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당에게서 살아남는 법-94화 (94/130)

94화 염원의 반지(4)

나란 존재를 소설 속 세상으로 불러온 신이란 새끼는 날 더럽게 싫어하는 게 분명했다.

이곳에서 반년 정도 살아남는 동안 깨어 있는 시간보다 기절했던 시간이 더 길었던 것을 보면 답이 나왔다.

지금까지 몇 번을 기절했었지?

넬리토리 협곡에서 강물로 추락했을 때.

칼이 준 걸레 빤 물맛이 나는 독극물을 먹고 붐을 치료했을 때.

아레나 후아튼 앞에서 붐을 터트렸을 때.

눈앞에서 염원의 반지를 얻었을 때.

더 있나?

아, 생각해보니 화장실에서 휴지를 찾던 때도 있다.

시발.

더 최악인 건 기절한 횟수보다 죽을 뻔했던 적이 훨씬 많다는 거다. 그리고 꼭 기절했다가 깨어나면 근시일 내에 죽을 위기가 뭉텅이로 찾아왔다.

지금도 그렇다.

일어났더니 좀비 나라의 헬게이트가 열렸다.

난 그 헬게이트를 홀로 막아내는 중이고.

이 정도면 기절&위기가 절대 공식이 될 거 같아서, 기절하는 것도 무서워서 뜬 눈으로 버틸 것 같았다.

콰작― 콰자작―

“빌어먹을! 네놈들은 쉬는 시간도 없냐?”

힘찬 곡괭이질 한 번에 좀비 두세 마리가 산산조각 부서졌다.

이백? 삼백? 아니 그 이후로는 곡괭이를 휘두른 횟수를 잊었다.

숨이 차올랐지만, 버틸만했다.

심장의 주인이 되면서 육체 능력이 비약적으로 상승한 덕에 눈앞의 좀비들은 내 상대가 아니었다.

좀비가 된 대부분이 키가 작고 머리가 큰 드워프란 것도 유리하게 작용했다.

콱―!

곡괭이로 내리꽂아도 헤드샷이고, 발로 차도 헤드샷이었다.

머리가 부서지면 다행히 녀석들은 움직임을 멈췄다.

“…징글징글하다. 진짜.”

문제는 틈새로 기어 나오는 수가 끝도 없다는 것이었다.

내가 틈새를 막고 버티니 거품을 물고 달려들었다.

반지를 향한 집착들이 집요함을 넘어 미저리 저리가라였다.

그 엄청난 어그로 때문에 바위 더미들이 버텨주고 있지만, 관심이 집중된 나는 죽을 맛이었다.

눈 한 번 깜빡할 시간도, 숨을 돌릴 찰나의 여유도 없었다.

“으윽!”

중심을 잡던 발이 미끄럽다.

정강이까지 차오른 토막 난 시체들이 움직임을 방해했다. 풀풀 풍기는 썩은 냄새도 두통이 지끈거릴 정도로 고약했다.

지옥이 따로 없었다.

우지끈―

“……!”

단단한 곡괭이 자루가 충격을 버티지 못하고 결국 부러졌다. 부러진 자루를 잡고 틈새로 돌격했다.

푸욱―

서너 마리의 좀비를 날카로운 자루로 꿰뚫고 발로 차 넘어트렸다.

찰나의 쉴 틈.

길게 숨을 내뱉고 허리춤에서 단검을 뽑아 들었다.

또 기어 나온다.

난 욕설을 내뱉으며 기계적으로 단검을 휘둘렀다.

곡괭이와 달리 단검을 무기로 사용하자, 휘두른 팔에 긁힌 상처들이 하나둘 늘기 시작했다.

접근 거리가 짧으니, 이빨과 손톱에 박혀 피부가 찢겨나갔다.

하지만 괜찮다.

몇 번 휘두르다 보면 말끔하게 아물었으니까.

좀비 떼의 공격이 단조롭다 보니 금세 익숙해졌다. 생각했던 것보다 방어가 수월했다.

보통은 지쳐서 나가떨어질 물량 공세지만, 체력에 자신 있는 내겐 해당 사항이 없었다.

게다가,

‘점점 약해지고 있어.’

시간이 흐를수록 좀비들의 움직임이 둔해졌다.

반지의 힘이 약해진 여파 같았다.

시간을 끌면 끌수록 내게 유리한 상황인 것은 맞는데, 나도 반대급부로 대가를 지불하고 있었다.

바로 ‘마나’였다.

혹시나 하고 성력을 끌어올렸지만, 역시나 반응이 없다.

몸속에서 느껴지는 텅 빈 공허함.

[기운을 가져가겠다.]

몸속에 흐르는 기운들을 심장이 모조리 빨아들이고 있었다.

반지의 저주를 푸는 데에 내 특성 기운인 성력이 필요하다나?

그래서 지금껏 순수 육체 능력으로 버티는 중이었다.

‘이대로만 흘러간다면 버틸 만한데….’

지치지 않는 체력과 완력이 그걸 가능케 했다.

