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최고의 스승
먹물처럼 칙칙했던 반지가 단풍처럼 물들며 선명한 색감을 띠기 시작했다.
새빨간 반지로 물드는 과정에 생동감이 넘쳤다.
반지에서 풍겨 나오는 새로운 아우라(Aura).
죽음과 완전히 반대되는 기운, 역동적인 활력이 느껴졌다.
“…어?”
그 변화를 멍하니 지켜보다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뇌를 쿡쿡 찔렀던 지독한 통증이 빠르게 가라앉더니 시원한 감각이 찾아왔다.
몸을 살피니, 좀비와 다를 바 없었던 끔찍했던 몰골이 시간이 역으로 흐르듯 복구되고 있었다.
찢기고 베인 수십 곳의 상처, 금이 간 뼈마디들이 삽시간에 아물고, 뒤틀린 뼈와 뭉개진 팔처럼 심각한 부상도 눈에 띄게 회복되고 있었다.
무서울 정도로 빠른 회복력이다.
이건 마치,
‘심장을 두 개 가진 기분이네.’
두 개의 심장.
그중 하나로 보이는 붉은 반지를 살피니, 루비 보석 같은 광택이 흘러나왔다.
염원의 반지(Ring of Desire).
내 염원이 ‘생존’인 것처럼 내가 선택한 그릇에 맞게 생존과 관련된 힘이 채워진 것 같았다.
[최고의 선택이었다.]
최고의 선택.
레토니칼스가 남긴 말뜻이 이제야 이해가 되었다.
불사자의 심장을 지닌 상태로 ‘생존’을 염원의 그릇으로 정했으니, 생존에 최강자로 꼽히는 불사자의 힘이 그릇에 채워지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의도한 건 아닌데, 반지를 확보함으로써 불사자의 심장을 하나 더 얻게 된 효과를 얻었다.
‘일격에 목이 잘리거나, 피떡이 되지 않으면 죽을 일은 없겠네.’
여분의 심장이 주어진 셈이다.
이는 앞으로의 선택과 행보에 많은 변화를 줄 것 같았다. 뭐든 유리한 방향일 테니 고민은 접어두었다. 고민은 나중에 여유가 있을 때 천천히 하면 된다.
목과 허리를 돌리니 잘 돌아간다.
거동이 가능할 정도로 회복이 되자, 펜리를 찾았다.
그녀는 횃불 아래 암벽에 기대어 쉬고 있었다.
다가가니, 그녀는 두 쌍의 크로우를 착용한 채 날 응시하고 있었다.
몸을 살짝 웅크린 채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는데, 마력 중독으로 힘겨워하는 티가 역력해 보였다.
마력 중독은 어떤 느낌일까.
갑자기 변태가 된 것 같아서 서둘러 잡생각을 털어버렸다.
“괜찮습니까?”
“그건 내가 할 말인데? 서서 기절한 줄 알았더니 아니네.”
“기절은 더는 사양입니다.”
기절은 곧 위기란 공식이 만들어진 만큼, 앞으로 기절만큼은 피하고 싶었다.
미신이라고 해도 확률이 높았거든.
“…….”
그녀는 날 빤히 올려다봤다. 내가 뭐냐는 듯 제스처를 취하자, 그제야 나직이 한숨을 내쉬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웬 한숨입니까? 제가 한심해 보입니까?”
“누구라도 네놈의 전투를 지켜봤다면 나처럼 반응했을 거야.”
“이상했습니까?”
“이상했냐고? 이상했지. 소름 돋을 만큼.”
펜리는 어이없다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방금 전 내뱉은 한숨은 녀석의 정신이 정상이라는 사실에 안도한 한숨이었다.
이와 비슷한 기세를 훈련장에서 경험해 본 적이 있지만, 이번과는 달랐다.
조금 전 전장에서 녀석은 마치,
‘피에 미친 악귀 같았지.’
본능뿐인 녀석의 초근접 전투는 상대로 하여금 원초적 공포를 자극했다.
