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개안(凱安)
“이거하고 이거는 도르네프가 좋아하겠어요.”
“정말요?”
일어나면서 맛이 괜찮은 샌드위치를 골라줬는데, 그녀가 무척 좋아했다.
별것 아니지만, 저 샌드위치는 내가 알려준 음식 레시피였다.
취미 생활로 캠핑을 즐겼던 터라, 전문가는 아니지만 요리 담당을 맡을 정도로 간단한 요리 정도는 뚝딱 해내는 편이었다.
드워프의 영지라서 그런지, 음식 메뉴가 빵이면 빵, 고기면 고기, 무척 단조로운 편이라 바구니 안에 있는 재료로 샌드위치를 만들어 건넸더니 반응이 무척 뜨거웠다.
그때부터 여러 가지 레시피로 만들어서 이것저것 가져왔는데 손재주가 있어서인지 맛이 괜찮았다.
‘샌드위치가 그렇게 신기한가?’
기존에 있던 빵과 고기, 채소를 섞은 것뿐이다.
베네타의 안주인이 샌드위치에 흥미를 보이자 그 밑으로도 알음알음 레시피가 퍼지고 있었다. 확실히 유행은 위에서부터 타고 내려가는 것 같았다.
일상처럼 먹던 패스트푸드가 이 세상에선 큰 변화로 받아들여지자, 현대의 지식을 이용할 방법을 잠시 고민해봤다.
하지만 바로 휴지통행.
지식을 이용해 영지를 발전시켜봤자, 재앙이 나타나면 끝이었다.
손짓 한 번에 모든 게 날아갈 수 있는 세상이다.
그 고민을 할 시간에 레토에게 가르침 하나를 더 받는 것이 훨씬 이득일 것 같았다.
“얼른 도르네프에게 줘봐야겠어요!”
물론, 작은 이득도 있었다.
그녀가 샌드위치를 만들어서 도르네프에게 가져간 이후로 날 노려보는 횟수가 줄어들었다는 거?
혹한의 망치를 휘두르는 군주가 눈앞의 여인에겐 싫은 티도 못 내면서, 그 꿍한 마음을 손맛 좋은 드워프를 내게 보내는 것으로 풀고 있으니 기가 막혔다.
쇠몽둥이는 또 어떻고.
작정하고 만들었는지 더럽게 아팠다.
“혹시 매운맛이 강한 재료가 있습니까? 아주 매운 거면 좋습니다.”
“아팔의 씨앗이 무척 맵기는 한데….”
“그겁니다. 그거 왕창 넣어서 도르네프에게 줘보세요. 새로운 맛일 테니.”
“정말요?”
그녀의 샌드위치가 맵다고 뱉을 녀석이 아니지.
어디 당해 봐라 난쟁이 녀석아.
이런 소심한 복수 말고 크게 손을 봐줘야 하는데, 기회가 올지는 모르겠다.
일단 나보다 세기도 했고, 그 전에 펜리년을 먼저 손봐야 하기 때문이다.
펜리년이 무조건 먼저다.
아, 드디어 간식 뺏어 먹을 시간인가.
“설마, 훈련이 끝난 건가요?”
훈련장을 벗어나던 샤르바딘이 내가 계속 뒤따라 나오자 놀란 표정을 지었다.
보통은 활을 잡고 훈련할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보다시피 팔이 이래서요. 숙소에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아, 팔이… 치료사를 불러드릴까요? 심각해 보이는데.”
“이 정도는 침만 발라도 낫습니다.”
“…….”
뒤틀린 팔목을 잡고 배웅하듯 손을 흔들고 있으니 샤르바딘은 어색하게 웃고는 도르네프를 찾아서 휑 가버렸다. 함께 가던 나토네와 눈을 마주쳤는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반응들이 왜 저래?”
어깨를 으쓱이며 발걸음을 돌렸다.
숙소로 돌아가기 전에 몸부터 씻었다.
물에 닿으면 팔목이 더럽게 아팠는데, 몸이 찝찝한 게 더 싫었다.
시종들의 도움을 받을까 잠시 고민했지만, 역시 혼자 씻는 게 마음이 편했다.
여인들이 내 몸을 닦아주는 모습은 아직 상상이 안 가거든.
상처도 보게 되면 기겁할 테고.
“아, 살 것 같다.”
피로 얼룩진 흔적이 찬물에 씻겨가니 천국이 따로 없었다.
더러운 흔적이 사라지니 단련된 육체가 드러났다.
몸짱에서 체지방이 싹 빠진 느낌인데, 오밀조밀 각 잡힌 근육이 드러나자 절로 눈길이 갔다.
보름 전만 해도 아기처럼 뽀송뽀송한 피부를 자랑했는데, 셀 수 없이 뜯기고 찢기길 반복하면서 피부결도 거칠게 변했다.
