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포식자가 되는 방법
절대자의 가르침!
벌써부터 몸이 달아올랐지만, 도르네프의 부탁을 받은 터라, 섣불리 성안을 돌아다닐 수 없었다.
‘아침이 되는 데로 훈련할 장소부터 알아봐야겠네.’
도르네프에게 부탁하면 괜찮은 장소로 구해줄 것이다.
잠시 눈을 붙일까 하다가 침대에서 내려왔다.
레토와 대화할 때 긴장해서인지 배가 고팠다. 이대로는 잠이 안 올 것 같아서 살금살금 펜리가 누워있는 침대로 다가갔다.
그녀의 침대 옆에 놓인 과일 접시가 보였다.
깨어날 펜리를 위해 준비해 둔 간식거리인데, 지금껏 내 간식거리로 전락한 상태였다.
오늘은 싱그러운 사과.
그녀 앞에서 사과 하나를 시원하게 베어 물었다.
“뺏어 먹으니까 더 맛있네.”
이 펜리년아 어떠냐.
대놓고 대들진 못하니, 이렇게라도 복수하고픈 마음이었다.
접시를 깨끗이 비우고 침대에 다시 누웠다.
배부르고 등 따시고.
나아가 혈맹까지 맺는다면 홀로 분투하던 생존 서바이벌은 더는 안 해도 된다.
안전한 둥지가 생기는 것이다.
‘이제야 좀 살만해졌네.’
고생 끝 행복 시작이란 말을 떠올리며 푹신한 침대에서 잠을 청했다.
내일은 더 멋진 하루가 되리라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꿀 같은 숙면도, 꿈꿨던 행복도,
[일어나라.]
레토의 부름에 산산조각 부서졌다.
“무, 뭡니까? 갑자기.”
[쇠몽둥이를 준비해라. 훈련 시작이다.]
다음 날부터 난 지옥을 경험해야 했다.
* * *
“어디 가셨지?”
오늘도 어김없이 숙소를 찾아온 샤르바딘은 음식이 가득 든 접시를 식탁에 내려놓고 주변을 둘러봤다.
방 안에는 마스터인 펜리만 덩그러니 누워있었다.
아서의 하루는 단순했다.
늦은 오후까지 침대에서 뒹굴거리다 자신이 찾아오면 식사를 함께하곤 했는데 침대가 오늘은 휑하니 비어 있었다.
함부로 돌아다닐 수 없는 신분이니, 곧 돌아오리라 판단하고 침대에 앉아 기다렸다.
“오늘은 중요한 소식을 알려 주려고 일찍 왔는데.”
엘프석 제작이 완료되어 넬라가 곧 방문할 것이라 소식을 전해왔다.
넬라의 부탁으로 바깥 정보를 아서에게 자연스럽게 알려주는 역할을 했는데, 오늘은 단순히 얼굴만 보고 가면 될 것 같았다.
넬라가 직접 그를 만나보겠다고 했으니까.
‘또 심심해지겠네.’
수다 떨 대상이 사라지니 살짝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그녀는 아서의 빈자리를 손바닥으로 쓸었다.
특별한 기운을 지닌 인간.
피 웅덩이에서도 느꼈지만, 그의 기운은 주변 사람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다.
마스터는 아직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것 같지만 말이다.
“늦네.”
수프가 차갑게 식자, 그녀는 울상을 지었다. 시종을 부를까 고민하던 그녀는 고개를 흔들곤 성주의 집무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성주님은 원로들과 회의 중이십니다.”
“기다릴게요.”
도르네프는 폐광산 건으로 무척이나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자신의 대(代)에서 뿌리나 다름없던 광맥을 되찾은 상황이라 준비할 것이 한둘이 아니라고 들었다.
조용히 창가 의자에 앉아 티타임을 즐기고 있는데, 문이 벌컥 열리며 도르네프가 모습을 드러냈다.
“오, 내 피앙새 샤딘!”
