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당에게서 살아남는 법-97화 (97/130)

97화 최고의 스승(2)

누가 보면 온종일 침대에서 뒹구는 동네 백수처럼 보였겠지만, 내 머리는 일개미처럼 쉴 새 없이 굴러가고 있었다.

이 세계에 떨어지고 반년이 지난 지금, 내겐 많은 능력이 생겼다.

인첸트와 정신 방벽.

넬리토리에서 획득한 고대 문양.

특성 개화 능력인 성력과 신명 사냥꾼.

메인 스토리의 보상인 레토니칼스의 심장. 그리고 이번 폐광산에서 획득한 흡혈의 고리와 염원의 반지까지.

악착같이 살아남으며 다양한 힘을 얻었지만, 정작 완벽하게 익혔다고 확신하는 건 단 한 개도 없었다.

스킬만 익혀놓고 숙련도에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고 해야 하나?

정확히 숙련 방법을 몰랐다는 것이 정확했다.

획득 정보야 소설을 통해 알고 있지만, 수련 방법은 몸으로 직접 익혀야 하는 만큼 단순히 알고 있다고 되는 게 아니었다.

지금껏 실전을 통해 그 능력들을 조금씩 알아가고 있지만, 그 한계가 명확했다.

‘이곳은 현실이고, 난 천재가 아니니까.’

게임처럼 단축키 한 번에 스킬이 나가고, 사용횟수마다 스킬 레벨이 오르는 간단한 구조가 아니었다.

직접 부딪치고, 시행착오를 겪으며 공부하듯 발전시켜나가야 했다.

난 그 발전 시간을 단축해줄 존재로 레토니칼스를 떠올렸다.

이 녀석이라면 날 단시일 내에 강하게 만들어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 말이다.

지금은 바깥에 신경 쓸 데가 아니라 내실을 다져야 할 시기다.

내가 획득한 능력을 다듬을 시간.

그러기 위해선 심장에 깃든 이 녀석의 도움이 절실했다.

‘일단 대화는 가능해졌는데….’

레토니칼스와 대화의 물꼬를 튼 시기는 이틀 전, 베네타로 향하는 마차에 올라탔을 때였다.

펜리는 벨트를 얻자 바로 기절했고, 도르네프는 폐광산의 저주가 풀리면서 준비해야 할 미래를 고민하고 있었다.

그 조용한 공간에서 난 레토니칼스를 불렀다.

무시로 일관하면 어쩌나 했는데, 그는 내 부름에 쉽사리 응답했다.

그래서 물었다.

[당신의 진짜 정체가 뭡니까?]

내가 그에게 건넨 첫 번째 질문이자 가장 중요한 질문이었다. 심장에게 자아가 있다는 사실을 겪어보기 전까진 알지 못했으니까.

그 질문에 레토니칼스는 ‘초월성(超越性)’이라는 단어로 자신을 표현했다.

절대자의 강력한 의지가 뭉쳐서 만들어진 독립적인 에너지 덩어리 말이다.

간단히 말하면 영혼에서 떨어져 나온 영혼 파편이라고 보면 될 것 같았다.

대화를 통해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됐는데, 불사자란 실체가 더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육체를 없앴고, 영혼마저 소멸시켰다.

[하지만 완벽한 안식에는 실패했다.]

레토니칼스는 영원한 안식을 계획했지만 실패했다.

스스로의 존재가 그 실패의 증거라나?

녀석과 대화하면 이따금 이런 생각이 든다.

‘뭔 개소리야?!’

솔직히 반은 알아듣고, 반은 못 알아먹겠다.

상식 밖의 녀석과 대화하려니 가슴이 답답하고 덥다.

창문을 괜히 닫았나?

“이름 레토가 어때서요?”

[이름에는 존재를 증명하는 힘이 있다. 가볍게 여긴다는 건 존재를 부정하는 것과 같다.]

“그럼 당신이 불사자 레토니칼스입니까?”

[맞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네가 레토니칼스냐, 아니냐.

이틀 동안 이 주제를 가지고 이 녀석과 논쟁을 펼쳤다.

중요한 내용은 아니었다.

그저 녀석의 성향을 파악하기 위한 밑밥 깔기였다.

그런데 질문을 던질 때마다 모호한 답변을 내놓거나, 궤변을 늘어놨다.

특히,

[실체는 소멸했지만, 난 여전히 세상에 존재한다.]

죽었는데, 살아있다.

‘술은 먹고 운전은 했지만 음주 운전은 아니었다’와 뭐가 다른 소린지 모르겠다.

뭐든 철학이 담긴 선문답으로 돌려 말하는 꼰대 스타일.

머리가 지끈거렸다.

