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변화 그리고 완성
신명 목록은 세상이 그 존재를 바라보는 운명 바코드와 같다.
과거, 현재, 미래까지 예측할 수 있는 이정표.
물론, 나에게만 해당하는 얘기다.
난 신명이 뜻하는 바를 예측할 ‘정보’들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개안(開眼)을 통해 타 주인들의 신명 목록을 볼 수 있게 됐지만, 정작 내 신명 정보에 대해 무지했다.
알게 된다면 분명 큰 도움이 될 텐데.
이 세계가 날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는지도 궁금하고 말이다.
‘될까?’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거울 앞에 섰다.
나를 비추는 거울을 향해 살기를 드러냈다.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거울에 비친 내 머리 위엔 후광이 없었고, 사냥꾼이 사냥꾼 자신을 사냥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됐기 때문이다.
‘역시 실패네.’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사냥의 대상이 자신이 될 순 없는 모양.
그럼 방법은 하나뿐이다.
‘내 신명을 볼 수 있는 인물을 찾아가야 한다는 건데.’
당장 떠오른 인물은 두 명이다.
운명의 아케인, 그리고 마녀 릴리.
이중 아케인은 대상에서 지웠다.
내 신명을 가지고 블랙마켓에서 카멜에게 힘을 실어주고 있는 모습을 보니, 내 존재에 대해 경계 혹은 적개심을 가진 것 같았다
찾아간다고 해도 내 물음에 답해줄 것 같지 않고, 오히려 카멜에게 목숨을 위협받을 확률이 높았다.
그럼 남은 인물은 오르도르 숲의 마녀인데,
‘이쪽이 확률이 훨씬 높겠어.’
악명 높은 마녀로 알려졌지만 그건 마녀사냥을 이끌었던 집단이 만들어낸 선입견이 컸고, 그녀의 천성은 ‘악(惡)’과는 다소 거리가 멀었다.
날이 선 고슴도치 같다고 해야 하나?
마녀 대학살로 인간에 대한 불신이 깊지만, 만날 기회만 있다면 친해지는 것은 그리 어려운 성격이 아니었다.
그녀는 단순하고 꾸미는 것을 즐기며 먹는 것을 좋아하는 어느 소녀와 같다.
이 같은 사실이 알려지지 않은 건, 그녀가 움직이는 곳에는 늘 상급 마녀 오르타들이 지켰기 때문이다.
오르타들은 마녀 대학살 당시 강과 들판, 산맥을 피로 물들였던 공포의 마녀들이다.
그 마녀들 사이에 고고히 피어난 검은 꽃, 릴리 베이스.
그녀는 선입견이 만들어낸 공포의 상징이자, 사람들이 그녀를 두려워하는 이유다.
‘챕터Ⅱ에 등장하는 인물이라, 당장 만나긴 어려울 거야.’
그래도 가능성을 놓지는 않았다.
운명의 아케인 또한 챕터Ⅱ부터 등장하는 인물인데, 카멜 곁에 붙었다.
펜리가 마력 벨트를 얻고 그림자의 왕의 관심을 얻는 것처럼, 카멜도 아케인의 도움을 통해 나에게 빼앗긴 힘과 기연을 다른 방면으로 회복하고 있었다.
이 변화가 오르도르의 숲에도 없으리란 법이 없었다.
밤공기나 쐴 겸 창문을 열었는데, 구름에 걷힌 달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더럽게 크네.
달이 둥글게 만개했다.
창 너머로 펼쳐진 베네타에 환한 달빛이 내리쬔다.
횃불이 따로 필요 없을 정도다.
잠시 달을 멍하니 올려다봤다.
조금 전 마녀 릴리에 대해 자세히 떠올렸기 때문일까.
“달의 마녀(Moon witch)…….”
만월을 보자, 나도 모르게 그녀의 신명을 중얼거렸다.
‘만월의 재능’을 가진 그녀는 모든 주술에 능통한 만능케에 가까웠다.
지금 그녀에게 주어진 유일한 페널티는 ‘시간’이다.
그릇이 클 시간 말이다.
갑자기 그녀의 얼굴이 궁금해졌다.
소설에선 그 미모 때문에 뭇 사내들의 마음을 울리고, 피바람을 몰고 다녔다고 했다.
지금은 어리니, 그 정도까진 아니려나?
내 신명 목록을 알아내려면 한 번쯤 꼭 만나봐야 하는 인물이니, 그 외모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창문을 닫았는데, 밤바람 때문에 펜리의 얼굴 주변에 꽃잎들이 떨어져 있었다. 꽃병에서 떨어진 것 같았다.
[건드리지 마라.]
이마에 떨어진 꽃잎을 치워주려고 하는데, 레토가 경고를 해왔다.
[그림자 왕의 가호를 잊었나?]
“위험합니까?”
[그림자 주인의 의식이 없을 땐 피하는 게 좋다. 그림자가 있다면 더더욱.]
등불에 비춘 펜리의 그림자가 침대 위에 머물러 있다.
