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당에게서 살아남는 법-89화 (89/130)

89화 폐광산의 저주

“배낭이… 묵직하네요?”

“식량과 필요한 것들을 챙겼어. 특히, 이 모래시계.”

“모래시계?”

“배낭 안에서 꺼내 봐.”

내가 꺼낸 모래시계는 도르네프의 것과 똑같은 것이었다.

모래가 바닥으로 떨어지는 데는 대략 사흘 정도가 소요된다고 했다. 신기한 건 시계를 뒤집고 흔들어도 모래가 한 방향으로 변함없이 흘러간다는 것이었다.

중력의 영향을 받지 않는 것 같았다.

한쪽 공간으로 모래가 전부 떨어졌을 때, 출구가 다시 열릴 것이라고 했다.

“낌새가 이상하면 출구는 바로 닫힐 거야. 그러니 미리 도착해서 기다리고 있어.”

“우리가 나타나지 않으면 어찌 됩니까?”

“떨어진 모래가 반대편 바닥으로 다시 옮겨질 때까지 기다려야지. 그때 한 번 더 출구를 열 거야. 그때도 나타나지 않으면 난 돌아갈 거다.”

“그 뜻은….”

“출구는 폐쇄될 거야.”

사흘 뒤에 한 번. 그리고 다시 사흘 뒤에 마지막.

배낭에 식량이 넉넉히 든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철저하네요.”

“전에도, 그 이전에도, 이렇게 해왔으니까.”

광산을 폐쇄하기 직전까지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며 만들어진 규칙이라고 했다.

지나칠 정도로 저주를 경계하는 모습인데, 희생자의 규모를 생각하면 충분히 이해 가능한 모습이었다.

물론, 펜리에겐 그 이해를 바라면 안 된다.

“폐쇄는 얼어 죽을, 안 열어주면 출구를 부숴버릴 거야.”

“괜히 힘 빼지 마.”

“그 정도야?”

“네년이 부술 것 같았으면 내가 같이 오지도 않았겠지.”

“야. 들었지? 네놈의 무덤이 될 수도 있어.”

내 무덤? 네 무덤은 생각 안 해봤니?

펜리의 시선이 날 향했다.

자신 있냐고 묻는 표정인데,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그럴 거면 정보라도 알게 6성 시절에 폐광산을 살짝이라도 공략해보지 그랬어.

대장장이 정원을 발견한 펜리는 보물들을 싹쓸이한 뒤 폐광산 진입까지 시도했는데, 저주와 마주하자 그녀는 ‘돌파’가 아닌 ‘공략 포기’를 선택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동기가 없었으니까.’

학살자의 영토가 된 토바른 지역에 더는 펜리가 지켜야 할 것이 없었다. 그 탓에 난 저주의 정체는 알고 있지만, 공략법은 모른다.

그러니, 그리 쌍심지를 켜고 보지 말라고.

“쫄리세요? 그럼 포기하시든가.”

“…햇병아리가 많이 컸네. 그런 말도 할 줄 알고. 뒈지기 전에 얼른 내려가지?”

“루비 벨트가 탐나긴 하나 봅니다?”

“지랄.”

찰진 욕설과 함께 발길질이 날아왔다.

엉덩이를 처맞았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암흑 세상에 빨려간 뒤였다.

추락한다?

이 전개, 제단 구덩이에서도 한 번 경험했던 건데.

또 당한 건가?

위쪽에서 펜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밧줄 안 잡으면 뒈진다는데?”

“…헉!”

정신을 차리고 다급히 양손을 뻗어 벽을 받치고 섰다. 공간이 좁아서 가능한 묘기다.

그 뒤로 밧줄을 잡고 위를 노려보니, 펜리 년이 천천히 밧줄을 타고 내려오고 있었다.

망할 년아, 죽을 뻔했잖아!

그 말을 내뱉기도 전에, 펜리 년이 위에서 내 머리를 꾹꾹 밟아대기 시작했다.

“…뭐 하는 짓입니까?”

“나무늘보냐? 얼른 안 내려가?”

“자꾸 이러면 가만히 안 있습니다?”

“지금 뒈질래, 내려갈래.”

“네네. 갑니다.”

훗날 눈물 콧물 질질 싸게 해줄 것이라 다짐하며 밧줄을 타고 주르륵 내려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빛 하나 없는 작은 공간에 불과했다.

굳이 밧줄이 없어도 두 팔을 뻗고 버티며 내려갈 수 있을 정도.

하지만 그것도 더 내려가니 불가능해졌다.

디딜 곳도 없고, 뻗은 벽도 사라졌다.

그네처럼 휘청휘청하는 뻥 뚫린 공간에 던져졌는데, 주변은 암흑천지라 아무것도 안 보였다.

“바닥이 어디쯤이야?”

