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흡혈의 고리
활을 쏠 줄 아냐고?
당연히 현실에선 활을 실제로 구경해본 적도 만져본 적도 없었다. 내가 제대로 다뤄본 장거리 무기라곤 어릴 적에 가지고 놀던 새총이나, 군대에서 쓰던 총기류 정도?
하지만 난 도르네프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이곤 활 쏘는 자세를 잡았다.
난 아니어도 암살자인 이 몸은 기억하거든.
착 감기는 매끄러운 그립감.
활대의 부드러운 곡선 바디는 순백의 눈이 내린 듯 매끄럽고 은은한 광택이 흘러나왔다.
한눈에 봐도 성스러운 느낌이 물씬 풍긴다.
‘응? 근데 활시위가 없네?’
뒤늦게 그 사실을 인지한 순간, 활대에서 강력한 흡착이 느껴지더니 손바닥에 진득한 통증이 올라왔다.
뭐지…?
마치 빨판에 흡착되어 피가 빨리는 듯한 이 불길한 느낌은?
“……시발.”
근데 진짜였다.
활대를 움켜쥔 팔이 서서히 검붉게 변색되더니 미라처럼 말라 갔다. 동시에 활대 위로 가느다란 활시위가 소환되었다.
붉은 실선.
마치 내 피로 만들어진 시위 같았다.
성스러움은 개뿔, 순박함을 가장한 사기꾼 새끼에게 당한 기분이었다.
그 광경을 멍하니 보고 서 있자, 펜리가 키득키득 비웃고는 낄낄대기 시작했다.
“딱 너 같은 거 골랐네.”
“……뭐요?”
“너 여기저기에 빨대 꽂는 거 잘하잖아. 그 주인에 그 무기를 고른 거지.”
뭐, 이년아?
무기의 위력을 알아볼 첫 대상이 정해진 것 같았다. 난 그대로 붉은 실선을 쭉 잡아당겼다.
우웅―!
활시위 사이로 생성되는 핏빛 화살.
일단 화살이 불필요하다는 건 확인했고.
이대로 펜리 년의 머리를 날려버리려고 했는데, 화살에서 느껴지는 기운에 잠시 멈칫했다.
잠깐 이거….
‘인챈트가 실리네?’
성력의 기운을 화살에 천천히 밀어 넣자, 화살에 변화가 생겼다.
핏빛이 황금빛으로 물든다.
어느덧 완성된 시위에 걸린 황금빛 화살.
화살의 변화에 도르네프가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속성 변화? 이런 능력도 있었나?”
“저 활의 능력이 뭔데?”
“속성 흡혈.”
주인의 피를 흡혈하여, 주인이 가진 속성을 화살로 소환하는 변태 같은 활이라고 했다.
피를 뽑아?
확실히 착용자에 대한 배려는 개나 줘버린 물건이었다.
이딴 걸 왜 만든 거야?
전대 드워프 중에 괴짜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위력은 흡혈의 양에 따라 달라져. 다만, 최소로 요구되는 양이 존재하지. 그 위력은 마력탄 정도?”
“최소 위력이 마력탄? 괜찮은데?”
“계속 사용할 수 있다면 괜찮겠지.”
인간 기준으로 서너 발이면 빈혈이 올 정도라고 했다. 빈혈이 오면 제대로 된 전투가 불가능하다. 어지러운데 무슨 칼질을 하겠어.
서너 발 쏜 후에 튀어야 한다는 뜻인데, 마력탄 서너 발로는 2성도 죽이기 힘들었다.
가성비가 무슨 레전드급 민폐 된장녀 수준이었다.
“가성비가 쓰레기네.”
“아니, 그냥 쓰레기야. 꽝도 이런 꽝이 없거든.”
“비주얼은 괜찮은데?”
“함정이야. 겉만 화려한 보물 상자를 열었는데, 속이 텅텅 빈, 상자 자체가 가장 비싼 경우지.”
“망한 거지?”
“좆망한 거지.”
“…….”
내 양옆에 착 달라붙어서 놀리듯 두 이종 연놈들이 대화를 이어나갔다. 하지만, 내 귀에는 그 대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뽑기 실패로 인한 정신적 멘붕?
이 세계에 떨어진 후 내가 겪은 불운 스토리를 떠올리면 해맑게 웃으면서 넘어갈 수 있다.
난 지금 움켜쥔 활의 잠재력을 계산하고 있었다. 오직 나만이 한계 이상으로 끌어올릴 수 있는 활의 능력 말이다.
‘이거 잘 쓰면 대박일 것 같은데.’
활대를 잡았던 팔이 어느새 혈색을 되찾고 있었다. 피가 뭉텅이로 빠지자 심장이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는데, 활의 흡혈보다 심장의 회복 속도가 월등히 높은 모습이었다.
