 프로 확실해?”

“확실한 건 아닙니다. 이 목록을 본 또 다른 이가 있을 수도 있으니까요. 게다가 아케인이 왜 카멜 곁에 붙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근데 블라이어 성주는 어째서 ‘세이렌’이 신명 목록임을 숨기는 거지?”

“여러 가지 의도가 숨겨져 있을 겁니다. ‘세이렌’은 신명 목록의 일부 단어에 불과합니다. 전부 노출하지 않은 것을 보면 절 압박해서 끌어내려는 수작이거나, 반대로 섣불리 움직이지 못하게 할 의도 같습니다.”

카멜은 곧 움직일 거다.

에토르 점령.

블라이어든 베네타든 에토르를 손에 넣은 세력이 토바른의 영토 70%를 손에 넣게 된다.

그 대계(大計)를 펼치기 전, 나에게 경고하는 것이다.

허튼짓하지 말라고.

“만약 아케인이라면 그가 제 신명, 특히 ‘이름’을 알고 있는지가 가장 중요합니다. 그래야 의도가 협박인지, 견제인지 알 수 있거든요.”

“간만에 머리 아프네.”

펜리는 잠시 고민하는 눈치였다.

도르네프는 그저 눈을 감고 있었다. 그는 머리 쓰는 건 질색인 타입 같았다. 다만, 한 가지 의문이 떠올라 지나가듯 물었다.

“블라이어 성주가 돈이 그리 많았나? 토바른 내의 수많은 정보 길드를 움직일 만큼?”

“금광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건 또 처음 듣는 정보인데, 확실한 거야? 너무 터무니없는데.”

펜리에게 말한 것도, 도르네프에게 말한 것도 전부 증거는 없고 내 말뿐인 근거였다.

나였기에 귀라도 기울인 것이지, 다른 사람이 말했다면 미친 소리 그만하고 꺼지라고 외쳤을 것이다. 내 말만 믿고 섣불리 움직이지 않을 거란 소리다.

“증인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를 베네타로 데려와야 합니다.”

“증인? 블라이어에 금광이 존재한다는 걸 증명할 증인이 있다고?”

“네. 더불어 운이 좋다면 그를 통해 블라이어와 아케인의 관계도 증명할 수 있을 겁니다.”

“그게 누구지?”

그 물음에 난 현상금 수배 리스트 마지막 줄에 적힌 인물을 떠올렸다.

현상금 100만 골드의 사나이.

블라이어의 전(前)대 기사 단장.

“록터 펠리스. 그자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주술사들의 둥지에서 피의 만찬을 함께 즐겼던 록터가 금광을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학살자의 대적자로 불렸던 영웅 포지션.

그를 우군으로 얻어야 한다.

* * *

베네타에서 북쪽으로 얼마간 올라갔을 때, 마차는 우거진 숲으로 진입했다.

숲에 들어와서인지, 뒤따라오는 말발굽 소리가 더 크게 느껴졌다.

“폐광산은 멀었습니까?”

“다 왔어. 저기다.”

도르네프가 창가를 가리켰을 때, 숲이 중간에 툭 끊긴 듯 푸르른 녹음(綠陰)은 사라지고 드넓은 암벽 지대가 펼쳐졌다.

그리고 눈앞에 펼쳐진 거대한 동굴.

멀리서도 그 동굴 크기가 압도적이라 느껴졌는데, 너비가 마차 십여 대 정도는 일렬로 들어가도 될 것 같았다.

저기가 폐광산이라고?

단순히 ‘폐(閉)’했다기엔 동굴이 뻥 뚫려 있다.

“동굴로 들어가야 합니까?”

“당연하지. 토바른 내에 가장 큰 광맥이 흐르는 곳이야. 그 범위가 어느 정도인지 드워프인 나조차 확실히 알지 못하지.”

마차는 주저 없이 동굴 속을 파고들었다. 마차 겉의 횃불 네 개가 켜지고 내부가 밝아지자, 도르네프가 바깥쪽을 바라보며 물었다.

“따라오는 이들 중 익숙한 얼굴이 있었나?”

“없습니다. 왜 묻는 겁니까?”

“죽으면 아쉬운 소리 할까 봐.”

“네?”

“대장장이 정원을 왜 폐광산 안쪽으로 옮긴 줄 아나?”

“정원이 이곳에 있어?”

펜리의 물음에 도르네프는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동굴 바깥에서 주저하던 인간들이 마차를 쫓아 들어오자, 도르네프는 짧게 혀를 차곤 마차에 몸을 다시 묻었다.

“여긴 성과 달리 시체를 처리할 필요가 없거든.”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끄아아아아악―!

뒤쪽에서 비명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르륵― 그르륵―

쇠 긁는 소리가 들려왔다.

톱니바퀴 굴러가는 소리, 트랩이 작동한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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