애써 밝은 표정을 짓는 도르네프였지만, 그녀는 그의 피곤한 분위기를 바로 읽어냈다.
얼굴 밑이 퀭한 것이 원로들에게 꽤나 시달린 것 같았다.
“바쁜데 방해해서 미안해요. 도네프.”
“무슨 말을! 한동안 얼굴을 못 봐, 너무너무 보고 싶었소!”
둘은 잠시간 대화를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 잠시 후, 샤르바딘은 그에게 방문 이유를 말했다.
“아서… 아니 알렉스님은 어디 계신가요?”
알렉스.
지금은 아서 클레이튼의 가명이었다. 자리와 상관없이 이름을 밝히지 않은 건 펜리의 부탁이 있었기 때문.
그 물음에 도르네프는 퉁명스럽게 물었다.
“그는 왜 찾는 것이오?”
“온종일 자리를 비운 것 같아서요. 눈에 띄면 안 된다고 하지 않았나요?”
“그는 지금 다른 곳에 있소.”
“어디요? 말해주세요.”
도르네프는 사흘 만에 찾아온 자신의 피앙새가 아서놈을 찾자 눈가를 실룩거렸다.
그녀를 매일 보진 못하더라도, 시종들을 통해 일과를 빼놓지 않고 보고 받았다.
대화 상대로 아서와 많은 시간을 보낸다고 들었다.
직접 식사도 챙겨주고, 잠자리도 봐준다고 했을 땐 질투심마저 들었는데, 이젠 자리에 없다고 자신을 찾아와 그를 찾았다.
‘부러운 놈!’
그래서 녀석이 오늘 새벽 자신을 찾아와 훈련에 관한 것을 부탁했을 때 흔쾌히 부탁을 들어줬다.
“그는 지금 성주 전용 훈련장에 있을 거요.”
“훈련장이요? 갑자기 그곳은 왜….”
“오래 쉬어서 몸을 풀고 싶다고 하더군. 앞으로 그곳에서 지낼 시간이 더 많을 거요.”
“그럼 식사를 훈련장으로 가져다줘야겠네요.”
샤르바딘의 마지막 말에 도르네프의 눈에 불꽃이 튀었다.
자신조차 이런 관심을 받아본 적이 없거늘.
감히 피앙새의 관심을…!
그때 기사 단장 나토네가 도르네프를 찾아왔다.
“무슨 일이냐?!”
“…아, 저 그게.”
사나워진 성주의 눈빛에 나토네는 잠시 움찔하곤 부러진 쇠몽둥이를 어색하게 들어 올렸다.
핏자국이 묻어 있었지만, 나토네는 굳이 그런 사실을 보고하지 않았다.
“강도를 더 늘려야 할 것 같습니다.”
“맷집이 그 정도라고?”
“여기 흔적을 보면 그 정도는 아닌데….”
“아니! 곧 베네타의 은인이 될 신분인데, 도와줄 땐 확실하게 도와줘야지. 대장간에 일러놓을 테니, 통짜 강철로 가져가게. 그럼 절대 부러질 일은 없겠지.”
“…통짜 강철 말입니까?”
“기사들도 부족하다고 했지? 손맛이 매운 녀석들로 보내주지. 이참에 반쯤 죽여… 아니 잘 도와주게.”
“…….”
샤르바딘은 궁금한 표정을 지었다.
대체 무슨 훈련이길래, 도네프는 실실거리고 나토네 경은 한숨을 내쉬는 것일까.
“궁금하오?”
“나토네경을 따라가도 될까요?”
“출입증을 따로 내줄 생각이었으니, 이참에 경을 따라 구경이나 하러 가시오.”
성주 전용 훈련장이라 성주의 허락이 있는 자만 출입이 가능했다.
다만, 도르네프는 출입증을 그녀에게 써주며 확신했다. 이번 방문을 끝으로 두 번 다시 훈련장을 찾지 않을 것이라 말이다.