질기고 탄력적이다.
‘분위기가 많이 달라졌네.’
물기를 닦으며 거울을 바라보니, 달라진 내가 마주 보고 서 있었다.
매섭게 휘어진 눈썹.
전에는 느낌이 강해 나와 안 어울렸는데, 이젠 눈썹의 매서움이 딱 맞는 옷처럼 느껴졌다.
심장의 영향 때문일까.
외모에서 풍겨 나오는 분위기가 전체적으로 거칠어졌다.
기존에 날 알던 사람도 자세히 보지 못하면 못 알아보고 지나칠 정도다.
[변화가 느껴졌나?]
“이런 신체적 변화를 말하는 겁니까?”
[웃기는 소리.]
“그럼, 무슨 변화를 말하는 겁니까?”
[내가 알려주는 것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면 진즉 말했겠지.]
“…….”
이따금 똑같은 질문을 던지는 레토.
그가 묻는 변화란 1단계 근육 단련의 완성을 뜻하는 것 같은데, 어떤 변화를 말하는지 모르겠다.
물어도 부족하다는 말뿐이다.
숙소로 돌아왔다.
방안을 둘러보니 전과 크게 달라진 것은 없었다.
눈에 띄는 건, 펜리 곁 작은 식탁에 놓인 꽃병 정도?
싱그러운 향기가 난다고 생각했는데, 저 푸른 안개꽃에서 흘러나오는 향기 같았다.
[마력향이 진하게 풍긴다.]
“저 안개꽃에서 말입니까?”
[자연적인 꽃이 아니다. 신녀의 기도로 피운 꽃이다. 마력 회복에 도움을 주지.]
신녀.
며칠 전 엘프 넬라가 다녀갔다고 하더니, 그녀의 작품인 것 같았다.
펜리가 누워있는 침대로 다가갔다.
그녀의 상태는 전과 비교해도 크게 달라진 것이 없었다.
그저 잠든 것처럼 보였는데, 샤르바딘의 말에 따르면 넬라가 엘프석 하나를 펜리에게 사용하곤 낭패를 지으며 다시 돌아갔다고 들었다.
마스터의 몸에 큰 변화가 생겨서 엘프석 한 개로는 부족하다나.
그 변화는 분명 신명 목록과 관련 있을 것이다.
“어떤 신명 목록이 변한 거지? 궁금하네.”
[궁금하면 보면 되지 않나?]
“전 ‘신을 받드는 자’가 아니라서요.”
[멍청한 말을 하는군. 그 두 눈은 장식으로 달고 다니는 건가?]
“제 눈이 어때서… 아!”
레토가 날 죽일 듯이 굴리고, 가진 능력 중 연구할 것들이 많다 보니, 신명 사냥꾼의 능력을 잠시 잊고 지냈다.
사냥감의 후광을 통해 신명을 읽어내는 개안(凱安) 능력 말이다.
누워있는 펜리의 머리 위로 보이는 은은한 후광이 그 증거였다.
다만, 개안을 펼치려면 신명 사냥꾼으로 먼저 각성해야 했다.
[대상과 대치하든, 대상이 죽어가든, 대상이 자고 있든, 네가 사냥할 의지만 있다면 그저 사냥감일 뿐이다.]
사냥꾼 각성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다만, 사냥에 실패했을 때의 페널티를 걱정했는데 우려에 불과했다.
저번 펜리의 경우처럼 사냥에 실패해도 그렇다 할 페널티를 느끼지 못했다.
“사냥할 의지라….”
턱을 만지작거리며 그녀를 내려다봤다.
아레나 후아튼 앞에 섰을 때, 최근 펜리 앞에 섰을 때 어떤 마음으로 신명 사냥꾼을 각성했는지 떠올려봤다.
사냥하고자 하는 마음.
‘…살기(殺氣)?’
그래, 살기다.
사냥감을 죽이고자 했던 마음 말이다.
그 마음을 담아 펜리를 노려봤는데, 반응이 없었다.
뭐가 부족한 거지?
[그딴 게 살기라고? 사냥꾼으로서 수치다.]
“…….”
역시 약했나?
저번처럼 펜리가 날 때려주면 쉬울 것 같은데 말이지.
이렇게 빌빌거리고 누워있으면 죽이기가 미안해지잖아.
짧게 호흡을 내쉬고 두 눈을 감았다.
머릿속에 죽이고자 하는 대상을 떠올렸다.
역시나, 한 사내의 얼굴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흩날리는 거친 흑발, 그 사이로 보이는 메마른 눈빛.
학살자 카멜 블레이저.
같은 하늘을 두고 살 수 없는 자신의 대적자.
살아남기 위해 반드시 죽여야 하는 존재.
