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당에게서 살아남는 법-99화 (99/130)

99화 존재의 격(格)

[일어나라.]

“……헉!”

레토의 부름에 난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녀석이 심장을 자극하며 깨우니, 무조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잘만 이용하면 완벽한 경계용 알람인데, 이런 식이라면 앞으로 꽤나 귀찮아질 것 같았다.

창밖을 바라보니 어둡다.

뿌연 구름에 걸린 달이 현재 늦은 밤임을 알려줬다.

훈련이 뒤늦게 떠오르자 팔다리를 살폈다.

분명 온몸이 망가진 채 기절했는데, 컨디션이 훈련 전과 똑같았다.

찌그러질 듯이 괴로웠던 호흡도 평온했다.

조금 전 그 정신 나간 훈련이 단순한 악몽이 아니었을까 하는 착각마저 들었다.

[이해가 안 가는군.]

“…이해?”

[네놈이 이상하다는 뜻이다.]

“전 당신이 훨씬 더 이상한데요? 이딴 훈련을 어떤 인간이 버팁니까?”

정예 드워프들에게 둘러싸여 복날에 붙잡힌 개처럼 두들겨 맞았다.

처음 훈련 내용을 들었을 땐 나도 드워프들도 기가 막힌 표정을 지었지만, 레토의 말이니 강력히 훈련을 밀어붙였다.

그런데 지금은?

솔직히 또 하라고 하면 못 할 것 같았다. 이건 인간이 버틸 수 있는 수련이 아니었다.

레토니칼스의 심장과 염원의 반지가 아니었다면 그 자리에서 죽었을 것이다.

[너라면 버틸 줄 알았다. 나와도 스스럼없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니까.]

“그게 이상한 겁니까?”

[종(種)의 본능조차 이기지 못하는 정신력으로 나와 대화를 나눈다는 게 가능하다고 보나? 염원의 반지도 마찬가지다. 존재의 ‘격(格)’이 맞지 않으면 주인이 되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러니 이상하다고 할 수밖에.]

“존재의 격(格)?”

잠시 침묵이 흘렀다.

레토의 말에서 한 가지 능력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레토의 격에 맞게 내 정신을 보호해주는 능력.

어찌 보면 진짜 나란 존재에게 선물로 주어진 특별한 힘이었다. 위기로부터 수없이 나를 구해준 능력이었으니까.

‘정신 방벽.’

정신 방벽을 떠올린 순간 레토의 말이 흘러나왔다.

[누군가의 보호를 받고 있군.]

“…누군가의 보호?”

[인간치곤 격이 터무니없이 높아서 의문이 들었는데 이제야 이해가 돼. 보호를 받았던 거지 격이 높았던 것이 아니야. 누구지? 나조차 인지하지 못할 가호라면 나의 격보다 높을 수 있다는 건데, 마땅히 떠오르는 이름이 없다.]

누구긴 누구야, 날 이 세계로 떨어트린 놈이겠지. 물론, 난 그놈의 이름을 모른다. 그저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을 연출한 신의 장난이 아닐까 하는 생각밖에 안 들었다.

드물게 레토가 혼란스러워 보였다.

그 정도로 충격적인 일인가?

나야 이 세계에 떨어진 이후 죽을 고비를 넘기며 알게 된 능력이라 그 특별함을 자세히 알지 못했다.

하지만 레토는 아닌 것 같았다.

레토는 정신 방벽을 가호라 해석했다

누군가가 나를 보호하는 특별한 힘 말이다.

[그 가호는 나에게도 특별하다.]

“레토, 당신에게도 말입니까?”

[가호가 없었다면 네 존재는 내가 거쳐 갔던 수많은 숙주와 다를 바 없었을 것이다. 염원의 반지도 마찬가지다.]

“폐광산의 죽은 자들처럼 됐을 거라는 말이군요.”

[그렇다. 가호가 너와 나의 안전판 역할을 하는 셈이지.]

“만약 가호가 풀린다면…….”

[나의 격에 잡아먹히거나, 극복하거나 둘 중 하나겠지. 아직 네겐 성장할 시간이 있으니까.]

“…….”

이렇게 직접 들으니 새삼 정신 방벽이 얼마나 특별한 능력인지 피부로 느껴졌다. 어쩌면 내가 얻은 능력 중 정신 방벽이 가장 강력한 능력이 아닐까?

게다가 레토가 내게 강력한 위기의식을 심어줬다. 성장하지 않으면 정신 방벽이 사라진 그날 흔한 숙주 중 하나가 될 것이라고.

진짜 능력이 사라지면 어떡하지?

일종의 시간제한이 있는 초심자 패키지 같은 거 말이다.