도르네프는 오전에 찾아온 아서를 떠올렸다. 훈련을 도와줄 기사들을 원했는데, 훈련 내용을 듣곤 바로 녀석에게 한 마디를 내뱉었다.
미친놈.
‘정신 나간 녀석이 분명해. 아니면 폐광산의 저주가 녀석에게 옮겨진 건가?’
그만큼 녀석의 훈련은 도와주는 기사들도 질색할 만큼 이해하기 어려웠다.
집무실을 나온 샤르바딘은 나토네에게 양해를 구하곤 음식이 담긴 바구니를 들고 왔다.
훈련이 끝난 후 식사를 챙겨줄 생각이었다. 그런데 나토네는 음식 바구니를 보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못 먹을 겁니다.”
“네?”
“아닙니다. 따라오시죠.”
설명이 굳이 필요할까.
한 번만 봐도 그 뜻을 바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어쩌다 그자의 훈련에 엮어서 이런 고생을 하게 됐는지, 나토네를 한숨을 내쉬곤 대장간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잠시 후, 통짜 쇠몽둥이 묶음을 어깨에 짊어진 나토네가 성주 전용 훈련장으로 향했다. 조용히 뒤를 따르던 샤르바딘이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나토네경이 직접 이런 일을 하시는 이유가 있나요?”
“특별한 이유는 없습니다.”
“그럼 기사들을 시키면 되잖아요.”
“거동이 가능한 드워프가 저밖에 없어서 그렇습니다.”
“훈련이 정말 고된가 보네요.”
훈련이 고되다.
그녀의 말에 나토네는 헛웃음을 흘리곤 높은 벽으로 둘러싸인 문 앞에 섰다.
성주 전용 훈련장은 기사단의 훈련장과 붙어 있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벽돌로 높은 벽을 쌓아서 함부로 안쪽을 볼 수 없다는 것이었다.
끼이익―
나토네가 철문을 열자, 문틈 사이로 거친 바람이 훅 불어닥쳤다.
샤르바딘의 보드란 머리카락이 거칠게 흩날렸다. 짙은 열기를 담은 것처럼 바람이 무척 뜨거웠다.
그리고,
“욱!”
그녀는 뒷걸음질 치며 코를 틀어막았다.
짙은 피비린내가 맡아졌다.
열린 문틈으로 훈련장 바닥이 비췄는데 온통 붉게 물들어 있었다.
나토네가 문을 활짝 연 순간, 그녀는 바구니를 툭 떨어트렸다.
충격적인 광경이 눈 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이게 훈련이라고요?”
“뭐, 그는 그렇게 말했습니다.”
나토네는 통짜 쇠몽둥이를 움켜쥐며 훈련장 바닥을 응시했다.
“포식자가 되는 방법이라고.”
거기엔 피투성이가 된 아서가 쓰러져 있었다.
* * *
[의식을 놓지 마라. 포기한 순간 훈련은 물거품이 된다.]
“……시…바ㄹ”
흙바닥 한가운데에 주저앉아 있었다.
바닥을 짚고 있는 두 무릎, 두 손에 감각이 없다. 부들부들 떨고 있는지, 부러진 건지 모르겠다.
아니, 오히려 감각이 없으니 살 것 같았다.
하도 얻어맞아서 솔직히 너무 아팠거든.
주르륵―
갑자기 시야가 붉어졌다.
이마에서 핏물이 흘러나와 두 눈동자를 적셨다.
눈을 깜빡거리고 싶지만 참았다.
눈을 감은 순간, 의식을 잃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핏물은 두 눈을 타고 흐르더니 바닥으로 뚝뚝 흐르기 시작했다.
머리가 깨진 건지, 이마가 깊게 찢어진 것 같았다.
[부족해. 한참 부족하다.]
두근―!
심장 박동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온몸의 피가 혈류를 타고 흐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동시에 염원의 반지가 붉은빛을 토해냈다. 하지만 시원한 감각 대신 미칠 듯한 답답함이 올라왔다. 치유 속도가 터무니없이 느렸다.