의식이 없을 때 섣불리 건들면 안 되는 모양이었다. 그림자가 튀어나와 공격하려나? 호기심에 목숨을 거는 성격이 아니라서 뒤로 물러났다.
“당신은 저런 거 없습니까? 숙주를 지켜야죠.”
[죽기 전에 깨워주지 않나?]
“…아, 네. 고맙네요.”
레토에게 많은 것을 바라면 안 된다. 레토가 지시하는 행동에는 무조건 고통이 따랐다. 괜히 말을 꺼냈다가 또 다른 고통을 선물해줄지 모르니 입조심 해야 했다.
뭘 할까 하다가 침대에 드러누웠다.
손목이 제자리를 잡긴 했는데 손가락에 힘이 안 들어간다.
근육과 신경이 회복되려면 시간이 더 필요할 것 같았다.
현실에서 이 정도 상처라면 불구를 걱정해야 하는데 하룻밤 정도의 상처로 치부하고 있으니, 나도 이곳 사람이 다 된 것 같았다.
눈꺼풀이 스르륵 감겼다.
내가 얼마 만에 자는 거지?
보름 만에 드디어 숙면을,
드르르…….
[일어나라.]
…컹, 시발.
[인첸트 숙달에 걸음마도 못 뗀 주제에 휴식이라니, 게을러터졌군.]
“…….”
보름 동안 잠도 안 자고 훈련 중인데 게을러터졌단다.
절대자들은 잠도 안 자나?
이 녀석이 내게 온 것도 어찌 보면 불행이 아닌가 싶다.
아니, 불행의 시작인가?
손목 부상이 아니라도 내겐 주어진 훈련이 많다.
난 흡혈의 고리를 소환했다.
맛있냐?
흡혈의 고리가 내 피를 쭉쭉 빨아먹기 시작했다.
어째 하나같이 날 괴롭히는 것들뿐이다.
인첸트 숙달을 위한 훈련이 밤새 이어졌다.
* * *
5일이 더 지났다.
예상은 했지만, 내 손목을 아작냈던 신입 드워프는 결국 돌아오지 못했다.
추가 도우미 없이 여섯 명으로 훈련을 진행했는데 훈련 20일 차가 되는 날부터 얻어맞는 횟수가 눈에 띄게 줄기 시작했다.
공격 루트가 눈에 익었다고 해야 하나?
레토가 말한 ‘주시’가 드디어 빛을 발하고 있었다. 여섯 명이 휘두르는 몽둥이 궤적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퍼퍼퍽―!
“……크!”
물론 포위당했으니 다 피할 순 없다. 하지만 급소를 피하고, 빗겨 치는 횟수가 늘면서 내 반격이 매서워졌다.
퍽―!
“크억!”
결국, 한 놈의 면상에 이마를 박아넣는 데 성공했다. 코를 부여잡고 한 녀석이 바닥을 구르자, 놀란 나머지가 나와 거리를 벌리곤 경계에 들어갔다. 이젠 거리를 주면 당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후욱! 후욱!”
거친 숨을 내쉬며 주변을 둘러봤다. 온몸이 피투성이다. 하지만 움켜쥔 주먹엔 힘이 넘쳤다. 고통도 익숙해졌고, 맞는 것에 대한 두려움도 사라진 상태다.
한 발을 쿵! 내딛자, 정면에 있던 드워프가 한 걸음 물러났다.
줄곧 방어만 해왔던 내게 처음으로 공격권이 주어졌다.
간다!
[그만.]
“…억! 뭐요?!”
[훈련의 본질을 잊었나? 맞지 않으면 의미 없어.]
시발, 정말 변태 같은 훈련이다.
그래도 불만을 표하지 못하는 게, 단시일 내에 눈에 보일 정도로 강해지고 있는 게 느껴졌다.
20일 동안 쉴 새 없이 퍼부어졌던 공격 궤도는 앞으로 내가 어떻게 피하고 막고 반격해야 하는지를 본능적으로 알게 해줬다.
치명상을 입을 확률이 줄어들었단 소리였다.
맞을수록 강해지는 몸이라니, 슬프다.
“한 명 더 늘립니까…?”
[여섯이 가장 이상적이다. 일곱부턴 공격이 되려 무뎌지더군. 드워프들에겐 합공이라는 개념이 없는 것 같다.]
“…그럼?”
[변화는?]
또 변화에 관해 묻는다.
레토가 하루에 한 번은 내게 꼭 묻는 질문이다.
레토가 내게 바라는 변화는 무엇을 뜻하는 걸까?
“수수께끼 그만하고 힌트라도 주시죠?”
[네놈이 요즘 고민하는 고민거리 하나가 줄어들겠지.]
“내 고민거리?”
[흡혈의 고리.]
그 말을 듣는 순간 레토의 뜻을 알아챌 수 있었다.
레토가 바라는 변화가 이뤄지면 그게 가능하다고?
난 순백의 팔찌를 바라봤다.
요즘 내 고민거리는 최대 출력에 관한 것이었다.