강해져야 하는 강력한 동기가 하나 더 생긴 셈인데, 그럼 훈련에 더 목마를 수밖에 없었다.

“그럼 훈련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

레토는 침묵했다. 내 스펙을 떠올리며 잠시 생각할 시간이 필요한 것처럼 보였다.

그 짧은 침묵은 내게 억겁의 시간처럼 느껴졌다.

레토가 날 포기하면 곤란하다.

단 하루지만 지옥을 맛봤다.

다만, 끔찍한 훈련임에도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나도, 암살자였던 전(前)주인의 기억에도 오라나 마력 같은 특별한 능력을 성장시키는 전문 지식이 없었다.

능력이나 아티팩트는 스토리를 토대로 얻을 수 있지만, 얻는 능력들을 성장시키려면 레토의 도움이 꼭 필요했다.

‘어떻게 보면 계승자의 길을 걷는 것과 같네.’

절대자 레토니칼스의 뒤를 잇는 계승 의식 말이다. 다만 어제 그 미친 훈련처럼 절대자의 상식 속에 날 집어넣는 거는 사절이다. 내가 버티지 못할 테니까.

[훈련의 강도를 한계 아래로 낮추면 된다. 하지만 내가 바라본 강함에는 이르지 못할 것이다.]

“당신이 바라본 강함은 무엇입니까?”

[죽지 않는 것.]

레토의 마지막 말이 내 가슴을 무겁게 짓눌렀다.

이 세계는 대체 얼마나 강해져야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일까.

레토가 바라보는 적들은 어떤 존재들일까.

갈 길이 아득하게 느껴졌다.

[아쉽나? 맥박이 가라앉는군.]

“뭐, 노력해봐야죠. 당신이 포기하지 않은 것에 만족합니다.”

[아쉬워할 필요 없다.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니까.]

“무슨 뜻입니까?”

[너에겐 특별한 능력이 있다. 그 능력을 성장시킨다면 부족한 부분을 충분히 채우고도 남는다. 아니 더 강해질지도.]

“무슨 능력 말입니까?”

[속성을 부여하는 힘.]

속성을 부여하는 힘.

내 선천적 신력인 인첸트를 말하는 것 같았다.

레토는 내 육체의 일부인 만큼, 내 능력을 나보다 잘 아는 존재였다.

그는 인첸트의 능력에서 어떤 가능성을 찾은 것일까.

[속성을 꼭 장비에만 담으라는 법은 없으니까.]

“무, 뭐라고요?”

[육체의 부족한 부분을 속성 부여로 채울 생각이다. 네 육체라면…… 아마 버틸 수 있겠지.]

“아마…?”

인첸트의 과부하를 버티지 못하고 산산조각 부서졌던 단검들이 떠올랐다. 드워프 제(製) 무구 정도는 되어야 인첸트의 과부하를 버틸 수 있었다.

‘내 몸뚱이가 드워프 제보다 단단할 리가 없잖아?’

몸이 부서질 것이다.

또 누굴 죽이려고.

이 사실을 레토에게 알리자, 그는 오히려 한심한 듯 말했다.

[그건 속성을 부여하는 통제력 부재다. 속성 과부하 문제는 최근에 생겼을 것이다. 안 그러나?]

“그, 그러네요?”

4성에 오른 직후 속성을 부여하는 힘이 강해지면서 과부하 현상이 생겼다.

이 능력도 통제할 수 있는 거였나?

[손볼 곳이 더 많아졌다. 잠자는 건 포기해야겠군.]

“아니,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립니까? 인간은 잠을 자야죠!”

수면욕은 인간의 욕구 중 가장 강한 욕구로 꼽힌다. 단 하루만 못 자도 정신이 몽롱해지고, 사흘이 넘어가면 제정신으로 버티는 게 불가능했다.

식욕은 참고 스스로 굶어 죽을 수도 있지만, 수면욕은 인간이 절대로 참을 수 없는 욕구였다.

레토는 빈말과 거리가 먼 꼰대 중의 꼰대.

시발, 진짜 안 재울 것 같은데?

[내가 도와준다면 수면 없이 한 달 정도 버틸 수 있다. 죽음 없는 고통은 성장의 동력이 된다. 잠재력 성장에도 도움이 되겠지.]

“……미친, 한 달이 말이 됩니까?”

[네놈이 부탁했다. 누구에게도 죽지 않을 만큼 강해지게 해달라고. 이 세계에 인간만 있는 줄 아나? 인외(人外)의 존재로부터 살아남으려면 인간의 상식부터 버려라.]

팩트 폭행 오지네.

