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당에게서 살아남는 법-87화 (87/130)

87화 대장장이의 정원

“하, 함정이다!”

“호, 화살? 조심… 크아악!”

비명의 울림이 끝없이 터져 나왔다.

운 좋게 살아남은 이들은 죽을힘을 다해 마차를 뒤쫓았다. 멈춰도, 후퇴해도 죽는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처절한 비명을 내지르며 따라오는데, 도르네프는 귀를 후비며 무시로 일관했다.

일단 적으로 인식하면 가차 없다.

괜히 군주가 아닌 건가.

쿠쿵―

“……!”

미약한 진동이 느껴졌다. 잠시 후, 바닥 사이로 짙은 안개가 빠르게 피어올랐다.

안 그래도 어두웠던 동굴 내부가 더욱 어두워졌다. 아니, 짙은 안개에 횃불마저 꺼져버리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암흑이 찾아왔다.

두두두두두―

“…….”

근데 마차는 마치 앞이 보이는 것처럼 전과 똑같이 움직였다. 두 눈을 한동안 끔뻑여도 어둠 그 자체다.

변한 건 주변 소리였다.

그르륵― 그르륵―

뒤쪽에서 들려오는 톱니바퀴 굴러가는 소리.

뒤쫓던 이들은 암흑 세상에 패닉 상태라 그 죽음의 속삭임을 듣지 못했다.

피융―!

“아, 앞이 안…!”

“끄아악!”

다시 울리는 비명.

그 비명은 서서히 멀어지더니, 이내 침묵으로 가라앉았다.

이젠 마차 굴러가는 소리밖에 안 들린다. 난 조심스레 입을 뗐다.

“뭐가 어떻게 된 겁니까?”

“트랩이 반응한 거지.”

“다 죽은 겁니까?”

“아마도?”

목소리가 덤덤한 것이 오히려 더 무서웠다.

들어보니 드워프들이 작정하고 만든 강철 트랩이었다. 능숙한 마나 유저조차도 방심하면 꼬챙이가 되거나 톱니에 갈려 죽을 거라나.

함정 하나 살벌하게 만들어놨다.

게다가,

“지금 마차가 움직이는 거 맞죠?”

“잘 가고 있네만.”

“도르네프 님은 앞이 보입니까?”

“인간들의 시야로 본다면 암흑 그 자체이지만, 드워프들의 시야로는 앞이 보인다고 말할 수 있지.”

“대체 뭐가 보인다는 겁니까?”

“땅의 결이 보이네만.”

숨 쉬는 방법을 왜 묻냐는 듯 말하는데, 땅만 줄기차게 파고 사는 종족답게 어둠 속 동굴에서도 주변을 느끼는 타고난 능력이 있는 것 같았다.

그에 감탄도 잠시,

덜컹―!

“나, 나토네! 방금 전복될 뻔했잖아!”

“…죄송합니다! 주군!”

“내가 말을 몰아야겠나? 집중 안 해?!”

“아, 아닙니다! 할 수 있습니다!”

“…….”

마부가 기사 단장이었어?

긴장한 듯 숨소리가 거칠었는데, 손꼽히는 실력자도 이리 긴장할 정도면 땅의 결을 느끼는 능력도 모든 드워프에게 해당하는 건 아닌 것 같았다.

“숨 쉬듯 하는 거라면서요.”

도르네프의 헛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이 난쟁이 양반도 허풍이 심한 타입 같았다.

그나저나 어두워진 이후로 펜리 년이 조용했다.

이리 입 다물고 있을 여자가 아닌데?

“펜리 님?”

“시끄러워.”

목소리가 날카롭다. 발톱을 바짝 세운 고양이 같아서 더는 건드리지 않았다.

그림자가 없는 암흑에 민감하다고 하더니, 그 탓인 것 같았다.

긴 어둠 사이로 마차는 쉬지 않고 움직였다.

수차례 지그재그로 마차가 기우는 움직임.