오직 파괴 본능만 따르는 기괴한 전투 스타일. 파괴의 범주 안에는 스스로도 포함되어 있어서 전투 패턴을 읽을 수가 없었다.
‘몰아붙일수록, 죽음에 이를수록, 상대하기 두려워지는 타입.’
적으로 두고 싶지 않은 상대였다.
아군인지 알면서도 한 번 더 상태를 확인해보게 되는 묘한 위화감을 느꼈을 정도였으니까.
‘그 존재의 영향이겠지?’
레토니칼스.
펜리는 그 이름을 작게 중얼거리며 크로우를 해제했다.
“진짜 괴물 새끼가 다 됐네.”
“능력입니다. 괴물 새끼가 아니라.”
“능력 좋아하네. 화톳불에 뛰어드는 불나방이 딱 네놈일 거다. 살면서 내게 세 번의 위기가 있었는데, 그중 두 번이 네 녀석과 엮인 사건이었어.”
“도미닉 연구소와 폐광산, 하나는 뭡니까?”
“알아서 뭐하게?”
“다 좋게 끝나지 않았습니까?”
“좋게? 내 꼴이 지금 좋아 보여? 내가 너랑 또 엮이면 엘프가 아니라 난쟁이 새끼다.”
“챙길 건 다 챙기면서 우는 소리는.”
“죽을래?”
“이미 죽을 뻔했습니다.”
지랄 같은 펜리년의 성격이면 지금쯤 주먹이 날아와야 하는데, 그녀는 벽에 기댄 채 씩씩거리고 있었다.
중독 상태로 그리 날뛰었으니 탈진 직전일 것이다.
난 염원의 반지를 만지작거렸다.
‘통하려나?’
하나의 심장이 된 반지를 건넨다면 마력 중독을 치유하는 데 도움이 될까?
[저 엘프 수준으로는 회복되기 전에 미쳐버릴 거다.]
“…응?”
갑작스러운 레토니칼스의 대답.
묻지도 않았는데 대답을 한다?
설마, 내 생각을 읽을 수 있는 건가?
[행동을 느끼고 파악한 것뿐이다. 내게 어려운 일은 아니지.]
절로 미간이 좁혀졌다.
다행히 내 진짜 정체는 숨길 수 있을 것 같은데, 사소한 행동에도 생각을 읽히는 것을 보니 앞으로가 피곤해질 것 같았다.
당장 레토니칼스를 붙잡고 할 말이 많았지만, 일단은 다음으로 미뤄야 할 것 같았다.
그르르륵―!
톱니바퀴 맞물리는 마찰음이 들려왔다.
시간이 된 것 같았다.
우린 자연스럽게 위를 올려다봤다.
철컥―! 소리와 함께 도르네프가 약속했던 두꺼운 밧줄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타이밍 참으로 뭐 같네.’
아니, 오히려 잘 된 건가?
다시 생각해보니, 밑에 좀비 떼가 득실거렸다면 도로네프는 밧줄을 내리기보단 문을 다시 닫았을지도 모르겠다. 사흘 후 다시 기약된 시간이 있었으니까.
우린 밧줄이 내려오길 기다렸다.
슬슬 손을 뻗으려고 하는데, 돌연 밧줄이 중간 높이에서 뚝 멈췄다.
잠시 후, 저 높은 암벽 구멍에서 도르네프의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렸다.
“위대하신 도르네프님이라고 외쳐봐!”
“닥쳐! 이 난쟁이 새끼야!”
“암고양이가 확실하군.”
이상한(?) 확인 작업을 끝으로 밧줄이 머리맡에 멈춰 섰다.
“먼저 올라가.”
“저 먼저요?”
“왜? 내 엉덩이 보고 싶어?”
그 반대도 싫다고 엘프년에게 강하게 항의하고 싶었지만, 내 엉덩이까지 주물럭거린 여자와 괜한 심력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이거 가져가고.”