반지의 힘이 약해질수록 좀비 떼의 힘도 무력화되니 이깟 마나가 봉인돼도 손해는 아니었다.

다만, 이렇게 유리한 상황이 계속 유지가 될까?

“빌어먹을, 그럴 리가 없지!”

그아아아―!

염려했던 우려가 눈앞의 틈새로 모습을 드러냈다.

카앙―!

“큭! 빌어먹을 드워프 장비!”

휘두른 단검이 처음으로 튕겨 나갔다. 드워프 제(製) 단검을 튕겨낼 것은 같은 드워프 제(製) 방어구뿐이다.

기사단 출신 놈들이 뒤늦게 모습을 드러냈다.

약해졌어도 저 무식한 장비들은 여전히 단단했다.

둔기까지 사납게 휘두르며 기어 나오자 나도 주춤주춤 밀리기 시작했다.

전투 후 처음으로 틈새 자리를 내줬다.

공간을 내주자, 좀비들이 물 흐르듯 틈에서 새어 나왔다.

두 마리, 세 마리, 다섯 마리.

눈을 끔뻑일 때마다 상대할 머릿수가 실시간으로 많아졌다.

“…미치겠네.”

모래시계를 살피니 여전히 모래가 떨어졌다. 악착같이 버텼다고 생각했는데, 도르네프의 도움을 받으려면 시간이 더 필요했다.

휘적휘적 비틀거리는 좀비 떼가 보인다. 어느덧 무릎까지 차오른 시체 더미가 진로를 방해하고 있다.

의도한 건 아닌데, 수북이 쌓인 시체 더미가 좀비 떼를 저지하고 있었다.

저곳이라면 좀 더 버틸 수도.

잠시 갈등하던 나는 곡괭이를 움켜쥐곤 시체 더미 중앙으로 뛰어들었다.

“크아아아아! 시발!”

목청에서 짐승 같은 기합이 터져 나왔다.

한 손엔 곡괭이, 다른 손엔 단검.

움켜쥔 무기들로 노린 것은 오로지 머리다. 좀비 떼 사이로 뛰어들자, 사방에서 손톱과 이빨, 그리고 둔기가 날아왔다.

“아악!”

아프다.

하지만 난 방어 따윈 무시하고 오직 좀비 새끼들의 머리만 노렸다.

서둘러 머릿수를 줄여야 한다.

까앙―!

곡괭이로 기사의 투구를 날리고, 단검으로 놈들의 턱을 꿰뚫었다.

뇌까지 휘저은 단검을 뽑을 때면 온몸에 둔탁한 충격이 느껴졌다.

피부가 찢어지고 뼈에 금이 갔다.

대신 빠르게 상처가 아문다.

좀비 떼와 싸우니 나도 좀비가 돼버린 것 같았다.

“시발! 시발! 시발!”

어느새 난 부러진 곡괭이 자루와 단검을 쳐들고 시체 더미 위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머리를 꿰뚫고, 부수고, 으스러트렸다.

무릎까지 차오른 시체 더미가 허벅지까지 차올라, 내 앞에는 작은 둔덕이 되었다.

“…커억, 헉. 헉.”

드디어 심장에 과부하가 왔다.

호흡 부족으로 심장이 날뛰며 발작을 해댔다.

그럼 마나를 쓰게 해주던가.

여섯 마리, 여덟 마리, 열 마리.

계산 미스다.

죽이고 또 죽여도 덤벼드는 좀비들이 줄지 않았다.

틈새가 뚫렸다.

좀비 떼의 움직임이 더욱 느려지지 않았더라면 진즉 끌려가서 다진 고기가 됐을 것이다.

전신이, 얼굴이 저들의 썩은 피와 살점으로 버무려졌다. 이 정도면 동족으로 착각해도 되는데 왜 자꾸 덤비는 거야?

아, 반지.

반지 때문이다.

체력이 부치니 내 움직임 또한 둔해졌다. 상처가 아무는 속도보다 늘어나는 상처가 더 많아지기 시작했다.

‘이대론 죽어.’

전투를 포기하고 무기들을 버렸다. 그리고 바닥을 굴러 좀비 떼 사이를 벗어났다.

그러던 중,

콰아아아앙―!

바위 더미에서 폭음이 들려왔다.

터널을 틀어막았던 바위들이 와르르 무너졌다. 시커먼 터널이 모습을 드러냈을 때,

그르륵― 그르륵―

안쪽에서 오싹한 바닥 끄는 소리가 들려왔다.

익숙한 소리다.

거대한 해머.

놈이 드디어 나타났다.

“시발, 끝판왕이냐?”

반지의 전(前)주인이었던 비요른이다.

끝판왕도 부담스러운데, 그 뒤로 남은 가주들과 기사들도 하나둘 터널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홀로 싸우다간 자칫 골로 갈 수 있었다.

결국, 난 최후의 방어선까지 포기하고 더욱 뒤로 물러났다.

‘버틸 수 있으려나.’

다행이라면 저들도 움직임이 눈에 띄게 느려졌다는 것이다.

드넓은 공터를 이용해 시간을 끌 수 있다면 이기는 싸움이 될 수 있다.