동굴이 한 방향으로 뚫린 것 같지 않았다.

미로?

그것도 무척 복잡한 미로 같았다.

이젠 내 위치가 어디쯤인지 감도 못 잡겠다.

‘이러니 학살자도 정원을 못 찾았지.’

아티팩트 수집에 집착하는 카멜이 대장장이 정원을 놔둘 리 없었다.

점령한 순간부터 정원을 찾는 작업에 착수했는데, 엄청난 인원을 동원해 수년에 걸쳐 영지 잔해를 치우고 주변 땅을 파고 이 잡듯이 뒤졌다.

당연히 폐광산도 의심하고 조사를 했는데, 이렇게 변태같이 숨겨놓으면 위치를 알았다고 한들, 찾기 불가능했을 것 같았다.

‘드워프의 허락 없이는 절대 발을 디딜 수 없는 장소라더니.’

대장장이 정원을 표현한 소설 문구가 완벽히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긴 암흑도 오랫동안 노출되니 적응이 되었다.

두 사람의 꿈틀대는 실루엣이 시야에 비칠 정도로 눈이 익숙해졌을 때였다.

“워―!”

마차가 드디어 제자리에 멈춰 섰다.

마부석에서 내려온 나토네가 주섬주섬 무언가를 챙기더니 마차 문을 활짝 열었다.

“으! 눈 부셔.”

나토네가 등불을 들고 나타나자, 눈 부심에 고개를 돌렸다. 불빛에 흐릿했던 시야가 돌아왔을 땐 막다른 벽이 나를 반겼다.

우리는 마차에서 내린 후 암벽으로 꽉 틀어막힌 장소 앞에 섰다.

툭툭―

벽을 두들겨 보니 속이 꽉 찬 느낌이 들었다. 건너편에 공간이 따로 있는 것 같지 않은데,

“다 온 겁니까?”

“이 암벽 너머부터 폐광산이다.”

“건너편에 공간이 있다고요?”

입구에 얼마나 많은 암벽을 때려 박은 거야? 여길 치우고 광산으로 진입하는 건 평생 곡괭이질을 해도 불가능할 것 같았다.

폭파도 힘드니, 방법은 하나밖에 없었다.

‘비밀 통로.’

내가 도르네프를 돌아보자, 그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딱 봐도 뭘 원하는지 알 것 같아서 품에서 황금패를 꺼내 건넸다.

황금패를 움켜쥔 도르네프가 암벽에서 스무 걸음 정도 물러나더니 한 자리에 섰다.

잠시 후 그 주변을 살피던 그가 바닥을 쓸고는 황금패를 내려놨다.

그 순간, 바닥이 쿠쿵! 울리더니 황금패와 함께 푹 꺼졌다.

갈라진 바닥 밑으로 끝 모를 계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디까지 이어진 거지?

너비는 한 사람이 겨우 들어갈 정도로 비좁고 어두웠는데 밑 분위기가 공포 특집을 떠올릴 정도로 을씨년스러웠다.

“이봐.”

“…헉!”

이 난쟁이가 왜 등불을 얼굴 밑에 들이밀고 지랄이야!

“왜 그래?”

“아, 아닙니다. 혹시 밑에 가디언이나 트랩은 없습니까?”

“없으면 섭섭하지.”

“폐광산에 무슨 보물이라도 숨겨놨습니까?”

“숨겨놨지. 폐광산으로 진입하기 전에 보물 구경이나 하고 가라고.”

“네?”

등불을 쥔 도르네프가 나토네에게 손짓하자, 나토네는 예를 표하곤 마차로 돌아갔다. 우리가 돌아올 때까지 마차에서 기다릴 계획인 것 같았다.

계단에 한 발을 걸친 도르네프가 우릴 돌아보곤 턱수염을 쓸어내렸다.

“죽고 싶지 않으면 한 걸음 이내로 따라와라.”