번쩍―
사납게 두 눈을 뜬 순간,
움찔―!
의식이 없던 그녀가 무의식적으로 내 살기에 반응을 보였다.
동시에 후광에서 신비한 룬 문자가 신비롭게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펜리 체이서 – 세계수의 그림자(암(Shadow))]
[다크 엘프족의 축복 받은 몸놀림]
[진(眞) 다크 엘프의 갈퀴나무 손톱]
[그림자 일족의 주술]
[그림자 왕의 가호]
‘그림자 왕의 가호?’
넬라가 본 신명 목록이 이거였던 모양이었다.
설마 폐광산에서 그녀가 사용했던 왕의 소환술이 그림자 왕의 호기심을 불러온 것일까.
6성에 오르고 그림자 왕의 관심을 받았을 때와 완전히 다른 상황이었다.
5성에 그림자 왕의 관심이라….
“이건 너무 빠른데.”
지금 마력으로 그림자 왕의 힘을 사용하기엔 너무 일렀다.
마력 한계가 분명할 텐데 어떻게 자격을 얻는 거지?
순간 펜리가 보물처럼 안고 자는 벨트에 시선이 닿았다.
‘아, 마력의 루비 벨트!’
설마, 저 아티팩트가 그림자 왕의 선택을 앞당겼나?
여러 가지 변수가 의외의 결과를 낳았다.
‘이게 그녀에게 좋은 선택일까?’
확신하기 어렵다.
그림자 왕의 힘은 강력하지만 내가 불사자의 심장을 얻은 것처럼 양날검으로 작용할 확률이 높았다.
당장만 해도 마력 중독에 빠져 빌빌거리고 있지 않나.
스스로를 파멸로 이끌 수 있는 힘.
절대자들의 힘은 강력한 만큼 큰 대가를 지불했다.
[검은 녀석이 엘프에게 호기심을 드러냈군. 마력에 항상 굶주리겠어.]
특히, 그림자 왕은 마력을 잡아먹는 포식자였다.
마력 중독은 앞으로 펜리에게 인생 과제나 다름없었다.
“그림자 왕을 알고 있습니까?”
[그는 어디에나 존재한다. 그림자니까.]
“레토, 당신도 절대자였습니까?”
[그렇다고 볼 수 있지.]
“그럼 당신은 힘을 빌려주는 대가로 무엇을 가져갔습니까?”
[살고자 하는 의지.]
“…살고자 하는 의지?”
[절대자들이 대상으로부터 원하는 대가는 대부분 결핍과 관련되어 있다. 검은 녀석은 마력을 통해 자신의 실체를 드러내길 원하지. 그림자는 홀로 실체를 드러낼 수 없으니까.]
“그럼, 당신은…….”
[내 결핍은 ‘죽음’이다. 내 힘을 빌릴수록 숙주는 죽음을 품게 된다. 영혼이 죽고, 이성이 죽고, 종국에는 육신마저 죽는다.]
“불사자의 힘을 얻는 대가가 죽음이라니 황당하네요.”
[네 녀석은 예외다. 네 녀석에겐 영혼과 이성을 지킬 수 있는 가호와 육신을 살리는 염원의 반지가 있으니 말이다.]
레토의 말대로 모든 것에는 예외가 존재하는 것 같았다.
아마 펜리도 그 예외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어쨌든 마력 벨트부터 그림자 왕까지, 그녀의 스펙이 수년을 앞서갔다.
이 결과를 보니, 문득 불안감이 올라왔다.
스토리의 흐름이 너무 빠르다.
내 개입으로 펜리가 이렇게 바뀌었다면 소설의 주인공에게는 더 큰 변화가 있지 않을까?
내가 학살자 카멜 사이에 끼어들면서 주인공에게 포섭되어야 할 인물들, 주인공에게 주어진 기연, 성장할 힘까지 뺏어왔다.
소설 속 주인공이라면….
“부족한 힘을 대체할 다른 방법도 알고 있겠지.”
펜리보다 더 크게 변하면 변했지. 멈춰있을 자가 아니었다.
큰 변수가 될지 모르는 일이지만,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나 혼자 학살자를 상대하는 건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니까.’
학살자는 강력한 세력을 이루고 있고, 이를 상대하려면 나도 세력이 필요했다.
혈맹.
혈맹을 맺고, 베네타와 검은 장미의 힘을 빌려야 했다. 그러려면 일단 펜리가 의식을 차려야 일이 진행된다.
넬라가 엘프석을 제작하고 있지만, 아무리 빨리 잡아도 일주일은 더 걸릴 터였다.
그전까지 내가 해야 할 일은 정해져 있다.
레토에게 1단계 육체 진화를 인정받는 것.
그리고 하나가 더 늘었다.
‘내 신명 목록을 알아내야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