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당에게서 살아남는 법-93화 (93/130)

93화 염원의 반지(3)

“으…….”

정신이 든 순간 지독한 갈증이 찾아왔다.

뭐가 어떻게 된 거지?

반지와 접촉을 했고, 레토니칼스의 말에 반지를 착용한 순간 의식이 날아갔다.

지금 상황은?

의문도 잠시, 메마른 입술이 가뭄의 단비처럼 촉촉이 젖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시원한 물이 입안으로 들어왔다.

금붕어처럼 입을 뻐금뻐금하며 목을 축이고 있는데,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주 지랄을 해라.”

“…응?”

“어떻게 물 마시는 모습까지 이리 밉상일 수 있지?”

물을 받아마시며 힐끔 시선을 돌리니 펜리가 쭈그린 채 앉아 있었다.

세상에 짜증이란 짜증은 얼굴에 다 담은 표정인데, 행동은 물을 잘 마실 수 있게 물병과 내 얼굴을 손으로 받치고 있었다.

설마, 이런 게 츤데레…?

펜리가 츤데레의 성격이었나?

하지만 그런 기대도 펜리가 물병을 내 코 위에 쏟아부으면서 사라졌다.

“커억!”

코로 물 들어갔다. 망할 년.

“정신 차렸으면 일어나. 한가롭게 누워 있을 시간 없으니까.”

“뭐가 어떻게 된 겁니까?”

“뭐가 어떻게 돼. 아직도 ㅈ된 상황이지.”

펜리는 내 앞에 모래시계를 던졌다. 자리에 앉아 시계를 살펴보니 바닥 부분이 모래로 거의 다 차 있었다.

사흘 후에 모래가 다 찬다고 했으니 도르네프와 약속했던 사흘이 다 된 셈이다.

“오늘이 사흘째다.”

역시나 내 생각이 맞았다.

‘사흘 가까이 의식을 잃고 있었다고?’

입술이 말랐을 때 제법 시간이 흘렀을 것이라 예상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난 염원의 반지를 살폈다.

색감은 먹물에 담근 것처럼 여전히 칙칙했다. 다만, 풀풀 풍기던 죽음의 아우라가 눈에 띄게 옅어졌다.

반지의 힘이 점점 약해지고 있다는 건데, 레토니칼스의 말이 사실이었다.

[반지에 담긴 염원은 찌꺼기뿐이라 금방 사라질 거다.]

‘그걸 어떻게 압니까?’

[내가 담았으니까.]

반지의 주인이 그라는 것이 놀란 것도 잠시, 반지에 담긴 염원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레토니칼스는 잠시 침묵하더니 한 마디를 내뱉었다.

[‘죽음(Death)’이다.]

무의식 속에서 레토니칼스와 제법 긴 시간 대화를 주고받았는데, 찰나에 불과했던 그 시간이 현실에서 사흘이나 흐른 뒤였다.

시간 낭비라고 생각은 들지 않았다. 저주에 대한 힌트를 얻었으니까.

‘반지의 염원이 사라지면 죽은 자들은 흙으로 돌아간다고 했지.’

일단 확인이 필요했다.

“죽은 자들은 어찌 됐습니까?”

분위기를 살폈는데 조용한 것을 보니, 주변에 좀비 떼는 없는 것 같았다.

대신 펜리의 얼굴만 간신히 알아볼 정도로 시야가 어두컴컴했다.

마법 구체를 왜 소환하지 않은 거지?

그 의문은 펜리가 가방에서 횃불을 켜면서 깨닫게 됐다.

난 펜리를 보며 나직이 신음을 흘렸다.

“…몰골이.”

“전쟁터에서 구른 병사 같지? 내가 이렇게 된 데에는 네놈 지분이 100%야. 전부 네놈 탓이라고 빌어먹을 새끼야.”

“…….”

뭐라 맞장구쳐주고 싶은데, 피투성이가 된 그녀를 보니 말문이 턱 막혔다.

거친 말투는 똑같지만 두 귀가 축 늘어진 것처럼 말하는 모습에 힘이 하나도 없다.

시무룩한 고양이를 보는 것 같았다.

다행인 건 그녀의 피가 아니라는 거다.

검게 변색한 썩은 피.

그리고 악취.

죽은 자들의 피였다.

그놈들이랑 얼마나 뒹군 거야?

“죽은 자들에게 변화는 없었습니까?”

“변화? 하루 전이라면 모를까. 지금은 나도 몰라.”

“네? 뭔 소립니까?”

펜리는 횃불로 한 곳을 가리켰다.

흐릿한 시선 속에 크게 무너진 바위 더미가 보였다. 사람 크기의 바위들이 한가득 쌓여있다. 위쪽을 살펴보니 암벽을 무너트려 바위 더미로 입구를 막은 것 같았다.

“여긴…….”