마치 어둠 속 바다 위에 던져진 느낌이다.

작은 목소리도 메아리처럼 울렸는데, 느낌이 오싹했다.

밧줄 하나에 기대어 내려가는 속도를 서서히 높이는데, 갑자기 주변이 확 밝아졌다.

위쪽을 올려다보니, 펜리가 눈부신 마법구를 소환했다. 마법구를 밑으로 던지자, 빛의 구체가 천천히 허공을 부유하며 주변 시야를 비추기 시작했다.

“…더럽게 넓네.”

거대한 홀에 갇혀 둥둥 떠다니는 느낌이었다.

주변은 세월이 엿보이는 가파른 암벽으로 둘러싸였고, 밑으론 뻥 뚫린 공간이 이어졌다.

난 구체를 따라 한참을 내려와야 했다.

예상보다 더 늦게 바닥에 도착했다.

밧줄을 놓고 위를 올려다보니, 밧줄은 까마득한 천장의 작은 구멍과 이어져 있었다.

우리가 나온 구멍으로, 도르네프의 말이 사실이라면 저 구멍이 폐광산을 벗어날 유일한 탈출구였다.

‘밧줄을 내려주지 않으면 확실히 복귀가 쉽지 않겠어.’

잠시 후, 뒤따라 착지한 펜리가 밧줄을 툭툭 잡아당기자, 밧줄이 스르륵 위로 올라가더니 잠시 후 구멍 속으로 사라졌다.

설마, 했는데 정말 안 내려오네.

도대체 갑옷은 왜 입은 거야?

밧줄을 회수한 도르네프는 이제 사흘간 정원에 머물며 우리를 기다릴 것이다.

이젠 우리 차례다.

베스트 시나리오는 사흘 안에 임무를 끝내고 이곳에 머무는 것이었다.

“지도 가져왔지?”

“네.”

한참 전에 폐쇄된 광산이지만, 내부 구조가 변한 적이 없으니 가져온 지도는 유용했다.

구체의 빛에 기대어 지도를 살폈다.

우리가 서 있는 장소는 채굴한 광물을 보관하는 장소였는데, 지금은 텅 비어서 거대한 공터로 남아 있었다.

우리가 향할 장소는 저주가 시작됐다는 광산 중심부.

위치 파악이 끝나자 지도를 품에 넣었다. 가는 길이 단순해서 더는 살펴볼 필요가 없었다.

“한 길로 쭉 이어진 구조라 헤맬 일은 없을 것 같네요.”

“무슨 일이 터질 줄 알고.”

“무슨 뜻입니까?”

“배낭 내놓으라고.”

“왜요?”

“내가 한두 번 당해?”

이 펜리 년이 라웁 숲에서 일주일 정도 굶겼더니, 트라우마가 생겼나.

식량을 사수하려는 모습인데, 어쩌겠나. 약한 게 죄지.

옜다. 배낭 셔틀이나 해라.

스스로 정신 승리를 쟁취한 뒤 광산의 내부 구조를 머릿속으로 떠올렸다.

“방향부터 잡죠.”

“터널만 찾으면 되지?”

“네. 밝기를 더 키울 수 없습니까? 주변을 살피기엔 빛이 너무 약한데.”

“마력 낭비는 사절이야.”

펜리는 범위를 늘리는 대신 구체를 벽 끝으로 붙인 후 벽을 따라 빠르게 이동시켰다. 큰 원을 그리며 움직이던 구체가 잠시 후 거대한 터널 앞에 멈춰 섰다.

3미터 높이의 터널이었는데, 터널을 발견하자 우리는 고민 없이 터널로 발걸음을 옮겼다.

중심부와 이어진 길은 저 길 하나뿐이었다.

‘미로가 아니니 시간을 낭비할 일은 없겠어.’

만약 도미닉 연구소의 제단 구조처럼 미로로 복잡했다면 임무를 해결하기에 사흘은 빠듯했을 것이다.

터널 안으로 진입하자, 펜리의 머리 위로 구체가 둥둥 떠다니며 앞을 밝혔다. 주변을 살피니 눈에 띄는 것이 있었다.

“버려진 곡괭이들이 많네요.”

터널 곳곳에는 광물 채굴에 필요한 집기들이 너부러져 있었다. 뭔가 사건이 터졌고, 집기들을 버리고 도망친 흔적이었다.

터널을 따라 쭉 걷던 우리는 잠시 멈춰 섰다.

버려진 낡은 방패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광산 채굴 장비와 거리가 먼 물건.

펜리가 방패를 살피곤 고개를 끄덕였다.

“기사단 장비다.”

흙을 털어내니 방패 위로 베네타의 문양이 나타났다.

전(前)대 가주들이 이끌고 온 병력의 흔적을 발견하자, 우린 속도를 줄이고 흔적을 쫓기 시작했다.

