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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에게서 살아남는 법-95화 (95/130)

95화 염원의 반지(5)

나를 에워싼 거센 불길이 적들의 접근을 막아주고 있었다. 조금만 늦게 불을 피웠으면 어둠 속에서 고깃덩어리가 될 뻔했다.

다급한 마음에 기름을 뿌린 행동이 나를 살린 셈이다.

“불을 무서워하네요?”

“여유 부릴 때가 아니야. 곧 꺼진다.”

활활 타오르는 불길 너머에서 비요른이 날 노려보고 있었다.

그녀의 말이 맞다.

도르네프가 챙겨준 기름 주머니를 몽땅 퍼부어 한순간 강하게 타오르게 했을 뿐, 불길은 빠르게 사그라들고 있었다.

횃불로 주변을 밝힌 후 흡혈의 고리를 소환했다.

둘러보며 뒤로 물러나니 암벽이다.

암벽을 타고 올라갈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직각으로 매끈하게 깎여 있어 등반 자체가 힘겨워 보였다.

인위적으로 만들어놓은 게 분명했다.

“드워프들 짓이야.”

“출구로 접근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겠죠? 오르면 또 오를 수 있을 것 같기도 한데.”

“뒈지기 싫으면 그딴 생각 버려. 내가 터널 입구를 어떻게 무너트렸을 것 같아?”

“네?”

“트랩이 깔려 있다.”

“…….”

“밧줄을 내려주지 않으면 꼼짝없이 굶어 죽는다는 뜻이지.”

“우선 살아남아야겠네요.”

“그건 반지에 미련을 못 버리는 네놈이 걱정해야 할 문제고. 나랑은 상관없어.”

생각해보니 그렇네.

죽은 자들은 반지의 주인인 나만 집요히 노릴 것이다. 내 곁에서 그녀가 슥 빠진다고 눈길이나 주겠는가.

그 사실을 알면서 날 도와주겠다는 이유가 뭐지?

그녀는 지금 마력 중독에 빠져 있다.

나처럼 마나를 사용할 수 없는 상태란 뜻이다. 조용히 숨어 있으면 도르네프가 밧줄을 내려줄 텐데, 리스크를 감내하면서 날 돕겠다고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설마 겉으로는 싫어해도 날 진짜 친구로….

“네놈이 죽으면 광산 지분이 날아가잖아. 숨은 붙여놔야지.”

“…아 네.”

망할 엘프년.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그렇다고 생각 없이 나선 건 또 아닌 것 같았다.

“네가 한 짓이지? 죽은 자들이 사라지고, 저것들이 점점 둔해지고 있는 게.”

“그렇다고 볼 수 있죠.”

“저것들은 못 없애는 거야?”

“시간이 필요합니다.”

“얼마나?”

“긴 시간은 아닐 겁니다. 반지의 힘이 거의 사라진 듯 보이니까요.”

이젠 평범해 보이기까지 한 반지를 보여주자, 펜리는 ‘좋아.’를 짧게 외친 후 두 쌍의 크로우를 소환했다.

“가주들만 조심해. 내가 견제해 줄 테니 잘 버텨보라고.”

“…버티라고요?”

“넌 가능하잖아.”

…이런 미친.

결국, 또 고기 방패냐?

그런데 또 정확히 판단한 것이라 반박하기 힘들었다. 이번 전투로 몸뚱이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단단하다는 것을 알게 됐거든.

더럽게 아픈 것만 빼면, 마나 없이 힘으로 휘두르는 둔기 공격 정도는 충분히 버틸 수 있었다.

다만, 일격에 나를 짓뭉갤 수 있는 비요른과 가주들의 경우는 달랐다.

크아아아아악!

“온다! 시선을 끌어!”

불길이 푹 꺼져버렸다.

흐릿해진 시야, 펜리가 그 시야 속으로 사라졌다.

최악의 몸 상태로 정면 승부는 무리니, 나를 미끼 삼아 뒤를 견제할 생각인 듯 보였다.

그럼 나는,

‘일단 미끼가 되어줘야겠지.’

활대를 잡고 시위를 쭉 당겼다.

피를 대가로 마나 없이 마력탄 위력의 화살을 무한정 소환할 수 있다는 건 상당한 메리트였다.

콰콰콰콰콰쾅―!

놈들이 코앞까지 접근할 때까지 사방으로 화살을 갈겼다. 무리는 안 했다. 머리라도 핑 돌면 그대로 저승행이었으니까.

반지의 기운에 화살로 도발까지 하니, 사방이 날 죽이려는 놈들뿐이다. 거리를 잰 후부턴 공격하지 않고 기다렸다.

쿵―

비요른이 지척까지 다가왔다.

더 버티다간 포위 당한다.

난 비요른을 향해 돌진했다.

섬뜩한 바람이 내 머리카락을 흔들자 그대로 슬라이딩을 했다.

콰아아앙―!