반지를 살펴보니, 이젠 검은 아우라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반지의 저주가 거의 다 해제되어 가는 신호였고, 그 신호의 힘인지 눈앞에 갑작스런 변화가 찾아왔다.

크아아악, 크아악!

좀비 떼 일부가 괴성을 지르며 몸을 배배 꼬기 시작했다.

일반 좀비들이다.

기괴하게 몸을 비틀던 그들의 몸짓이 뚝 멈추더니, 이내 마른 껍데기처럼 부서지기 시작했다.

근처에 다가오던 좀비 떼를 시작으로 도미노처럼 잿가루가 돼서 흙으로 돌아갔다.

뿌연 잿가루가 공간을 가득 채웠다.

드디어 저주가 풀린 것인가 기대했는데, 가라앉은 잿가루 사이로 가주들과 기사들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도 잠시,

“…뭐!?”

그들의 모습이 어둠 속으로 푹 사라졌다. 잿가루의 여파로 주변에 설치해놓은 횃불들이 꺼진 것이다.

암흑이 찾아왔다.

“…쿨럭, 시불!”

텁텁한 느낌에 기침을 뱉어내며 횃불 쪽으로 달렸다.

횃불 주변엔 펜리가 놓고 간 가방이 있다. 암벽에 손끝에 닿자 주변을 더듬더듬거리며 가방을 찾았다.

손끝에 걸리는 가죽 감촉.

가방이다.

다급히 가방에서 기름을 꺼내 던지다시피 주변에 뿌린 후 불을 질렀다.

기름 위로 바닥이 활활 타오르며 주변 시야를 환하게 밝혔다.

다시 터널 쪽으로 몸을 돌린 순간, 난 멈칫했다.

“…….”

죽은 자들 대부분이 잿가루가 되어 사라졌지만, 눈앞의 비요른과 그 병력은 최후까지 버티며 내 목숨을 위협하고 있었다.

“…또 반지냐?”

암흑 속에서도 반지가 저들을 불러왔고, 가방을 찾는 사이 완벽한 포위망이 만들어졌다.

도망칠 틈이 없다.

입술을 다문 채 두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눈앞의 상대를 노려봤다.

첫 대면 때와 달리 비요른도 무척 약해진 상태였다. 해볼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나만 돌아온다면 말이지.’

속으로 그를 불렀지만, 레토니칼스는 조용했다. 심장은 마나를 뱉어낼 생각을 안 했고, 결국 난 순수 육체 능력으로 저들과 싸워 버터야 했다.

“이건 많이 빡센데.”

내 신음 섞인 중얼거림에,

“뭘 빡세, 할만하구만.”

타오르는 불꽃이 만든 그림자에서 힘 빠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동시에 누군가 내 등을 맞대고 섰다.

펜리다.

시선을 돌리니 그녀가 숨을 거칠게 고르고 있었다. 식은땀을 줄줄 흘린 채 두 눈이 살짝살짝 풀려있다.

엄지를 추켜올리며 당당히 사라졌던 때와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내 예상이 맞았다.

엘프석의 마력을 과다하게 받아들인 대가로 그녀는 마력 중독에 빠져 있었다. 그 후유증이 뒤늦게 발작하며 나타난 것 같았다.

“어디 숨어 있다가 나온 겁니까?”

“네놈 그림자.”

“전 허락한 적 없는데요?”

“닥치고 앞이나 봐.”

“괜찮습니까?”

“내 걱정할 때가 아닐 텐데?”

“빌빌대는 게 다 보여서요. 그냥 쉬세요. 제가 해결합니다.”

“네깟놈이?”

“믿어 보세요. 우린 친구 사이 아닙니까?”

그때가 갑자기 떠올랐다.

연구소를 탈출할 때 펜리가 즉흥적으로 친구를 제안했고, 냉큼 받아들인 기억 말이다.

“친구 사이? 지랄하고 자빠졌네.”

물론, 이 망할 엘프는 자기가 한 말조차 기억 못 하고 있었지만 말이다.

하는 짓을 보면 구해줄 가치가 전혀 없는 엘프년인데, 그동안 받은 것이 있으니 돌려줄 생각이다.

거래로 이뤄진 관계라지만 그녀로 인해 수많은 위기를 넘겼다.

게다가 나와 그녀 사이엔 신명으로도 엮여 있었다.

이 정도면 운명이라고 봐도 된다.

앞으로 펼쳐질 내 고단한 여정 뒤엔 늘 검은 장미는 곁에 있을 것이고, 내 선택에 크고 작은 영향력을 미칠 것이다.

소설, 악당들이 강해지면 벌어지는 일.

악당 새끼들이 판을 치는 더럽고 추악함이 일상적인 세상.

이 비열한 세상 속에 서로 등을 맡길 수 있으니, 우린 친구가 맞았다.

“친구 사이 맞습니다. 악수까지 했는데요?”

“나랑 자꾸 엮지 마. 사기꾼 새끼야.”

“…….”

지금은 비즈니스 친구 정도가 적당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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