“실체는 소멸했다면서요? 그럼 당신은 다른 존재 아닙니까?”

[난 그 실체에서 뻗어 나온 분신체다.]

“분신체?”

[세계수의 나뭇가지를 꺾어 심는다고 그 나뭇가지가 세계수가 아닌 것은 아니지. 분신체는 그런 존재다.]

분신체.

실체에서 갈라져 나온 존재….

신명 사냥꾼으로 각성했을 때 아레나 후아튼의 후광에서 본 신명이었다.

‘레토니칼스의 분신체.’

내 방해로 분신체로 각성하는 데 실패했지만, 성공했다면 아레나는 레토니칼스의 분신체로 세상을 활보했을 것이다.

분신체는 어떤 존재일까?

분신체로서 그녀는 불사자의 길을 걷는 것일까?

“분신체는 불사자입니까?”

[멍청한 질문이로군. 다른 절대자조차 담지 못하는 불사의 권능을 한낱 숙주 따위가 담을 수 있을까?]

“…….”

크리스탈 미믹도, 아레나도 녀석의 숙주 중 하나였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마찬가지.

이건 좀 깊게 파볼 필요가 있었다.

“그럼 숙주를 통해 얻으려는 게 뭡니까?”

민감한 질문이지만, 고민 없이 질문을 던졌다.

그동안 살핀 녀석은 답을 회피하는 타입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예상 답변은 ‘숙주를 통해 불사자의 실체를 부활시킨다’였다.

그런데,

[난 완벽한 죽음을 원한다.]

“완벽한 죽음? 실체는 소멸했다고…….”

[실체는 소멸했다. 하지만 이 세계는 내 죽음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억겁의 계획은 실패했고, 난 그 염원을 이어가야 한다.]

아, 모르겠다.

다만, 세계가 녀석의 죽음을 인정하고 있지 않다는 말은 이해했다.

아레나의 신명 각성으로 ‘레토니칼스’란 이름이 신명으로 떴다는 건, 이 세계가 불사자의 존재를 여전히 인식하고 있다는 얘기였다.

“이 세계에서 완벽히 지워지는 게 당신이 바라는 것입니까?”

[처음으로 말이 통했군.]

심장이 크게 두근거렸다.

흥분하는 건가?

[난 죽어야 한다. 그것도 완벽하게.]

“…….”

돌겠네.

트롤 저리 가라 할 불사의 심장을 얻어 기껏 살만해졌더니, 심장이 죽고 싶단다.

그것도 완벽하게.

트롤도 이런 트롤이 없었다.

아, 트롤이 맞는 건가?

재생력 하나는 진짜였으니까.

근데 죽어?

네가 죽으면 나는?

넌 내 심장인데?

소설 ‘악당들이 강해지면 벌어지는 일’을 읽다 보면 스토리 내에서 수많은 개또라이들을 접하게 된다.

근데 내 안에 깃든 이 녀석은 그 개똘아이들도 한 수 접어주는 미친 상똘아이였다.

어느새 난 침대 위에 벌떡 일어나 있었다.

이 빌어먹을 소설은 정신적으로도 쉴 시간을 안 준다.

마른침을 삼키며 물었다.

“그, 그래서 계획이 뭡니까?”

설마, 이것도 말해줄까 싶었다.

[없다.]

“…네?”

[억겁의 세월 동안 계획을 세우고 실행했다. 그리고 실패했지. 실체는 세상에서 지웠지만, 초월성은 지울 수 없었다.]

“당신이란 존재 말입니까?”

[그렇다. 내 존재가 실체의 영원한 안식을 방해하고 있다. 불사자는 죽지 않은 굴레를 타고 난 존재. 세계는 그 굴레에 맞게 실체를 언제고 부활시킬 것이다. 그럼 짧은 안식도 끝이 나겠지.]

심장 박동이 약해진다.

침울해하는 건가.

녀석의 감정 변화를 알 수 있으니, 좋긴 한데. 이게 내 심장이라 마냥 좋아할 수가 없었다.

“지금껏 스쳐 갔던 숙주들이 많습니까?”

[셀 수 없다. 생명체라 부를 수 있는 모든 종(種)을 거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그들은 모두 어떻게 됐습니까?”

크리스탈 미믹, 아레나 후아튼.

전(前)주인들의 말로를 알고 있기에 답이 예상은 됐지만, 확실히 할 필요가 있었다.

[모두 죽었다.]

“당신이 원한 겁니까?”

[그랬다면 불사의 권능 일부를 심장에 넣지 않았겠지. 숙주가 죽으면 난 다시 시작해야 한다. 내겐 번거로운 일이지.]

“하지만 그들은 모두 죽었습니다.”