“……이건.”
“전대 가주들의 투구다.”
가방 안에는 왕관을 닮은 투구들이 담겨 있었다. 아픈 와중에도 저주를 푼 증거들을 챙긴 모양이었다.
꼼꼼한 건 인정해줘야겠네.
밧줄을 잡고 잠시 주변을 둘러봤다.
시체는 사라졌지만 죽은 자들의 흔적은 남아 있었다.
폐광산의 망령이 사라졌으니, 역사로만 남았던 베네타의 광산은 다시 활기를 띨 것이다. 이는 또 소설과 전혀 다른 미래로 이어지겠지.
앞으로 어떤 변화가 찾아올까?
여러 고민 속에서 난 밧줄을 잡고 오르기 시작했다.
꼬르르륵―
“…….”
배가 고팠다.
고민 전에 일단 배부터 채워야 할 것 같았다.
나의 생존에 굶주림은 치명적이었으니까.
* * *
베네타의 영주성.
“…….”
무거운 눈꺼풀을 뜨자 실크 레이스가 달린 투명한 커튼이 내 코를 간질였다.
한동안 멍하니 바람이 살랑거리는 커튼을 올려다봤다.
내가 창문을 열어놓고 잤었나?
침대와 붙어 있는 큼지막한 창밖을 바라보니 구름 한 점 없는 청명한 하늘이 날 반겼다.
아, 아침에 잠깐 깼다가 다시 잠들었던 것이 떠올랐다.
얼마나 더 잔 거지?
도르네프의 성에 복귀한 지 이틀 동안, 난 먹고 자며 편안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아, 평생 이렇게 살고 싶어라.
드넓은 침대 위에서 푹신한 이불을 부둥켜안고 빈둥대고 있는데, 누군가 문을 열고 다가왔다.
“오찬 시간이 한참 지났어요. 일어나요.”
감미로운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늘씬한 여인이 침대 옆 작은 테이블에 음식이 든 접시를 내려놓곤 날 내려다봤다.
바람에 살랑거리는 브라운 계열의 머리카락. 슈퍼 모델 뺨치는 미모의 엘프가 식사를 가져왔다.
영주성의 안주인, 샤르바딘이었다.
성의 안주인이 직접 챙겨주는 식사 자리.
‘호강은 호강인데….’
더럽게 눈치가 보였다.
호탕한 면모의 도르네프이지만, 유독 샤르바딘과 관련해선 소심함의 극치를 보였기 때문이다.
내 식사를 직접 챙겨줬다고 하면 또 은근슬쩍 찾아와 날 사납게 노려볼 것이다.
“다른 사람을 보내도 되는데….”
“알다시피, 두 사람의 복귀는 비밀에 부쳐진 상태라서요. 한동안은 제가 직접 움직일 거에요.”
“검은 장미가 시중을 붙여준다고….”
“아니요! 제게 은인인 분인데 소홀히 대하면 안 되죠! 식사와 잠자리는 제가 직접 챙길 거예요.”
아니, 괜찮아. 괜찮다고!
특히, 잠자리 얘기는 도르네프에게 제발 하지 마.
샤르바딘의 과한 관심만 빼면 지내기 최고의 장소인데, 저 엘프도 고집이 보통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계속 안 볼 수도 없는 것이, 내가 묵고 있는 숙소는 성주가 묵고 있는 꼭대기 층이었다.
아무나 오를 수 없는 층이라, 우리 존재를 숨기기 위해 잠시 묵게 된 숙소인데, 샤르바딘 바로 옆 방인 게 문제였다. 심심하면 찾아와서 귀찮게 군다.
‘저 엘프년이 얼른 깨어나야 하는데.’
달콤한 수프에 빵을 찍어 먹으며 옆 침대를 응시했다.
베개에 금발을 늘어트린 구릿빛의 늘씬한 엘프가 보인다.
암고양이 펜리였다.