거대한 해머가 내 머리를 스쳐 바닥에 내리꽂혔다. 비요른의 턱이 드러나자, 그대로 시위를 위로 튕겼다.

콰아앙―!

“……!”

폭발이 터지며 비요른의 투구가 하늘로 치솟았다. 충격에 비틀거리며 물러난다. 전에 머리를 맞췄을 때 곧장 손을 뻗어오던 터프함이 사라졌다.

확실히 약해졌다.

“야, 굴러!”

“…헉!”

붕! 부우웅―!

날 선 할버드가 양쪽에서 날 스치고 지나갔다. 시발, 조금만 늦었으면 목이랑 허리가 뎅겅 잘릴 뻔했다.

비요른 곁을 지키던 가주들이다.

빠르게 자세를 잡고 다음 공격을 대비했는데 조용했다.

뒤를 돌아보니, 펜리가 가주들을 견제하며 시선을 돌리고 있었다.

적들의 움직임이 눈에 띄게 둔해졌기 때문인지, 다크 엘프 특유의 민첩함이 빛을 발했다.

최악의 컨디션에도 저런 움직임이라니.

확실히 5성은 달랐다.

내가 어그로를 끈 탓에 그녀의 움직임이 자유로운 점도 한몫했다.

반대로 얘기하면 저들 빼곤 전부 나만 노린다는 뜻이었다.

내게 둔기 세례가 퍼부어졌다.

퍽! 퍼억! 퍽!

“…끄!”

머리를 보호하며 내달렸다.

맞은 부위에 피멍이 들고 살점이 뜯겨나갔다.

멍석말이를 당하면 이런 고통이려나.

속이 뒤집힐 듯 아프고, 뼈란 뼈가 비명을 질러댔다.

아프다. 시발.

근데 버틸만했다.

이번 폐광산 전투로 확실히 느낀 것이 있는데,

“…제길, 인생이 더 고달파지겠네.”

내 맷집이 인간 수준을 한참 벗어났다는 거다.

둔기의 위력이 반감된 탓도 있지만, 둔기를 얻어맞고 버틴다는 것 자체가 일반 상식으론 불가능했다.

보통 인간이었으면 뼈가 부러지고, 머리통이 부서졌을 것이다.

펜리도 내 맷집을 인지했기에 날 이곳으로 밀어 넣었겠지.

틈새를 악착같이 막고 버텼던 그 미친 전투를 다 지켜본 게 틀림없었다.

가주들만 조심하면 된다.

그리고 가주들을 펜리가 붙잡고 있는 지금이,

스각―

반격의 기회란 뜻도 됐다.

한 대 맞으면 그대로 돌려준다.

열 배로 돌려주고 싶은데, 쪽수가 너무 많았다.

난 미친놈처럼 단검을 휘둘렀다. 멈추면 포위당하기에 불도저처럼 좀비 떼 사이를 휘젓고 다녔다.

바닥을 쉴 새 없이 굴렸고, 적들의 장비를 빼앗아 휘두르고 던졌다. 다급할 때면 한 놈을 잡아끌어 고기 방패로 사용하기도 했다.

정신이 없다.

생각하고 움직이는 건 사치였다.

눈앞의 적을 죽이면 또 다른 적이 자리를 채웠고, 쉴 새 없이 싸우면서 근접이 유리하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꼈다.

근접.

붙고 붙고 또 붙었다.

그리고 한 뼘 거리의 초근접 전투가 시작됐을 때 내게 변화가 찾아왔다.

두근―!

심장이 힘차게 맥동하기 시작했다.

무슨 신호지?

레토니칼스가 반지의 저주를 푼 것일까?

아니다.

이건 하나의 준비를 위한 레토니칼스의 신호였다.

이성이 사라지고 본능이 머릿속을 채웠다. 손에 쥔 단검이 걸리적거리기 시작했다. 단검을 투척해 한 놈의 머리통을 날려버리고 두 주먹을 말아쥐었다.

“크아아아악!”

퍼석―!

휘두른 주먹에 두 마리의 좀비가 산산조각 박살이 났다.

파편이 허공에 튀고, 난 그사이를 짐승처럼 질주했다.

한 마리, 두 마리, 세 마리.

얼굴을 손바닥으로 우그러트리고, 팔을 휘둘러 팔다리를 부러트렸다.

팔꿈치는 이제 드워프의 투구를 우그러트리고 머리까지 터트렸다.

연달아 주먹을 날렸고, 지나간 자리엔 뭉개진 고깃덩어리만 남았다.

주변에 적이 줄어들수록 내 얼굴은 서서히 악귀처럼 일그러졌다.

지독한 통증이 온몸을 채운다.

근육 가닥가닥이 끊어지는 것 같았다.

위험 신호.

본능이 멈추라 했다.

안 그러면 몸이 망가진다고.

하지만 멈출 수 없었다. 여전히 내 한 뼘 거리엔 반지를 노리는 적들이 득실거렸으니까.

순간 레토니칼스의 선문답이 떠올랐다.