[피조물이란 것을 간과했다. 초월성을 몸 안에 담고 제정신을 유지하는 숙주는 손에 꼽히더군. 분신체로 각성을 완벽히 맞춰도 동화률 10프로가 최고치였다. 하지만 그런 존재들도 몇 해가 지나면 미치거나 육체가 버티지 못했다.]

“그럼 저도…….”

[넌 특별하다.]

순간, 심장에서 열기가 피어올랐다.

의식이 없는 펜리가 몸을 뒤척일 정도로 그 열기는 뜨겁고 강렬했다.

[염원의 반지는 나의 실체가 사용하던 물건이다. ‘초월적 존재’가 아니면 접촉만으로도 정신이 붕괴되지.]

“…네?”

난 놀란 표정으로 반지를 살폈다.

생동감이 넘치는 붉은 색감의 반지.

내 오른손 중지에서 반지의 아우라가 풍겨나오고 있었다.

접촉하면 정신이 붕괴된다고?

이리 멀쩡한데?

[게다가 반지의 염원이 ‘생존’으로 정해지면서 내 초월성도 일부 흡수해간 상태다. 정확한 동화율은 알 수 없지만 확신할 수 있다. 넌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내 숙주로 완벽한 존재다.]

“…….”

숙주로서 인정을 받았다.

이걸 웃어야 하는 건지 울어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

다행인 건 그가 내게 무척 호의적이라는 사실이었다. 염원의 반지를 얻으면서 나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폐광산의 저주를 해결하려고 했던 일이 레토니칼스의 인정을 받게 된 계기가 된 것 같았다.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대체 불가능한 숙주.

레토니칼스에게 난 그런 존재다.

어떻게 이용하면 내가 원하는 방향대로 녀석을 끌고 갈 수 있을까.

고민의 원점은 다시 ‘이름’으로 돌아왔다.

“그럼 레토니칼스란 이름부터 지우는 게 어떻습니까?”

[이름을?]

“이름에는 존재를 증명하는 힘이 있다면서요. ‘완벽한 죽음’을 바라는 게 아닙니까?”

[…아.]

이 세상에서 완벽한 생존을 바라는 내게 완벽한 죽음을 바라는 변태 같은 심장이 들어왔다.

기가 막혔지만, 심장을 축출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같이 가야 했다.

[이 단순한 이치도 생각지 못하다니 헛살았군. 아주 좋은 생각이다.]

“잘 부탁드립니다. 레토.”

[레토, 레토라….]

새로운 이름에 감회를 느끼는 것일까.

이번만큼은 녀석도 레토란 이름을 부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크게 뛰는 심장 박동이 기분이 무척 좋다는 것을 말해줬다.

내 심장을 느끼면서 저 녀석의 감정을 알아야 하는 거야?

나중에는 헷갈리면 어떡하지?

심장에서 흘러나오는 감정이 녀석의 것인지, 내 것인지 말이다.

그리고 한 가지 깨달았다.

나와 레토는 심장으로 연결된 사이라는 것.

즉, 서로에게 거짓말이 안 통한다.

애초부터 녀석을 의심할 필요가 없는 일이었다.

“레토.”

[말하라.]

절대자로 살아왔던 기억 때문인지, 말투가 영 재수가 없다.

그래도 이름을 바꾼 것을 보면 꽉 막힌 꼰대는 아닌 것 같으니 잘 구슬리면 앞으로 큰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아니, 도움에 따라 내 운명이 바뀔지도.

지금도 그렇다.

“절 강하게 만들어주십시오. 누구에게도 죽지 않을 만큼.”

[누구에게도 주지 않을 만큼이라….]

죽음을 간절히 상대에게 죽지 않은 방법을 알려달라는 참으로 아이러니(irony)한 부탁이다.

하지만 어쩌겠어.

이 세계관의 컨셉은 악당들이 강해지면 벌어지는 일이다.

강한 악당들을 꾸준히 등장할 것이다. 그 재앙으로부터 살아남으려면 무력이 필요했다.

녀석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선 일단 내가 살아야 했다.

[좋다.]

그걸 레토도 모르지는 않는지, 내 부탁을 흔쾌히 수락했다.

후―

길게 숨을 내뱉으며 침대에 주저앉았다.

일단 내가 원하는 방향대로 상황은 만들어졌다.

절대적 아군 하나가 늘었다.

절대자의 파편으로 모든 종(種)을 숙주로 삼으며 억겁의 세상을 바라봤던 존재.

심지어 그는 나 자신보다 내 몸에 대해 더 자세히 알고 있었다.

이보다 완벽한 스승을 어디 가서 찾을 수 있을까.

최고의 스승을 얻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