“우리가 처음 발을 디뎠던 장소.”

“광물 저장소 말입니까?”

“그래.”

“그럼 저곳은 터널이겠네요?”

“맞아. 놈들의 접근을 막으려고 무너트렸지.”

하루 전에 암벽을 무너트려 입구를 틀어막은 뒤 줄곧 버텼다고 했다.

펜리는 내게 횃불을 쥐여줬다.

뭐지?

횃불을 건넨 그녀의 표정에서 후련함을 읽었다. 어깨에 짊어진 짐을 모조리 내려놓은 표정이랄까.

어째 느낌이 쎄한데?

“이틀 동안 널 업고 다니면서 별짓을 다 했어. 난쟁이 새끼는 문을 열 생각을 안 하지. 죽은 자들은 꾸역꾸역 쫓아오지. 넌 더럽게 무겁지.”

“…….”

“숨어도 보고, 도망도 치고, 싸우기도 했는데 도저히 놈들을 떼놓을 수가 없더라고. 왜인 줄 알아?”

펜리의 눈빛이 사납게 돌변했다. 그녀의 시선은 내가 착용한 염원의 반지에 닿아 있었다.

“저 망할 반지 때문이야. 반지에서 풍겨 나오는 기운이 놈들을 계속 불러오더라고. 광산에 묻힌 시체가 얼마나 많던지, 난 이곳이 광산이 아니라 암매장 무덤인 줄 알았다고.”

“…그래서요?”

“뭘 그래서야, 이전보다 머릿수가 훨씬 더 많아졌지. 터널에 뚫린 작은 틈새나 구멍에서 놈들이 꾸역꾸역 기어 나오는데, 네가 그 소름 돋는 장면을 봤어야 해. 그래야 널 버리려고 했던 내 마음을 이해하지.”

팔뚝에 소름이 돋았다.

날 버리려고 했다니, 무슨 말을 그렇게 살벌하게 해?

“구,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니야. 네 단단한 몸뚱이와 재생력이 아니었으면 나도 위험했어. 긴 터널을 뚫고 오려면 단단한 방패가 필요했거든.”

…방패?

이 엘프년이 설마, 날 고기 방패로 써먹은 거야?

횃불로 몸을 살펴보니 웃옷은 사라지고 바지는 걸레짝이 되어 있었다.

상처는 없는데, 기분이 왜 이리 찜찜하지?

“지금이라도 깨어나서 다행이야. 진짜 위험했거든.”

“지금이 위험한 상황입니까?”

“곧 위험해질 거야.”

펜리는 곰방대를 꺼내더니 깊게 빨아들였다. 뿌연 연기 위로 초록빛이 섞여 나왔다.

그녀는 짧게 혀를 차곤 곰방대에서 엘프석을 툭툭 털어냈다.

“엘프석이 수명을 다했어. 내 마력은 곧 바닥날 거야. 보다시피 주변을 밝힐 구체조차 소환할 마력도 없거든.”

“바위 더미로는 부족합니까?”

“마력이 바닥난다는 건 어딘가에 쓰고 있다는 뜻이겠지? 어디에 마력을 쓰고 있는 것 같아?”

“바위 더미?”

“아니, 너.”

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내 몸 위로 푸른 기운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녀가 내 몸에 걸어놨던 마법이 풀리는 현상 같았다.

쿵―!

그어어어어어―!

“…….”

갑자기 바위 더미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알람을 맞추고 일어난 것처럼 터널 안쪽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미친 듯한 괴성이 터져 나왔다.

한두 마리가 아니다.

난 신음을 흘리며 몸에서 빠져나오는 기운을 살폈다.

이 푸른 기운, 전에 펜리에게 부여받은 적이 있었다.

“…위장(Camouflage)?”

“이성이 없는 존재에겐 효과가 확실한 마법이지.”

“그 효과가 끝났다는 겁니까?”

“말했잖아. 엘프석이 없다고. 반지의 기운을 가리려면 얼마나 많은 마력이 필요한지 모르지? 난 할 만큼 했어.”

“그럼 저 바위들은….”

“고작 바윗덩어리로 놈들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해? 어림도 없지.”

펜리가 내 그림자 위에 섰다.

기분 나쁘게 왜 남의 그림자를 밟느냐고 투덜거리고 싶지만, 난 설마 하는 표정으로 펜리를 바라봤다.

위기에 몰린 엘프년의 패턴이야 뻔하지 않은가.

곰방대를 잠시 만지작거리던 그녀가 내게 물었다.

“너, 그 반지 포기할 생각은 없지?”

“네.”

“단호하네.”

“이유가 생겼거든요.”

“그럼 난 여기까지야. 난쟁이 녀석이 신호를 보낼 때까지 알아서 살아남아. 이젠 내 몸 살필 여력도 부족하니까.”

“…….”

펜리가 내 그림자 속으로 천천히 스며들었다.