“내 긴 다리로는 반걸음이겠네?”

“고양아, 그 무릎부터 접어줄까?”

노려보던 도르네프가 곧장 계단 밑으로 사라지자 펜리는 늘어지게 기지개를 켜곤 그 뒤를 총총 따랐다.

대장장이 정원.

‘어떤 모습이려나.’

소설에서도 다룬 적 없는 장소라 가슴이 살짝 떨렸다.

설렘과 긴장이 공존하는 감정.

그것도 잠시, 두 사람이 밑으로 푹 꺼지듯 사라지자, 서둘러 계단을 타고 펜리 뒤를 바짝 쫓았다.

잠시 후, 세 사람이 사라진 바닥이 천천히 닫히더니 공간이 사라졌다.

* * *

철컥― 철컥―

앞서가는 도르네프의 손이 쉴 새 없이 움직였다. 비좁은 벽 이곳저곳을 조심스럽게 누르며 움직였는데, 그때마다 철컥철컥 마찰음이 들려왔다.

트랩이 해제되는 소리 같았다.

계단은 그리 길지 않았다.

계단이 끝나고 비좁은 통로가 눈앞에 펼쳐지자, 도르네프는 등불을 바닥에 내려놓고 빈손으로 움직였다.

더는 주변이 어둡지 않았다.

통로 벽 사이사이로 촘촘히 박혀 있는 발광석들이 보인다. 반짝이는 발광석의 빛무리에 절로 탄성이 흘러나왔다.

마치 별들이 반짝이는 장면 같아서 어두운 우주를 산책하는 느낌마저 들었다.

언제 통로 끝에 다다랐는지도 모른 채 나는 눈앞에 펼쳐진 몽환적인 광경에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대장장이 정원에 도착했다.

“엄청나네요.”

공간은 그리 넓지 않았다.

휙 훑어보면 한눈에 들어올 정도였는데, 그래서 공간을 꽉 채운 유리 세공품들이 더 화려하게 눈을 어지럽혔다.

다양한 꽃 형태로 세공된 백여 점의 유리 장식품들이 공간을 아름답게 채웠다.

생기라곤 없었지만 발광석과 어우러져 몽환적인 분위기를 연출했는데, 장인들의 정성 어린 손길이 한 땀 한 땀 엿보이자, 어째서 이곳이 대장장이의 정원이라 불렸는지 알 것 같았다.

펜리가 유리 세공품들을 툭툭 건드리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하나만 가져가도 수만 골드는 받을 것 같은데.”

이 펜리 년은 뭐든 돈으로밖에 안 보이는 모양이었다.

우리는 곧 정원 중심에 우뚝 선 거대한 유리 세공품에 집중했다.

그 세공품 곁에 서 있는 도르네프를 본떠 실사판으로 만든 것처럼 섬세하게 세공된 드워프 형태의 유리 세공품이었다.

“초대 가주시네.”

도르네프는 세공품 앞에 서서 가볍게 예를 표한 후 세공품을 장식한 물건들을 하나하나 가리켰다.

“이 물건들이 정원의 보물들이지.”

화려하다 못해, 기가 질릴 정도로 꾸며진 모습이었다.

투명한 드워프 세공품 위로 장비와 장신구들이 가득 차 있었다.

양손에 들린 할버드부터, 등과 허리춤에 매달린 다양한 장비들, 그리고 손가락 하나하나에는 알록달록한 색감의 반지들과 팔찌도 눈에 들어왔다.

대장장이 정원에 보물 같은 장비들이 숨겨져 있다고 하더니 정말이었다. 난 눈앞의 장비들을 이 한마디로 정의했다.

지린다.

펜리조차 홀린 듯 보물들을 살피곤 나직이 중얼거렸다.

“경매로 팔리면 영지 몇 개는 거뜬히 사겠어.”

“…….”

이년은 포기를 모른다.