분명 피를 흡혈한 만큼 그 위력이 강해진다고 했다.
‘퍼스트 어택에서 활의 최대 출력을 낼 수 있다는 말이잖아.’
피를 흡혈해도 내겐 레토니칼스의 심장이 있었다.
좀비 같은 회복력으로 난 온종일 헌혈을 해도 큰 타격이 없었다. 첫 공격에서 활이 낼 수 있는 최대 파워로 화살을 생성할 수 있다는 뜻.
게다가 이 활은 인챈터인 나와 궁합이 아주 좋았다. 당장 화살에 관통만 인챈트해도 기본 위력의 두세 배를 더 뽑아낼 수 있었다.
무엇보다,
내가 활을 선택한 진짜 이유는 다른 것에 있었다.
‘신명의 화살을 숨길 수 있겠어.’
내 고유 능력인 신명 사냥꾼.
그중 대표 능력인 ‘신명의 화살’을 이 활과 섞어 사용한다면 상대가 내 고유 능력을 알아차리기 힘들 것 같았다.
이 활의 능력이라 착각하게 할 수도?
남이 보기엔 꽝인 선택 같지만, 내겐 최고의 궁합을 지닌 무기나 다름없었다.
“이 활, 이름이 뭡니까?”
“흡혈의 고리.”
“흡혈의 고리? 무슨 활 이름에 고리란 이름이…….”
“활대에서 손을 떼봐.”
도르네프의 말대로 활대를 놓자, 활이 잠시 허공에 부유하더니 고리 형태의 팔찌로 줄어들었다.
순백의 색을 지닌, 민무늬 팔찌였다.
그것을 낚아채 왼쪽 팔목에 착용하자 부드럽게 착 감기며 딱 맞게 줄어들었다.
“어때, 지금 심정이?”
“하나만 물어봐도 됩니까?”
“교환은 안 돼.”
“보기와 달리 눈치가 빠르시네요.”
“저 암고양이와 엮이다 보면 없던 눈치도 생기게 돼. 뒤통수를 수차례 처맞거든.”
“뜻이 확고하시니, 어쩔 수 없죠.”
“아쉬운 눈치가 아닌데?”
아쉬움?
아니, 난 이 흡혈의 고리가 아주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펜리 년이 보고 있어서 티를 내지 않고 연기에 들어갔다. 입맛을 다시곤 포기한 듯 드워프 세공품 앞에 주저앉았다.
“뭐 기회가 한 번 더 있으니까요. 그걸로 만회해야죠.”
“그 기회가 마치 공짜인 것처럼 말하는군. 목숨을 걸어야 할 거야.”
“각오는 됐습니다.”
“폐광산의 저주, 풀 수 있겠나?”
“네. 자신 있습니다.”
자신? 솔직히 잘 모르겠다.
소설과 현실은 괴리가 너무 크다는 걸 알아버렸거든.
알고 있는 것과 실천하는 건 하늘과 땅 차이였다.
그래서 보험이 필요하다.
펜리 체이서란 우량주 보험 말이다.
내가 자신 있게 외친 건, 당연히 펜리를 의식한 것이었다.
자, 미끼 투척이다.
난 펜리 앞에서 결심한 표정을 짓고는 벨트를 콕 집었다.
큼지막한 루비가 중앙에 박힌 멋들어진 벨트. 조금 전 펜리의 시선을 사로잡은 장비였다.
“황금패를 얻으면 저 루비 벨트는 제 것입니다.”
그 말에 펜리의 표정이 확 구겨졌다.
자기 것도 아니면서 벌써 사탕을 빼앗긴 아이의 표정이었다.
하여간 욕심은.
“네놈이 저 벨트가 뭔지 알고?”
“안 들립니까? 벨트가 지금 절 부르고 있습니다. 영혼의 동반자처럼.”
“…이 또라이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표정은 전보다 더 구겨졌다.
당연했다.
영혼의 동반자.
이딴 헛소리는 훗날 저 벨트의 주인이 된 펜리가 했던 말이었으니까.
다크 로즈를 빼앗겼을 때의 감정을 또 느끼고 있을 거다. 생각해보니, 내가 펜리를 더 괴롭히는 느낌인데?
근데, 쟤는 그래도 된다.
‘어차피 한참 후에나 갖게 되는 물건이니까. 지금 벨트를 얻게 된다면 앞으로 활동에 큰 도움이 되겠지.’
6성이 된 펜리는 폐광산에 대장장이의 정원이 있다는 사실을 죽기 전의 도르네프에게 들어 알고 있었다.
다만, 도르네프는 조건 한 가지를 덧붙였다.
더는 강해지기 어렵다고 생각이 들 때 대장장이 정원을 찾아갈 것.
그 기준이 펜리에겐 6성의 끝자락이었고, 한 달의 수색 끝에 대장장이 정원을 찾게 된다.