매끈한 다리, 호리호리한 허리, 새침한 얼굴이 사라지고, 쭉 뻗은 한쪽 팔만 남은 상황에서 그녀의 손이 엄지로 변하더니 날 추켜세웠다.

이 상황에서 영화 터미네이터가 떠오른 건 왜일까? 그 영화에서 터미네이터는 ‘I will be back(나는 돌아올 것이다)’를 외쳤지만, 저 엘프년은,

“바톤 터치다. 난 돈값 했어.”

절대 돌아올 생각이 없어 보였다. 광산 지분 얘기만 하고 홀라당 사라져 버렸다.

“진짜 가버렸네.”

한두 번 경험한 일이 아니다 보니 이젠 놀랍지도 않았다. 함께 지지고 볶고 구르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적응이 된 것 같았다.

서운한 감정은 없었다.

‘정말 할 만큼 한 것 같았으니까.’

몰골만 봐도 얼마나 치열했는지 알 수 있다. 날 업고 이틀 내내 죽은 자들 사이를 뛰어다녔을 것이다.

과정이야 어떻든 의식을 차리기 전까지 날 살렸으니, 돈값은 확실히 한 셈이다.

‘도와줄 여력도 없는 것 같고.’

덤덤한 표정과 달리 한계에 다다른 상태란 것을 알고 있다.

내 눈은 못 속이지.

저것 또한 나약함을 가리기 위한 ‘위장’이었다.

마력 중독 현상.

그림자의 왕을 소환했을 때부터 부족한 마력을 엘프석을 통해 쉴 새 없이 공급받았다. 사흘, 체력이 버텨내기엔 긴 시간이다. 그 부작용이 슬슬 나타날 시간이었다.

어딘가에서 빌빌대고 있을 확률이 높았다.

그래서 내게 살 방법까지 말해준 거겠지.

‘반지를 포기한다라…….’

죽은 자들이 반지만 노린다면 반지는 지금 상황에선 내 목숨을 위협하는 물건이다.

욕심을 버리면 위험을 회피할 수 있지만, 반지를 포기할 수 없는 이유가 있다.

‘레토니칼스가 반응을 보였거든.’

불사자의 심장은 내 생존에 무척 이롭지만, 심장에 깃든 레토니칼스란 존재는 내게 우호적이지도, 적대적이지도 않았다.

내가 느낀 레토니칼스는 일부 관심거리 빼곤 모든 것에 무관심했다.

지독히 오랜 세월을 살아온, 짙은 매너리즘에 빠진 절대 존재.

[반지의 주인이 되고 싶다면 내가 도와주지.]

그 권태에 찌든 존재가 처음으로 적극적인 반응을 보였다.

첫 등장 이후 무시로 일관했던 레토니칼스가 스스로 손길을 내민 것이다.

반지의 주인이 된다면 레토니칼스란 존재에 대해 자세히 알아볼 기회가 생길 것 같았다.

심장은 이제 내 몸의 일부다. 심장에 대해 많은 걸을 알수록 생존 확률이 올라갈 테니, 반지를 포기할 순 없었다.

‘저주는 곧 풀려. 그때까지만 버티면 된다.’

폐광산의 저주는 레토니칼스의 염원인 ‘죽음’과 관련되어 있다.

반지의 힘이 곧 다할 것이라 했으니, 저주도 사라질 것이다. 게다가 도르네프와 약속했던 시간이 거의 다 되간다.

모래시계를 품어 넣고 바위 더미를 응시했다.

시간만 끌면 된다.

쿠웅―! 쿵! 쿠우우!

크고 작은 굉음이 쉴 새 없이 울렸다.

바위 더미가 들썩들썩했다.

좀비 떼가 바위 더미를 밀치는 모양.

“안에서 아주 지랄발광을 하고 있네.”

공간 전체에서 바위 긁어대는 소리가 이곳까지 들려왔다.

잠시 후,

그그극―

바위 한쪽이 퍼석― 소리와 함께 무너져 내리더니 사람 하나 빠져나올 틈새가 만들어졌다.

끄에엑! 끄에!

벌어진 틈새 사이로 썩어 빠진 팔들이 한가득 튀어나왔다.

지옥문 사이로 서로 튀어나오려는 악귀들이 따로 없었다.

난 이를 악물곤 곡괭이를 집어 들었다.

그리곤 틈 앞에서 미친 듯이 곡괭이로 좀비 떼를 찍고 찍고 또 찍었다.

악취와 함께 피와 살점이 온몸에 튀었지만 멈출 수 없었다.

‘뚫리면 오래 못 버틴다.’

이곳은 드넓지만, 출구가 막혀 있다.

고립된 장소란 뜻이고, 포위당하면 답도 없었다.

터널 입구를 틀어막고 최대한 버텨야 했다.

이제부터 생존은 오롯이 내 몫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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