단시간에 흡혈의 고리를 최대 출력으로 올리는 방법 말이다. 그러기 위해선 흡혈이 순식간에 이뤄져야 하는데, 레토는 1단계 육체 완성이 그 고민을 해결해 줄 수 있다고 내게 말하고 있었다.
내가 흡혈의 고리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레토가 훈련 종료를 선언했다.
[이 이상 훈련은 무의미하다. 훈련으로 변화를 잡아낼 수 없다면 ‘계기’가 필요한 시점이다. 다른 훈련에 집중해라.]
“계기? 어떤 계기를 말하는 겁니까?”
[인간의 언어로 ‘깨달음’이라고 표현해야겠군. 나도 모른다. 깨달음은 네 몫이지.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여기까지다.]
석양이 질 때쯤 마무리되는 몽둥이 훈련이 점심쯤 일찍 마무리됐다.
“…훈련이 끝난 겁니까?”
“일단은요.”
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훈련 종료를 알리자 기사들의 반응은 각양각색이었다.
홀가분함, 기쁨, 안도감… 응?
아쉬워 죽겠다는 저 표정은 뭔데?
날 때리는 게 설마 즐거웠던 거니?
저 드워프 녀석의 얼굴은 꼭 기억해놔야겠다.
“군말 없이 훈련에 동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흰 기사입니다. 주군이 시키면 해야죠.”
물론 말과 달리 기대하는 눈빛으로 날 바라봤다.
그들이 원하는 것이 돈이냐?
그럴 리가.
난 피식 웃고는 그늘 밑에 쟁여놨던 큼지막한 바구니를 가져왔다.
평상시엔 훈련이 끝나면 바구니를 오픈하는데 오늘은 훈련이 일찍 종료되어 점심을 내가 준비한 음식으로 하게 됐다.
“오!!!!!!”
바구니를 열자, 드워프들이 감탄을 흘리며 바구니 중심으로 옹기종기 모여들었다.
바구니 안에는 이 세계에서 볼 수 없는 색다른 음식들이 펼쳐졌다.
성내 사람들이 샌드위치에 큰 관심을 보이면서 기사들에게 줄 음식을 떠올려봤다.
군주의 명이라지만 하루의 절반을 날 위해 땀 흘리는 도우미들이다.
직접 챙기고 싶었다.
샤르바딘에게 부탁해 성내 주방을 사용할 수 있게 됐는데, 며칠 전부터 생각해둔 음식들을 직접 만들어서 반응을 살폈다.
“크하하하하!”
“내가 이 맛에 여길 온다고!”
“오늘도 먹고 죽자!”
‘부담스러울 정도로 폭발적인데….’
반응이 너무 좋았다.
돗자리를 깔고 그 위에 음식을 죽 깔아놓자 흥분한 표정들로 맥주를 들어 올렸다.
캠핑에서 주로 먹던 맥주용 안줏거린데 맥주가 빠지면 섭하지.
바비큐, 김치 짜글이, 골뱅이무침, 감자튀김 겉바속촉의 위대함을 느껴봐라.
물론, 레시피만 비슷할 뿐 재료들은 이 세상 것들이라 현대의 맛과는 달랐다.
그래도 맛있다고 정신없이 집어먹는다.
홀짝―
나도 맥주로 목을 축였다.
미지근한 맥주.
맥주는 시원한 것이 생명인데, 마법을 사용할 줄 모르니 아쉬운 대로 만족하며 시간을 보냈다.
서로 가벼운 대화도 오갔다.
“성주님의 개화 특성인 ‘냉기’를 본 적 있지. 상대가 누구든 일격에 얼어붙는 공격이라니 대단하지 않나? 자네도 특성을 개화했겠지? 육체 쪽으로 말이야.”
드워프들의 눈빛에 부러움이 스쳐 지나갔다.
이들과 대화하며 알게 된 사실은 내 예상보다 개화 특성자가 훨씬 적다는 것이다.
눈앞의 여섯만 해도 3성인데도 전원 무특성인 것을 보면 개화 특성자가 얼마나 희귀한 경우인지 알 수 있었다.
기사 단장 나토네도 마찬가지다.
그는 무특성 5성의 실력자였다.
“운이 좋은 편이라서요.”
구라다.
내 운은 쓰레기나 다름없다.
하지만 특성을 개화했으니, 일단 웃으면서라도 개화 특성에 관해 인정해야 했다. 우는소리 했다간 진짜 몽둥이질을 당할 것 같거든.
다만, 드워프들은 나의 개화 특성이 육체와 관련된 것으로 알고 있지만 아니다.
이름 알렉스,
마르샤 가(家)의 몰락 귀족.
단검과 석궁을 잘 다루며 특별한 빛을 다루는 특성 개화자.
검은 장미들이 베네타 바깥으로 흘리고 있는 내 거짓 스펙이었다.
학살자에게 혼란을 주기 위한 밑밥 깔기인데 머리가 좋은 놈이라 솔직히 통할지는 모르겠다.