내가 먼저 부탁한 일이라, 뒤로 물리긴 늦었다. 레토의 성격상 어물쩍한 태도를 보이면 때려치우라고 할 게 분명했다.

[동이 트는군.]

레토의 말에 창가를 바라보니, 저 멀리 영지를 에워싼 드넓은 성벽이 태양 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대화를 나누다 보니, 어느덧 아침이 찾아오고 있었다.

[준비해라. 훈련 내용은 어제와 같다.]

“그 짓을 또 하라고요?”

[당연하다. 토대가 받쳐주지 않으면 씨앗을 심어도 쓰레기만 나올 뿐이다. 이 종잇장 같은 몸으로 무엇을 할 수 있지?]

종잇장 같은 몸이라니.

지금 몸이면 근육질 오크랑 주먹 다이를 떠도 이길 것 같구만.

하지만 레토의 기준에선 한참 못 미치는 모양이었다.

“오늘도 기절시킬 생각이면 미리 말씀해주시죠.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니까.”

[걸어서 숙소로 올 수 있을 것이다.]

그 말을 나보다 믿으라고?

어째 편안한 둥지가 생겼어도 고생길은 끝날 기미가 안 보였다.

아니, 스스로 고생길을 만드는 건가?

이것도 불운 덩어리로 낙인찍힌 운명인 것 같았다.

한숨을 내쉬며 몸을 슬쩍 풀었다.

짜증 날만큼 컨디션이 좋다.

수면 없는 훈련.

상식 밖의 육체 회복 능력.

최고의 스승.

이건 버티면 무조건 강해질 수밖에 없는 성장 테크다.

그것도 무척 빠른 기간 안에.

한숨을 내쉬며 펜리를 바라보니, 고로롱거리며 세상 편하게 침대에 누워있다.

며칠 전의 내 모습이 딱 저랬다.

정말 편했었는데.

이때만큼은 그녀가 부러웠다. 그리고 이유 없이 괘씸했다.

난 그녀의 간식에 손을 뻗었다.

* * *

도르네프의 집무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다.

도르네프는 이른 아침에도 집무실 붙박이처럼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오늘도 폐광산 업무로 밤을 새운 모양이었다.

두 눈덩이 밑에 짙은 다크서클이 퀭하니 내려앉았는데, 저 짠한 모습을 보니 기회가 와도 절대 성주는 되지 말아야겠다는 확신이 생겼다.

“그 짓거리를 또 하겠다고?”

“왜요? 하루만 할 줄 알았습니까?”

“죽으려면 혼자 나가서 죽어. 우리 피앙세가 네 몰골에 얼마나 충격을 받았는지 아나?!”

샤르바딘이 충격받은 게 그렇게 큰일인가? 아주 날 잡아먹으려고 든다.

죽을 뻔한 건 난데, 왜 저래?

그리고, 피를 보고 샤르바딘이 충격을 받아?

‘피 웅덩이에서 함께 구른 짬밥이 얼만데 충격은 무슨.’

살짝 놀란 정도에 그쳤을 것이다.

“저를 도와준 드워프들을 다시 부를 수 있겠습니까?”

“기사들은 불러줄 수 있지만, 나토네는 임무를 받고 이른 새벽녘에 자리를 비웠네.”

“임무? 중요한 임무입니까?”

“폐광산과 관련된 임무이네. 그에 관해서 자세히 듣고 싶나? 폐광산에 대한 앞으로의 일정이 얼추 잡혔는데.”

“어차피 펜리님이 의식을 차리면 다시 조율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렇지.”

“그럼 나중에 그녀와 함께 듣겠습니다.”

폐광산의 저주가 풀렸다는 사실은 토바른 내 파급력이 무척 큰 사건이라, 대비할 시간이 필요했다.

지금은 비밀에 부친 상태니, 펜리가 의식을 차리고 이야기해도 늦지 않았다.

당장은 훈련에 집중할 시기였다.

혈맹을 맺고, 학살자와 부딪치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토바른의 주인을 놓고 벌이는 또 다른 사투가 벌어질 거다.

학살자 주변에 포진된 수하들만 떠올려봐도 전부 나보다 강한 놈들이었다.

언제고 그놈들과 부딪칠 날이 온다면 지금 훈련이 내 운명을 가를지도 모른다. 지금부터 죽기 살기로 훈련에 매진해야 했다.

“그리고 더 필요한 건?”

도르네프의 물음에,

[더 단단한 쇠몽둥이로 준비해라. 어제건 너무 약했어.]

“…….”

그렇다고 죽겠다는 건 아니었다.

과연 레토의 말대로 걸어 나올 수 있을지 모르겠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