약한 모습을 절대 보이지 않더니, 대장장이 정원을 벗어난 후 마차를 타자마자 기절해버렸다. 그 이후로 지금껏 의식을 차리지 못했는데, 치료사 말로는 신녀인 넬라가 오기 전까진 치료가 오래 걸릴 것이라 했다.
단시간에 회복시키려면 엘프석이 필요하다나?
“엘프석은 아직입니까?”
“넬라님이 심혈을 기울여서 제작 중인데, 알다시피 엘프석은 쉽게 만들 수 있는 게 아니라서요.”
생각했던 것보다 엘프석의 가치가 더 귀한 것 같았다. 그걸 이번 의뢰에 몽땅 사용한 셈이니, 그녀의 속이 무척 쓰렸을 것이다.
‘그래도 저걸 얻었으니까. 오히려 이득이려나.’
오물오물 씹던 빵을 꿀꺽 삼킨 후 침대에서 일어나 펜리에게 다가갔다.
평소에 앙칼진 모습과 달리 이리 죽은 듯이 자고 있으니 순해 보였다.
저 잠자는 모습이 내겐 가장 호감 가는 모습이 아닐까?
조용하니 천국이 따로 없었다.
“전생에 벨트와 사랑하는 사이였나? 독하다 독해.”
“저 벨트가 뭐길래 그렇죠?”
“대장장이 정원에서 가져나온 아티팩트입니다.”
마력의 루비 벨트.
주인의 마력을 한 단계 증폭시켜주는 효과가 있는데, 마력에 목마른 펜리에겐 보물 같은 물건이었다.
가주들의 투구를 증거로 제시하고 곧장 저 벨트를 도르네프에게 요구했는데, 내가 벨트를 먼저 채갈까 봐 어지간히 신경 쓰였나 보다.
정신줄을 놓을 때부터 지금까지 저 벨트를 보물처럼 부둥켜안고 있었다.
“……으으.”
내가 벨트에 손을 대자 평온했던 암고양이의 인상이 앙칼지게 변했다.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리는데, 이게 가능해?
“…의식이 없는 거 맞죠?”
“그, 그럴걸요?”
눈이라도 부릅뜨며 노려볼까, 조심스레 벨트에서 손을 뗀 후 식탁에 앉았다.
짧은 식사 시간 동안 샤르바딘은 반대편에 앉아 바깥 이야기를 내게 들려줬다.
중요한 이야기도 있고, 쓸데없는 이야기도 있었다.
정보 반, 수다 반이다.
나긋나긋한 조잘거림 사이로 보드란 바람이 불어와 내 얼굴을 간지럽혔다.
대충 맞장구를 쳐주며 창밖을 바라봤다. 티타임 중인데, 카페에 앉아 시원한 아메리카노 한 잔을 즐겼던 여유가 떠올랐다.
갑자기 커피가 마시고 싶네.
한참 조잘거리며 시간을 보내던 그녀가 집사의 호출을 받고 자리를 비웠다.
“또 올게요!”
“…네.”
도르네프도 폐광산 건으로 긴 시간 자리를 비우다 보니, 어지간히 심심했나 보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창밖으로 걸어가니, 어느새 태양이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평온한 햇살이 베네타를 비춘다. 그 광경을 조용히 바라보던 나는,
턱―
창문을 닫으며 생각에 잠겼다.
샤르바딘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바깥소문을 알 수 있고, 토바른 내 심상치 않은 변화를 느낄 수 있었다.
특히, 블라이어.
카멜 녀석이 슬슬 존재감을 드러내려 하고 있다.
‘아직은 괜찮아.’
바깥일보단 내겐 더 중요한 일이 있었다.
난 침대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이 자세를 유지하는 데에 큰 이유는 없었다. 그저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기 편한 자세라고 해야 하나?
두 눈을 감으니, 심장 박동이 고요한 파동처럼 들려온다.
“레토.”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했을 텐데.]
불사자 레토니칼스.
이 녀석을 어떻게 구슬려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