[본능이 저항하는 한계를 넘으면 새로운 세상이 열리지.]

새로운 세상.

맞다.

나도 모르는 사이, 난 레토니칼스식(式) 전투를 펼치고 있었다.

두근―!

심장, 레토니칼스가 거친 맥동을 통해 말했다. 본능이 정한 한계를 뛰어넘으라고.

멈추지 말라고.

그어어어어―!

“크아아악!”

어느새 다가온 비요른.

서로 악을 질러대며 부딪쳤다.

놈의 해머가 내 머리를 노리고 휘둘러졌다. 레토니칼스 식 전투법에 회피는 없다.

이빨을 사납게 드러낸 채 왼팔을 크게 휘둘렀다.

퍼석―

해머를 비껴친 손이 뭉개졌다.

그 충격에 해머는 날 비스듬히 스쳐 지나갔다. 난 멈추지 않고 비요른의 품을 파고들었다.

퍼억―!

어깨 차징.

본능대로 움직였다.

비요른을 넘어트린 후 몸 위로 올라타 머리채를 움켜쥐었다.

날 노려보며 괴성을 지르는 괴물이 보인다.

고개를 뒤로 젖힌 나는,

콰작―! 콱! 콱!

놈의 얼굴에 박치기를 시전했다.

미친 듯이 머리를 움직였다.

이마가 찢어지고 실핏줄이 터지며 붉은 세상이 펼쳐졌다. 하지만 난 멈추지 않았다.

그 순간,

퍼석―

비요른이 부서졌다.

아니, 정확히 내가 부순 게 아니라 껍데기가 돼서 잿가루로 화했다.

드넓은 공터에 검은 재가 비산했다.

비요른 뿐만 아니라 죽은 자들 전부가 허공으로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피투성이가 된 끔찍한 몰골로 전장 한가운데에 우뚝 섰다.

후욱― 후욱―

거친 숨을 몰아쉬며 펜리와 눈을 마주쳤지만, 그녀는 복잡한 눈빛으로 나를 볼 뿐 다가오지 않았다.

얼굴이 다시 일그러졌다.

“끄으으으.”

고통에 삼켜진 나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힘들었다.

지금 누군가 날 노린다면 난 죽을 거다.

레토니칼스식(式) 전투는 지독한 양날의 검이었다.

마치 죽고자 하는 전투법 같았다.

숨마저 턱 막히자 두려움이 몰려왔다.

난 죽고 싶지 않다.

[염원이 풀렸다.]

레토니칼스가 말을 걸어왔다.

염원의 반지가 힘을 잃자, 모든 것이 말끔하게 해결됐다.

저주가 풀렸다.

이제 남은 건 한 가지.

[나의 염원이었던 ‘죽음’이 사라졌으니, 빈 반지에 새로운 염원을 담아야겠지.]

스스로 반지의 주인이 되겠다고 했다.

레토니칼스가 내게 물었다.

[네 염원은 무엇이지?]

“염원을 말하면 들어줍니까?”

[염원은 반지의 그릇을 정하는 과정일 뿐, 그 힘을 담지 못한다면 빈 그릇에 불과하다.]

“그 힘은 어떻게 담습니까?”

[하늘에 맡겨야 한다. 바로 얻을 수도 영원히 얻지 못할 수도 있다.]

말이 어렵다.

오래 살아서 그런지 꼰대 티가 풀풀 풍겼다.

그릇, 일단 내 염원의 기준을 정하라는 말 같은데.

‘기준이라….’

순간 칼 바스타인이 떠올랐다.

라웁 숲에서 칼은 내게 살아가는 ‘기준’을 설명해 준 적이 있다.

[복수. 난 복수를 위해선 적과도 손을 잡을 수도, 죽이는 대상도 가리지 않아.]

그때 칼의 염원이자 기준은 복수였다.

그 자리에서 내 기준도 정했던 것 같다.

이 세계에 떨어진 순간부터 줄곧 유지해온 나만의 기준.

“생존.”

망해가는 세상에서, 이 빌어먹을 악당들에게서 악착같이 살아남는 것.

그것이 나의 염원이자 기준이다.

[부질없는, 이해하기 힘든 염원이군.]

레토니칼스의 목소리에서 씁쓸함이 느껴지는 건 착각일까.

[하지만 너로서는 최고의 선택이었다.]

“…?”

최고의 선택?

무슨 뜻일까.

의문이 들었지만, 손가락에서 느껴지는 저릿한 감각에 반지를 살폈다.

반지가 붉게 반짝반짝 빛나고 있다.

바라보기만 해도 활력이 돌고, 선명했으며, 생동감 있는 색감이었다.

두근―!

불사자 레토니칼스의 심장이 크게 뛰기 시작했다.

[염원은 ‘생존’으로 정해졌다. 그 빈 그릇은… ‘불사자’인 내가 채워주지.]

반짝 반짝.

두근 두근.

심장과 반지가 공명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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