레토의 짓이다.
[상처가 아무는 감각, 뼈가 붙는 느낌, 심장을 따라 흐르는 혈맥의 소리를 들어라. 살아있는 감각을 뇌리에 천천히 각인시켜라.]
“…커억, 헉, 헉.”
육체가 느릿느릿 회복되는 과정.
그 감각에 숨이 턱 막혔다.
죽음 직전에서 허우적거리는 고통.
그 고통에 정신이 각성 상태로 흘러갔다.
감각이 곤두서며 시간이 느리게 흘러간다.
모든 소리가 웅웅 일그러져 들렸다.
손가락 끝의 작은 감각마저 크게 느껴지는 상태.
당연히 고통은 배가 되었다.
아파서 말조차 안 나온다.
“끄어억!”
레토는 이 상태는 빈사 상태라고 표현했다.
마라톤을 완주한 이후로 다시 백 미터를 전력 질주하는 고통이다.
펄떡펄떡 뛰는 심장이 터질 것처럼 느껴졌다.
[기절하거나 주저앉아 있는 건 먹잇감들이나 하는 짓이다. 포식자가 되려면 일어나라. 그리고 움직여라. 상대를 물어뜯어라.]
“……미친, 커억!”
끊어지려는 의식을 간신히 붙잡고 있는데 여기서 일어나라고? 움직이라고? 싸우라고?
미친 소리 하지 말라고 외치고 싶었다.
까드득 주먹을 움켜쥐었다.
바닥에 긁힌 손톱들이 우수수 부러졌지만, 폐부가 찌그러지는 고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움직여라!]
이를 빠드득 갈며 고개를 들었다.
붉은 시야.
흙바닥에 대(大)자로 퍼질러 누워있는 드워프들이 보인다.
일부는 주저앉은 채 날 괴물 바라보듯 보고 있었다.
가슴을 헐떡이는 것이 그들도 숨이 넘어갈 것처럼 지쳐있었다.
망할 난쟁이들.
몽둥이를 휘두른 놈들이 나보다 먼저 나가떨어졌다.
저래 봬도 3성 이상의 기사들이었다. 난 마나 없이 순수 육체 능력으로 저들을 상대했다.
아니, 상대가 아니라 일방적인 구타였다. 마나를 사용하는 기사들과 맨몸으로 싸우라니, 미친 소리나 다름없다.
그런데 했다.
레토가 요구했으니까.
절대자이니, 뭔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쥐뿔도 없었다.
이 빌어먹을 절대자는 호흡조차 죽을 듯이 괴로운 빈사 상태가 돼서야 훈련을 시작한다고 말했다.
시발, 여기서 뭘 하라고.
인간이라면 절대 무리해선 안 되는 기력이 말라비틀어진 상태.
본능이 더 움직이면 죽는다고 내게 겁을 준다.
[본능이 저항하는 한계를 넘어가면 새로운 세상이 열리지.]
“…….”
[레토니칼스의 육체에 한계 따윈 없다. 스스로 한계에 선을 긋는 행위는 나약한 종(種)들이나 하는 짓거리다. 벽을 부숴라. 그게 내 훈련법의 첫걸음이다.]
극한의 고통만 연구하는 변태 같은 스승을 만난 것 같았다.
상또라이가 분명했다.
“…….”
흔들 인형마냥 고개만 까닥까닥하는 정도.
그것이 빈사 상태에 빠진 나의 한계이자 움직임이었다.
움직이라고?
미친 소리다.
난 본능에 잡아먹혔고, 결국 의식의 끈을 놓았다.
바닥에 코를 박고 쓰러졌다.
[이 정도로 나약하다니….]
흐릿한 의식 너머로 레토의 탄식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난 옅게 미소를 지었다.
기절하는 것이 이렇게나 행복한 경험이었나?
전율이 이는 카타르시스마저 느껴졌다.
기절하면 마(魔)가 끼는데 큰일이었다.
그렇게 내 첫날의 훈련이 끝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