흔적은 앞쪽으로 계속 이어졌다.

부러진 검과 도끼, 뜯긴 방어구들이 바닥에 버려져 있었다.

펜리는 흔적들을 하나하나 살피며 앞장섰다. 흔적을 살피는 실력이 나보다 훨씬 뛰어났기 때문이다.

우린 조용히 그리고 최대한 천천히 터널의 더 깊숙한 곳으로 발을 들였다.

제법 지루한 시간이 이어지고, 흔적을 둘러보던 그녀가 미간을 살짝 좁히곤 조용히 입을 뗐다.

“이상해.”

“뭐가 말입니까?”

“버려진 장비들은 무더기인데, 그 주인들의 흔적이 없어.”

“시체를 말하는 겁니까?”

고개를 끄덕인 펜리는 마른 흙을 집곤 슥슥 비볐다.

붉다.

핏자국이었다.

“근처에서 큰 전투가 벌어졌어. 누구랑 싸운 거지?”

“눈에 띄는 흔적이 있습니까? 덩치 큰 괴물들이라든가, 특별한 것 말입니다.”

“아니, 그런 흔적은 없어.”

“모두 똑같은 흔적입니까?”

“전부 드워프의 발자국들밖에 없어.”

그 답에 난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 변수 없이 내용대로 흘러가는 것 같았다.

“그럼, 드워프들끼리 싸운 거네요.”

“동족이랑? 미치지 않고서야…….”

펜리는 말을 흐리곤 잠시 멈칫했다. 아군끼리 싸운다?

전혀 생각지 못했던 발상이었다. 전투 흔적을 손으로 천천히 쓸어 보던 그녀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날 바라봤다.

“너, 뭔가 알고 있지?”

“드워프들의 흔적밖에 없다면서요? 그럼 드워프들 짓이겠죠.”

“설마 저주? 드워프들이 뭐에 홀렸거나 미쳤다는 뜻이야?”

“비슷한데, 좀 다릅니다.”

그때,

스르렁― 스르렁―

뭔가 바닥을 끄는 소리가 들려왔다.

터널 앞뒤로 동시에 흘러나왔는데 오싹한 감각이 올라왔다.

주변을 둘러봤지만, 워낙 어두워서 소리의 진원지를 파악하기 힘들었다.

펜리와 나는 자연스레 등을 맞대고 섰다.

“지금껏 단 한 구의 시체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럼 둘 중 하나겠죠.”

“말해봐.”

“싸워서 이긴 쪽이 죽은 이들을 묻어줬다거나…….”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진짜를 말해.”

난 조용히 앞을 가리키며 말했다.

“병력 전체가 몰살당하고 시체들이 스스로 움직인 거죠.”

펜리는 내가 가리킨 방향을 보지 않았다. 이미 그녀의 앞쪽에서도 비척거리는 인영들이 잡혔기 때문이다.

어둠을 뚫고 천천히 다가오는 무언가.

펜리가 짧게 혀를 차곤 응축된 구체를 터트린 순간 터널 전체가 대낮처럼 밝아졌다. 우리는 신음을 흘리곤 전투 자세를 잡았다.

그어어어어어―!

캬아아아아아!

터널을 꽉 채운 무리들이 썩은 몸뚱이를 질질 끌며 모습을 드러냈다.

대부분 드워프였고, 이종족인 수인도 일부 눈에 들어왔다.

하나같이 비주얼은 끔찍했다. 눈동자는 전부 새하얗게 뒤집혔고, 온몸의 살점이 썩거나 떨어져 뼈 마디마디가 드러났다. 벌어진 상처에선 핏물 대신 진물이 흘러나왔다.

죽은 이종족들의 행렬.

“난쟁이 녀석이 눈앞의 광경을 봤어야 했는데.”

“왜요?”

“이 정도로 개판이면 황금패를 추가로 더 받을 수 있을 거 같거든.”

“…이 상황에서도 그 얘깁니까?”

전부 이성이 사라진 괴물의 모습이었다. 소설에선 저들을 저주받은 존재들이라 표현했지만, 난 저들을 간단히 한 단어로 표현했다.

좀비(zombie).

이보다 어울리는 표현이 더 있을까?

카아아아아―!

“뭐야?”

“으앗! 바, 바닥이요! 바닥!”

앞뒤로 나타난 좀비 무리가 끝이 아니었다.

저들의 등장이 신호가 된 듯, 바닥 곳곳에서 썩은 손들이 우수수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우리가 서 있던 곳부터 지나온 곳까지, 그리고 앞으로 지나갈 곳까지.

터널 흙바닥 전체가 비명을 질러대며 좀비들이 하나둘 몸을 일으켰다.

좀비들의 등장은 예상했다.

그런데,

“…뭐가 이렇게 많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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