그녀의 손이 홀린 듯 올라가는데, 도르네프가 거칠게 손목을 낚아채곤 어림없다는 듯 콧바람을 불었다.

“암고양이, 네 몫은 없어.”

“키만큼 쪼잔하게 구네. 가볍게 만져 볼 순 있잖아?”

“저 녀석의 부탁이 아니었으면 넌 이곳에 들어오지도 못했어. 자격이 없으면 바라보는 것에 만족하라고.”

“…….”

도르네프를 노려본 것도 잠시, 그녀의 눈은 다시 보물로 멍하니 향했다. 그런 펜리를 놔둔 채 도르네프는 날 바라보며 짧게 턱짓을 했다.

“골라.”

“……네? 지금요?”

“물건의 가치를 살피는 심미안도 황금패의 자격 중 하나다. 능력은 알려줄 수 없어. 원하는 걸 하나 가져가.”

무슨 시장 좌판에 깔린 물건처럼 골라 가라 말하는데, 눈앞의 장비들은 무려 몇 대에 걸친 전대 가주들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보물들이었다.

‘능력을 알려줄 수 없다라….’

다행인 건 시간제한이 없다는 거다.

난 드워프 세공품 주변을 천천히 돌며 장비들을 하나하나 살폈다.

신기하게도 이 중 눈에 익숙한 장비들도 보였다.

‘꿈에서 봤던 도르네프의 장비도 있어.’

특히 저 황금 갑주와 검게 물든 카이트 실드가 눈에 익었다.

꿈에선 망가진 형태였지만, 장비가 워낙 화려해서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학살자에게 붙잡혀 목이 떨어지는 그 순간까지 존재감을 드러냈던 장비들.

단순한 꿈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꿈에서 봤던 장비들이 이리 실존해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아레나가 더럽게 세긴 했나 보네.’

이런 장비들을 들고, 검은 장미까지 합세했는데 공멸이라니.

완성된 키메라 육체와 심장의 조합이 얼마나 무시무시했는지 장비를 보니 피부로 느껴졌다.

“이 아까운 장비들을 어째서 보관만 하십니까? 잘만 사용하면 엄청난 힘이 될 터인데.”

“제대로 된 주인을 만나기가 어렵거든.”

“네?”

“이 장비 하나하나가 역대 가주들이 공들여 만든 것들이야. 문제는 사용자에 대한 배려가 쥐꼬리만큼도 없는, 그저 지들 잘난 맛에 제작된 물건들이란 거지. 전부 다루기가 까탈스럽고 위험하기 그지없어. 나조차 저 중에 한두 개만 다뤄도 과부하가 올 정도야.”

아, 그래서 갑옷과 방패만 사용했던 건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물건을 다시 보는데, 펜리의 표정이 내 눈에 들어왔다.

그녀의 눈초리가 심상치 않았다. 눈빛에 진득한 탐욕이 느껴진다고 해야 하나?

뭘 보는 거지?

시선을 쫓아가니, 벨트가 눈에 들어왔다.

붉은 루비가 박힌 벨트였다.

루비의 크기만 보면 이 중 가장 비싸 보이긴 했다.

표정을 보니, 불꽃처럼 팍! 꽂힌 것 같은데, 이러면 내 선택지에서 벨트는 일단 보류다.

곧 던질 미끼를 콱 물 것 같거든.

그리고 내 눈에는 벨트보다 더 시선을 사로잡는 무기가 있었다.

드워프 세공품 위에 장식된 장비 중 세공품과 가장 언밸런스한 무기라 더 눈에 확 띄었다.

딱 보는 순간 ‘이거다!’라는 확신이 들었다.

“전 이걸로 하겠습니다.”

고민 없이 한 장비를 움켜쥐자, 도르네프는 나와 장비를 번갈아 보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예상치 못했다는 표정이었다.

“자네 활은 쏠 줄 아나?”

내가 선택한 건 멋들어진 바디를 자랑하는 거대한 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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