베네타의 몰락 이후 숨겨진 정원의 보물들이 모두 펜리의 소유가 된다는 뜻이었다. 그중 펜리가 사용한 장비는 저 벨트 하나가 유일했다.
마력의 루비 벨트.
주인의 마력을 한 단계 증폭시켜주는 효과가 있었다. 마력이 없는 내겐 하등 쓸모없는 장비.
그럼에도 내가 탐욕의 액션을 취하는 척한 건 그녀를 홀라당 낚기 위함이었다.
내 액션이 먹힌 것일까.
펜리 년이 내 표정을 살피기 시작했다.
그녀는 위험과 보상을 두고 줄다리기를 시작했다.
펜리는 짧게 혀를 찼다.
‘저 표정, 재수 없단 말이지.’
폐광산은 베네타의 전대 가주들과 정예 기사단이 묻힌 장소였다.
위험천만한 사지(死地)다.
근데, 그 사지로 들어가는 놈치곤 표정이 지나치게 여유로웠다.
정말 자신 있는 건가?
생명의 징표로 녀석에게 크게 덴 경험이 있어서 의심의 씨앗을 버릴 수가 없었다.
하지만 눈앞의 인간은 쓸데없는 곳에 목숨을 내던지는 멍청이도 아니었다.
생존을 무엇보다 첫 번째로 생각하는 빈댕이 같은 놈.
그런 놈이, 폐광산에 스스로 들어간다?
‘뭔가 있다는 건데.’
그게 뭔지 물어보고 싶지만, 약은 놈이라 제대로 말해줄 리 없었다.
포기하자니, 저 황홀한 빛을 머금은 루비 벨트가 눈에 아른거린다.
다크 로즈처럼 자신의 것이란 느낌이 팍팍 왔다. 그런데 저놈에게 또 빼앗길 위기다.
고민은 그리 길지 않았다.
저 녀석은 죽을 것 같으면 별 지랄을 다 해서라도 폐광산에 안 들어갈 놈이었다. 자진해서 간다는 건 위험을 회피할 수단이 있거나, 뭔가를 알고 있다는 뜻.
난 펜리의 표정 변화에 속으로 끌끌 웃었다.
‘곧 낚이겠네.’
머리 굴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렸다.
그녀의 경우는 판단이 어려운 정보들을 잔뜩 던지면서 낚아야 했다. 머리를 잘 굴리는 타입은 판단이 어려우면 자신이 바라는 쪽으로 해석하기 때문이다.
역시나,
“전에 말한 그 거래 아직 유효하지?”
던진 미끼를 그녀가 콱 문 순간이었다.
* * *
흡혈의 고리를 선택하면서 대장장이 정원에서 볼일은 끝이 났다.
이제 폐광산의 중심부로 향할 시간.
그 위치를 묻는 내 질문에 도르네프는 밑바닥을 가리켰다.
“이 밑이요?”
설마, 폐광산 위에 대장장이 정원을 올린 거야?
“입구는 없습니까?”
“막힌 벽 못 봤어? 광산 입구로 더는 출입이 불가능해.”
“입구를 완전히 무너트린 겁니까?”
“저주가 새는 것만큼은 막아야 했으니까.”
“저주가 아닐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게 뭐든 밖으로 나오면 베네타에 재앙이 시작되겠지.”
군주가 직접 이끈 최정예 전력이 세 차례나 들어가서 몰살당한 장소였다.
최후의 수단은 무조건 틀어막는 것뿐이었다.
도르네프는 정원 한쪽에 은은히 발광하는 꽃밭으로 걸어갔다.
유리로 세공된 아름다운 꽃 세공품들의 향연.
도르네프는 그중 검은색을 띤 꽃 세공품을 조심스레 집곤 천천히 뽑아 들었다.
그게 신호가 된 것인지, 조금 전 도르네프가 가리킨 바닥이 천천히 꺼지기 시작했다.
그그그그그극―!
계단은 없었다.
시커먼 구멍뿐이었다.
한 사람이 몸을 구겨서 겨우 들어갈 정도로 구멍은 비좁았다.
도르네프는 어디선가 두꺼운 밧줄을 가져와 구멍 밑으로 밀어 넣었다.
밧줄이 끝없이 들어가는 것이 밑이 무척 깊은 모양이었다. 반대쪽 밧줄을 스스로 허리에 묶은 도르네프가 말뚝을 박은 것처럼 서더니 우리 쪽을 바라봤다.
“내려간 즉시 밧줄은 회수될 거야. 꺼진 바닥도 막힐 거고.”
“출구는 이곳뿐입니까?”
“이곳뿐이다.”
“어떻게 신호를 보냅니까?”
“시간을 맞춰야지.”
도르네프는 내게 작은 배낭을 건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